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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서부 대평원에서 느꼈던 백제의 숨결[역사와 만나는 논픽션 가족문화기행] 제녕은 백제의 사비성이 있던 부여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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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4월 28일 (화) 20:02:15
최종편집 : 2009년 04월 30일 (목) 13:41:49 [조회수 : 8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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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이번 중국기행은 일반적인 관광보다는 될 수 있으면 역사적 유물이나 문화 유적들과의 만남을 염두에 둔 기행이었다. 비록 역사와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내와 청소년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역사책, 우리가 들어온 역사적 지식이 결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역사는 배움을 통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비판 의식을 기르며 역사의 원리와 법칙을 올바로 판단하여 세상을 바로 보고 올바로 살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가 배워 오고 알아 온 역사는 왜 우리에게 세상을 바로보고 올바로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 못했을까. 그것은 역사의 변화발전 주체인 우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려고 적극 노력한 위대한 인물이나 지도자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낡고 썩은 지배집단의 경제 수단과 정치권력 도구, 그리고 집단사회를 지배하면서 쌓은 노하우(經驗)를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고 뿐만 아니라 여러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잘못된 사회 체제를 별 문제 없다고 정당화한 결과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환상과 허위의식을 불어넣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 때문이다.

   
▲ 산동성 서부 대평원에 자리잡은 제녕시 중심부의 태백루 광장에서, 이번기행은 일반적인 관광보다는 온 가족이 역사와 만난 짜릿한 가족문화기행 이었다 ⓒ 2009 류기석

지배자의 역사는 자신의 역사관을 가지고 과거사실을 다시 구성하여 만들어진 역사다. 그러기에 이제껏 보고들은 역사는 누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썼는가가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가족들만이라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체험하여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행이 되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이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장성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되면 역사와 문화를 접한 경험을 되살려 자신들의 삶 속에서 역사와 문화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대상이며, 자신들의 삶과 역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다.

산동성 서부 대평원을 가다

2009년 2월 18일 맑은 하늘아래 펼쳐진 중국 산동성 곡부시 현성(縣城)에 자리한 공묘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곧장 버스터미널에 닿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제녕까지는 한 시간 남짓 버스로 이동했다. 제남에서 공자의 고향이라는 곡부(曲阜)까지는 약120km, 곡부에서 제녕까지는 약40km쯤 된다. 제녕은 육상, 수상(운하), 항공 등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고속도로로 북경까지 7시간, 상해까지 7시간, 청도까지 6시간 걸린다.

   
▲ 가족들은 버스를 타고 때론 걸으며, 오래된 회화나무 길옆에 자리한 제녕시박물관을 찾았다 ⓒ 2009 류기석

제녕(지닝濟寧)시에는 약 38개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으며, 옛 부터 발달한 운하 때문에 오랜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다. 제녕의 한나라(漢) 때 지명은 린청현(任城懸) 이었고, 금나라(金) 때는 지저우(濟州) 원나라(元) 때에는 제녕(지닝)이라 불리었다가 지금의 제녕은 1913년에 현(縣)으로 그리고 1948년에 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도시다.

국내에는 산동성 제녕시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 중국현지의 자료를 참고해야만 했다. 제녕은 오래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로, 주요 생산물은 마늘, 화강석, 석탄, 민물고기, 오리, 밀, 옥수수, 벼, 목화와 땅콩 등이 유명하다. 공산품으로는 포도주, 제분, 농기구, 직물, 석탄, 기계, 전력, 방직, 화학, 가죽가공 등이 발달하였으며, 죽기(竹器), 철기, 목기 등 전통수예품도 우수하다. 이외에 기계공업, 의약, 방직, 식품생산기지로서도 발달된 도시다.

   
▲ 제녕박물관 뒤편으로는 작지만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세련미와 기품 있어 보이는 숭각사(崇覺寺)라는 절이 과거로 부터 자리한 듯 보인다 ⓒ 2009 류기석

제녕시는 중국 고대문화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역사상 줄곧 산동성 서남부 일대의 중요한 물자 집산지이자 문화 명인들의 배출지가 되어왔다. 이곳은 중국의 저명한 문학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삼국시대의 공융과 왕찬, 명말청초의 공상임과 가부서가 유명하다고도 하며,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 두보도 오랫동안 제녕에 기거하며 세상에 회자되는 시를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5대 성인인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 모두가 이곳 제녕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제녕은 우리에게는 낮선 땅이지만 계절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하여 사람살기에 알맞다. 북방의 유명한 수향(水鄕) <강북의 작은 소주>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고 한다. 유교문화 관광도시라는 곡부와 추성 외에 안자의 사당, 증자의 사당, 소호릉, 무씨사당 석각, 철산과 강산의 마애 석각, 한나라 비석군이 있으며, 문화재에 지닝철탑(濟寧鐵塔), 동대사(東大寺), 태백루(太白樓) 등이 있어 역사문화 명승지와 자연산수의 완벽한 조화가 독특한 관광자원을 형성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대규모 축제행사를 벌이는데, 곡부의 국제 공자문화제, 양산국제 수호문화제, 국제 연꽃제, 봉산 고묘회 등이 있다. 수호전 108 영웅호걸의 양산박이라 하는 중국 북방 최대의 호수인 미산호는 아시아 최대 규모인 십만 헥타르의 연꽃 자생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석문산, 봉산, 소양호, 독산호, 남양호 등 자연 경관과 인류문화경관들이 즐비한데 필자는 일대가 본래 대륙백제의 부여였고, 마한의 옛 강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제녕의 중심을 알리는 이곳에는 중국의 4대 철탑의 하나인 고철탑과 성루건물이 예사롭지 않게 자리하고 있었다 ⓒ 2009 류기석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누누이 필자는 우리의 역사 강역이 대륙이었다는 인식전환에는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이란 책을 쓰신 이병화 역사연구가의 도움이 컷다라고 밝힌바 있다. 그는 방대한 사서 자료들에 나타난 강역의 근거들을 집대성하여 중국 산동성 제녕시가 대륙백제 말기의 사비성 즉, 부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륙백제에 관한 논의는 국회 국사청문회(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년 진행)가 7인의 강단사학자와 임승국, 안호상, 박시인 교수 3인에 의하여 국회에서 진행되어 단군조선의 개국사실과 백제의 대륙진출, 한사군의 명칭삭제 등 국사교과서의 정정을 이끌어 낸 사실이 있다.

