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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기독교 이해를 위한 추천도서 8권“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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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1월 16일 (화) 00:00:00 [조회수 : 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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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일반 교우라도, 성서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기초 신학서적과 종교서적이 있다. 특히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분들, 또는 구역장이나 교회학교 교사 등 책임있는 자리를 맡아 봉사하는 분이라면, 이 추천도서 8권을 꼭 읽어보시도록 권하고 싶다.

불과 8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성서와 기독교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8권의 책들을 정독한다면, 적어도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고, 기독교라는 ‘세계종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8권의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반 교우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너무 어렵지 않고, 신학적으로도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책을 고르려고 노력하였다. (개인적으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책을 추천하고 싶기도 하지만, 너무 방대하고 유동적인 그들의 연구과정을 정리, 정립하는 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이 글은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불거토피아>에 공지로 올려 이미 천여 명의 회원들이 읽었다. 그럼에도 조금 정리하여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들이 갖고 있는 내용과 호소력이 한국교회 교우들을 바람직한 신앙으로 안내하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된 지 오래된 책이 있어, 일부 단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 <성경의 형성사> 박창환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출간.

저자는 이 책의 서론에서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성서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고 하는 한국의 교회가 실제로는 성서의 정신과 엄청나게 배치되는 태도와 생활을 갖고 있다.”고 진단하며, 그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있다.

1) 한국 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같이 가르치고 있다.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 이를테면 성서를 많이 읽음으로써 비록 그 뜻은 모른다 하더라도 어느 책에 무슨 말씀이 있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서 지식만으로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

2)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읽기는 하지만 바른 성서관을 갖지 못하고 읽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상한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약장에 들어 있는 것은 다 약이요 병을 고치는 데 쓰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고, 어떤 병이 나든지 차별 없이 아무 약이나 마구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 일반이 이와 같은 성서 개론적 배려와 연구 없이, 일차원적으로 어디서나 성구를 끌어다가 아무렇게나 적당히 생활에 결부시키고 적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판단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물론 사회에까지 혼란을 가져다주는 결과가 나타났다.

3) 이러한 현상은 교회 지도자들이 깊은 성서 신학적 연구 없이 한 가지 처방의 약으로 만병을 통치하려 드는 의사처럼, 제 나름의 해석과 제 나름의 처방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해 온 데에서도 기인한다... 사람을 살리고 인간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되도록 주신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도리어 교회 분쟁과 분열의 도구가 되고 그 원인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이 책은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낸 저자가 일반 교우, 특히 교회학교 교사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최소한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초 성서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전과는 달리 성경을 보는 눈이 새롭게 뜨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 문자의 한계를 넘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2. <예수는 없다> 오강남 지음. 현암사 출간.

이 책은 수 년 전, 베스트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국 교계에서 한창 문제가 되었던 책이다. 성경이 어떤 책이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쉽고 명쾌한 비유로 정곡을 찔러 설명한다. 그러나 보수(복음)적인 교회에서는 금서로 규정하고 있다.

집필 당시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매우 쉽고 평이한 문체로 이 책을 썼다. 어린이가 읽어도 이해할 만큼 글의 흐름이나 예화가 쉽고 재미있지만, 그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는 어느 전문적인 신학서적 못지않은 심오한 깊이를 갖고 있다.

이 책은 경솔한(?) 제목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 오강남 교수가 직접 채택한 제목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식(“있다 없다”)의 흑백논리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마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목 앞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우리가 지금까지 제멋대로 규정지어 믿어온 그런) 예수는 없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체와 적절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비유로, 난해한 신학적, 종교적 문제의 핵심을 명쾌하고 쉽게 설명한다.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다 보면, 성경이라는 책 속에 담겨진 ‘사람의 언어’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는지, 혹은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어떻게 우리를 죽이는 ‘죽음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그 양면성에 대한 통찰을 자연스럽게 갖게 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첫 단행본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를 쓸 때, 빼어난 두 글쟁이들의 글쓰는 방식을 벤치마킹해 보려고 했다. <로마인 이야기> (이 책을 아직 안보신 분은 꼭 읽어 보시기를.. 특히 인생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젊은이라면..)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와 <예수는 없다>를 집필한 오강남 교수다. 그들처럼 쉽고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쉽고 재미있고 명쾌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그 두 분의 글쟁이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버거웠음이 증명되었지만..


3. <이스라엘의 역사>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컨콜디아사 발간.

이 책은 루터교 출판사인 컨콜디아사에서 발행한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첫 번째 책이다.

성서를 연구할 때, text와 context를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text는 성서의 본문이다. context는 그 본문이 쓰여지게 된 배경, 즉 역사적 상황이나 저자가 처한 환경, 글을 쓰게 된 의도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context를 알지 못한 채, text만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서가 쓰여진 동기와 배경, 저자에 대한 연구 없이, 오로지 성서만을 100독, 200독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로부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쉽게 만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약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성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실제적 역사와 무관하게 형성되어진 구약성서들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책은 구약성서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개론서이다. 이 책을 공부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구약의 흐름이 시대별로 이해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의 관계도 대략 파악이 된다. 구약을 공부할 때마다 두고두고 유익한 자산이 될 것이다.

성서와 우리와의 시대적 간격은 2~3천년에 이른다. 또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삶의 자리와 우리와의 공간적 간격 또한 그 못지않다. 그 간격을 무시하고 구약성서를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는 구약성서를 읽지 말라.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4. <구약성서 39권>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컨콜디아사 발간.

앞서 소개한 컨콜디아사 발행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구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 토대 위에, 두 번째 책은 문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각 권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해 준다. 책읽기를 싫어하는 분이라면, 첫 번째 책인 <이스라엘의 역사>만 정독해도 좋겠다. 그러나 기왕에 내친걸음이니 <구약성서 39권>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저자는 독자들이 구약성서 각 책들에 대한 주요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필치로 서술했고,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각 책을 소개하고 있다... 각 책들의 역사적 배경, 기록 유형, 개요, 자료, 메시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본서는 독자들에게 성서 전체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줄 것이다.” 이 책의 감수자인 민영진 박사의 말이다.

저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입문서는 구약성서의 저자들과 그들의 저작들에 관하여 학자들 가운데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올바른 해석을 위한 입문으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본적인 견해들을 진술하고 있다.”


5. <구약성서 신학>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컨콜디아사 발간.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컨콜디아사 발행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마지막 책이다.

