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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신학에 대한 재고(再考)마땅하게 생각하여 온 것에 대하여 이것이 진정으로 최선일까? 이보다 더 나은 이해는 없을까?
김주범  |  kjbjohn@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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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1월 08일 (화) 22:06:06 [조회수 : 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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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신학에 대한 재고(再考) 

현재 우리가 가진 신앙이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망을 위하여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현재 상태가 별 문제가 없다고 하여 그것에 안주해 버린다면 더 나은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순간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성장하여야 할 부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여야 할 부분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입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 중 아직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성장은 아직 밝혀 내지 못한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지식을 재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 이 작품은 홍천 동면교회 정혜레나 님의 조각전시회 중 일부입니다.  
 
마땅하게 생각하여 온 것에 대하여 이것이 진정으로 최선일까? 이보다 더 나은 이해는 없을까? 등등 항상 최선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태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고 메시지들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이해는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택한 당신은 이미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해를 추구하여 오신 분인 줄 압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가고 동의가 안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최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와 다른 이야기일지라도 끝가지 듣습니다.

 

제가 재고하여야 할 신학으로 선택한 것은 기존의 전통신학과 마귀 진멸신학 입니다. 기존의 전통신학은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구원론 중심 신학입니다. 칼뱅주의 교회, 웨슬레안주의 교회, 침례주의 교회, 형제회 주의 교회 등 여러 교회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계통도 결국 구원론 중심주의 신학 속에 포함된 교단입니다.

구원론 중심주의 교회들과 상당히 다른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교회가 있는데 그것은 곧 마귀진멸신학 중심 교회들입니다. 이 신학은 주로 한국에서 베뢰아 계통의 교회들입니다. 성락침례교회, 서울 부활의 교회, 한국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한 축사를 강력하게 나타내는 교회들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한국의 신학을 꼭 이 두 가지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신학적인 흐름으로 볼 때 이같이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신학은 구원론 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진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둘은 신학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서로 분명한 다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존 신학을 재고하는데 이 두 가지를 다룬다면 여타의 다른 신학 구조라 할지라도 포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기존의 전통신학을 다루고 다음으로 마귀진멸신학을 다루겠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 또는 구세주로 믿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통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또는 구원의 주로 믿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라고  합니다. 이 신학 아래 있는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거의 모든 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혹시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주 또는 구세주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가져 본적은 없습니까? 즉 다음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본체이신 분이 신데 왜 사람을 죄를 짓지 않도록 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으며, 선악과를 만들고 그것을 따먹은 인간을 심판하여 지옥의 형벌을 주시는 것일까?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내버려두셨다가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려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고서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느니 사랑의 하나님이니 하시는 것은 병주고 약주는 그런 분이 아닌가?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분이 죄를 범하려 할 때는 무엇을 하셨는가?

「‘벌레 같은 나를’,‘지렁이 같은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할 때 마치 지나가던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 있는 자기를 건져 준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러한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왜 소중한 지를 아는 가?

기독교 신앙에는 우연이 없다고 배웠는데 자신이 아프거나 곤란한 곤경에 처하면 고쳐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그렇게 기도해 오지 않았는가? 우연이 없다고 믿는 신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라고 믿는데 과연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나를 영광받기 위해서 지으셨다면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인가?

구원은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야 받는 것인가? 아니면 영광을 돌리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되는가?