그들이 백제를 규명하는데 있어 증거로 제시한 자료들은 중국의 정사인 "25사"로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송서""양서"......등 명나라의 역사책인 "명사"까지 25개 왕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중국 25사 가운데 "백제전"이라고 하는 기록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사기, 전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다음의 "송서"로 25사중 6번째고, 그 다음에 "양서, 남제서, 북제서, 주서...." 이렇게 해서 "명나라 역사"까지 이것이 중국25사의 체계인 것이다. 또한 대륙백제에 대한 정당성은 경향신문 주최(계간간행) 백제사 특집 심포지움에서 밝힌 사학자들의 논단이 대륙백제의 단초와 근거라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의 백제사 편과 실제 그 당시의 유물과 유적들을 한반도에서는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제녕박물관에 전시된 삼구로 된 철제잔과 복식을 한 토기 등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 2009 류기석

백제의 역사 강역을 살펴보면 최초(BC18년) 대륙의 사천성 남쪽에 십제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출발한 한성백제는 중기(AD369년)에 고구려의 땅 하남성을 공략하여 북쪽에 한성백제를 세우는 강성 대제국으로 발전한다. 이후 백제의 말기(AD668년)는 중국대륙의 동쪽 산동성에 웅진ㆍ사비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때 고구려 관할에 있던 마한의 강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당시 백제의 강역은 북위와 맞닿은 사천성으로부터 남제와 운남성에서 맞닿았고, 호남성에서 왜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하남성과 산동성에서 고구려와 경계를 이뤘고, 산동성과 안휘성 그리고 하남성에서 신라와 맞닿아 있었다.

이후 백제의 패망으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재편되는데 대륙서쪽에는 당이 세력을 펼쳤고, 대륙북부와 중앙․동쪽으로는 발해․신라, 만주에는 우산국, 한반도에는 탁라가 있었다. 물론 대륙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반도는 5세기말까지 고구려의 강역이었다가 6세기 초 백제강역,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신라의 강역이었다가 10세기 이후 고려의 강역이었다. 그리고 근세조선이 들어서던 14세기이후 세종 때 탁라국 왕조를 종식시키고 지금의 서울에 경복궁을 짓고 수도를 옮긴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 화려함 보다는 자연 속에 동화된 뜻한 느낌의 향로들과 토기로 만든 새의 형상이 아름답다 ⓒ 2009 류기석

산동성 곡부에서 제녕시로 향하는 도로 바깥풍경은 망망한 대지에 버드나무와 황량한 밀밭들이 끝없이 이어질 뿐 무미건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에서는 농민들이 곡물을 생산하는 수익보다는 나무를 심어 생산하는 소득에 더 많은 돈을 지원하여 농사보다는 속성수인 미루나무들을 눈에 띄게 많이 심어 놓았다. 이곳 산동성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 곳곳의 볼 수 있는 미루나무는 경제성과 수목으로서의 생육조건이 잘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녕시 여러 곳 중 한곳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도착, 먼저 관광지도를 살펴보고는 도시중앙에 자리한 제녕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은 오래된 회화나무 길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5시전까지는 무료관람이라 천천히 박물관 2층에 올라서려는데 박물관 뒤편으로 심상치 않은 고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으로는 보기드믄 철탑이 수만 겹의 세월을 이기고 서있었데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제녕의 오래된 미래와 만나다

제녕시 정중앙에 있는 박물관건물은 과거 중요한 건축물(宮闕)이 있었던 자리를 허물고 들어선 듯하다. 뒤편으로 오래된 건축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선 모습과 그 앞으로 고(古)철탑(鐵塔)과 성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의 고택들은 제남과 곡부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간직했다. 처마선이 급해 보였고, 맞배지붕중앙에 말을 탄 형상의 문양을 넣은 것이 특이했다. 북방건축인 고구려는 힘이 넘치고 패기 있는 특징이 있는 반면 남방건축인 신라는 여성스러운 면과 고구려와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아 패기가 있으면서 섬세하다. 그러나 백제의 건축은 작지만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세련미로 기품 있어 보인다. 이곳의 몇몇 건축물들이 작고 단순하지만 뭔가 이전 것들 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 제녕박물관에는 유난히 발이 세 개 달린 삼발이 철제화로가 많이 전시됐고, 근엄하기보다는 넉넉한 석각이나 석상 등 조각품들이 친근하게 느겨졌다 ⓒ 2009 류기석

이곳 건축물들이 현재는 숭각사(崇覺寺)라는 절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건물안으로 들어서니 초기 운하도시로서의 역사적 기록물, 소장품, 관련 자료들을 간단히 전시하고 있었다. 숭각사 경내를 살펴보고는 곧장 철탑과 루(樓)가 있는 곳에 다가갔다. 이곳에서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있는 스님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공안만이 집무를 보는 듯 보였다. 숭각사에 대한 역사는 1105년 북송 휘종 때 건립되었고, 1581년 명나라 만력제 때 재건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알 수 없다. 쇠로 주조한 철탑으로서 원래는 7층이었으나 재건당시 9층으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탑 아랫부분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8각형 기단이 있다. 전체 높이는 23.8m이지만 철탑만의 높이는 10여m라고 한다. 기단의 남쪽 면에 문이 있고, 실내 꼭대기에는 두팔조정을 쌓았다. 또 실내에는 송나라 때 제작된 천불상과 1881년 청나라 광서제 때 만들어진 탑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탑신은 8각형이고 내부는 벽돌을 쌓아 채운 실심형이다. 각 층마다 탑 처마와 평좌와 난간이 설치되었고, 처마와 평좌 아래에는 모두 두공을 올렸다. 탑신의 각 층마다 4면에 문이 있고 나머지 4면에는 불상을 안치한 감실이 있다. 제1층 탑신에는 "1105년 상씨가 남편 서영안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주조하다"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2층 탑신에는 "황제만세 중신천추"라고 새겨져 있다. 풍경은 맨 위층 8개 각에만 달려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분실되었다. 탑찰은 도금한 보병 형식이다. 광저우 광샤오사 철탑, 후베이 당양 위취안사 철탑, 산동 랴오청 철탑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철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규모는 작았지만 예스러움이 느껴지는 일부 건축물과 오래된 철탑, 루건축 등으로 보아 과거 이곳이 제녕의 중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다양한 석기, 철기, 목기, 유기, 자기 등의 공예품들이 역사자료들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석기들과 옹기, 토기들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격조 있는 품위를 선보였다. 유난히 발이 세 개 달린 삼발이 철제화로가 많이 전시됐고, 근엄하기보다는 넉넉한 석각이나 석상 등 조각품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우뚝 솟는 화려함 보다는 자연 속에 동화된 뜻한 느낌으로 자연스러움이 생활에서 필요한 요구들을 덧붙이는 형태로 만들어진 듯 하다.

