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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신학에서의 선악과 이해의 부당성선악과의 저주를 하나님이 하셨는가?
김주범  |  kjbjohn@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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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30일 (일) 19:41:24 [조회수 : 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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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저주를 하나님이 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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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본체이신 분이 신데 왜 사람을 죄를 짓지 않도록 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으며, 선악과를 만들고 그것을 따먹은 인간을 심판하여 지옥의 형벌을 주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자 인간을 저주하신 것은 인간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하면서까지 주권과 거룩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법관은 될 수 있으나 사랑의 아버지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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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진정으로 전지전능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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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선악과의 문제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면 서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알지 못하셨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녕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따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은 일부러 사람으로 하여금 따먹고 죽도록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일 때 사람이 따먹을 것을 미리 아시지 못하고 그것을 만드셨다면 그것은 전지(全知)에 문제가 있고, 또 따먹는 것을 따먹지 못하도록 하지 못한 것은 전능(全能)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 아시면서 선악과를 만들고 따먹도록 내버려두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먹는 것에 대한 대가가 보통의 것이 아닌 영원한 형벌 지옥이라 할 때에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말거나 그러한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칼을 아무데나 놓아서 아이들이 손을 베었다면 아이들이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그렇게 칼을 조심 없이 막 놔둔 어머니가 잘못인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따먹을 것을 다 아시면서 선악과를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말 안 들으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주권을 세우려는 우주의 절대 독재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한번 말 안 들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시겠다고 하니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으며 공포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같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느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영광을 받기 위하여라니 !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것에 근거합니다. 이왕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주신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분이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에는 무엇을 하셨는가? 타락하도록 내 버려둔 것이 어떤 의도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면 혹시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타락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인간을 사랑하신 어떤 이유가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에 어떤 의도가 없으셨다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유 없이 타락되도록 내버려둠 당했다면 인간들은 자신의 타락에 대하여 전지전능 하시다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는 전지전능한 분일 수 없으며,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결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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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만든 목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선악과의 명령이 하나님을 기억하게 위해서, 또 인간의 한계성을 알게 하기 위해서, 즉 인간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자율적인 순종과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가장 강력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은 다음의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들을 저주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침해할까 봐 긴장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범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손상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주권이 침해를 받자 하나님의 거룩성이 불순종을 용납할 수 없어 인간을 심판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지명령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이 부여된 기준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인간을 심판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법을 세워 놓고 범법에 대하여 법으로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법에 부여된 가치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법 제정 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법에 대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법대로 저주의 심판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해로 볼 때 인간의 저주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침범한 자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의 대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은 두 가지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나는 선악과 자체 내에 어떤 저주나 독이 들어 있어 그것을 먹는 것 자체로 그에게 해 가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악과 자체에는 아무런 저주가 없으나 다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전자의 가능성은 실제로 없습니다. 전통신학의 말 대로라면 하나님이 직접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저주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형벌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과 형벌이 인간 저주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적 행위를 감행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수호가 관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간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다는 견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수단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같은 끔찍한 저주를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을 가차없이 저주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저주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창3:11에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의 법을 세우셨으므로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려면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저주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선고하여 인간이 저주를 받았다면 법을 어겼으니 당연히 법을 어긴 것에 대하여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를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저주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범법을 선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악과 명령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나타내고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이 인간에게 하나의 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범법자로 선고하지 않고 누가 너희를 범법자로 고하였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법을 고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저주 역시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능력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유의지를 주시고 반면에 자유의지의 제한을 두는 선악과를 주셔서 자신의 주권적 권위와 거룩성을 나타내고, 또한 그것으로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려 하셨으며, 그 거룩성과 주권을 침해할 까 봐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이 인간으로부터 침해를 받을 것을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의 수호로 보는 것은 선악과 나무 열매에 하나님으로서의 전 인격과 주권과 성품을 내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침범하면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하여 선악과를 내세우신 것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실과를 법으로 내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이 침해를 받을 까 억장을 부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주 귀한 사과를 하나 사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과를 먹지 않고 아들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세울 목적으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들아, 이 사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네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줄로 알고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들이 그 사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주권이 아들로부터 침해를 받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같은 이야기가 말이 됩니까? 자신의 주권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들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여 아들을 시험할 리도 없지만 아들이 사과를 먹었다 해서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과 거룩성을 선악과에 내 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위대하심을 성립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에 자신을 걸었다는 것은 참으로 옹색하고 치졸한 발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이 큰일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인간으로부터 주권과 거룩성을 지킴 받으셔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룩성과 주권을 침해받아 인간을 저주하였다면 기도 방해한다고 자신의 아이를 목욕탕에 집어넣어 익사시킨 아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이 진정으로 이것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어느 정도의 벌을 가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번의 기회만이 허용된 것이었으며, 그 결과로 마귀의 종이 되게 하고 결국 지옥의 영벌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위의 논의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만드시지 아니한 것을 보았습니다. 기존 신학에서는 인간의 저주가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인간을 저주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부러 만드신 것입니다.