인간이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담의 처음 상태로의 회복을 말하는데, 과연 아담의 처음 상태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었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자 인간을 저주하신 것은 인간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하면서까지 주권과 거룩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법관은 될 수 있으나 사랑의 아버지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의문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제가 구원중심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고민하고 겪었던 문제들이 대강 이것들과 유사한 것들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간혹 스쳐 가는 의문들이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신학을 공부하였고 신학 속에서 갈팡질팡하다 그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나름대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구원론 중심 신학 또는 신앙에 대하여 이상의 질문들을 포함하는 문제점을 몇 가지 제기하여 보겠습니다. 진지하게 여러분도 함께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1.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가? 사랑의 본체이신가?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선악과의 문제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면 서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알지 못하셨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녕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따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은 일부러 사람으로 하여금 따먹고 죽도록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일 때 사람이 따먹을 것을 미리 아시지 못하고 그것을 만드셨다면 그것은 전지(全知)에 문제가 있고, 또 따먹는 것을 따먹지 못하도록 하지 못한 것은 전능(全能)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 아시면서 선악과를 만들고 따먹도록 내버려두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먹는 것에 대한 대가가 보통의 것이 아닌 영원한 형벌 지옥이라 할 때에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말거나 그러한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칼을 아무데나 놓아서 아이들이 손을 베었다면 아이들이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그렇게 칼을 조심 없이 막 놔둔 어머니가 잘못인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따먹을 것을 다 아시면서 선악과를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말 안 들으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주권을 세우려는 우주의 절대 독재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한번 말 안 들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시겠다고 하니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으며 공포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같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느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영광을 받기 위하여라니 !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것에 근거합니다. 이왕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주신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분이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에는 무엇을 하셨는가? 타락하도록 내 버려둔 것이 어떤 의도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면 혹시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타락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인간을 사랑하신 어떤 이유가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에 어떤 의도가 없으셨다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유 없이 타락되도록 내버려둠 당했다면 인간들은 자신의 타락에 대하여 전지전능 하 시다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는 전지전능한 분일 수 없으며,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결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2.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목적이 없다 하면 자연과 역사에는 목표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잠16:4)라고 합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사물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목적에 대하여 전통신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 창조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 그 자신의 목적이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바울이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목적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다(고전15:28, 사48:11).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창조성을 우리가 앎으로서 우리는 창조자 자신의 만족이 창조의 주된 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②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은 그의 완전하심의 현시이다.

성경은 그의 완전하심이 그의 뜻이요. 기뻐하는 바라고 말씀하고 있다. 제임스 오르는 인간의 창조가 그 자신의 완전함을 보이시기 위해 그의 계획안에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사상은 창조의 지혜와 그 존재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고 피조물의 창조 시에 나타내셨던 아름다운 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창조 속에 매장된 무한한 보화와 자원을 합리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와 같은 세상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창조의 지혜는 그 자신의 창조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창조물들을 보시고 그것들이 좋다는 것을 아셨다. 인간이 그의 창조 속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르지만 창조 후에 인간은 ”매우 좋다“라고 인정을 받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모든 하나님의 지으신 것은 모두가 이 목적을 위해 있다. 이 영광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다른 목적들이 이룩된다. 그 자신의 영광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은 성경의 평범한 진리이며 여러 가지 이유로 보여줄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를 계획하실 때 다른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에 그는 그의 영광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 속에 있게 된다. 절대적인 목적은 유일한 대상에 종속되어질 수 없다.

둘째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이시다. 그 자신의 뛰어나심은 모든 존재의 뛰어남보다 더 뛰어나시고 더 가치가 있다.

셋째로, 인간은 그 자신들조차도 그들이 만든 사물의 행동과 조작이 우수할지라도 그것은 마땅히 인간을 창조하신 이에게 공을 돌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된 목적은 창조자의 영광을 보존하며 그들 자신의 고상한 선과 행복과 탁월성을 보존하게 된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자이시오, 또한 그렇게 인정되지 않고서는 피조물의 존재도 행복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의 최고 목적으로 삼으신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은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벧전 4:11).

 

한 때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며 고통에 고통을 경험하였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말을 조심하였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으며, 주일 성수, 헌금, 기도회 등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 쓸 수록 낭패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더하여 졌습니다. 내 자신에 대한 절망이 치솟았습니다. 이것에 실패하자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좌절이 나를 사로잡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신학대학을 들어간 후부터 대학원을 마치고 군복무를 마치기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어정쩡한 가운데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이 문제를 물었을 때 그들 역시 썩은 고름 위에 반창고를 붙이고서 마치 별일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개인의 삶과 목회가 정상적으로 될 수 없다는 답답함이 점점 증폭되었습니다.

이 증폭되는 답답함에 결국 하나님은 시원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견하고 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소망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삶에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 고통의 문제 가운데로 지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들이 그토록 잘 알고 있는 것, 즉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에 정면으로 배치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요구하시는데 어떻게 그것을 무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요구하시면 우리는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켜 드릴 때 구원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자기의 존재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들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공개적으로는 아니지만 은연중에 다음의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어 영광을 돌릴 때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믿기만 하면 모두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이 아닌 지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느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또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최악질의 압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애를 쓰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여지없이 지옥에 버림당하고 병과 저주를 받는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영광을 받기 위하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신 것을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라면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목적 역시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들을 다시 살려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셔야 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는 벌써 하나님이 아닙니다.