   
▲ 제녕박물관의 내부모습, 각종 도장류와 옥제품들이 눈에 띈다 ⓒ 2009 류기석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중 가장 세계화되고 앞선 문물과 문화는 어느 나라였었는지 깨달아야 하겠다. 당연히 백제라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본 글을 쓰면서도 백제에 관한 역사적인 사료나 문화관련 자료들이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박물관 하나를 채울 정도로 많은 유물이 쏟아진 무령왕릉을 비롯한 현 국립공주나 부여박물관에 가득한 역사적 유물들과 사적들을 볼 수 있지만 이것으로는 왠지 잃어버린 백제왕국의 천년을 다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든다.

최근에 히브리서 8장을 읽던 중 진실한 앎(새로운 사관)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앎(옛 사관)이란 낡아지고 쇠하는 것으로 없어져가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으로부터 희망과 자긍심을 부여받는 길임을 깨닫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관들은 완벽하지도 완벽할 수도 없음을 밝힌다. 다만 역사를 공부하고 깨달은 과정에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혹 본문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견해가 다른 주장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4월28일) 대륙(환에서 고려까지)에서 8,600년 반도(근세조선 이후)에서 600년이 생겨나게 된 결과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명과의 일생일대의 최대전쟁을 겨루어보려고 했던 고려(AD1368)는 이성계(태조) 장군의 뜻밖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근세조선이 건국한다는 대목에서의 시대적 상황이다. 또한 명과 운명적인 대결을 준비한 고려는 멸망하고 갑자기 근세조선이 건국하는 상황 말이다. 이때만 해도 조선의 강역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남성, 하북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세조선으로는 자신의 정권을 정당하게 유지하려는 새로운 방향모색이 불가피해 한반도로의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대륙의 영토를 포기함으로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때를 말이다.

역사는 실재적 역사(Wirkliche Geschichte)와 해석된 역사(Gedeutete Geschichte)의 토대위에서 바라보되 실증주의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는 일제(日本)뿐만이 아니라 명(明)ㆍ청(淸) 그리고 조선(朝鮮)에 의한 역사왜곡 및 축소 등을 철저히 밝혀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얼마 전까지 동북공정 이전에 잃어버린 1,000년의 역사를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Xia Shang Zhou Chronology Project)으로 해결하려 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의 제9차 경제·사회 5개년 계획의 하나로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연대학(年代學) 연구 사업이다.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의 연구 방법을 종합하여 연대(年代)가 분명하지 않았던 기원전 841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年表)를 확정하였던 것이다. 하북, 하남, 산서, 산동, 강서, 안휘, 절강, 복건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에선 하상주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천, 운남, 감숙성에 이어 섬서, 산서, 하남, 호북, 호남, 강서, 귀주, 강서, 광동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하상주의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해서도 여의치 않자 서둘러 완성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로 고구려사에 대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실시했다. 또한 중국의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 나온 자료들에 의하면 티벳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관련된 서북공정과 이 외에도 운남성에 있는 27개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등 민족과 역사 및 영토 주권과 관련하여 거시적인 국가 발전 프로젝트의 하나로 왜곡 사업을 추진 중이다. 사실 중국의 하화 족은 더욱 서북쪽인 청해성 인근이 자신의 강역으로 이곳에서의 유물과 유적이 그들의 역사와 관련성이 있는 것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태백(李太白)이 시(詩) 짓고 놀았다던 태백루(太白樓)에 오르다

제녕박물관을 나오니 오후 서너시쯤 되었다. 대로변의 차량행렬을 따라 오래된 회화나무 길을 거닐면서 태백루(太白樓)로 향했다. 태백루로 향하는 길가에는 중국의 원산지인 회화나무 가로수가 심겨져 인상적이었다. 이 회화나무는 북으로 요녕성에서 남으로는 광동성이나 대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산동성에서부터 서로는 내륙의 감숙성과 사천성까지 중국 대부분의 지역 어디를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란다. 오래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이 나무는 궁(宮)이나 조정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져 궁궐은 물론 절간이나 사당 혹은 벼슬아치들의 뜰이나 마을의 정자수로도 즐겨 심던 수종이란다.

   
▲ 이태백(李太白)이 시(詩) 짓고 놀았다던 태백루(太白樓)에 오르다 ⓒ 2009 류기석

그러니 회화나무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겨 신성시 하였나보다. 우주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목(神木)으로 집안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잡귀는 쫒고 상서로운 기운만 모여든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이 화평하고 가문이 번창하고 만사가 형통한다고 믿었다. 나라에서도 큰 공을 세운 관료나 훌륭한 학자에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고,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거나 공이 많은 관료가 물러날 때 기념수로 심기도 했다. 바로 이곳 제녕에서 꼬불꼬불한 가지가 마치 우산처럼 늘어진 변종 나무가 중국말 '롱좌화이(龙爪槐, 용조괴)'라 부르는 회화나무이다. 모양이 용의 발과 같은 형태라고해서 붙여진 별칭이란다.

제녕박물관에서 도보로 복잡한 도시를 20분간 걸으니 태백루가 버티고 서있었다. 태백루 앞에는 광장처럼 조성이 되어있었고, 그 앞으로는 잘 정비가 된 하천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혼자만 입장료를 지불하고는 허름한 고택이 되어버린 태백루에 올랐다.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온 듯 썰렁한 느낌이다. 그곳에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된 당나라 시인으로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이라고 알려졌는데,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고 한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 이백은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 2009 류기석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다.

태백루 2층에는 서예전시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밖의 풍경은 예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실망했다. 태백루에는 다양한 석문과 석물 그리고 나무들이 그저 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닝난관회족밀착지내에 위치한 동대사(东大寺)를 찾지 못하고 버스편으로 제녕터미널에서 중국의 유명한 유교사상가 맹자의 고향이라는 추성시(鄒城市)로 향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외침에 의해,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어떻게 왜곡, 단절, 축소되었는가와 백제의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 사료 등과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았다.

