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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여, 차라리 선교를 포기하라[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에게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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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03일 (월) 12:42:44 [조회수 : 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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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인질들이 돌아온 이후에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글은 <당신들의 예수> 246~252쪽에 실린 글의 원본으로, 2006년 8월에 쓴 글을 책 편집에 맞게 다듬은 글입니다.
 
한국교회여, 차라리 선교활동을 포기하라
-한국 개신교의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 유감
 
‘아시아협력기구’라는 개신교 단체가 주최한 ‘평화축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2006년 8월 5일부터 4일간 2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8월 3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수백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림으로써 이 행사는 시작 단계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리면서 밝힌 추방의 이유는 “이슬람 문화를 훼손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아시아협력기구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NGO단체로, 아프가니스탄 입국 목적을 “주민들에게 컴퓨터 기술과 언어를 가르치고, 교육과 건강 시설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보수 개신교 선교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당 기관의 C사무총장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아프간을 방문한 이유는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호활동 및 평화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권 이외에서 이들의 활동을 보는 눈은 여타 보수 개신교 선교단체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세프 스타네자이 아프가니스탄 내무부 대변인은 “한국인들이 관광비자로 입국했지만 이들의 활동을 보면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화축제 참가 학생들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글로 된 기독교 복음 관련 전단을 배포하여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혹 아시아협력기구가 순수한 인도적 봉사 차원에서 행사를 추진했다 하더라도 보수 개신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은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4년 동안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여 문화와 스포츠 활동을 했지만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사를 주최한 분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무모한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였는가?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왜 4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던 방식, 즉 ‘조용한 봉사 활동’을 계속할 것이지 2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를 추진하였는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고 그냥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종교를 묻지 않고 형제로 대해주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무슬림(이슬람교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전하거나 훼손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면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한 무슬림이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꾸란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권에서 벌어지는 ‘선교 행태’에 대해 차분히 짚어보고 싶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이 좋게 말해서 ‘선교에 대한 사명감’,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선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선교를 독려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명감에 불타는 기독교인들이 특히 마음에 새기는 대표적 성경 구절로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1~2절)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최후의 명령이며, 바울에 의해 재차 승인된 선교 명령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태복음 끝에 첨부된 이 구절은, 예수에 의해 직접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그로부터 백여 년 이상 지난 이후, 즉 교회가 조직화되고 권력체로 자라기 시작한 시대에 복음서에 뒤늦게 첨가된 구절이며, 디모데서 역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바울의 이론을 따르는 제자들(그들은 자신의 글을 바울에게 헌정하다 못해, 바울의 저작이라고까지 주장한다)이 교회 확장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모든 기독교권에서 폭넓게 지지받는 공인된 학설은 아니다. 보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교계 현실에서는 ‘사이비 이단사설’이라고 정죄되는 이론이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정직한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내 주장이 절대로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독선일 뿐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 역시 하나의 견해일 뿐이지 절대적 명제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시대의 산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 사상이 녹아있다. 물론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어 들었던 하느님의 사람들의 정신도 들어있다. 그렇기에 성서(거룩한 책)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결국 성서에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도 녹아 있고, 시대의 한계를 반영하는 인간의 억지와 오류도 담겨 있다. 이 사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인지할 때, 비로소 성서는 읽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책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신약성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선교적 사명’은 ‘하느님의 요구’가 아니라 조직체의 확장을 필요로 했던 그 당시, 즉 그 구절이 기록되던 당시 ‘교회의 요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 확신을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 대신, 보수 기독교인들 역시 자기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 한국 교회의 거듭남을 역설하는 류상태 (전)  목사.     © 대자보

이 참에 한가지 변명을 좀 해야겠다. 내 글을 읽은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 중에 내 글이 ‘강요적’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반하장이지만, 내가 ‘강요적’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여기저기 썼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수 신앙은 원시 신념일 뿐이며, 거기에 매이는 것은 종교적 노예상태에 있는 것이다. 거기서 빨리 벗어나라. 내가 갖고 있는 열린 신앙을 너희들도 가져야 한다.” 사실 많이 무리한 셈이다. “너는 반드시 틀리고, 나는 반드시 옳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내가 그런 식의 단정적 표현을 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참 못난 이유지만, 내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입으로는 ‘예수님 찬양’을 떠들면서도 철저하게 예수님을 교리 안에 가두고 제 멋대로 그 이름을 팔아먹고 이용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와 ‘먹사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겠다. 앞으로도 이 못난 분심을 제어할 자신이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허망한 확신에 맞서기 위해 ‘강요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일부러 골라 쓰는 경우가 있다.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겸손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대화법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하며 자기 신념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표현보다 “그건 반드시 틀렸다. 왜냐 하면...” 이라는 강한 표현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주식을 사면 반드시 돈 번다. 저 주식 사면 망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과 “그 사람 말이 틀릴 수도 있다. 이 쪽 주식을 사는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확신 없는 투자자는 “확신 있게 말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는 공갈협박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잖은 말보다 “그런 식의 신앙은 사랑의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는 짓이다.”라는 강한 주장이 그들의 무지를 깨우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원시 신념’을 ‘절대 진리’인 양 착각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 역시 그들의 유치한 신념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내 신념을 절대 진리인 양 강요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선교 활동’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싶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선교’에는 세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참된 선교란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보수 선교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세상의 종말이 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선교활동이야말로 상대방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한 길이기에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기어코 기독교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도 이런 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둘째, “바람직한 선교는 교리를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봉사와 구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만 교리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결국은 상대방을 예수에게로, 즉 기독교라는 종교에로 귀의하게 만드는데 최종 목표가 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차라리 첫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도 순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가면을 벗는 것이 낫지 않을까.
 