망가진 물건을 돈주고 고치는 것은 그 물건의 목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큰 목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었다면 분명 그것은 생명보다 귀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한 이유는 역시 영광을 받기 위하여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 주신 목적이 상실한 영광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은 사람을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영광 구걸 중독 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말씀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열하고 야비한 하나님을 전통신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섭리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류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적과는 무관하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다. ····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섭리 아래 의로운 목표를 위해서, 자비로운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타락을 허락하셨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며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왜냐하면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 지혜, 선하심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이라 하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인한 타락을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와 거룩한 안내에 따라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목적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인간의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 하였다면 인간 타락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정론 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나 인간 범죄의 책임은 순전히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인간 스스로 죄의 유혹으로 범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율배반적 논리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받기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럴 수 있습니까? 반드시 인간은 범죄를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인간으로 죄를 범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직접 인간을 죄에 빠뜨리지는 아니하였으나 함정을 파 놓고 인간으로 빠지게 해 놓고 “네가 주의하지 않아 빠졌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함정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 “보아라, 네가 잘못하여 함정에 빠졌지만 나는 자비하고 사랑이 많기 때문에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구원의 하나님이다”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고서 범죄한 자들 중 구원하는 이들에게도, 버리는 이들에게도 “네가 범죄하였다. 나는 너로 범죄하게 하지 않았다”고 그 범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우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속으로는 인간이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작정하셨으면 서도 말입니다.

거기에다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는 것까지 인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함으로 내가 절대자 하나님임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예정을 기뻐하셨으니 말입니다. 예정의 교리로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은 될 수 있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악질 포학자요 독재자인 하나님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 타락과 구원의 과정 자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셨다면 하나님은 영광 받는 것을 다시 회복하고자 우리를 구원하신 것보다 더 악질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다 그 아이가 다쳤을 경우 그 아이를 고쳐 주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아이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그 다리를 고쳐 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인간의 타락의 과정 자체를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수 있으나 절대로 사랑의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지전능도 야비하고 비열한 짓일 뿐입니다.

우리 사람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드시고,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빤히 다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따먹으면 죽는다고 협박하고, 따먹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따먹고 사망에 처하자 자기 생명을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한다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싹 다시 살아 놓고, 온갖 생색을 다 내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우리 앞에서 쇼를 부리지 않는 것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완전히 인간을 엑스트라로 무대에 등장시키면서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질문 3. 구원(문제 해결)을 부르짖는 것은 이 세상의 역사가 누구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과 이 세상의 통치자가 마귀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행복하게 별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출하셨다가 뜻밖의 사고로 모두 사망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슬픔과 충격이 컸고, 거기에다 생활비를 벌 사람이 없어 결국 이들은 사람들에게 구걸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 경우에 이들이 구걸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이들과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불쌍하여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였다는 것과 현재 인간의 상태가 비참함으로 관계없는 하나님께 자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거나, 설사 창조하셨다 하더라도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우주의 미아로 내 팽개쳐져 부모의 아무런 보호와 돌봄이 없는 사생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나 사람이 그 목적에서 이탈하자 우리 사람을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요청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버림이 전제될 때에 구원 요청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마귀에게 당하며 산다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서 마귀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려고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에 속하고 이 세상의 환난과 곤경에 처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에게 받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버리시고 사람과 관계를 끊었고, 하나님이 마귀에게 속하여 사람들이 곤경 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용납 받을 수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그래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하고 외치는 것이 구원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버리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직접 연출하여 조성하신 것이며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보면 구원을 부르짖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람들이 죄에서, 각종 질병에서, 어려운 문제에서, 기타 여러 가지 문제에서 구원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고 풀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통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령 돌 징검다리를 건너가던 사람이 그만 미끄러져 물에 빠져 떠내려 갈 때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는 것이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물에 빠진 사람과 구해 주는 사람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더 더군다나 구해 주는 사람의 의도와 그 사람이 물에 빠진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해 주는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물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우리가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냥 구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영을 배우려고 수영장 코치에게 훈련을 받는 과정으로 물에 처넣어졌다고 할 경우에는 “살려 달라”고 하는 말은 성립이 안됩니다. 그는 그 물 가운데서 허우적대면서도 수영하는 것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가 물에 폭 빠져 버렸을 경우에는 코치가 알아서 건져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해 달라”고 소리치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라고 소리쳐 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의 세상, 마귀가 왕노릇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공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통치자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전통신학은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유일한 통치자임을 말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는 이원론을 나타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세상의 정당한 주인이시며 세상은 오직 창조자인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당한 주권을 찬탈한 사탄은 세상을 죄와 죽음으로 지배하며. 그에 대한 복종 곧 범죄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보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통과 재난과 불행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합법적 지배자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을 찬탈하고 그가 왕노릇 하면서 죄와 죽음으로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마귀의 지배를 합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구원을 외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고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만이 진정한 통치자라면, 그리고 우리를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부딪힌 여러 가지 곤경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배려 없이 주어진 상황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라도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하고 모르는 사람하고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은 구원해 줄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나, 그 가운데서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구원해 줄 사람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에게는 모든 상황이 통제자의 통제와 의도 중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원론을 거부합니다. 오직 유일한 통치자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외치는 신앙은 실제로 이원론을 나타냅니다. 이원론이란 하나님과 마귀의 지배가 서로 대립되어 있어 이 세상이 이 존재의 대립에 의하여 이끌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제 통치자가 두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자신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신을 통치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곤경에서 구원을 부르짖으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현재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상황 부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부여되었다면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려고 하여야 할 것이지 그 상황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어린아이 같은 행위입니다.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여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괜히 고통을 받으니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실제로 마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이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귀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실제적 이원론입니다.