첫 번째 책은 구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두 번째 책은 문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각 권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해 준다고 소개하였다. 이 책은 이런 토대 위에, 구약성서 전체를 흐르는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구약신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 39권>을 읽은 분은 이 책 역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첫 번째 책을 소개할 때, text와 context를 함께 연구하지 않고는 성서 본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그 실례를 하나 들어보고 싶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에게 “난 네가 정말 미워.”하고 말했다고 하자. context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문자만 놓고 보면, 이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엄마가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엄마가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즉 context를 알아야 한다.

가령 아이가 엄마 몰래 동생을 괴롭힌다거나 몰래 돈을 들고 나가 과자를 사먹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런 좋지 않은 행동을 들킨 순간에, 엄마가 아이에게 한 말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엄마가 밉다고 한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특정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때, 거기에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을 해석할 때는, 시공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말씀이 아니라 “그 때 그 순간”의 정황아래서 표현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문자로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내 사랑하는 자식이다.”라고 외치는 엄마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context를 알지 못한 채, text만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 혹 “context가 그런 것이라면, text(본문)에만 집중해도 능히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예를 들어서 그렇지, 성서 안에는 그렇게 쉽게 가늠할 수 있는 context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context를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의 경험으로도, 추론이나 명상으로도, 혹은 아무리 우리가 그 context를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당시의 context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직 당시의 context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통해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가 쓰여진 context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오직 성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칼을 들고 노는 것과 같다. 신학을 외면한 채, 오로지 성서를 수십 독, 수백 독 독파하는 분들이 있다. 성서의 문자에 갇히는 지름길이 되겠다.


6.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지음. 분도출판사 펴냄.

이 책은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에크하르트 <Eckhart, Meister> (1260?~1327)의 사상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 길희성 교수는 서양 중세시대를, 신학과 철학이 조화를 이루며 철학이 영성과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시대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이 다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되었고,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에서도 지성과 영성은 이질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서구 신학의 비극이며 현대 서구 사상이 겪고 있는 영적 빈곤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엑카르트는 인간 영혼과 하느님의 일치를 추구한 신비주의자로, 인간이 인격적 하느님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위험성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의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에 대한 집착에서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교묘한 작용을 간파하며,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체의 경건하고 선한 행위에서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심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위해 신을 놓아버린다.”고 하였으며,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신의 역사 (A History of God)>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 왔다.”

흔히 기독교는 인격신 개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엑카르트는 그 개념을 돌파한다. 그는 하느님을 만물 안에서 만물을 움직이는 동력이며 만물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인력과도 같다고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는 창조주 하느님, 즉 삼위일체 내의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궁극적이고 원초적인 신의 근저, 즉 신성 혹은 ‘하느님 너머의 하느님’(God beyond God)이다.

엑카르트는 신과 신성을 구분한다. 양자는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신성은 모든 변화를 초월하는 실재 그 자체인 반면, 신은 피조물들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해체되는’, 말하자면 ‘상대적’ 존재이며, 신은 활동을 하지만 신성은 아무런 활동도 없는 고적한 실재라는 것이다. 이 신성의 세계는 삼위일체적 구도를 초월하는 더 깊은 세계이다.

이런 엑카르트의 사상은 당시 가톨릭 교리의 중심을 흔드는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조금 지나 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당시 교황 요한 22세가 공표한 발표문에는 엑카르트가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알고자 했으며 신중하지 못했고 신앙의 원칙을 어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신은 존재라기 보다는 지성이다.”


7. <일세기 교회> 박태식 지음. 생활성서 펴냄.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 계시의 책이므로 ‘기록된 그대로’ 읽으면 되었지, 무슨 비평적 해석이니 전승사 연구니 하는 인간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확신’은 일명 ‘계시종교’라고 하는 유일신 종교 삼형제(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자들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자신의 삶을 평안하고 안정된 삶으로 인도하는데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계시종교인들은 자기 신념체계를 절대화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과 대화하기 어렵고, 결국 상대방의 신념체계를 부정하기 쉬우며, 이 신념체계들이 어느 시점에 동일 공간에서 만나게 되면 치열한 전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런 식의 갈등상을 부시와 빈 라덴, 혹은 부시 일당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대별되는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진정 자기가 하는 일을 ‘신의 뜻’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확신과는 달리, 그들의 신은 그들처럼 편협하지 않으며, 그들은 하느님 대신 자기 신념체계를 절대화하고 박제화하여 믿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려면, 기존의 기독교인들은 한가지 전제를 잠시 유보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 계시의 책이다.”라는 전제에 대해 “정말 그럴까?”하고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성서가 어떤 책이며, 어떻게 쓰여졌는지, 또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안내해 주는 좋은 책을 최소한 몇 권은 읽어보아야 한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로 안내해주는 매우 훌륭한 책들 가운데 하나다. 지은이가 우리 한국의 성공회 성직자이며, 매우 쉽고 명쾌하게 글을 썼으므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량도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간편하게 쓰여진 책이지만 기독교회가 태동하고 성장하게 된 배경과 신약성서가 쓰여진 동인을 일깨워주는 좋은 책이다.

책의 겉표지에는, 저자의 머리말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2천년 전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 갓 탄생한 그리스도 교회는 세력 과시는커녕 어떻게 해서든지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세기 교회는 아직 세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울퉁불퉁한 그 모습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흘러나온 원천인 일세기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우리의 가슴을 절로 요동치게 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정말 재미있고 스릴있게 읽은 부분은, 예수님의 문하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 부분이다. 바울학파와 베드로학파, 그리고 요한학파 사이의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전투(?) 흔적이 지금도 성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재미있다.

신약성서의 주요사상은, 결국 주도권을 거머쥔 바울학파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주축으로 하는 바울 서신의 중심사상인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얻음) 사상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동인이 된 것이다. 거기에 요한학파(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사상과 베드로학파(야고보서, 베드로서 등)의 사상이 세 축을 이룬 채 균형을 이루며 신약성서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바울학파가 아닌, 다른 학파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엉뚱한 상상을 한번 해 본다. 만약 베드로학파가 주도권을 쥐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교회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유대교의 주류로 부상하거나 아니면 정통 유대교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요한학파가 실권을 쥐었다면, 초현실적인 종교가 되어 기독교의 크나큰 장점인 ‘역사성’ ‘사회성’은 상당히 후퇴했겠지만, 오늘날 바울이 세운 엄격한 교리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롭고 유연한 종교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알지 못하고는 성서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읽기는 읽어도 우리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교리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진 ‘사망의 언어’(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하지만)로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망의 말씀이 오늘날 부시를 낳고 네오콘을 낳아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성서가 쓰여진 바로 그 시대, 서기 1세기의 상황과 교회의 실존을 (비록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파악한 부분까지는) 어느 정도 진실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 박태식 교수는 서강대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정양모 신부에게서, 그리고 독일에서는 G.스트레케 교수에게서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받았다.