우리역사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

   
▲ 대륙백제 사비성(부여)의 지도와 궁전으로 추정되는 변조되고 훼손된 청진사와 동대사 유적 ⓒ 2009 류기석

우리의 역사는 외침에 의해,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어떻게 왜곡, 단절, 축소되었는가?

최근 영어타임이란 블러그에 올라와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 주부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우리의 역사는 외침에 의해,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어떻게 왜곡, 단절, 축소되었는가?"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대륙과 한반도의 역사는 외침에 의해,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어떻게 왜곡, 단절, 축소되었는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분명한 것은 중국의 사서와 국외 학자들의 기록에서도 우리역사에 대한 긍정부분이 있음에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도지, 환단고기 등의 사서가 신화와 위서논란에 싸여있음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신화다, 우상이다,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라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어서 그는 "남들이 인정해주는 데도 우리가 스스로 단절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우리 스스로의 눈을 이렇게 왜곡되게 한 것은 무엇이고, 우리에겐 우리민족의 빛나는 역사서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국이나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왜곡 확대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왜 우리 역사를 스스로 축소 왜곡하는 자기비하에 빠져 있는 것일까?"라면서 "중국은 지금도 동북공정을 준비해서 현재의 중국 땅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흡수하려고 한다. 자국중심으로 편리하게 확대해석하는 춘추필법, 도편외교는 우리와는 반대되는 왜곡이다."며 역사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한 "일제 36년간을 거치면서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우리 민족역사는 철저하게 왜곡되었다. 민족의 품성 또한 열등한 민족으로 세뇌시켰고, 국조 단군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오랜 시간 우리에게 문화를 배워간 열등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광복 후, 미군정시대에 그들의 물질문명의 공세와 함께 그들의 교육과 종교를 함께 심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우리스스로 미신, 우상, 비합리적,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단절하게 하였다."라며 지금도 그 영향권 안에 있음을 안타가워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근본정신과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슬픔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의 빛나는 정신과 역사를 이야기 하려해도 힘이 들게 한다. 우리에게 우리 역사를 증거 하는 역사서가 남아있다면, 현재의 역사교과서의 왜곡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빛나는 역사를 국사교과서 단 몇 페이지에 할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것도 남의 이야기 하듯 대하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의 빛나는 역사를 마감한 이후, 2,000년간의 외침에 우리의 역사서는 모두 소각되어졌다. 강대국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는 역사교육과 정신교육을 철저히 시키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에는 제일먼저 그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없애기 위해 사서를 불태우고, 그들의 종교와 정신을 심어 스스로 종속되게 만든다."는 역사적 비애(悲哀)를 일깨웠다.

이어 "우리의 사서가 불타 없어지게 된 것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단군의 폐관에 따른 ‘분서갱유’가 시초일 것이다. 서기 244년 고구려를 침범해온 위나라 관구검의 약탈과 방화에 의해 신지비사, 해동비록, 단군기, 선사등 귀중한 사서들이 소각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서의 소각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사고가 불타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 이세적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사서를 불태웠을 때에 백제서기, 단기고사, 조대기가 불탔다. 1233년 원나라가 고려를 침공했을 때 초토화 작전으로 유명한 몽골과 39년이나 장렬하게 대항하였지만, 결국 강화조약을 맺을 때 삼한고기, 해동고기등 유명사서가 소각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전국에 4곳으로 나누어 보관하던 사고 중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곳이 불탔다.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을 납치하는 부대와, 조선의 사서를 약탈, 수집해가는 특수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왕건과 견훤의 전투과정에서 거칠부의 국사, 단군기, 삼한고기, 신라고기, 백제신찬이 소멸되었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할 때 세 명의 천주교신자가 통역과 안내자로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무고한 주민을 상해하고, 외규장각 도서까지 약탈 방화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행위를 한국천주교는 근래에 들어 사과했지만, 종교의 역기능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금도 외규장각 도서반환에 대한 협상이 진행 중이고, 프랑스와 우리 나라사이의 뜨거운 감자이지만 진척이 없다. 일제가 이 땅에 들어와서 제일먼저 한 일은 전국을 뒤져 민족자존의 사서와 선가의 서적 등을 압수하고 소각했다. 전국에서 20만권이 소각되었다. 그 후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역사를 왜곡해 들어간다."는 정황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어 우리 역사를 연구해 오신 최태영 옹은 "우리의 잃어버린 사서의 대부분이 일본 땅에 특히 일본 황실 도서관에 있다."라며 일본 땅에서 직접 일본인들이 역사기록을 숨겨놓은 현장을 목격했노라고 증언한바 있음을 알렸다. 박은식선생은 "개인은 밥과 빵을 먹고 살 듯, 국가와 민족은 역사를 먹고 산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우리의 역사서가 소실되었다고 슬퍼 말고, 있는 것, 한 조각이라도 목숨같이 아끼고 드러난 사실이라도 우리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자"고 말씀하신 내용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에겐, 유물, 유적의 실재적인 증거보다는 우리의 역사를 보는 역사관이 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상대방(서양)의 잣대에서 원래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젠 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가 바뀌길 기다리기보다는 다양한 계층들이 나서서 올바른 역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알려야 할 것이다. 이 땅의 학자들은 언젠가 부끄러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논쟁거리로만 여기기 전에, 의심나는 부분은 하나하나 되짚고 그 진실 된 역사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면서 “현재의 역사는 학자들에 의해 진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에 의해 역사교육이 바뀌기보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출판과 소설을 통해, 만화를 통해, 방송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왜 우리의 역사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바뀌지 않는 것일까? 누구의 고집이고 누구의 비양심일까? 누가 오염된 눈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교육에 몰입하는 현재의 교육도 가장 두려운 점이라고 고백하면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육이 순식간에 역사의식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라 가장 두렵다고도 했다.

대륙백제는 있다 VS 대륙백제는 없다?