셋째, “진정한 선교는 교리를 강요하지 않고 그냥 이웃들의 삶의 자리가 좋아지도록, 혹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은 조건없이 치료해 주고, 배고픈 이웃에게 빵을 주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는 기술을 가르쳐 주되 종교와 연관짓지 말고 그냥 돕기만 하라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가 실행한 선교가 바로 이런 선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다원화된 세계에서 기독교가 해야 하는 선교가 있다면 이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류상태 목사가 오랜 침잠 끝에 내놓은 <당신들의 예수>, 한국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도서출판 삼인, 2007

그러나 이제 한국 교회에, 아니 기독교 세계에,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그냥 선교하지 말자. 이제는 그만 ‘선교’라는 용어를 버리자. 지난 2000년 동안 ‘선교’라는 이름으로 이웃종교의 고귀한 삶의 자리를, 그들의 아름다운 문화를 얼마나 훼손했던가.
 
‘선교’라는 말에는, “나는 당신들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또한 “당신들은 부족한 것이 있다.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없는 그것, 혹은 당신에게는 부족한 그것이 나에게는 있다.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너그러운 듯하지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오만이 담겨있다. 게다가 그 의식에 집착하여 “반드시 주고 싶다.” 혹은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상대방의 문화를 해치는 폭력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니 더 이상은 ‘선교’라는 말을 쓰지 말자. 그냥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은 당연하니까, ‘봉사’라고 하던가 ‘서로 돕기’라는 말을 쓰자. 그리고 제발, 도와야 한다면, ‘기독교’라는 이름을 접고 그냥 돕자.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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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124.61.163.32)
2007-09-18 02:04:41
선교는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류선생님의 글을 언제나 열렬히 환영하고 보는 독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선교는 분명 잘못되었다고 하시는데 저도 공감입니다.
분명 선교는 기독교 교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와 구제가 함께 해야되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교와 전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고 나로서는 절대절망이지만 오직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으로 살면서 그 생명이 흘러넘치면 자연적으로 전도와 선교가 되지요.

그런데 선교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류선생님이 거론하신 모든 방식이 현대 기독교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것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선교까지 하지 말라면 과연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라는 건지 궁금합니다.

미션스쿨을 혐오하시고 겉과 속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류선생님의 글들을 보면서 저는 참 많이 공감합니다.
한국이 선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되집어 봅니다.

정말 대단한 동방의 등불, 백의민족은 이번에도 또 멋진 짓을 합니다.
오래전부터 전쟁만 하던 나라, 이제는 자기 종족끼리도 총부리를 나누는 나라,
결국 성한 것이 하나도 없는 폐허에 탈레반들이 류선생님이 그렇게 칭송하시던
'이슬람 원리주의'로 다스리게 되어 여자를 개, 돼지만도 못하게 대하는
아프가니스탄을 아시지요?

종교를 초월해서 지금 가서 도와줘도 시원찮을 판국에 자기 열정과 젊음을 들여
봉사하러 간 청년들이 잠시 머물다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얼빠진 대한민국은
축구에 흥분하며 차 위에서 짐승이 짝짓기 할때나 하는 짓을 하고,
태국 방콕에 16세미만 여성 상대로 섹스관광객 1위라는 소리에는 매우
쥐죽은 듯 조용해지는 이 멋진 대한민국은...!

자기 몸 바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섬기러 간 이에게 혈세를 내놓으라는,
훌륭한 나라입니다.
지금 다들 배가 불러서 기억을 못하나 봅니다. 아니면 류선생님은 배우셨지만
'박씨는 지금 너무 감정적으로 제 글을 이해하시나 봅니다...'
혹은
'학교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라 교육 아닌가요?' 등으로 말하시겠지만...