8. <보살예수> 길희성 지음. 현암사 펴냄.

서강대 종교학과 길희성 명예교수가 지난 2004년 봄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일요신학강좌’에서 강의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 만남을 시도한 비교종교학 서적으로,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발칙하고 불경스런 책으로 보일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학자로서 불교에 대한 깊은 학문적 연구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타가 인정(근본주의자 제외)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저자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념체계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신의 유일한 궁극계시자이며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로 고백된 예수를, 중생 구제를 위해 성불을 마다한 대승불교의 보살에 비유함으로써, 기독교의 절대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상대적인 자리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 즉 예수가 수많은 보살 중의 하나가 되는 기독교의 상대화를 받아들여야 기독교가 복음의 원형을 되찾을 수 있고, 이웃종교와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길벗이 될 수 있으며, 인류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며 공헌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런 발칙한(?) 강의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종교상황에 놓인 현대 사회에서, 종교인이 자기 종교에만 몰입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불교와 같은 깨달음의 종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절대신념체계로 무장한 종교, 특히 유일신 삼형제(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웃종교를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 사회에서 많은 갈등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현대 비교종교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막스 쉘러의 말처럼, “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악행’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선으로 착각하여 양심의 가책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무지’다. 지금은 조금 뜸해졌지만, 미국에서 창궐한 네오콘 (미국의 부시 정권을 창출한 개신교 신근본주의자들)의 행태가 바로 그러하며, 그 근본주의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은 한국 주류 개신교의 행태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길희성 교수의 <보살예수>는 참으로 시기적절한 때에 출간되었다고 생각되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읽어보도록 강력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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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 (82.126.225.240)
2007-01-21 09:40:33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9장 13절 말씀 -
리플달기
6 11
진실 (68.149.9.78)
2007-01-19 04:21:30
류상태 목사(?) 하나님 앞에 솔직하세요
결론적ㅇ로 예수 믿지 않고 다른 종교믿어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나의 사상이다'라고 선포하고 그리고 예수 믿어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활동하세요. 묻 사람을 속이지 말고...
리플달기
7 11
운영자 (211.196.105.229)
2007-01-17 17:52:54
이해를 돕기위해 최근의 뉴스파워(http://newspower.co.kr/) 인터뷰를 전재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대광고 강의석 사건>류상태 전 교목 인터뷰
“한국교회, 복음의 원형 회복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범진/백현모 poemgene@ssu.ac.kr



2004년 10월의 어느 날, 대광고와 강의석 군 사이에서 벌어진 학내 종교자유 문제는 어느 덧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로 대두되었다. 학교의 강제적인 예배참여에 반기를 든 강의석군과 학교 사이에서 중재(?)를 하던 당시의 류상태 교목실장은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에 동의할 수 없음과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목사직을 반납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종교다원주의자임을 고백해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흔히 <대광고 강의석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때로부터 약 3년이 지난 오늘 날, 사립학교법 재개정과 관련된 논쟁과 관련하여 <대광고 강의석 사건>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쪽에서는 “그 사건을 거울삼아 반드시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저쪽에서는 “그 사건을 교훈삼아 기독교사학이 이번기회에 반성하고 개혁해야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에서 봐도 <대광고 강의석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그 중요한 담론의 중앙에 서 있는 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을 직접 만나는 일은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대광고 강의석 사건으로 종교다원주의자임을 고백하고 목사직을 반납한 류상태 선생

그러나 <대광고 강의석 사건>이 후, 약 3년여에 걸쳐 ‘기독교 의식 개혁운동’을 하며 그가 써낸 책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2005)』와 지금도 쏟아지고 있는 다수의 칼럼들은 한국교회를 향하고 있다. 과연 그의 칼럼들이 이쪽의 말처럼 ‘실체가 없는 허상을 향한 단순한 분노와 독설’인가?

아니면 저쪽의 말처럼 ‘예언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말기 진단을 내린 것처럼, 암세포 제거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더욱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류상태 전 교목실장은 “기독교 문제의 중심에는 ‘독선적인 교리’가 있다. 그리고 그 독선적인 교리를 이용해서 목사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오늘날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재료가 된다.”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틀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전제 없이’ 모든 인류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딸 아들로 선포한 파격적인 대자유의 선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기독교의식개혁운동’에서 말하는 복음의 원형에 대해서 밝혔다.

또한 전투적이고 자극적인 글과 관련해서는 “분노를 동력으로 쓰는 것은 나와 가정을 위해서 앞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시기가 있는 것이다. 어떤 단계가 있는 건데 곪았으면 칼로 째야 되는 단계가 있고, 곪았으면 짜내야 하고, 다 짜냈으면 약을 바르고 부드럽게 싸매줘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고름이 깊게 베어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극단적인 표현도 막 쓴다. ‘성경을 찢자’라던가,‘예수님 죽어주십시오’라는 표현의 글”을 쓴다고 밝히고 “이런 표현을 써야지만 저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듣기라도 하더라.”고 극단적이고 전투적인 문체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은 이러한 방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적절한 시기가 오면 약을 바르고 보듬어 줄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립학교법과 관련된 보수교단의 반응에 대해서는 ‘강제적인 선교 방식’을 고수하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밝혔다. “강제가 아니라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을 때, 그 학생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듣고 그 학생들이 신앙을 갖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이 소중한 것이다.”며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학생들이 갖게 되는 방식은 역효과이고 이런 방식은 이제 안 통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한 타종교에 비해서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현실성, 역사성, 개혁성, 사회성”이라며 “이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에서 구현이 된 적이 있었고, 세계가 주목을 한 아주 뛰어난 한국적인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라고 생각을 한다”며 이러한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비판 대상이 되는 보수교단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는 “조직과 열정이라는 장졈은 무시할 수 없다며 ‘그 열정이 바른 믿음위에만 선다면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할 뿐만 아니라, 선교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한국교회 예수를 배반하다>라는 책의 가제가 ‘이제 저를 목사라고 부르지 마세요’ 라고 알고 있다. 아무래도 목사직 반납에 따른 상징적인 제목인 것 같은데, 약 2년이 지난 지금 가장 많이 듣고 있는 호칭은 무엇인지?
▲ 지금도 여전히 목사라는 호칭을 가장 많이 듣는 것 같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도 있고, 우리교회(새길교회)에서는 형제님이라고 많이 부른다. 우리 교회에서는 원래 원칙적으로 형제 자매로 부르기로 했었고, 공식적으로 직분이 없으니까 다 형제 자매로 부르고 있다.