먼저 "대륙백제는 있다 VS 대륙백제는 없다."를 논하기 전에 한반도 강역이해로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이병화 한국방송출판)"이란 책을 참고하면 "한반도는 대체로 고조선시대로부터 마한과 막조선의 영향권에 있었고, AD5세기까지는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6세기에 이르러 한반도는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7세기 말엽에는 신라의 강역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신라를 이은 고려의 영토였다. 한반도는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될 때부터 근세조선이 한반도로 이전할 때까지도 탁라라고 불리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사료들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 백제는 대륙에 중심을 두고 있던 나라!

우선 삼국의 대륙강역기록을 살펴보면 송나라 심약이 편찬한 <송서>로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남제서 백제전의 백제 7태수 관할지역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라는 기록이다. 다시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이병화 한국방송출판)"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AD668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5부 37군 200성 76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추산해 보면 백제는 350만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한 국가였다. 그런데 근세조선 세종 때 AD 15세기 초 전라도와 충청도의 인구는 11만 3천명정도로 전한다. 또 근세조선 때(AD1666년) 제작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에 수록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성읍은 60개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사학자들은 백제사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틀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한반도가 한 때는 백제의 강역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백제의 중심 강역은 대륙에 있었다. 왜냐하면 백제는 200개의 도읍성을 가지고 있었고, 인구가 67만호로 350만 명이 넘었고, 대륙에서 활동했던 전연, 북위, 진, 송, 남제, 동진, 수, 당과 인접해 있었고, 대륙의 감숙성에 있는 요서지역을 침공 영토를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의 좁은 강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십만(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는 위험과 그를 실어 나를 선박제조능력 또한 부족했던 것 같다.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는 백제의 천체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과 백제 땅에서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지진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는 대륙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는 지적들을 접했다.

2)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요즘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성훈 칼럼니스트는 "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했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인구로 본 백제는 대륙인가? 한반도인가? <삼국사기> 및 모든 중국의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6만호면 대충 4~5백만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런 인구가 과연 한반도에서 가능했을까? 단순비교로 보면 통계청이 1992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종(1519년) 때와 현종(1660년) 때 조선 전체의 인구가 약 76만호이다. 백제 멸망 900~1000년이 지난 조선 전체의 인구와 백제 멸망 시의 인구가 같았다면 백제는 조선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줄어들 수가 없다. 특히 인구=노동력이었던 옛날과 같은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말이다.

사서에 나오는 백제 인구의 변화를 분석비교하면 신라는 18만호(수도만, 삼국유사), 백제는 76만호(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는 210만명(송사-백제멸망 600여년 후 약 35만호), 조선(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태조 6년(1406년:백제패망 740년 후) 153,404호(370,365명:한성제외), 중종14년(1519년:백제패망 860년 후)754,146호 (3,745,481명), 영조 8년(1732년:백제패망 1,100년 후)1,713,849호(7,273,446명) 여기서 백제 패망 730 여년 후 지방별 인구를 태조 및 태종실록을 살펴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인구수는 56,003호 그리고 경상도는 48,993호이다.

여기서 백제(4~5백만)가 고려(210만)보다 많으며, 조선 초(37만-한양제외)로 백제가 조선의 약 10배에 달한다. 백제(76만호)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700여년 후 5.6만호)를 합한 13.5배에 달한다. 신라 수도는 경상도(700여년 후) 전체의 약4배에 이르므로 결론은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그리고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 도한 오류이다. 백제의 영역은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로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삼국의 위치를 과학적 근거로 찾아본 것이다. 백제는 발해만 일대가 일식의 최적관측지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식분석에도 2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 최적관측지를 찾는 것과 둘, 일식을 볼 수 없는 네가티브(Negative) 방식으로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최적관측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로 삼국사기에는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구분이 없어 부분일식까지 볼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어진다. 여하튼 고구려의 최적관측지는 바이칼호 동쪽 내몽고지역, 백제는 북경지역, 신라는 양자강 중류, 왜는 남지나해상으로 나타난다.

박창범교수의 네가티브 방식이란 단 한번이라도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지워나감으로서 그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여기서도 삼국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여기에 반박자료를 낼 학자는 전 세계에 아무도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과학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껏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한 압록강변 집안과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껏 알고 있는 광개토호태열제비는 명ㆍ청과 조선 그리고 일본에 의해 집안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비가 옮겨진 후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성이 집안으로 비정된다.

   
▲ 대명여지도(산동여도)와 제녕시 옛 주변도 ⓒ 2009 류기석

기상으로 본 백제와 신라의 위치는 기상청에서 21년간 근무했던 정용석씨가 쓴 책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에 보면 삼국시대 기이한 기상 기록이 나온다. 백제 동성왕 4년(A.D 482) “겨울 10월에 큰 눈이 한 길(丈)이 넘도록 내렸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같은 해 신라에는 큰 눈이 왔다는 기록이 없다. 이렇듯 한쪽은 홍수와 가뭄과 폭설이 있었는데, 다른 쪽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가능한 일인가? 백제 기루왕 32년(A.D 108) “봄ㆍ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해 신라의 기록에는 “여름 5월 큰물이 져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자를 10도에 파송하여 구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극심한 가뭄인데, 신라는 홍수가 났다니 이게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황충(蝗蟲 메뚜기데) 기록이 유난히 많다. 이 황충은 우리나라 논에 있는 낭만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나오듯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 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 떼가 지난 곳에는 풀잎 하나 남지 않고 오로지 적토(赤土)만이 남는다. 즉 엄청난 자연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메뚜기 떼는 한반도에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메뚜기의 날개 특성상 황해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기록에 황충이 있다는 것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의 기록을 보면 이 황충이 나타난 기록이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삼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최치원(857 ~ ?)은 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즉 백제는 한반도의 충청도와 전라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중동부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 사서에 나타난 대륙백제의 다양한 흔적 ⓒ 2009 류기석
 

대륙백제를 말한다

인터넷 블러그에서 푸우밴드(http://blog.naver.com/poohsi/90004832211)님의 위(魏)나라와 백제의 기병전(騎兵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의 열국과 백제(百濟)간의 전쟁에 관한 의문을 제시하여 옮겨본다.