기회를 끝까지 주었는데도 불순종하고 명령을 어기었다면 영원한 결정적인 벌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단 한번의 불순종으로 영원한 저주에 처한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에 절대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한번 불순종한 자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기존 신학에서 볼 때 아담이 죽을 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어기는 즉시 그 저주를 받았습니다.
한번 불순종한 자에게 그렇게 영원한 저주를 하셨다는 것은 인간을 죽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좋은 것을 많이 주어 그 조건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결국 함정에 빠지게 하여 죽이고자 하셨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으니 막상 인간들이 불쌍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구원하신 분, 아니면 영광을 받기 위한 미치광이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에서 말하듯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면 인간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영광을 받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자율적인 순종과 사랑을 받는 것과, 인간의 한계를 아는 것과, 선악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축복이 아니라 완전히 저주인 것입니다. 우주 창조를 하시고서 “좋았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께는 좋았을 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쥐약 섞인 진수성찬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창조되어 결국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쥐약 섞인 진수성찬을 좋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정말 잔인한 폭군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악과가 섞인 에덴을 좋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본체이시며, 영광 구걸증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할 때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을 구원중심 신학자들이 말하듯 말하면 안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명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선악과로 자신의 절대 주권자의 영역을 지키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볼 때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저주하기 위하여 일부러 걸림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 선악과는 하나님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가 마귀에게 매여 종노릇하며,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을 주신 것을 믿는다면 선악과 창조 이유를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누구를 위하여 만드신 것일까요? 바로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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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훈련의 목표는 자유자재의 자율능력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자유자재의 자율능력은 성숙한 선택능력입니다. 할 것은 능력 있게 하고, 하지 않을 것은 능력 있게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할 것이 있고 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억압이나 강제가 전혀 없는 절대자유로 개인의 결정에 의하는 것입니다. 절대 자유만이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은 자유자재의 자율능력입니다.