 

질문 4. 하나님이 구속주인가 ?

이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구원의 주, 또는 구세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합니다. 성경 해석도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 것이 복음 적이라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구속주일까요? 제 말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장 주된 특성이 구속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창조 사건 이후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이 더 이상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는 창조주이지만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는 더 이상 창조하실 것이 없으시므로 창조주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 과정에 하나님은 구속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구속의 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그 창조와 인간으로부터 영광 받으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상실되었으며, 영광 받으려고 창조한 인간들에게 저주한 후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인간들을 구원한다고 보는 견지에서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한 번 만들었다가 괜히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땀을 뻘뻘 흘리는 그런 하나님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국 하나님이 이 우주와 사람을 육체로 만드신 목적이 특별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직접 하나님 나라에 만들어 놓으시면 될 것을 괜히 흙으로 만들었다 그 사람들이 타락하자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여놓으려고 피까지 흘리신 하나님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수 한번하고 아주 혼나는 그런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의 타락을 기뻐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이란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자 그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는 것 자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셨다면 그는 진정으로 구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광받기에 미친 하나님일 뿐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그같은 분이실 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볼 때 위와 같은 설명으로는 하나님을 너무나 잘 못 이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며 이 세상을 여전히 지금도 통치하고 계신 이유를 다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질문 5.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육체는 영원히 살고, 우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인가?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인간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가 죽는 것, 즉 이 땅에서 육체의 삶이 끝나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존재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멸망도 인간의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우주도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파산되는 것은 죄에게 점령된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육신도 벗어나고 죄에 점령된 우주도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육체와 우주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창조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은 잠깐 있게 하셨습니다(고후4:18).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온전히 영존케하기 위하여 진동시켜 버리신다고 합니다(히12:27).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도(히9:27),우주가 없어지는 것도(히12:26) 하나님의 정하신 바입니다.