반도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기존의 사학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이 있었다면 당연히 수군(水軍)에 의한 전투가 있어야 하고, 그 후에 육상에서의 전투의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양쪽 기병(騎兵)이 싸운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만 명에서 수십만 명씩의 대규모 전투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한반도(韓半島)에 백제(百濟)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魏)의 기병(騎兵)이 고구려(高句麗)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고구려(高句麗)가 눈감아 준 경우와 백제(百濟)가 대륙에 있었다면 설명이 가능한데, 과연 고구려(高句麗)는 백제(百濟)와 위(魏)나라의 군대가 자신의 영토에서 싸우게 했을까요? 아니면 고구려(高句麗)는 위(魏)나라 군대와 백제(百濟)군이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를 그냥 지나가게 묵인하고 있었을까요?

이는 앞쪽의 천문학적 사실을 통해서 검토한 것처럼 백제(百濟)가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에서는 설명이 안 되자, 아예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은 대륙에 남아 있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백제(百濟)관련 자료 중 일부입니다.

"...서(西)쪽으로 월주(越州)를 포함하고(월주의 남쪽은 월남, 즉 베트남이된다), 북(北)쪽으로는 高句麗와 국경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倭를 포함한다. 百濟는 동, 서 두 곳에 서울을 두고 있다....(舊唐書)"

"... 百濟는 전성기에 백만이 넘는 대군으로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 지역을 다 장악하였다... (三國史記)..." -과연 三國史記는 반도중심의 기록인가요?

"... 동진(東晉)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강(長江) 양안(兩岸:양쪽 지역)을 모두 점령하였다...(周書)"

중국 남부에는 지금도 百濟縣이라는 지명들이 있습니다. KBS취재진이 탐방하여, 이들에게 어째서 百濟라는 이름이 붙었나고 물어보자, 옛날에 조상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왔고 그래서 이곳에 그 조상때부터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百濟 22 담로(擔魯)를 배우고 있지만 그 위치는 배우지 않습니다. 擔魯는 지금의 연방과 같은 제도로, 百濟는 하나의 나라로 이루워진 나라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왕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일컬어 擔魯라 하는데 中國의 말로 郡縣과 같다. 百濟에는 22擔魯가 있는데 모두 자제나 종족(宗族)으로 분거하였다.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也 梁書 百濟傳) 여기서도 중국의 말(中國之言)로 표시 합니다. 당시 百濟가 中國(中原)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물론 위(魏)나라의 騎兵과 百濟의 騎兵이 배위에서 서로 싸웠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전쟁의 기록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史書라고 일컫는 기록에는 百濟에 관한 기록은 미미할 지 모르나, 상대가 되는 대륙의 史書에는 百濟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百濟國은 본래 高句麗와 더불어 遼東(지금의 遼東이 아니다-후술합니다.)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高句麗가 遼東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百濟는 遼西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百濟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라 하였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宋書)"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晉나라때 이미 高句麗가 遼東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百濟 또한 遼西, 晉平의 2군을 점거하고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百濟有遼西晉平二郡也 梁書)" 이곳에서 말하는 晉平2郡은 晉城과 高平을 말합니다.

"...夫餘는 鹿山에 자리잡고 있다가 百濟의 공격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였다. 그래서 서쪽으로 燕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외에도 百濟의 대륙존재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百濟를 반도의 한 귀퉁이에 몰아 넣고 있습니다. 百濟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대륙에 존재하는 것을 뒷받침 하는데, 百濟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자들은 그러한 적이 없고, 半島에 있었다니..

대륙인들은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까요? 또한, 夫餘는 우리가 배우기에 高句麗의 북방에 있던 나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資治通鑑의 기록을 보면. 半島의 百濟가 어째서 대륙의 夫餘를 공격할 수가 있는가요? 공수특공대가 진입하였을까요?

아니면 夫餘조차 半島에 있었다는 것일까요? 아마 현 사학계는 그러고 싶을 것입니다만, 그래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가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소위 사학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실어봅니다. 감상해보십시오.

"...(전략) 이들 기록에 의문을 품고서 百濟의 대륙 진출설을 불신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百濟가 자리 잡은 韓半島 중남부와 遼西지방은 말을 타든 배를 타든 대단히 먼 거리인데, 굳이 百濟가 군대를 보내어 郡縣을 설치할 이유가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다. 百濟가 郡縣을 설치했다는 晉나라는 3세기 후반~5세기초엽에 해당한다. 아직 百濟가 해외에 郡縣을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4세기 후반기에도 황해도 지방을 놓고 高句麗와 줄곧 전쟁을 치르느라 遼西지방까지 진출하여 郡縣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遼西지방까지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함과 뛰어난 항해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百濟 사정상 생각하기 어렵다. (중략) ...실제로 중국 기록을 보면 遼西지역에 百濟郡縣이 몇 년이상 존속할 만큼 힘의 공백상태를 보인 적은 없었다. ..(후략) ..."

위 글의 근간은 반도(半島)에서 해석하다보니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백제(百濟)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무슨 역사 해석을 자신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고 왜곡 해석하는지...우선, 백제(百濟)는 수군(水軍)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병(騎兵)을 투입했습니다. 또, 대륙 사서(史書)의 기록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놓고 쟁탈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학계는 황해도를 놓고 싸웠다고 합니다. 당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는 근거리에 있었습니다. 패수(浿水)를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학계입니다. 그러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전쟁을 반도(半島)에서 보니, 황해도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왕건(王建)에서도 집고 넘어간 것처럼 패수(浿水)는 지금의 북한의 대동강(大同江)이 아닙니다. 이곳은 당시 대륙의 요수(遼水)와 인접한 곳으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대륙에서 서로 패권을 놓고 겨룬 것입니다. 당시의 백제(百濟)의 국력이 먼 곳에 원정군을 파견할 만하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운 소리지만, 물론 백제(百濟)는 원정군을 요서(遼西, 지금의 遼西가 아니다.)로 파견한 것이 아니라, 그곳이 백제(百濟)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륙의 열국의 위치를 지금의 중국의 위치로 확대시켜 놓고 백제(百濟)의 자리를 찾으니, 힘의 공백상태가 없었다는 소리를 운운합니다. 상대방의 나라는 있는 대로 늘려서 해석하고 우리의 강역은 되도록 이면 작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요즘은 백제(百濟)가 대륙에 진출했는데, 그것을 고대 상업세력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토는 그리지 않으면서 그 당시는 영토의 개념이 지금과 달랐다는 둥 알 수 없는 말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영토개념도 그렇게 말해야지 당(唐)나라의 영토도 아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더군다나 수십만의 위(魏)의 기병(騎兵)과 백제군(百濟軍)이 싸웠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있음에도 장사꾼이라니, 백제(百濟)의 상인들은 잘도 싸웠나 봅니다.