▼ 대한예수교(통합) 목사 안수를 받고, <강의석 사건>으로 인해서 다시 반납을 했다. 그 때의 목사 안수가 교단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그것에 따라서 스스로의 정체성이 달라질 것 같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라는 섬김의 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현재 목사를 전문 성직자로 인정하는 일을 교단이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나님이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해서 성직자에게만 특정한 직분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개신교 전통에도 맞지 않는다.

▼ 어떤 부분에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 개신교는 만인 사제설이고, 만약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직자라면 모두가 다 성직자이지, 목사가 ‘평신도하고 구별되는 성직자’라고 교단에서 주고 있는데, 그것을 교단에서 인정하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인정해서 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한다.

목사직은 교단이 주는 것인데, 다만 목사직을 반납을 했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굳이 그거를 직분이라고 한다면, 나는 ‘종놈직분’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섬김의 직분 그것은 반납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평생을 걸쳐서 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별로 실천을 못한다는 것이다.(웃음)

그것은 내가 반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납하지도 않았고 반납할 의사도 없지만, 그것을 내가 과하게 주장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정말 그것을 지키느냐, 하나님 앞에서 해나가느냐 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기독교 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다. '복음의 원형'을 찾는 운동이라고 알고 있다. 정확하게 어떤 것인가?
▲ 기독교 의식 개혁운동은 그냥 기독교 개혁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의식’개혁 운동이라는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복음의 원형을 찾는 것이다. 기독교 개혁은 반드시 의식개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체제를 개혁한다. 윤리를 개혁한다.’ 이것 가지고는 개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 왜 체제와 윤리 개혁만으로는 안되는 것인가?
▲ 왜냐하면 기독교 문제의 중심에는 ‘독선적인 교리’가 있다. 그리고 그 독선적인 교리를 이용해서 목사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오늘날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재료가 된다. 그 독선적인 교리가 문제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복음의 원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의식이 개혁되어야 나는 비로소 기독교가 개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 의식개혁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 개혁을 하려면 복음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 독선적인 교리와 다르다는 복음의 원형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흔히 말하는 그 ‘복음’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 내가 말하는 복음의 원형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한국교회가 말하는 복음은 상당히 교리적이고 그것도 배타적인 교리다. 말하자면 ‘예수님만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라고 말하는 생각들.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게 한국 교회는 복음의 원형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은 복음이 원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복음의 원형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틀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전제 없이’ 모든 인류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딸 아들로 선포한 파격적인 대자유의 선언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 그렇다면 그 복음의 원형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이 개혁된다면 어떤 체제나 윤리도 자연스럽게 개혁되고, 선교의 방식도 변한다고 보는지?
▲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복음의 원형 자체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님 가르쳐 주신 것이 그거다. “너희는 하늘 아버지의 딸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었고, 이렇게 되면 인권이 그냥 꽃피고 살아나는 것이다.

▼ 오늘 날 교회가 개혁 되어야 할, 복음의 원형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 성직자와 평신도 이러한 구분 자체를 짓고, 목사가 평신도를 지배하는 구조라든가 이런 것이 용납될 수가 없다. 정말 복음의 정신이 살아난다면 목사는 섬기는 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평신도도 완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딸 아들이라는 어떤 영적인 자부심. 인권 의식이 깨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처럼 존귀하게 보고, 인권이 살아나게 되고 차별이 없어지고. 이런 것들이 교회에서부터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평신도, 목사라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복음의 원형에서 벗어난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한국 교회의 장점은 ‘주류 개신교’하고 ‘한국 교회의 흐름’에서의 장점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흐름에서의 장점이라고 본다면, 과거에 70 80년대에 볼 수 있었던 민중신학 운동. 이것을 나는 장점으로 보고 싶다. 이것이 가장 기독교 적이라고 본다. 미래로 도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영성, 초월성 이것이 물론 종교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사회성, 역사성이다. 역사에 한가운데에 뛰어드는 이거는 다른 종교가 가지고 있지 않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점이고 기독교의 큰 매력이고 독특성이다.