만든 것들, 즉 육체와 우주가 죄로 인하여 그 수명이 단축되는 것은 확실히 죄의 결과이지만 그것들이 폐기되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땅콩 껍데기는 알맹이에서 싹을 틔우려면 그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껍데기가 썩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알맹이를 위하여 껍데기는 폐기되는 것입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껍데기가 썩어 버릴 수 있으나 껍데기가 썩어야 한다는 원칙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체나, 우주가 폐기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입니다. 이것을 죽음이나, 우주의 멸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우주를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우주라는 공간에 살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될 때, 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시공간을 폐기하실 때, 매미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듯, 육체와 우주를 벗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 말하듯 하나님이 육체와 우주를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그 목적을 상황에 의하여 바꾸신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방법이나 과정을 변경하시기는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을 변경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와 우주를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창조하시고서 인간이 타락함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여 육체와 우주를 폐기시키기로 하셨다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영원 세계의 영원불변하는 통치자임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중대한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질문 6. 아담의 처음 형상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었는 가?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말합니다. 회복이라는 것은 목표로 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의 처음 상태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아담의 처음 상태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이루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 주장에 대하여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상태가 겨우 마귀가 시험했을 때 홀딱 넘어가는 그 정도라는 말입니까? 그 결과로 그 자신이 마귀의 종이 되었음은 물론 그 후손들 모두를 마귀의 종이 되게 하였고 인류에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 왔는데도 말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하나님이 인간을 완성된 상태로 지으셨고, 하늘과 땅도 완전하게 지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창조가 창세기에서 끝났고 인간의 창조도 창세기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뒤에서 왜 아담이 하나님의 완성된 형상이 아닌 가를 말씀 드리겠지만 없어질 육체와 우주 안에 우리를 창조하신 것 자체가 아담이 결코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없어질 시. 공간 안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야 할 존재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지구에서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이 영원히 그렇게 하란 말입니까? 이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와 우주는 반드시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어질 것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없어질 그것에서 그렇게 하면서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처음 상태가 결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 7.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선악과를 만든 목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선악과의 명령이 하나님을 기억하게 위해서, 또 인간의 한계성을 알게 하기 위해서, 즉 인간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자율적인 순종과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가장 강력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은 다음의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들을 저주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침해할까 봐 긴장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범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손상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주권이 침해를 받자 하나님의 거룩성이 불순종을 용납할 수 없어 인간을 심판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지명령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이 부여된 기준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인간을 심판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법을 세워 놓고 범법에 대하여 법으로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법에 부여된 가치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법 제정 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법에 대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법대로 저주의 심판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해로 볼 때 인간의 저주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침범한 자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의 대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은 두 가지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나는 선악과 자체 내에 어떤 저주나 독이 들어 있어 그것을 먹는 것 자체로 그에게 해 가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악과 자체에는 아무런 저주가 없으나 다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전자의 가능성은 실제로 없습니다. 전통신학의 말 대로라면 하나님이 직접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저주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형벌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과 형벌이 인간 저주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적 행위를 감행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수호가 관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간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다는 견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수단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같은 끔찍한 저주를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을 가차없이 저주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저주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창3:11에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의 법을 세우셨으므로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려면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저주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선고하여 인간이 저주를 받았다면 법을 어겼으니 당연히 법을 어긴 것에 대하여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를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저주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범법을 선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악과 명령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나타내고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이 인간에게 하나의 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범법자로 선고하지 않고 누가 너희를 범법자로 고하였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법을 고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저주 역시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능력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유의지를 주시고 반면에 자유의지의 제한을 두는 선악과를 주셔서 자신의 주권적 권위와 거룩성을 나타내고, 또한 그것으로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려 하셨으며, 그 거룩성과 주권을 침해할 까 봐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이 인간으로부터 침해를 받을 것을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의 수호로 보는 것은 선악과 나무 열매에 하나님으로서의 전 인격과 주권과 성품을 내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침범하면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하여 선악과를 내세우신 것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실과를 법으로 내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이 침해를 받을 까 억장을 부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주 귀한 사과를 하나 사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과를 먹지 않고 아들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세울 목적으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들아, 이 사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네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줄로 알고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들이 그 사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주권이 아들로부터 침해를 받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같은 이야기가 말이 됩니까? 자신의 주권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들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여 아들을 시험할 리도 없지만 아들이 사과를 먹었다 해서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선악과에 내 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위대하심을 성립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에 자신을 걸었다는 것은 참으로 옹색하고 치졸한 발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이 큰일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인간으로부터 주권과 거룩성을 지킴 받으셔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룩성과 주권을 침해받아 인간을 저주하였다면 기도 방해한다고 자신의 아이를 목욕탕에 집어넣어 익사시킨 아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이 진정으로 이것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어느 정도의 벌을 가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번의 기회만이 허용된 것이었으며, 그 결과로 마귀의 종이 되게 하고 결국 지옥의 영벌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위의 논의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만드시지 아니한 것을 보았습니다. 기존 신학에서는 인간의 저주가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인간을 저주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부러 만드신 것입니다.

기회를 끝까지 주었는데도 불순종하고 명령을 어기었다면 영원한 결정적인 벌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단 한번의 불순종으로 영원한 저주에 처한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에 절대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한번 불순종한 자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기존 신학에서 볼 때 아담이 죽을 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어기는 즉시 그 저주를 받았습니다.

