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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무엇일까?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즐기는 행위![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 감춰진 조선(朝鮮)의 얼굴 한양(漢陽)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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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3월 19일 (목) 15:38:28
최종편집 : 2009년 03월 20일 (금) 23:10:13 [조회수 : 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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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무엇일까.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즐기는 행위다. 여행 중의 여행은 역사기행으로 키케로(Cicero)가 '역사의 아버지' 라고 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이래 뛰어난 역사가는 모두 여행가였다고 한다. 여행은 많은 경우 문화기행이기도 한데 우연히 꽃을 보는(走馬看花) 식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에 보고 싶었던 곳의 주제와 장소 등을 선별하여 감상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여행은 칸막이가 없는 교실이요, 학교다. 이번 5박6일간의 가족기행은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중국이라는 나라속에 어우러진 옛 전통과 현대문화를 체험하고 각 지역특성의 다면적 가치를 자연스레 아이들의 눈을 통해 넓게 심어주기 위한 취지로 떠났던 것이다. 특히 역사 속에 숨겨진 사실들을 찾아가는 즐거움도 맛 보았고, 우리와 다른 잠자리와 먹거리,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느끼면서 진행되었다. 자체적인 기획프로그램 안에서 현지 동시통역은 중국 선교사로 있는 지인의 소개로 한족인 장춘이공대학 한국어과 마효길님이 해주었는데 어느 여행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여운이 많이 남는 기행이었다.

   
▲ 여행은 칸막이가 없는 교실이요, 학교다. 이번 5박6일간의 가족기행은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중국이라는 나라속에 어우러진 옛 전통과 현대문화를 체험하고 각 지역특성의 다면적 가치를 자연스레 아이들의 눈을 통해 넓게 심어주기 위한 취지로 떠났던 것이다.(사지은 제남시 대명호반에서...)

그 중에서도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은 역사연구가 한분의 도움이 컸다. 그분은 한국·중국·일본(Korean Chinese Japanese)등에 산재해 있는 사서들을 교차 분석한 결과 중국 산동성 지역이 조선건국 초기만 하여도 우리 강역이었음을 자신이 지은 역사서 "바로보는우리역사 대륙에서8600년 반도에서 600년"에서 밝힌바 있다. 그 역사적 현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자 가족들과 함께 나섰던 것이다.

우리가족이 돈과 시간이 많아서 날마다 이런 여행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돈을 벌어 쓰는 경제방식의 철학, 외형적 꾸밈의 현실집착 보다는 미래 지향적 삶에 좀 더 많은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여행사들의 수박 겉핥기식의 깃발여행이 아닌 가족모두가 하나씩의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걷거나(慢走) 산을 오르며, 삼륜자전거와 버스, 택시와 기차로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면서 잊혀졌던 조선이전의 역사적 실체를 간직한 도시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흔적 하나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의 첫 도착지는 중국 동부에 있는 산동성의 성도 제남이다. 산동성의 경제, 문화, 과학, 교육과 금융의 중심이며, 난대와 온대로 대륙계절풍기후에 속하는 사계절이 분명한 도시이며, 평균기온은 13.6℃이다. 사계절 중 1월이 가장 춥고, 여름에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무덥다. 남쪽으로 태산과 인접하고 북쪽에는 황하를 끼었으며, 대표적인 호수로는 대명호와 백운호며, 관광지로는 천불산, 표돌천, 흑호천 등이다.

   
▲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은 위해시, 제남시, 곡부시, 재령시, 추성시, 태안시, 제남시, 위해시 순으로 진행됐다.(사진은 중국 산동성의 근세지도)