이런 것이 구현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우리 한국에서 구현이 된 적이 있었고, 세계가 주목을 한 아주 뛰어난 한국적인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 열매와 꽃 그것이 문익환 목사님등이 하신 작업이고 그것이 결국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가져 온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이라든가 이런 분들 다 기독교인들 아닌가. 그것이 한국교회가 가졌던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분노를 동력으로 쓰는 것은 나와 가정을 위해서 앞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 그러한 모습을 지금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나?
▲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내가 볼 때는 그 요람이 어떻게 보면 한신대였는데, 한신대는 지금은 그 얼이 많이 약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이러한 상태에서 ‘지금 한국 교회의 장점이 무엇이냐?’하면 나로서는 찾기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열정’과 ‘열심’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장점으로만 말하기는 힘들다. 열정이나 열심이 바른 깨달음 위에 놓여 져야 이 열정이 자기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열매를 맺을텐데 바른 깨달음이 없이 열정을 가질 땐, 이 열정이 교회와 자기 자신을 헤칠 수 가 있다. 열정은 참 좋은데 그 열정이 바른 믿음위에 선 열정이냐 하는 그런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 그 열정이 한국교회의 가능성이라고 봐도 되는 것인가?
▲ 그렇다. 그러니깐 그 가능성이 바른 믿음 위에 선다면, 그것이 정말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대형교회를 포함 한 주류 보수 교단 교회들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장점을 찾기가 참 힘들다.(웃음) 조직이 참 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적인 접근을 참 잘하는 것 같다. 어떤 젊은이들을 흡인하는 요소 중에 하나가 CCM, 문화, 이런 것 자체는 내가 볼 때는 참 매력적이다. 예를 들면, 대중가요와 대중문화등은 인생의 허무, 별 의미 없는 사랑 타령이 많은데 CCM에서 불리어지는 사랑은 상당히 아주 적극적이고 인류애적인 그런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은 경우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세련된 음악들과 결합되어서 젊은이한테 전파되고 공유된다고 하면 젊은이들의 문화나 정신을 밝게 하는 큰 공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큰 공헌’이라 함은 선교차원에서도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 CCM이 음도 좋고 음악 자체는 좋은데, 때로는 교리적인 독선을 많이 뿜고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어떤 교리적인 요소보다는 다른 문화나 다른 신념체계에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충분히 아름다움을 공유 할 수 있는, 어떤 공유 가치를 가사나 이런 곳에 담아서 일반 사람들이 공감 하고 ‘기독인들 참 멋있구나.’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표현이나 가치가 너무나 아름답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책에 보면 보수교단에 전도사로 있을 때, 진보 측에서 주로 보여 지는 사회성을 지닌 목회자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 내가 영락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가, 83년 84년 두해였다.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를 하신 뒤에 박조준 목사님이 뒤를 이었을 때였다. 그런데 박조준 목사님은 여러 가지를 갖추었었다. 학력도 있고, 설교스타일이나 그런 것이 한경직 목사님하고 꽤 닮았다. 그러나 박조준 목사님은 어떤 사회적인 불의라든가 이런 것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는 그런 분이었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이 아주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주로 수요예배라던가 이럴 때 그 정권에 대해서 아주 강한 비판을 했다. 그때가 영락교회가 사람 제일 많을 때(거의 5만/정도), 나는 그런 설교가 충격적이었다. 그러한 메시지를 담아서 많이 신이 나고, 겁도 났다. ‘아 그래도 영락교회 목사니깐 이게 통하는 구나. 5만 성도들이 받쳐주니깐 저 전두환씨도 함부로 못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 한국교계에 존경하는 목사님은?
▲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많다. 보수쪽에서는 한경직 목사님 존경하고, 영락교회 전에 계셨던 임영수 목사님도 존경한다. 이분들은 보수적인 입장에서 존경을 한다. 진보쪽에서는 유경재 목사님이라던가,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 홍근수 목사님, 이런분들을 존경한다. 보수적이지만 한경직 목사님이나 임영수 목사님은 정말 신앙대로 사시는 분들이다. 자기 믿음을 그대로 삶으로 받아내는 그런 분들이라는 점에서 존경을 한다. 유경재, 문익환, 홍근수 목사님도 믿음과 삶이 일치하면서도 나하고는 신학적 방향이 많이 같기 때문에 존경을 한다.

▼ 현재 다니고 있는 새길교회는 평신도 중심의 초교파 교회라고 알고 있다. 어떤 교회인가?
▲ 평신도 교회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사실 평신도라는 용어도 문제가 있어서 적절한 말이 있으면 바꿨으면 좋겠다. 이 단어 자체가 귀신도가 있다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귀한신도있고, 평범한 신도 있고 편 가르기 하는 것이다.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뭐라고 적절한 용어를 찾아야 할지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 많이 쓰여 지는 표현이니까 일단 그대로 쓰면, 평신도가 중심이 된 교회다.

우리도 목사님들이 있기는 있다.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도 계시고, 홍근수 목사님도 지금 우리교회 나오신다. 그러나 우리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모두 ‘형제, 자매’다. 개인적으로 부를 때는 ‘목사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는데, 설교 하실 때는 ‘형제님’이라고 부른다. 외부에서 오신 목사님들은 ‘목사’라고 부른다.

우리교회의 큰 특징이라면, 헌금의 60%를 외부에 사용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새길교회는 삼무정신을 이야기 한다. 교단이 없고, 교회직제가 없고, 교회건물이 없는 것이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없고 그냥 모두 다 형제, 자매이다.

▼ 직제가 없다고 했는데 새길교회에는 신학위원, 운영위원장, 사무국장 등이 있다. 이것이 다른 교회의 직제와 차이점이 있다면?
▲ 직제와 차이점은 장로라던가, 권사, 이런 직제는 개인에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장로가 되면 계속 장로가 되는 것이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는 그 개인에 대한 항존직분이다.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가는 것이다. 은퇴를 해도 앞에 ‘은퇴’자를 붙여서 은퇴장로, 은퇴권사다. 이것이 항존직, 개인을 따라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신학위원, 운영위원장은 직무에 따른 구분이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사무국장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직제가 아니고, 우리교회는 사무국장이 없다. 이것은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 직무다.

▼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은 무엇인가?
▲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은 물론 새길교회가 낳은 산하기관이다. 사무국장은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의 사무국장이다. 새길교회에는 신학위원이라고는 있는데, 이분들이 말하자면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로서 지도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선출을 하거나, 항존직은 아니다. 신학위원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그래도 직제, 개인에 대한 것과 비슷하다면 신학위원이라고 할 수 있다.

▼ 새길교회 운영위원(회)장은 어떤 일을 하는가?
▲ 운영위원장은 우리교회는 운영위원회가 있다. 집행기관이다. 이분이 교회를 대표한다. 운영위원회가 한30명정도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교회의 모든 일들을 논의한다. 물론 최고 의결기관은 공동의회지만, 공동의회가 매 사건마다 다루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나. 실질적으로는 일반교회의 당회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운영위원회가 있다. 해마다 10명씩 뽑아 3년 임기로 30명 정도가 된다. 3년지나면 전부 그만둔다. 운영위원장도 1년 단위로 바뀐다. 연임을 할 수 있어서 연임을 하면 2년, 안하면 1년 운영위원장이 있다. 교회로 따지자면 전도부장, 재정부장식으로 말할수 있겠다. 그러나 장로나 집사 등의 직제와는 다른 것이다.

▼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 사무국장 겸 신학연구원을 맡고 있다.

▼ 신학연구위원이면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 신학을 연구하는 것인가?
▲ 연구원은 자기가 공부를 여기에서 한다기보다,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이곳에 와서 새길에서 해야 될 사업이 어떤 것이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원은 신학을 한 사람들, 전공한 사람들 가운데 뽑는다. 나하고 다른 한분이 있다. 그분은 이대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했고,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분이다. 그 분이 새길의 방향이라던지 새길에서 해야 될 구체적인 사업들 이런 것. 새길공동체 전반적인 것이고, 교회일도 같이 연구를 한다.