곧 이것은 선택능력입니다. 때문에 선택에 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선택훈련을 하려면 선택의 조건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하라는 것이 있고 하지 말라는 것이 있어 이들 가운데서 자신의 선택능력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선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살 능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 재료로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할 것과 하지 말 것, 즉 선악과를 지명하여 주셨습니다. 아담이 해야 할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수행하므로 「하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에덴에서 끝없는 대화와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품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지 않을」훈련은 선악과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각 개인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존립을 위하여 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통한 이 「하지 않을」훈련을 통하여 역시 하나님의 속성을 품부하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할 것」과 「하지 않을」것의 훈련, 즉 선택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원하지 않으시는 것, 좋아하시는 것,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의 사랑 등을 자신 안에 품부하여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잘 받음으로 하나님과 같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자유자재의 자율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기존 신학에서 말하듯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조건으로 선악과 만들었거나 마귀를 진멸하기 위한 계획에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우리를 하나님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기존 신학에서는 물질세계의 창조 이유와 인간 창조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악과의 존재이유를 잘 못 설명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이 저주하여 벌을 내리셔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났다거나 마귀를 멸할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인간 창조목적을 잘못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영광을 받아야 할 이유도 굳이 없고, 죄를 범한 인간을 그렇게 용서하지 못할 하나님도 아니고, 마귀진멸을 인간의 힘을 빌어서 해야만 하는 그런 무능한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원 계획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더하여 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심 역시 더하여진 과정입니다. 이 더하여진 과정을 필연적 원 과정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 창조목적을 하나님을 위한 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무릎 보호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무릎 보호대를 아이에게 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반드시 무릎 보호대를 착용해야 하는 것을 부모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릎 보호대는 더하여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져 무릎을 상하지 않고 잘 성장하기를 원하지만 그리고 부모가 아이 넘어지는 것을 부모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넘어질 것을 대비하여 무릎 보호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 계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원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에 실패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기업을 다시 얻도록 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것 역시 인간의 자유에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이 자유자재의 자율능력의 존재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시고 다만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 의도는 우리로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롬7:10).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금한 것은 아담의 자유의지를 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후에 갖가지의 명령들, 규례들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할 때 마귀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인지 알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은 독생자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선인을 위하여는 죽는 자가 혹 있을 수 있지만, 의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데 더군다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정말 있을 수 없습니다(롬5:7).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롬5:8).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으로만 알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빼 놓으면 다른 면으로 하나님을 아무리 잘 알아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로 보내시어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살리려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일4:8-10).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속하여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그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원론 중심 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전 역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활동의 역사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을 위해 종말의 시간을 연장해 가시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을 선악과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전혀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한번 죄를 범하면 전혀 용서가 없으시고 엄하게 벌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실 까요? 에덴 동산에서 나온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하나님이 정말로 책망하셨을까요?

변덕쟁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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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정말로 이러한 범죄자는 돌로 쳐죽였습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면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 둘 다 죽였습니다. 또한 처녀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다른 남자와 통간하거나 반대로 남자가 그리하여도 그들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중에 경고로 삼았습니다(신22:22-24,레 20:10). 모세의 법대로 한다면 그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같은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하셨습니다(요8:10-11). 정말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그 말씀에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눅17:3-4).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이 사랑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 자신이 자비 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잘못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돌아갈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야단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이면 물론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하지만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비판치 아니하시고, 더 나아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까지도 인자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는 너무나 무서운 하나님이셨습니다. 전통신학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형벌을 받아 인간에게 저주가 왔으며 고통이 왔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여러 번 따먹어, 하나님께서 말리고 말리다가 어쩔 수 없어 결국 형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처음 따먹자마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온 세상이 죄 아래 속하였으며 모든 인간이 모태로부터 죄의 저주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랑의 본체이며 사랑으로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용서하되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한번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 하여 그렇게 돌이키지 못할 저주를 하셨다는 것은 이해 못할 일입니다. 저주하신 이유가 분명하다면 그나마 모르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형벌 하시고서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에 전혀 해당 없는 자기 과대 허위 광고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결과가 너무나 엄청난 것을 체험하시고서 너희들은 제발 용서하라, 용서하라 하신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쇼를 부리신 것입니까? 