제남시의 총 면적은 8,177km2이고 도시 면적은 3,257km2이다. 제남시는 역하구, 시중구, 회음구, 천교구, 역청구, 장청구 등 6개구와 평음, 제양, 상하 3개현, 장구시를 포함한 54개 가두판사 처와 65개진, 27개 향, 487개 주민위원회, 4,657개 행정촌을 관할하고 있다. 제남의 역사는 유구하며 국무원으로부터 역사문화 문명도시로 지정된바 있다. 이러한 제남은 풍경이 아름답고 샘이 많아 샘물의 도시로 불리 운다. 제남시의 호적등록 인구는 603만명(2006년), 임시거주 인구는 78만 명이며,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42개 민족이 제남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분포는 한족이 98.31%,회족이 1.62%이며 나머지가 기타 소수민족이다. 주변도시로는 임청, 료성, 태안의 태산과 곡부는 물론 재녕과 추성 등 교통이 잘 정비되어 있어 제남을 거쳐 쉽게 주변의 관광도시를 구경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2월 14일 제남행 야간열차표를 예약하기 위해 전날 위해시에 있는 기차역과 여행사 몇 곳을 수소문했지만 열차정보가 틀리거나 출발하려는 시간대의 열차가 매진된 후라 부득불 고속버스로 출발하게 되었다. 당일 멋쟁이들과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황관난치 인근의 버스터미널로 갔더니 오고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차례로 배낭 검사를 하고는 제남시행 1번과 2번 출구에서 제남행 버스를 기다렸다. 출발한다는 예상시간이 되었는데도 차가 오지 않아 이웃한 3번 출구를 확인하니 그곳에서 제남행 고속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고속버스 내에 좌석표가 필요 없다는 것을 모르고 널찍한 뒷좌석을 놔두고 좁은 앞좌석에 미리와 앉아 있던 중국인을 물리고 조르르 앉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바로 뒷좌석으로 간 이분들이 어찌나 코를 골고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곤욕을 치렀다. 더욱더 곤욕을 치른 일은 5시간동안 휴게소를 들리지 않아 소변을 꾹꾹 참아 결국에 말도 통하지 않는 운전사에게 전화통화를 시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일이다.

위해시를 떠나온 7시간째인 오후 11시쯤 제남시에 도착했다. 싸늘한 거리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미리 마중하기로 한 현지인은 얼음 짱이 되어 나타났다. 우선 버스터미널에서 빠져나와 인근에 알아 놨다는 여관으로 향했는데 무슨 학교기숙사 같았다. 복도식으로 된 싸늘한 방안분위기, 지저분한 공동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장 그곳을 나와 대명호 인근 호텔을 찾았다. 좋은 곳에 데려다 주겠다던 택시기사는 인근의 시끄럽고 냄새나는 호텔을 안내해 주기에 그곳에서도 나와 한두 곳을 더 찾아보고서야 중심가 허름한 여관에 묵을 수 있었다. 우리가족과 현지인이 아직 호흡이 맞지 않은 탓에 첫날의 잠자리는 이렇듯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 둘째 날, 제남시는 풍경이 아름답고 샘이 많아 샘물의 도시로 불리 운다. (사진은 제남의 도시풍경 콜라주)

둘째 날, 불편함을 무릅쓰면서 아침을 맞았다. 낮선 제남의 이른 풍경은 도로마다 분주해 보였다. 유난히 길거리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는 포장마차들로 활력이 넘쳤다. 매서운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거리의 한 귀퉁이에 여관에서 소개시켜준 카페테리아가 우리를 반긴다. 여기서 간단한 요기를 해결하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마지막 날 위해시로 되돌아가기 위한 열차표를 끊기 위해 제남역사로 향했다. 이동은 택시를 주로 이용했으며 기본요금은 7원, 줄곧 5명이 타고 다녀 정원을 초과했고, 이 때문에 택시 잡기가 수월치 않았으며 공안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도심지 한복판 난잡한 차량행렬을 피해 대명호 정문에 도착했다. 대명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제남시는 북쪽으로 4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가 흐르고, 남으로는 천하제일의 태산을 품고 있는 명당이다. 황하(濟水)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오늘날 제남(濟南)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명, 청 이전 우리역사와 문화가 담긴 도시로서 현재는 중국 20대 도시로 9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산동성 성도이다. 10차선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고, 다른 중국도시에 비해 깨끗한 편이며, 우리의 대구처럼 분지형태로 이루어진 도시로 중국의 4대 화로인 남경, 무한, 중경과 더불어 후덥지근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최근 관광산업인 먹거리, 숙박, 교통, 관광지, 쇼핑, 오락 등 6대 시설에 중점을 두어 개발하고 있으며, 우리의 수원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곳이다.