▼ 새길공동체란?
▲ 새길교회와 새길 기독사회 문화원이 자매단체기 때문이다. 묶어서 새길 공동체라고 한다. 새길 공동체의 전반의 방향과 발전을 위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신학연구원이다. 신학연구원, 사무국장, 간사, 등 3 사람의 유급직원이 있다.
신학위원은 쉽게 말해서 어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로 보면 장로지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 당회도 없고, 어떻게 보면 명예직으로 조언의 역할, 자문위원 비슷한 분들이다.

▼ 새길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떤가?
▲ 분위기 자체는 한마디로 자유스럽다. 모든 형식으로부터 자유스럽고, 다만 ‘예전, 예배’만큼은 매우 전통적이다. 묵도로 시작을 하고, 찬송, 기도, 성가대 찬양은 전통적이다. 의외로 신앙적으로는 보수적인 분들이 많다. 우리가 징을 치기도 하고 국악 찬양을 도입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것들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우리교회가 아주 진보적인 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분들도 많이 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의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보수적인데 그것이 싫어서 오신 분들이 있고, 신앙의 색깔에 있어서는 범위가 넓다.

▼ 사립학교법과 관련하여 <대광고(강의석) 사건>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그 사건을 거울삼아 반드시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건을 교훈삼아 기독교사학이 이번기회에 반성하고 개혁해야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에서 봐도 <대광고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 입장에서 사립학교법관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대광고 사건을 봐라’. 그러니까 ‘보수적으로 가야된다’. 그러니까 ‘내려놔야한다’라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나도 똑같이 얘기하고 싶다.
‘이제는 전통적인 방식만 고집을 하고, 강제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안 된다’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일단, 대광고 사건으로 봤을 때, 누가 학교의 강제적인 선교방법에 편을 들던가? 기독교 말고 어느 누가 기독교 학교의 편을 들던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기독교 학교 측에 있는 분들이 그런 ‘강제적인 방식으로 선교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 안타까운 것이다. 선교를 하려면 그렇게 강제적인 방법으로 하면 안 된다. 그것이 70년대 80년대까지는 통했다. 그때는 억지로라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제로 한다고 해서 끌려와서 예수님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은 ‘기독교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느냐’고 비웃는다.

▼ 현재 사학법 재개정 관련 갈등과 더불어 기독교 사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강제적으로 하면 목사도 교목들도 편하다. 다 불러주니까 채워주니까 적당히 해도 굴러간다. 이것은 ‘제도’때문에 ‘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만약에 틀을 바꿔서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사학의 문도 열어두면 당장은 골치 아플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사가 7명같은 경우 2명의 외부 이사가 들어와서 이야기하면 골치 아플 것이다.

그러나 조율과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 합리적인 과정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결정권이 없다. 그 ‘두 사람 나중에 막 난리를 쳐서 관선이사를 들어오게 한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자동차가 사람을 헤치니 만들지 말자는 말과 같다. 그 두 사람은 엄선된 사람이다. 각 학교의 교사, 학부모, 여러 인사 들이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 4명이 있으면 ‘4명중에서 2명 뽑아 주십시오.’하면 재단이 판단하여 그중에 덜 과격하거나 마음에 드는 두 사람 뽑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안한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이다.

▼ 강제적인 채플(예배) 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학생에게 예배 선택권을 준다면 강제적인 제도 안에서 나왔던 인원의 10분의 1도 안 나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을 때, 그 학생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듣고 그 학생들이 신앙을 갖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이 소중한 것이다.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학생들이 갖게 되는 방식은 역효과이고 이런 방식은 이제 안 통한다. 정말 학교가 선교를 하고 싶다면, 이제 내용으로 승부해야 한다. 성경에도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는 향기’다. 그래서 사람들이 향기를 맡고 오게 해야지, 자꾸 그 악취를 풍기면, 그 악취를 맡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억지로 잡아두는 것이 선교가 되겠는가에 대해서 그분들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 평생을 ‘강제적인 선교’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아 온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내가 볼 때는 목사님들은 우선 내가 알고 있기에도 몇 명은, 머리 깎은 사람 중 내 친구도 있지만, 분명히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조직에 속하면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머리 깎으신 분들이 전부 통합측 목사님인데. 목사정도 되면 이제는 ‘그게 전부다’라고 생각해서 두려움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다고 본다. 정말 밥통을 내려놓기 힘들어서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래서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신앙만을 듣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교우들이 그런 분들이 많다. 목사들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기는 있다. 일단 그분들의 신앙은 존중해주고 싶다. 계속 대화해보고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 옳은지 객관적 판단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목사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 그렇다. 문제는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 목사들이 제일 문제다. 속된말로 약간만 비겁해지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자기는 그렇다고 치고, 그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목사들에게 얘기를 듣고 정직하지 못한 교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세뇌를 당하는 교우들은 어떻게 할거냐는 말이다. 이것은 완전히 장사하는 것 밖에 안된다. 종교장사하는 셈이다.

▼ 보수교단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적인 교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성도들과 끊임없이 고민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분들도 예수를 배반하는 것인가?
▲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쫓겨날 정도까지 얘기하지는 않더라도,(나도 대광고 때 이야기를 못했으니까)조금 조금씩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주기 위한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나마도 안한다고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 임영수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 홍근수 목사님이다.

▼ 대학 때 철학과에서 비교종교학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다. 기독교가 타종교에 비해서 특별히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기독교에는 타종교가 갖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이 확실히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것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다. 복음의 원형에는 그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현실성, 역사성, 개혁성, 사회성이다. 보통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초월성과 영성이다. 이것은 종교의 굉장히 아름다운 가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 중요하지, 배고프다고 빵을 달라는 사람에게 기도하라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은 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떡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떡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일 수 있다. 대게 다른 종교는 영성과 초월성을 추구하는데. 그런데 기독교는 바로 이 ‘떡’을 외면하지 않는다.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역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는 그 천국이잖아요. 너희들이 살고 있는 “바로 여기”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는 이 땅, 현실이 기독교의 매력이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이렇게 개혁적이고 매력적인 종교가 아직 없다.