한번 불순종한 자에게 그렇게 영원한 저주를 하셨다는 것은 인간을 죽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좋은 것을 많이 주어 그 조건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결국 함정에 빠지게 하여 죽이고자 하셨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으니 막상 인간들이 불쌍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구원하신 분, 아니면 영광을 받기 위한 미치광이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 말하듯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면 인간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영광을 받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자율적인 순종과 사랑을 받는 것과, 인간의 한계를 아는 것과, 선악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축복이 아니라 완전히 저주인 것입니다. 우주 창조를 하시고서 “좋았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께는 좋았을 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쥐약 섞인 진수성찬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창조되어 결국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쥐약 섞인 진수성찬을 좋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정말 잔인한 폭군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악과가 섞인 에덴을 좋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본체이시며, 영광 구걸증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할 때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을 구원중심 신학자들이 말하듯 말하면 안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명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선악과로 자신의 절대 주권자의 영역을 지키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볼 때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저주하기 위하여 일부러 걸림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 선악과는 하나님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가 마귀에게 매여 종노릇하며,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을 주신 것을 믿는다면 선악과 창조 이유를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누구를 위하여 만드신 것일까요? 바로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7가지 질문을 제기하며 우리가 옳다고 믿는 신앙 지식을 재고하였습니다. 구원중심 신학이 말하는 것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천국에 가게 하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꿀 바른 독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충분하게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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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문 (124.80.223.75)
2008-01-15 17:30:10
주류신학에서 주장하는 원죄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그 후손들에게도 전하여 진다는 교리입니다.