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의 첫번째 미션은 현재 우리 땅은 아니지만 600년 전 우리와 밀접했던 유구한 역사적 흔적들을 깨어있는 해안으로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청년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른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해 온 터라 이에 관심이 많다. 그 응답 이였을까 이제껏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지역향토사나 이웃나라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생태적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리고 오늘 가족기행이라는 타이틀로 집을 나선 것이다.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의 역사를 찾아서 말이다. 조선의 강역은 1400년과 1900년 전후 두 번에 걸쳐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첫 번째 강역의 변화는 조선 세종 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전 강역의 역사연구에 있어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국의 춘추(春秋)와 사기(史記),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記), 청(淸)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 다양한 사료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동아시아 나라들의 정통 역사서 내용들이 불신 받고 있다고 하는데 각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국가들의 역사 유적이 오늘날 어떻게 다른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우리 역사의 강역은 대륙의 서부에서 중부로, 중부에서 동부로, 또 동부에서 한반도로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핵심 도읍지의 이동으로 살펴보면 고조선 때에는 대륙의 감숙성이었고, 고구려 때에서는 섬서성, 발해는 내몽고자치구, 신라는 안휘성이었다. 고려 때에는 하남성에서 산동성으로 옮겼고, 조선 초에 산동성에서 한반도로 옮겼다고 한다.

   
▲ 전통의 거리는 우리네 인사동 거리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했다. 특히 먹거리와 곁들인 전통문화거리는 삶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용강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 하자면 산동성 제남시는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까지는 우리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했던 땅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공민왕은 1354년 평양(섬서성 서안시)으로 잠시 이거했다가 1355년 개경(하남성 등봉시)으로 환도하고, 1360년에는 한양(산동성 제남시)으로 천도한다. 다음 해 공민왕은 홍두적의 침입으로 안동(절강성 항주시)으로 피난 갔다가 1363년 개경(하남성 등봉시)으로 환도하고 1390년 공민왕은 다시 한 번 한양(산동성 제남시)으로 천도하려다가 실패하고 결국 고려는 1392년 대륙의 송경(산동성 임청시)에서 멸망하게 된다.

조선초기의 수도(都邑)는 두 곳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과 조선건국시기만 해도 송경(松京)으로 불린 현재의 임청시와 조선의 수도 한양인 현 제남시 두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송경에서 건국한 다음 사저인 경덕궁(임청시 청진사)에 머무르면서 조선건국 후 최초의 수도를 신도안(현재의 곡부시)으로 잠정적 결정을 하게 됐는데, 조선의 조정은 신도안(곡부)과 한양(제남시)을 놓고 재차 고심한 끝에 한양(제남시)으로 수도를 정한다. 이후 모든 종묘와 사직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밀어붙여졌고, 이 때 경복궁을 창건한다.