▼ 그렇다면 타종교에 비해서 특별히 아름다운 부분은 예수님께서 전파한 복음인가?
▲ 제도적인 기독교에 대해서 절망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많지만,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의 원형. 예수님은 아무도 부정을 못한다. (안티들은 부정을 하지만) 신은 죽었다고 하는 니체건 누구건 예수님은 아무도 부정을 못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 한명뿐이었다’고 얘기할 정도니까. 이런 것이 깊이 들어갔을 때, 예수님과 복음의 원형이 딱 만났을 때, ‘아! 바로 이거 였구나.’ 느끼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예수를 배반했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계속 싸워오면서 그런 사람들이 이단으로 배척을 당하고, 중세시대에 마녀사냥, 종교재판을 당하고. 그런식으로 가면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나도 뒤늦게나마 그렇다 싶어서 선배님들 따라하다가 요만큼이라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 지금까지 써 온 칼럼들이 전투적이다. 한 칼럼에서 밝히기를 분노를 동력으로 글을 쓴다고 했는데, 그 분노의 대상은 누구인가?
▲ 나는 분노를 동력으로 글을 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분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분노하는 대상은 ‘허깨비’다. 만약 그 ‘허깨비’의 이름을 데라고 한다면 나는 허깨비의 이름을 데겠다. 그 이름은 바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다. 이게 허깨비가 돼서 사람을 호리고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원효대사의 말 중에 ‘환호환 탄환사’라는 말이 있다. 마술사가 허깨비 호랑이를 만들어냈는데, 그 호랑이가 그 마술사를 집어 삼켰다는 말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혹은 사람이. 그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기준을 만들고, 혹은 설명하기 위해서, 또는 조직을 위해서, 수단으로서 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리가 사람을 움직이고 휘어잡고 헤치기도 하고 갈등도 심는다. 이제는 괴물이 되었다고 나는 표현한다. 이 허깨비를 나는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 분노한다면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허깨비에 대한 분노다.

▼ 극단적인 표현이나 예시도 종종 등장하는 것 같다.
▲ 분노를 동력으로 쓰는 것은 나와 가정을 위해서 앞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시기가 있는 것이다. 계속 공격만하면 저쪽에서 보면 공격만하는 놈팽이일 뿐이다 라고 하지 않겠나. 어떤 단계가 있는 건데 곪았으면 칼로 째야 되는 단계가 있고, 곪았으면 짜내야 하고, 다 짜냈으면 약을 바르고 부드럽게 싸매줘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고름이 깊게 베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짜내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표현도 막 쓴다. “성경을 찢자”라던같예수님 죽어주십시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런 표현을 써야지만 저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듣기라도 하더라. 그렇지 않고 좋은 부드러운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듣지도 않는다.

마치 누군가 주식 투자를 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신중하게 위험할 수도 있고, 잘하면 돈을 벌수 도 있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투기가 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하십시오. 라고 이야기 했을 때, 사실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은 어떤 얘기에 넘어가냐면 이거 사십쇼. 틀림없이 이것 돈 법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거기 확 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

▼ 보수 기독교계가 먼저 그러한 극단적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 안타깝게도. 지금 기독교에서 하는 일이 그런(극단적인)방식이 통했던 것이다. “당신 예수 믿어야 살아. 예수 안 믿으면 죽어.” 이것 무서워서 교회 못 떠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생각이 들어도 목사들은 “당신 시험에 드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 떨어지는 것이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 이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한다. 만약에 판단을 해서 교회를 떠났는데 내 판단이 옳다면 이 땅에서 자기 판단을 가지고 사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만약 자기 판단이 틀려서 교회를 떠났을 때 지옥을 간다고 생각을 한다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이 무서움과 두려움, 그리고 자기가 얻는 자유를 놓고 저울질하기에는 보통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속속들이 알기 전에는 어렵다. 보통사람들에게는 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다른 쪽의 이야기들은 ‘듣지마라, 듣지마라’ 하면 그 안에서 쌓여서 안 듣는다.

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무리다. 이런 방식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하고 고백적으로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했을 때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그건 얘 생각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 예를들면?
▲ 보수교단이 믿는 방식대로,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 이런 예수라면 ‘그 예수 죽여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수 안 믿는 다는 이유로 다 지옥 보낸다’고 하는 ‘그런 예수가 살아있다’라고 한다면 그는 폭군이다. 그래서 그런 예수를 죽여라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듣는다. 진보 쪽 목사들이 “그렇지 않다”라고 점잖게 쓴 글들 사람들이 전혀 읽지 않는다.

이쪽에 공부 훨씬 더 많이 하고 똑똑하신 분들 많이 있다. 나는 전문 신학자가 아니다. 박사과정도 안했고, 석사과정도 안했고 석사과정이라고 해봤자 목회학 석사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학생들 가르치면서 책을 놓지는 않았다. 내가 목사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내 과정을 보면 아마추어적이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니까 보이는 이 사실를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오로지 연구에 몰두한 신학자들이 이것을 모를 리가 있겠나? 몰라서 얘기 안하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 아는데 자기 밥통 뺏기지 않을 정도로 얘기하고, 교단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얘기하고, 돌려서 얘기하고, 추상적으로 얘기하니까 전달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욕하고 불편해 하면서 어쨌든 다 듣는다. 그래서 나는 이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방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 평소에 비판하는 한국교회와 예수를 배반한 목회자들의 실체도 ‘허깨비’인가?
▲ 독선적인 교리 자체가 허깨비다.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밥벌이를 위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거는 아닌데 ‘그것 아니다’라고 말하면 교인들이 많이 안 올수 있지 않겠나. 자유로워지니까. ‘교회 안다녀도 내가 예수님하고 데이트하면서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서, 진정한 경천애인,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 사랑하는 삶을 살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면 교회는 나중에 문 닫을 수가 있고, 목사가 밥 먹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교회 떠나면 안돼. 교회떠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고. 교회떠나서 당신이 잘사는 것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나중에 지옥 갈 것인데, 영원한 고통인데..’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붙잡아놓을 수가 있지 않나. 잘 모르는 사람 중에 못사는 사람에게 ‘여기 오면 나중에 영원히 잘 살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면 혹 할 수 있다. 깨이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부흥하는 것이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 전부다 보수적이다. 그런 교회가 부흥한다.