북위의 효문제와 백제군의 기록은 동성제(東城帝)가 위(魏)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王과 侯의 칭호를 내립니다.왕(王)을 작위로서 하사했다는 것은 그가 제(帝) 또는 대왕(大王)으로서 행세했음을 의미합니다. 北魏는 百濟에 멸망함으로써 역사의 그늘에서 사라집니다. 총 4차에 걸쳐 싸운 百濟와 魏의 전쟁 南齊는 이후 百濟의 제후국이 됩니다.

"...정로장군(征虜將軍) : 매라왕(邁羅王) -사법명(沙法名), 안국장군(安國將軍) : 산중왕(酸中王) - 찬수류(餐首流), 무위장군(武衛將軍) : 불중후(弗中候) -해례곤(解禮昆), 광위장군(廣威將軍) : 면중후(面中侯) - 목우나(木干那)...(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爲行安國將軍酸中王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南齊書)"

이렇듯 백제(百濟)의 대륙에서의 전쟁기록은 여러 역사서에 장군들의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사책에는 이러한 장군들이 나오지도 않고, 이러한 역사를 단순한 고대 상업세력으로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위에 기록된 장군들을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국사책이 맞는다면 위의 기록된 장군들은 당시의 유명한 장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문점들이 기록에 나타납니다. 백제를 한반도로 확정지어 놓고 보는 현 사학계의 의견은 모순투성이라는 것이 대륙백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반도에서 멸망한 백제라면 패망당시의 지명들이 반도에 나타나야 하는데 나타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 지명들은 중국 대륙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1) 한반도에는 백제패망시의 지명이 없다.

백제 멸망시의 지명의 예를 들어보면, 석문(石門), 대방(帶方), 석성(石城), 평원(平原), 황산(黃山),大山(太山), 제성(諸城), 동명(東明), 백마강(白馬河), 주류성(周留城), 항성(項城), 동성(桐城), 잠산(岑山), 독산(獨山). 덕안(德安),,,,

충청, 전라도 지역에는 백제 패망시의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나,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城), 호북성(湖北省),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등에는 위의 지명들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史書와 일치하는 지역이 공주(公州), 부여(夫餘) 지역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있지만, 황산벌이 현재 충남 연산(?) 이라고 합니다만, 대륙에는 아직도 패망때의 지명인 황산벌, 주류성등의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2) 한반도의 부여에는 사비성이 아닌 내지성의 비가 있기 때문이다.

부여(夫餘)에서 사비성(泗沘城)이라면 당연히 사비성(泗沘城)으로 기록된 지석(誌石)이 있어야 함에도 내지성(奈祗城)이 기록된 지석이 출토 되었다는 것은 이곳 부여가 사비성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의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 있던 곳입니다.

3) 백제 정벌시 당군 13만과 40만 유입지가 반도가 될 수 있는가?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멸망 당시의 인구는 76만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百濟城二百 戶七十六萬 舊唐書) 또한 城이 200개라고 합니다(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三國史記). 물론, 우리의 역사학계는 1호당 1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 "백제의 인구"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백제의 인구가 76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13만 정벌군이 당에서 황해를 건너 왔다고 하는데,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40만의 당군을 더 투입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53만 명의 활동이 충청, 전라도에서 가능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백제의 인구가 76만명(76만호를 76만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현재 사학계이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당나라 군대 53만과 신라군 등이 백제의 땅에 진주 하였다면, 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하는 군대를 과연 투입 하였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맥아더에 의한 인천상륙 작전 때도 4만명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 6.25 전쟁 당시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은 백만명에 달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3,000만 명인 점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백제 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어 가졌다?

三國史記 新,舊唐書 에서는 분명히 백제 땅을 신라와 발해가 나누어 가졌다(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 新唐書, 舊唐書, 三國史記)고 했는데, 경기, 충청, 전라도 어느 곳이 발해 땅이라고 밝혀지고 있는가요? 반도 남부에 발해 땅이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누구처럼 발견되기를 기다려 보자며 시간만 보낼까요? 그러나, 백제에 대한 기록 중에서 남제서(南齊書)의 백제 지명 광양이 발해 땅이 되고, 요나라 땅이 되었다고 요사(遼史)에 기록되고 있으니, 광양(廣陽), 즉 북경(北京)지역에서는 백제 땅이 발해 땅이 될 수 있으니 패망지역을 반도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기록> 현 사학계에서 그나마 정사 취급을 받고 있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660년 3월, 나당연합군 18만의 병력이 백제 침공(당군 13만, 신라군 5만)(高宗詔......統兵十三萬以來征......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경사(京師)로 보냈다(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 隆· 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 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送京師)

"백제의 부흥운동"시 당군 40만 증파(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당시 부흥군이 회복한 성 200여성(黑齒常之......復取二百餘城)

<의문점 제시>

이것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시 백제가 보유했던 성이 200개였는데 백제 부흥군은 200여성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근세조선 때 이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593년 정월 임진왜란때 명나라에 통보한 의병 총수는 관군의 1/4인 2만2,600명이었고, 백제 패망후 730여년이 지난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를 보면, 경기, 충청, 전라도 : 56,003호와 경상도 48,993호였으며, 신라의 경우 수도(금성)에 약 17만9 천호가 있었는데 신라가 패망한지 500여년이 지난 후 근세조선 때 경상도의 총호수가 10만에도 미달했다.(?)

지금 사학계는 1호당 1인의 인구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의 인구는 1호당 10명으로 계산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당시는 대가족 제도였다라면서,,).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백제시대 인구수에 비해서 근세조선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요?

중세까지는 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 인구가 완만하게 증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학계의 주장대로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씨조선시대의 인구수가 월등하게 적은데 과연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고 해석을 해야 될까요? 지금도 산동반도의 인구가 한반도 인구수 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과연 백제는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일까요?