이성계는 한양(제남)으로 천도하기 전 본인의 사저가 있던 송경(임청시)에 있는 경덕궁에서 잠시 머물렀다는데 이번 기행에서는 아쉽게도 고려의 정궁이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임청시에 있는 청진사를 찾아가 보질 못했다. 제남(한양)은 조선태조 왕자의 난으로 방과가 왕위에 오르면서 2대 정종(방과)은 송경(임청시)으로 되돌아가고, 3대 태종(방원)이 도읍을 다시 한양(제남시)으로 옮기면서 또 다른 궁궐을 짓는데, 이것이 창덕궁으로 1404년(태종 4년) 10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10월에 대체로 공사가 마무리된다. 이번 기행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창덕궁은 내성인 표돌천 경내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고, 이곳에서 흐르는 물길은 내성의 해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선초기와 조선중후기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1392년 대륙에서 시작된 근세조선은 1412년부터 1427년에 걸쳐 한반도의 서울로 도읍지를 옮긴다. 이때 고려의 유물과 유적 중 옮길 수 있는 것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옮길 수 없는 궁궐과 대규모 궁성, 내성, 외성 및 사찰 등은 어떻게 했을까? 한번쯤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여기서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어 의문이 남는 부분이 생긴다. 이때 통째로 빠져버린 지명도 있어 고려의 지명은 근세조선의 지명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이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도읍 송경(임청시)에서 한양(제남시)으로 천도하기로 하고 지은 궁궐이다. 1395년(태조4년) 9월 29일에 새로 지은 궁궐을 살피고는 잔치를 베풀고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는데 정도전은 시경과 주아(周雅)편의 한 구절을 인용, '만년토록 큰 복(福)을 누리리라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새 궁전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경복궁으로 정해 올려 임시거처에 살던 태조가 3개월 후인 12월 28일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면서 궁성 쌓는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곧 궁성 쌓는 일을 끝내게 된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12년(1412년)에는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크게 다시 지었는데 이곳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때까지의 사실은 대륙조선에서 일어났던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경회루(慶會樓)는 대명호반 경내에 있으며 현 북급각 인근의 건축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서에는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워져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 경회루라고 소개했다. 현재 대명호 북급각의 용도와 매우 흡사하다. 북급각 인근 호반에는 각종 정자와 종루, 목조이층의 거대한 루들이 즐비한데 이번 기행에서 우리가족들만이 유일하게 공연티켓을 구입하여 오랫동안 중국전통공연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무희들의 노래와 만담형식의 공연극이라 실망이 컸던 곳이 북급각이다. 다시 사서를 살펴보면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고 한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현재의 반도조선으로 건너와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는데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사료는 세종이 근정전을 고치고 사정전을 다시 짓고 광화문을 고치는 등 전각 등을 계속 신축했다고 한다. 대륙조선에서 반도조선으로 강역을 이전한 세종은 이때부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면서 대륙과 반도의 이질적인 언어와 풍습, 천문과학이나 농사방법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이후 성종 6년(1475년)에는 경회루를 개축, 연산군 12년(1506년)에는 경회루 연못에 만세산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도읍 송경(임청시)에서 한양(제남시)으로 천도하여 지은 경복궁과 현재의 경복궁은 엄연히 다른 궁궐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대륙조선의 경복궁 위치는 어딜까 궁금했다. 내성을 중심으로 궁성의 위치를 살펴보니(산동성 제남시 지도참조)는 바로 대명호를 낀 남쪽, 현 산동성 제남시 중심부인 성청주변의 오래된 목조건축물들이 궁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은 제남시대를 아우르는 외곾지역으로 추정된다. 헌데 앞으로는 그 위치마저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궁성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이미 났고, 남아있는 건축물마저도 도시정비로 인해 헐릴 위기에 놓인 것 같다. 몇 년전 산동성 제남시를 방문했던 역사연구가는 경복궁을 찾았으나 건물출입은 제한되어 있어 그 옆 신축아파트 공사장을 올라가서야 간신히 그 윤곽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궁궐다운 면모는 잃었으나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축물들이 초기에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나마 조선초기의 정궁의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으로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중국은 자신의 역사와 관계가 없는 문화적 유산들은 바로 없애지 않고 인근에 코크리트구조물로 재현시켰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재건축 할 때 아주 없애는 형식을 취한다고 하니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기가 점점 더 어려울 듯하다.

   
▲ 대명호반 주위는 아담한 고택들과 화원, 바위들, 나무들로 포근한 느낌을 준다. 북급각 주위로 역하정(歷下亭)이 멀리 버드나무 숲 속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구곡정과 창랑정 등도 들러보았다.

배낭을 맨 가족들이 산동성의 중심 대명호에 들어서니 아침날씨는 싸늘했다. 이곳에서 가장 적막하고도 조용한 겨울을 따뜻한 마음의 평정을 느끼며 1년 동안 보냈다는 중국의 저명한 작가 라오스어(노사)의 '지난의 겨울'이 솔직히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만난 노인이 한손엔 물통 그리고 또 한손엔 커다란 붓을 들고 보도에다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 것에 모든 것은 마음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분은 매번 종이를 아끼고 먹물을 아끼는 의미로 환경친화적인 취미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시와 산의 절반은 호수인 이곳은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신과 마음을 변화시켜 여유로운 삶을 만들었을 것 같다. 대명호의 둘레는 대략 5km이며 뱃놀이하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능수버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적격이다. 대명호 안에는 여섯 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역하정이 있는 섬이다. 제남 곳곳에서 흘러나온 샘물들이 모여서 거대한 대명호를 만들고 사람들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 아름다움을 풍류로 노래했던 것 같다. 헌데 현대적인 놀이시설들과 노점상, 호수위에 플라스틱 오리 배들과 이와 유사한 기구들이 많아 눈살을 찌푸렸다.