아시다시피 120년 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야만적이고 미개한 나라일 뿐이었습니다. 전염병도 많아서 툭하면 죽어나갑니다.
이런 나라를 위해 왜 그 수많은 선교사님들은 죽어갔습니까?
지금 선생님이나 혹은 제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다원주의자 여러분이
그 지식들을 들어 얻을 수 있도록 작은 학당을 열고 그 길을 열어준 것도,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의료기술을 하루 빨리 얻게 한 것도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정말 의문이 드는 건 전 세계에서 선교가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한다구요?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문화라는 가면을 쓴 악랄한 형태의 악습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일부다처제를 문화상대주의로 생각하면 귀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라에서 대우받는 여성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자신을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선교가 라마불교를 망쳐간다고 말하는데 라마불교의 방식이 문화라는 미명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는 생각해보셨습니까?

다원화된 세계라서 그 나라에 여러 민족이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민족은 여전히 '천장'풍습이 남아 있어서 자신의 부모의 시신을 어쩔 수 없이
칼로 각을 떠서 새들에게 먹이도록 뿌립니다.
예술하시는 분들은 엄청 멋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죽으면 부모라는 개념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있으며, 그 시신을 함부로 대하는 기억들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갈들이 생기면 바로 칼로 살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가까운 예로 한국에는 어떻습니까?
전통 전통 말하는데 그 전통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게 많았습니까,
죽이는게 많았습니까?

물론 선교사들이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 못해서 타 문화권에 고통을 준 일도 더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문제가 전체 문제인양 바라보는 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래도 선교를 감정적으로 해서 안되며, 성경을 다르게 이해하면 선교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신지 생각해보십시오.

현대 선교단체들이 선교대상자들에게 전달하는 훈련과 사상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선교’라는 말에 “나는 당신들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다.”혹은“당신들은 부족한 것이 있다.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없는 그것, 혹은 당신에게는 부족한 그것이 나에게는 있다.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표현하셨는데 이는 이미 선교학자들이 배척하고 지양해야된다고 아주 오래전에 주장하던 것입니다.

물론 류선생님이 지적하는 보수적이고 치명적인 한국 기독교는 처음에 그렇게 해나갔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처럼 성장하기 이전 상황은 전혀 알지 못한체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류선생님은 30여년전 기독교 사고방식을 현대 종교철학으로 반박하십니다. 항상... 하긴 아직도 그 고루한 악습을 고수하려는 분들이 문제겠지요.

신약성서만이 아닌 구약성서까지 강력하게 요구하는 '선교적 사명'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현대 썩은 가치관을 지닌 교회들처럼 무언가 늘어나야되고 확장되어야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 같은 사고 방식을 초대교회들이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조직체의 확장을 필요로 했던 교회의 요구'라고 확신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정확히 아시다시피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꼭 이말에 대해 성서비평학 얘기하시듯 그때 스데반이 죽을 때 옷을 가지고 있기만 했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서로 피곤하겠지요?)
그런데 그가 왜 바뀌었나요? 단순히 종교적인 신비체험 때문에?
그는 예수를 만난 겁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살고 있던 훨씬 대단한 삶을 버립니다.
사도바울이 체계적으로 조직을 세우기 위해 4복음서의 지상명령과 동일하게
선교를 한건가요?

선교는 그래도 당연히 해야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뭐라해도
그리고 복음 외에 다른 결론이 없는 이들을 걱정하시는 다원주의, 자유주의 여러분들이
말리셔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리플달기
0 0
손님 (121.180.156.231)
2007-09-07 23:24:25
나도 궁금 님 ㅎㅎㅎ
제가 사도 바울이 아니라서 바울의 마음을 모르겠는데요.

저는 예수만으로 충분합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랬지 않을까요?

다원주의의 입장에서야 유대교인으로 살아도 상관없겠지만

예수님이 중심인 기독교로 개종을 해도 상관없으니까요.

뭐 저도 다원주의자들의 의견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최대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펼친 논리가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네요.
리플달기
0 0
하늘문 (124.80.235.137)
2007-09-05 20:55:28
구속사에 대한 짧은 의견
구속사에 대한 두 견해 1) 성육신과 구원 등을 의미하는 말. 초역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며 단지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가 구원-계시 현실역사의 중심이며 정점. 태초로 부터 종말까지 성서에 의해 일관성 있게 설명될 수 있다.