백제의 역사와 문화 바로알기

정난도인(nsaju4u)님의 블러그(http://cafe.naver.com/nsaju4u/645) 백제의 역사와 문화, 재미있는 한국사여행 편에는 백제의 문화는 여러 측면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으나, 바다와 강을 이용할 줄 안 사람들의 문화로 불려져도 좋을 것이다. 바다와 강은 문화의 수용과 교류, 전파의 길이다. 이 열린 창구를 통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백제는 문화면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와 서로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하였고, 같은 부족 계통인 고구려는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한족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고 , 다시 이를 동쪽의 신라나 바다 건너 후진의 일본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대체로 백제 초기의 문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여 지지만, 웅진 시대부터는 고구려와의 정치 관계가 끊어지고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졌다. 그리하여 특히 중국 남조 문화의 영향은 백제의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니 무령왕 무덤에서 중국제 사기그릇들이 나온 일이라든지, 무령왕 무덤의 구조가 중국에서 유행한 것이라든지, 와당의 연꽃무늬에 서로 닮은 점이 있다든지. 백제가 기와와 벽돌을 만들면서 중국 남조의 양나라 것을 본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벽돌이 오늘까지 전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국 이러한 문화의 형성 과정의 차이는 신라 문화가 토착 문화의 요소를 대체로 강인하게 지녔던 것과 달리, 백제는 외래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문화 발전을 꾀했던, 즉 대외적인 개방성과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로 백제는 해로로 연결되어 있던 중국 남조의 문화적인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발달된 중국 대륙의 문화수준과 직접 비교될 문화를 남겼다. 이 같은 문화적 개방성과 외래 문화 수용의 적극성은 대 중국 외교 과정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한반도내에서 삼국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경쟁에서 백제는 우위권을 가지기 위하여 부단한 교섭을 전개하였던 것이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스스로 발전시킨 문화를 이웃 일본이나 신라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도 충실히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는 백제의 문화적인 왕성한 활동성과 자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 문화는 중국과 고구려의 서북 문화와 관계를 가지면서 신라와 일본의 남동 문화와 연결되는 이를테면 동아시아 문화 전파의 중요한 거점이자, 교량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백제는 외래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문화의 수준을 높이면서도 백제의 고유한 문화 특질을 키워 나갔던 점에서 백제 사람과 백제 문화의 뛰어난 점이 있다. 백제는 그 문화와 예술이 단순하고 소박한뜻 하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계를 얻었으니, 한국 미술의 특성으로 지적되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의 본바탕은 삼국 중에서 아무래도 백제의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삼국의 미술 문화는 모두가 불교사상과 불교미술이 주류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불교미술의 특징은 장엄미와 신앙심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따라서 각 시기 최고 수준의 조형미술을 대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전하는 백제의 미술문화는 고분 출토품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불교문화 유적과 관련된다.

이 같은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백제의 불교미술은 고구려의 예에서 보다 토착화하여 한국적인 조형미와 의식을 가미하고 있다. 예컨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백제불상의 얼굴표현이라든지 독특한 옷 주름, 불상의 형태들은 그러한 반영이었다. 백제의 문화 예술 수준은 선진과 고도로 대변된다. 중국 남조와의 부단한 교류와 문화수용, 일본에의 문화전파 능력, 통일 이후 신라의 예술에 기여한 백제 장인의 숨결이 그것을 말해 준다. 삼국 중에서도 유독 백제인들 만은 금석문이나 공예품에 장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이 점도 예술인에 대한 특별한 대우와 그들의 지위를 염두에 두게 하는 대목이다

찬란했던 백제의 수도 부여와 만나다

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에서 필자는 678년 동안에 이루어진 백제의 우구한 역사문화가 펼쳐졌던 장소인 한반도 서울,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아마 당과 신라에 의해 많이 파괴되고, 고려와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없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적다는 의구심에 백제의 강역이 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다는 사실로 그 이유를 알았다. 후기백제의 왕도였다는 반도의 부여읍내에는 백제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현 부여읍은 조선말까지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가 일제 때 바둑판식으로 신도시를 조성한 곳이란다.

   
▲ 우리가족은 중국 산동성 서부 대평원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끼고자 도보로 제녕의 복잡한 도시를 걸어 다녔다 ⓒ 2009 류기석

그러므로 중국대륙의 산동성 일대는 백제의 주 강역이었다. 그 증거로는 산동성은 사수(泗水)가 흐르는 사비성(泗沘城)이 있었던 곳이다. 부여성(扶餘城)이 곧 사비성(泗沘城)이며, 백제의 도읍지 였던 고려의 부여인 것이다. 찬란했던 백제의 수도 제녕(부여)과 추성(공주)은 이번 역사와 만나는 논픽션 가족기행에서의 핵심이었다.

현재 우리 반도조선의 부여나 공주에는 백제 때 현존했던 건축물이나 그 터라고 단정할 수 있는 곳이 불분명하다. 오로지 알 수 있는 것은 사서의 기록뿐이다. 당시 대표적인 건축물은 궁궐과 공공건물, 불교사원 등이었다. 궁궐건축에 대해서는 백제 진사왕 7년의 기록에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새로 파고 그 속에 산을 만들어 기이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고 한 것을 보면 4세기 말 궁궐 건축이 매우 화려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백제는 부여와 공주로 천도한 후 새로운 궁궐을 조성했고, 공주 도읍기 동성왕 편에는 궁궐의 동쪽에 감류각(監流閣)라는 50자 높이의 고층건물을 짓고 연못을 조성하는 등 왕과 귀족들의 연회소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나 형태만을 짐작할 따름이다. 이때의 대륙백제의 부여왕궁은 중국 산동성 제녕시로 현재는 추정되는 곳으로는 회교사원이 있는 청진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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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우 (39.118.38.202)
2023-09-14 05:09:37
대륙에서 삼국이 있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환빠가 어쩌고 저쩌고 저질스러운 댓글 집어치우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므로 언젠가 그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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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언 (222.113.3.220)
2021-10-21 11:44:15
ㅎㄷ고기 인지 거짓위서 로 인해
ㅎ ㅃ 들이 설치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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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119.199.177.110)
2023-08-04 11:32:24
말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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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방화별감 (39.115.51.28)
2015-01-15 20:18:32
정신차리십시오
저도 십대중반에서 이십대중반까지 환단고기 맹신자 였습니다. 님, 망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그게 역사적 사실로 되는것은 아닙니다. 부디 다각도로 사료를 검증 비판하시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시기 바랍니다. 일단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의 수많은 백제시대 산성터중 한 군데라도 한번 답사해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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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석기들과 옹기, 토기들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격조 있는 품위를 선보였다 ⓒ 2009 류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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