제남의 겨울은 춥고 건조했다. 이러한 날씨 탓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연꽃들로 화려한 장관을 이루었을 것 같은 호수에는 빛바랜 연잎들이 바람에 반가움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 같다. 뱀과 개구리가 살지 않는다는 이곳 버드나무 숲길을 중심으로 고택들이 줄지어 있다. 호수가를 바라보는 오래된 건축물 중 찻집에 들렀다. 보통의 찻잔보다 큰 유리잔으로 된 잔 안에는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많은 양의 차가 들어 있었고, 물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커다란 보온 통이 딸려 나왔다. 뜨거운 차를 가족들이 돌려 마시고나니 을씨년스럽던 추위는 갔다. 이곳 풍경을 즐기려면 초여름이 제격이지 싶다. 삼면이 수양버들, 사면에는 연꽃들이 장관을 연출하는 대명호의 연꽃과 버드나무는 제남의 시화(市花)와 시수(市樹)라고 한다.

대명호반 주위는 아담한 고택들과 화원, 바위들, 나무들로 포근한 느낌을 준다. 역하정(歷下亭)과 구곡정, 창랑정 등을 거쳐 대명호반에 있는 북급각에 들렀다. 원대에 창건된 도교사원이라고 하나 우리의 경회루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각내에는 현무신상과 천병천장이 있고, 현재 그곳에서 출토된 문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우리가족들은 북급각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유일하게 관람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인근의 종루와 사원, 성벽과 연결 지어진 목조이층으로 된 누관(樓觀)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서는 대명호반이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전망이 좋았다. 촘촘한 고목 숲과 고택들이 잘 어울리는데 그곳 성루 밑으로 물길이 흐르고 있었고, 누관(樓觀) 밖으로는 제남시의 허름한 시내가 조망됐다. 여유로운 제남의 시인들이 달밤에 대명호반에 나와 술을 나누며 시를 읊기에 안성맞춤이다. 북급각 공연을 마치고 대명호 일주는 공사 중인지라 포기하고 동문쪽으로 천천히 걸어 이동한 다음 대명호 남쪽 화원루변에 있는 부용가라는 전통거리로 향했다.

   
▲ 샘물의 도시 제남시의 흑호천은 한가로이 나룻배를 짓는 이들과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여러 척의 관광선들, 각종 석축과 조경수들, 옛 고택과 정자들, 샘물을 받아가는 시민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워보였다.

전통의 거리는 우리네 인사동 거리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했다. 특히 먹거리와 곁들인 전통문화거리는 삶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용강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내올 것 같은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했는데 웬걸 탕수육인줄 알고 시켰던 음식이 커다란 탕수어가 되어 통째로 나왔는다. 이것저것 시켜먹고는 시내중심을 거쳐 제남에서 가장 크다는 천성광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포돌천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갑자기 흑호천으로 향했다. 표돌천은 입장료가 비싼 반면 흑수천은 공짜라고 그리로 인도하는 꼼꼼한 안내원 덕이다. 어느새 발길은 샘물을 형상화한 천성탑을 거쳐 연꽃을 형상화한 조형배치로 가득한 광장분수대를 넘어 흑호천변을 거닐었다.

우리네 청계천은 콘크리트로 공구리를 부어 만든 수로에 인공적으로 한강물을 펌프로 퍼 나르는 천이지만 이곳은 우리와는 달리 샘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물길이 만들어진 천이다. 흑호천은 금선천의 동쪽에서 흘러나오는데 깊은 동굴과 같은 형세를 지니고 있으며 이 물줄기는 세마리의 호랑이 머리를 통과하여 흘러나오는 장관을 연출한다. 도시를 푸른 비취빛 주단으로 수놓은 샘물은 표돌천과 흑호천을 돌아 대명호에 이르는데 샘물 도시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한낮의 흑호천은 한가로이 나룻배를 짓는 이들과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여러 척의 관광선들, 각종 석축과 조경수들, 옛 고택과 정자들, 샘물을 받아가는 시민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워보였다.