아니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듯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우정 형벌을 내리셨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은 못 믿을 분이십니다. 이유도 없이 인간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유도 없이 무섭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인간에게 무섭게 하실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사이코(psycho)로 만들었습니다. 정신이상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도 여전히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정죄하지 않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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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담을 정죄하셨는가 아닌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첫 한번의 범죄를 용서하셨는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셨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임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본문 말씀 가운데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1절)의 말씀에 주의 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직접적으로 질책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물론 그 뒤의 말씀에서 보는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남자가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가 하나님의 정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씨름하는 역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벌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는 지엄하신 분으로 말하는 것이며, 전통적인 구원론 중심 신학의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교육 훈련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소망을 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으로 그같은 일이 더하여 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범죄에 대한 벌로 그같은 것이 우리에게 더하여 졌다면 그렇게 저주하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어떤 기대나 소망도 없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을 어겼기 때문에 그같은 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는 것을 모르실 리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벌하실 작정이셨다면 당장 “너 아담 이놈, 내가 그렇게도 엄중하게 일렀거늘 그래도 내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어?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책망을 하려면 명을 내리신 분이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 대하여 죄를 물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가 범죄하였음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담에게 범죄하였음을 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 너희가 나의 명을 어겼다고 말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로 말하는 그 저주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처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할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들을 구원하셔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을 어긴 형벌로 그같은 저주를 하셨다면 그 저주는 영원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엄하심을 또는 명령의 절대 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였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버지가 딸에게 “11시가 넘지 않게 집에 들어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위험할지 모른다. 혹 나쁜 놈에게 잘못 걸려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납치범에게 유괴 당할지도 모른다. 사창가에 팔려 가서 몸을 팔아야 할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에 아버지의 말씀이 딸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면 벌을 주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또 정말 딸이 인신 매매 범에게 잡혀 사창가에서 몸파는 신세가 되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딸을 위하여 딸이 주의하여야 할 것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또한 늦게 귀가하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딸이 정말 늦게 귀가하였을 때 “야 이년아, 네가 이 아비의 명을 어겼어? 아비의 말이 얼마나 준엄한지 맛을 보리라”하여 딸을 사창가로 팔아 넘겨 버렸다면 그 아버지가 정상적인 아버지이겠습니까? 정신 이상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할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하였다면 그 부모는 딸을 사창가로 팔아 넘기기 위한 계획으로 일부러 그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엄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딸을 팔아 넘기고 그 딸을 도로 찾기 위하여 집을 팔아 돈을 주고 데려왔다면 그 아버지를 정상인으로 생각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서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한다. 너를 구하기 위하여 집을 다 팔았단다. 이제부터 너는 나에게 절대복종하고 나를 위하여 살라”고 말한다면 그런 어이없는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그러한 일이 없도록 조처를 하면 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실 능력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이렇게 하신 것에 대하여 “거봐라,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저주하셨다” 하지 말고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같은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벌을 내렸다면 벌을 내리기 위해 일부러 그같은 말을 하고 그 올무에 걸려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해산의 수고와 땀의 수고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인간이 어떤 상태에 처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벌하기 위하여 일부러 선악과와 그것 따먹을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어 놓으셨다면 해산의 수고와 노동의 수고가 벌이지만, 인간을 벌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면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수고는 하나님의 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저주는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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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범죄하였을 때 마땅히 죄에 처하여 살기를 명하셨다면 하나님은 굳이 예수님을 보내어 사람을 구원하려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 몇 푼을 주고 우리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죄에 처하여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저의 집에 비디오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고장이 나서 아주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화면은 나오는데 음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AS센터에 맡겨서 고쳤습니다. 그날 하루는 이상이 없었는데 다시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 두 달 동안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가 비디오를 보자고 하도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다시 AS본사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수리비용이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선명한 화면과 음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비디오를 수리하였을까요? 그것은 비디오를 고장난 상태로 두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떻게 하다가 비디오가 고장이 났다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고친 것은 비디오를 가지고 있는 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비디오를 시청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디오가 고장나 그냥 집에 짐으로 있는 것을 제가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기를 원하셨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속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임마누엘로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첫 한번 불순종한 사람을 영원히 저주하실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나오고, 해산의 수고와 땀의 수고에 대한 저주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면서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하실 분이 아닙니다. 일흔 번에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하나님을 우리를 벌하기 위하여 두 눈을 치켜 부릅뜨고 감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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