▼ 그렇게 부흥하는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교회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 공경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꼭 교회 나오려고 하겠나? 일부 교회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오니까 나오겠지만, 집단세뇌가 되어 거대한 무리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교인들이 나오지 않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에 교리와 돈이 뭉쳐 다니는 것이다. 이 교리를 강하게 붙들고 있을수록 돈이 따라온다. 그리고 이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주고, 맡겨주면, 사람들이 자유로우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돈을 투자할 것 아닌가. 자기 가정이나 이웃, 다른 더 바람직한 일을 하는 자선단체에 뜻을 두고 도울 수도 있다.교회에 맹목적으로 집중하지 않는다. 교회라는 조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손해다. 자기 조직만을 생각하면. 그래서 약간 비겁해져서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 목사들이 생계문제로 인하여 사회성이 결여되고 진실 앞에 작아지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역사적으로 삼일운동 이후를 봐도 그렇고). 일부 신학자들은 앞으로 목사들은 ‘또 다른 직업을 갖고, 사역을 해야 한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대광고에 계속 있었다. 대안이 있었다면 나 스스로 먼저 일찍 나왔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갖고 있고, 봉사로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여러 가지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스스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면에서 평신도라고 하는 일반교우들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월급을 전혀 안주고 그냥 봉사만하라라고 했을 때, 기존 목사들이 집중하는 것처럼 어느 누가 교회에 집중하지 못하는 어려운 현실이 있다.

▼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새길교회도 어려운 현실인가?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 새길교회도 마찬가지다. 월급을 주면서 여기에 전념해라라고 했을 때 전념할 수 있지,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전념하기는 어렵다. 새길교회도 이런 어려움에 늘 봉착을 하는데 그래서 올해 3월달에 교회에서 세미나 발표를 하는데 그때 그러한 것들을 자세히 제시할 것이다. ‘목사위임제’나 이런 것들은 폐지해야 한다. 원로목사 제도 폐지하고, 목사들도 지금 다 연금을 들지 않는가. 교목들은 사립학교의 교직원으로서 사학연금제단에 가입하고. 그러니까 그런 연금이 있으니까 원로목사제도도 없애고, 담임목사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위임을 시키지 말고. 위임은 평생보장 하는 거지 않나. 위임받는 문제 때문에 싸움도 많이 일어나고, 위임받고 나서 자세가 달라지는 문제도 있다.

교회에서는 어쨌든 목사가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되어있는데, 그러면은 어느 정도는 견제장치가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2년이나 3년 계약직으로 하면 참 좋겠다. 지금 부목사들은 1년 계약제로 되어있는데, 그냥 담임목사 마음대로다. 담임목사가 보내고 싶으면 1년 만에 보내도 되고 아니면 계속 있고는 하는데, 담임목사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아예 총회법으로 정했으면 좋겠다. 2년이나 3년. 3년 되면 공동의회에서 당회나 제직회가 아니라, 공동의회에서 전체 교우들이 참여한 가운데에 3분의 2이상 지지를 받아야 한다든가. 3분의 2이상 지지를 못 받으면 떠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혹하지만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웬만큼 하면 쫒아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분의2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중간평가로서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계속 할 수 있는 것이고, 안되고 떠나야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교인들과 하나님 눈치 보면서 함부로 못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목회를 하려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청년의 때에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은 좋다. 그런데 특히 목회자의 길을 걷고 싶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버려줬으면 좋겠다. ‘성공적’이라는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이 성공이 ‘하나님 뜻에 맞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목회’를 성공이라고 생각하면 성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적인 목회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수도 많고, 외향을 갖추고 그래서 대접도 받고 월급도 좀 받고, 이런 것을 성공적인 목회로 우리사회가 본다. 그리고 신학생들도 이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 우리사회가 말하는 그 성공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식의 성공적인 목회는 포기해줬으면. 지금생각이 그런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삯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신학대학원이 아니라, 경영대학원이던 다른 곳에 가서 사회로 진출하는 것이 낫겠다.

세속적인 성공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하겠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의 참 정신, 경천애인, 하나님 공경하고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실현하는 그런 목회를 하고 싶다’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런 사람이 목회자의 길을 가야될 것이다.

*이범진/백현모-대학생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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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
운영자 (211.196.105.229)
2007-01-17 17:38:52
당당뉴스는 이단성 글을 제외한 모든 나도기자의 글들을 싣고 있습니다.
샬롬!
당당뉴스는 현재까지는 '세상과 교회의 다리' 역할을 자임히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copy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운영자가 감리교 목사이니까 아무래도 감리교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대안언론으로 서기를 바랍니다.

당당뉴스는 건전하고 진지한 토론의 장으로 '나도기자' 란을 통하여 올려주는 글의 99%를 모두 기사화 하고 있습니다.
당당뉴스에 실린 글들이 당당뉴스 운영자의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음은 물론 입니다. 그러나 이미 당당뉴스를 봐오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주장하는 것은 압니다, 다만 교회의 개혁을 위한 거대 담론의 한부분으로 '류상태님(前 대광고 교목)의 글들을 즐거이 싣고 있습니다. 혹시 독자가 다른 이견이나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반론으로 참가하시면 됩니다.

류상태님은 목사직을 스스로 반납했지만 통합 장로교 출신 목사로써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그의 의견을 귀담아 경청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저 작신도 동의하지 못하는 주장도 일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유로 당당뉴스에 기사로 싣지 못할 정도라고는 전혀 판단하지 않습니다.
암튼 현재 이필완(목사)가 운영자로 편집책임을 맡는 한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당당뉴스는 가까운 시일에 새로운 편집자를 맞이하고 기사의 정체성의 변화 내지는 나도기자의 글을 선택하여 싣는 문제를 몇몇 관심자들과 토론하고 있으며 당당뉴스 사이트의 전면 리뉴얼을 통해서 보다 폭넓게 세상과 교회를 향하여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당당뉴스의 대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대관령에서 이필완

* 현재 당당뉴스는 '나도기자'란을 통해 올려 주는 글들을 편집자가 임의로 취사선택함 없이 99% 대부분 기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부연합니다. 기사의 질이나 내용, 수준을 따지는 일은 전혀(전혀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늘 나도기자의 글을 모두 읽고 판답합니다만 아직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당당뉴스 메인면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고려치 않고 있단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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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
태엽감는새 (152.99.132.14)
2007-01-17 12:03:25
당당뉴스에 묻고 싶습니다. !
개인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른 이야기는 뒤로하고
당당뉴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비록 그것이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믿으시는 분들까지",
글들도 다 수용할수 있을 정도로 마음넓은 매체를 지향하시는 건지
아니면 무엇을 중심으로 당당뉴스가 내걸었던 가치를 이루고자
하시는 건지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밝혀 주시면 저 뿐만 아니라
이 곳에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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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
형래 (211.111.214.148)
2007-01-17 10:47:11
보살예수라...
예수가 수많은 보살 중의 하나가 되는 기독교의 상대화를

허허 헛웃음밖에 안나오네요

당당뉴스의 정체성이 궁금하군요

크리스찬이 아닌 종교학자의 글도 실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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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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