이 원죄의 교리는 기원 후 약 400년 경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만들어 지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가 남자의 정자를 통해서 유전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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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71.126.111.39)
2008-01-15 06:57:49
이단들은 무엇을 주장 하는가?
뭐라고 하는 말인지 하두 휭설수설 해서 내용은 알수가 없는데 글을 올린 배경과 무엇을 얘기 할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짐작은 가는데 그보다 먼져 이 양반이 목사가 맞는가 하는 것이며, 만약에 목사라면 이단에 속해 있는 목사인 것이다. 원래 이단들은 이런 말 저런 말들을 잔뜩 늘어 놓아 읽는 사람을 아리송 하게 만든 다음에 감추어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 사람도 그 중의 한명이라는 것이며 특히 왜 이단일수 밖에 없는가를 얘기 한다면 세상에 있는 마귀들을 진멸 할려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귀신론자 들이나 베뢰아나 레마의 이단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아 주기 바란다. 때로는 마귀들에게 예수님이 죄값을 지불하고 인간을 구원했다는 해궤한 논리도 늘어 놓아서 마치 마귀가 하나님 보다 우세한것 처럼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으; 전지 전능을 의심케 하는 아담과 하와의 사건을 부각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이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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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71.255.106.193)
2008-01-15 05:34:50
믿는것 만큼의 행하는 삶
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학문도 필요하고, 경험도 필요 합니다. 그리고 노력도 필요하구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은 무리이고 또 다 알아야 믿는다고 하는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을 나누는 대화와 토론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칼빈이 한 말대로 "나는 말씀이 가는곳 까지만 간다"라는 말이 큰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신학적인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하드라도 배운것 까지 일수 밖에 없듯이, 체험을 하였어도 체험한 곳까지만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은 지식이고 체험은 확신입니다. 아는것 많큼의 확신은 그 사람의 믿음이 되는 것이기에 귀하게 보는 것이고, 믿음이 있는 것 만큼의 행하는 삶을 요구 하시는 하나님이기에 누구나가 믿을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 저것 뒤적 거려서 아는게 많으면 그 만큼의 행함도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고 하셨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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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애형 (121.1.53.45)
2008-01-15 00:04:51
성경 자체가
현재 우리들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성경이 인간의 삶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든 주권적인 말씀의 계시이든 둘 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인간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체험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다고 봅니다. 김영민 님께서 말씀하신 맥락에서 생각해본다면,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하는 것은 귀납적인 이해가 되겟구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이신지에 대한 이해는 하늘문께서 말슴하신 방법으로 알게 되는 게 아닐런지요? 인간이 체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명제가 있어도 체험이 없으면 그 실제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불가피하게 두 방향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한계는 불가피하게 인간이 체험한 영역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은 대부분 목사님의 가르침의 범위에다 자신의 지식 및 체험의 범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큰 범위에서 보면 연역적이나 귀납적이라는 구분이 별 소용없는 것 같군요. 하나의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이지 우리의 신앙의 실제를 이해하는데는 두가지 방식이 서로 조화되어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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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문 (124.80.223.75)
2008-01-14 20:36:47
귀납적, 연역적
연역적, 귀납적
연역: 논리학에서,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논리의 절차를 밟아서 낱낱의 사실이나 명제를 이끌어 냄, 또는 그러한 일.
귀납: 논리학에서, 낱낱의 구체적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命題)나 법칙을 이끌어 냄, 또는 그러한 일.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을 말하신다면, 기독교는 귀납적 종교 아닐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터전하여, 인간의 오감을 통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계시하십니다. 하나님도 인간에게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귀납적 방법을 쓰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삶의 자리와 현재의 삶의 자리가 다르다면, 하나님의 계시도 틀려질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즉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계시의 깊이와 넓이를 때에 따라 변경하면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에 힘써야 하고, 반드시 알아 들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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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122.46.62.61)
2008-01-14 19:37:34
어떻게 아느냐의 방법이 또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네요
하나님을 알기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 즉 하나님을 탐구함에 있어 연역법적으로 접근할지 귀납법적으로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라는 불변의 전제를 정해 놓고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정해 놓지 않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그림을 맞추어 나가는 것 중 어느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알게 되는 하나님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계시된 종교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연역법적인 접근이 옳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가 계시된 종교라는 전제 또한 출발점으로 놓을 수 있을지… 역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할 수 밖에 없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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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애형 (121.1.53.45)
2008-01-13 16:42:43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의존하게 됩니다.
김영민님의 의견이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은 불가피하게 인간이 이해한 수준 한도에서 형성되게 됩니다. 인간이 체험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통달하기를 원하십니다. 고전 2:9-14에 보면 성령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통달케함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이 이해력이 불가피하게 제한적이나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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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124.80.97.181)
2008-01-13 06:27:28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아십니까?
보수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를 다니던 내가 중학교 1학년 즈음에 예정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악과 사건과 관련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전지전능의 하나님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시면서 사람이 따 먹을 것을 알았을 것인데 왜 그냥 따먹게 놔 둬서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막지 않으셨나? 전지전능에 하자가 있거나 사랑의 하나님에 문제가 있지 않냐고 담임목사님을 비롯해 몇몇 분에게 물었더니 그리 신통한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서점에 가서 ‘칼빈의 예정론’이란 두툼한 책을 사서 무작정 읽었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고등부 담당이시던 전도사님께 같은 질문을 했더니 대답을 주셨는데 덕분에 그 이후로 같은 문제로는 두 번 다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전도사님의 답은 이랬다. “아이에게 귤과 사과를 주고 둘 다 동시에 잡으라고 하면 양손을 써서 한 손에 하나씩 잡는다. 그러나 어른은 한 손으로 둘을 잡는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는 영어는 교과목에 없었고 산수라는 과목에서는 양수의 범위까지만 배웠다. 음수(마이너스)의 개념은 중학교에 가서야 배웠는데, 초등학교 졸업 때 쯤이면 별난 부모를 둔 아이들은 미리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하여 영어책과 산수책이 아닌 수학책을 가지고 다니며 폼을 잡았다. 그리고는 애들 앞에서 마이너스 값이 나오는 셈을 해 보이곤 했다. 보통 아이들은 5-2는 가능하지만 2-5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 과정을 맛본 아이들은 2-5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음수의 개념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2-5라는 문제를 받으면 답이 없다며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여기서 2는 피감수이고 5는 감수이다.) “감수 보다는 더 큰 피감수 주고 빼라고 하든지, 아니면 감수를 피감수 보다 작은 것으로 줘야 계산이 가능하다”라고.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엄청나게 발전하여 더 이상 인간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우리가 연구해서 알아내어야 할 것이 무한할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직 모르는 것이 무한할 정도로 많다는 얘기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주 미미할 것이며, 전지전능과 선악과 사건의 관계 역시 우리는 이해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하지 않던지 전능하지 않아야 선악과 사건이 설명이 된다”라는 인간의 주장과 “감수가 작던지 피감수가 커야 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라는 초등학생의 주장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이는가?
내 머리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를 절대주로 믿을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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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21.160.10.67)
2008-01-12 13:21:17
수정하였습니다.
수정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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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사 (220.74.145.228)
2008-01-12 11:39:16
수고하셨습니다. 내용은 거창하시나
구속사( ) 한자가 틀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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