구속사라는 단어는 18세기 정도에 학자들이 만들고 개념화 된 것입니다. 개념화에는 성서, 이성, 경험, 전통의 4가지 수단들이 동원되었지요. 따라서 인간 작업의 결과인 '구속사'로만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에 관한한 저는 개인적으로 2번을 더 신뢰하는 데요, 그러나 2번의 구속사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을 경시하여 인간을 위한 도구나 재료(resource)정도로만 보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의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을 생명사(생명을 다양하고 활기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덧붙혀서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다양성을 지향하기에, 신학은 각각 틀릴지라도 류상태님의 인격은 존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상태님은 선교의 두가지 방법중 "하나님의 선교"라고 이름하는 선교방법을 취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그 방법에 동의하구요.
리플달기
0 0
궁금증 (211.111.214.149)
2007-09-05 14:32:44
결국은
다원주의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의 순교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는가?
그래서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고 다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거라고 추측이 되는군요. 성경에 예수구원의 대속성 유일성,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문자 그대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하시거나 다른부분(하나님의 뜻, 착한행위등)과 연결해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등의 주장을 할수 밖에 없는거군요.
제 생각은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는게 아니라 성경은 곧 구속사가 아닌가 한데요.
구속사인 성경을 다른 관점에서 보다보니 그 틀에 맞추어 성경을 일부 부인하거나 다 믿어서도 안되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을 하게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원주의도 여러 관점이 있을 수있겠으나 유니온 신학교의 현경 교수 같은이들은 동성애도 지지하는것으로 기사가 난것을 보았는데요 그 분의 주장은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가 없다 동성애도 사랑의 한 종류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성경에 로마서인가(기억이 안남) 동성애를 죄로 명시한 부분이 있는데 현경교수는 이를 당대에는 인구번식을 위해 동성애를 금한것이지 동성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해석으로 주장하던데요..
이런식으로 성경을 자신들의 특정 이념에 맞게 해석하고 입맞에 맞는 부분만 취하면 한도 끝도 없이 많은 주장과 이념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장되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리플달기
1 9
나도 궁금 (61.4.204.176)
2007-09-04 21:19:35
아래 손님에게
"진리라는 걸 멀리 둘러가면서까지 찾을 필요는 없다"는 님의 주장대로라면 기독교적 환경에서 사는자는 그냥 기독교에서,불교적 환경에서 사는 자는 불교적 환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찾으면 된다는 것인데...그렇다면 바울은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그냥 따를 것이지 어찌하여 굳이 기독교로 개종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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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58.120.127.141)
2007-09-03 21:14:06
거듭남
류상태씨 님부터 거듭난 삶을 살아가세요?
기회주의자적인 행동은 거두고 낮은곳에서 낮은자와 함께 몸소실천하며 사세요
말로만 그럴듯한 글을 쓴다고 해서 님이 거듭난 사람으로 착각하지 마시고요

말로만 그럴듯한 글은 쓰지 못하지만 낮은 곳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주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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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121.180.156.231)
2007-09-03 20:42:59
음...
일단 저 자신은 다원주의자가 아니고 다원주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밝혀 둡니다. '예수'라는 구원의 원리는 예수님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던 예수님의 속성을 말할 수도 있어요. 후자를 중심으로 '예수'를 놓고 보면 다른 종교의 가르침 속에도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른 종교 믿어도 되겠네요'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아들이 함께 계시겠다던데 진리라는 걸 멀리 둘러가면서까지 찾을 필요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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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 (211.111.214.148)
2007-09-03 18:53:14
그러면..
구속사적 관점이 아닌 다원주의적 관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또 그의 제자들의 순교를 어떤식으로 풀이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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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121.180.156.231)
2007-09-03 18:02:02
아래 궁금증님...
제가 류상태 씨가 아니라서 답변 달아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다원주의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안 읽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님이야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배워 오셨으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다원주의자나 굳이 다원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타종교에 관용적인 사람들은

신구약을 읽을 때 님이랑 다른 관점을 가지고 읽죠.

길게 설명드려도 아마 수긍 못 하실 것 같으니 이 정도만 답변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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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 (211.111.214.149)
2007-09-03 15:35:19
참 궁금
류상태님 같은 다원주의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진정한 선교는 교리를 강요하지 않고 그냥 이웃들의 삶의 자리가 좋아지도록, 혹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은 조건없이 치료해 주고, 배고픈 이웃에게 빵을 주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는 기술을 가르쳐 주되 종교와 연관짓지 말고 그냥 돕기만 하라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셨는데
그럼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죠? 그냥 그때까지의 훌륭한 삶만으로도 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충분할텐데요 . 예수의 삶처럼 사는것만이 목적이라면 다른 위대한 성인도 있고 한데 왜 구지 하나님의 뜻이라며 괴로운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십자가의 죽음을 미련하게 지셨나요? 왜 초기 사도들이 순교당했죠? 교리(예수교?)를 전하지 않고 그냥
착하게 살아라라고만 했으면 절대 박해를 받지않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듣느자나 전하는자나
서로 평화롭게 잘살수 있었던데요? 개죽음입니까?오버해서??
아니면 사도시대만 교리를 전하고 지금시대는 다원화된 사회이니까 오늘날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죄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은 접어두고 착한 삶만 전하고 살아내면 되는가요?
궁금해요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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