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으로 산동성 제남시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그중에서 조선초기의 한양의 궁성위치로 산동성 정부청사가 있는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었고, 내성은 대명호를 끼고 해자주변을 둘러싼 녹지공간인 것, 외성은 제남시내 전체로 구분할 수 있었다. 참고로 개경외성의 둘레길이 2만9,700보, 나각(羅閣)이 13,000칸에 이르는데 비하여 조선초기의 한양은 나성보다 작은 규모로 둘레 20리 42보, 나각(羅閣)이 2,600칸, 문20개의 내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 흑호천 물길이 동쪽에서 서쯕으로 돌아나가는 지점에서 발길을 멈추고 커다란 성루(城樓)로 올라와 그곳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다음 목적지인 천불산으로 향했다.

   
▲ 천불산(千佛山, 치엔포샨)은 해발258m로 그다지 높지 않으나 조경이 잘 가꾸어진 예술의 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천불산(千佛山, 치엔포샨)은 해발258m로 그다지 높지 않으나 조경이 잘 가꾸어진 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순경산(舜耕山)이라고도 불리는데 제남시 외곽에 위치하여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허리에 있는 흥국선사까지는 겨울철 2시간정도의 걷기명상장소로 적당하며 제법 땀이 베일정도의 운동량이다. 늦은 오후 좀 싸늘하다 싶지만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줄지어 서있는 고택경내에는 한가로이 향불을 피우거나 상점을 열고 있는 곳이 많았다.

입구에 재미있게 도열한 12나한상과 도처에 불교사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가 오래됨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석굴(石窟)은 그 파손정도가 가장 심한 편이라고 한다. 현재 천불산공원으로 조성해 시민의 휴식공간과 유람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사원으로 오르는 나무마다에는 빨간 색 리본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빌면서 나무 가지에 묶어놓은 리본이라고 한다. 가정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남녀의 사랑을 기원하는 예쁜 단풍이다.

산중턱에는 불교사원인 흥국선사는 사뭇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아니면 이궁(離宮)처럼 느껴졌다. 경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관음당(觀音堂), 대화정(對華亭), 미륵전(彌勒殿)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흥국선사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수(隋)나라의 10개 불상이 보존되어 있는 천불애(千佛崖)와 그 동향으로 용천동(龍泉洞), 극락동(極樂洞), 여조동(呂祖洞) 등의 명승지가 있었다. 또 흥국선사의 동쪽에 자리한 역산원(歷山園)은 유가사상과 도교사상, 불교사상 등 3개 종교가 합쳐져 있는 일대의 잡원(雜園)으로 원내에 순사(舜祠), 노반사(魯班祠), 문창각(文昌閣), 일람정(一覽亭) 등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어서 각기 다른 연대기의 조형풍미를 감상할 수 있다. 천불산 중턱에서 바라다 본 제남은 전통모습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빈 자리에 현대화된 빌딩과 아파트들이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황하가 주변을 허리띠처럼 감싸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천불산을 하산하는 길에는 좀 비싼 편이지만 날씨도 그렇고 시간도 별로 없어서 케이블카를 탔다. 천불산을 오를 때와는 달리 하산길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산 허리춤의 사원은 측백나무, 편백나무, 화백나무, 서양측백나무 등 향나무들이 우람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르면서 만난 와불과는 달리 기묘한 대불 몇 개가 산 밑에 자리를 튼 것이 신기했다. 천불산을 빠져나와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로 이동중에 운전사는 250위안이면 2시간 거리인 곡부시를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해와 한 참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동의했다. 빠르게 제남을 빠져나온 택시는 고속도로 주변의 황량한 들판과 구릉지, 황량하고 초라한 마을들과 과수원들을 지나 곡부(曲阜:QuFu 신도안)시로 향했다.

우리 땅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은 근세조선의 역사가 대륙 산동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렵사리 간파한 재야 역사연구가의 조언이 단서가 된 것이다. 조선초기 한양의 강역을 대략이나마 확인했다는 것이 다행이고, 그 당시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등의 현장을 찾게 된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이후 찾게되는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의 충청주도 곡부(신도안), 제녕(부여), 추성(공주)을 비롯하여 양광도인 태안(광주)이 자리한 곳곳의 역사적 숨결들도 함께 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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