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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 감추어진 근세조선사의 비밀을 찾아서[역사와 만나는 논픽션 가족문화기행] 산동성 곡부(曲阜)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도읍지로 건설된 신도안 이었다.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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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3월 31일 (화) 18:45:50
최종편집 : 2009년 04월 02일 (목) 10:19:59 [조회수 : 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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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의 무대는 고도(古都) 곡부시로 산둥성[山東省] 제녕[濟寧] 북동부에 위치한다. 이번 논픽션 기행을 통해 너무나도 몰랐던 조선의 역사를 만나고 대륙의 역사와 만나고 있다. 

중국대륙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광대한 땅에는 현재 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 13억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곡부라는 명칭은 수(隋) 때부터 쓰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진포[津浦] 철도 곡부(취푸) 역(驛)의 동쪽 10km 쯤에 있는 인구가 6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징후철도[베이징~상하이]가 시의 서쪽으로 지나간다. 이곳은 명나라 이후 노나라 곡부로 알려지면서 공자의 고향으로 최근 유명해진 곳이다.

   
▲ 역사와 만나는 논픽션 가족문화기행,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주변 옛 지명도

곡부시 북쪽 1km 지점에 공림(孔林, 공자의 무덤)이 있는데 현재의 시가지는 한(漢)나라 때 성벽의 남서쪽 일부분에 해당한다. 공자의 유적지에는 대규모 문묘(文廟)가 세워져 있고(주나라 때 창건했다함), 예로부터 중국 예교(禮敎)의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사실로 믿기 어렵다. 곡부에서는 석탄, 기계, 면방직, 화학, 제주 등의 산업과 인근의 농촌에서 생산되는 밀, 수수, 땅콩 등의 농산물이 주요한 생산품이다. 이곳의 대표 문화재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및 안묘(顔廟), 주공묘(周公廟), 소호능(少昊陵:中國金字塔) 등이 있다.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춘추(春秋)》에서 유래되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는 공자는 경륜을 펴게 해 달라고 진ㆍ초ㆍ연ㆍ제ㆍ한ㆍ위ㆍ조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진언을 하는데 모두 거절당한다. 중국역사 이래 공자사상은 낡은 봉건사상으로 간주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거 한과 당 때는 노·장의 도교사상이 지배했고, 송과 명나라 때는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유학(공자)을 받아들여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는데 청나라 때 와서는 실학 및 고증학을 내세우다가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할 당시에는 아예 공자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고,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대륙을 광기(狂氣)로 물들였던 문화대혁명 동안에는 공자라는 사상은 최악의 낡은 가치관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이 시장경제를 확산하면서 공자사상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2007년 7월 25일자 아시아판 기사에서 최근 중국 사회에 ‘공자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자학교는 중국내에만 초ㆍ중등 및 대학과정에서 이미 수천 개에 이르고 대학 교육과정자체에 ‘공자학’을 새로운 전공과목으로 개설하고, 중국 정부차원에서 전 세계에 200여개 공자학교를 세워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전파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다한다. 이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거의 100년 만에 이웃 간 갈등을 최소화하고 위계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중국정부 나름의 속사정 때문이리라.

   
▲ 곡부에서의 첫 째날, 좀 쌀쌀하지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시장거리를 지나 현성의 동문으로 입성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남루한 행세를 하였고,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제남시 천불사에서 느즈막한 오후 출발한 택시는 시내중심가의 고가도로를 가로 질러 서쪽 길로 접어들었다. 고속도로를 오르기 전 LPG충전소를 잠깐 들린 후 곧장 공자가 태어났다는 곡부로 향했다.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달려 2시간 지나니 곡부시내로 접어들면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곡부시 공묘와 공부, 공림으로 향하는 밤거리는 오래된 전통도시다움이 사라지고 현대식 콘크리트에 전통기와만을 얹은 모습으로 조화롭지 못했다. 더욱이 화려한 네온사인의 거리가 주는 이미지는 별 인상을 주지 못했다. 여기에다 택시기사는 자기가 호텔을 잡아 주겠다며 곡부시내 택시기사를 엮어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고는 호텔로 안내했다. 참고로 택시기사는 택시요금 외에 호텔 알선료까지 챙긴 것으로 짐작된다.

첫 번째 호텔은 전망이 좋았으나 내부시설이 별로라 퇴짜를 놓았더니 두 번째 호텔로 이동했다. 성곽으로 둘러진 동쪽출입문 입구에 있는 호텔이었다. 일단 호텔방을 확인하니 그런대로 깔끔해 2인실과 3인실 방 한 곳씩을 380위안으로 흥정하고는 짐정리를 끝내니 9시가 넘었다. 야심한 밤, 주변의 음식점을 찾았으나 별로 내키지 않아 우리네 마트 같은 곳의 이층 분식점을 찾아가 국수 한 그릇씩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곡부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볼 일이 없는 평온한 날이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이 잔잔하게 그려졌던 밤이었다.

다음날 좀 쌀쌀하지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시장거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시장거리와 주변하천은 쓰레기들로 어수선했고, 주민들 대부분은 남루한 행세하였는데, 이동은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아침식사도 할 요량이었지만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길거리 노점상에게 사탕 귤이라 불리는 과일을 사가지고는 성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안의 거리풍경은 스산했지만 공자의 고향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유교의 개조이자 동양 최고의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는 성이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는 주(周)의 영왕(靈王) 20년(B.c.552) 노(魯)나라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성안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자전거 택시기사들로 곤욕을 치를 찰라 간신히 식당을 찾아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이곳이 초행인지라 마땅히 안내받을 곳도 없어 자전거 택시기사와 협의를 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곳 여행지를 차례로 이동시켜주고는 다음목적지인 제령시로 가는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조건이다. 처음 이들을 믿고 따라 나섰던 곳이 자신들이 잘 안다는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를 얹은 공자연구소와 박물관인지라 사양하고는 곧장 공림으로 이동했다.

   
▲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무덤이라는 공림, 이곳 입구 광장으로 들어서니 도장과 서예도구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은 노점들이 제법 관광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대륙에 감추어진 근세조선사에 대한 실체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더우기 옛 강역의 지명을 그대로 그려 넣기란 어려운 점이 많았다. 수백 수천 년의 역사서(사기, 한서, 당서, 송사, 요사, 원사, 명사, 일본서기,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와 관련 자료들을 제대로 접하여 읽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학식으로 무장한 그래서 딱딱하게 굳어진 주류 '강단 사학계'의 무감각함과 객관성 없는 지나친 편견만을 고집했던 비주류 '재야 사학계'의 역사관이 문제였다. 앞으로는 '재야 사학계'가 의심스러운 대목을 꼬집어 의문을 제기하면 '강단 사학계'가 긍정적인 사고로 받아들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대안적 역사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기서 대륙에서 건국한 근세조선이 한반도로 이전했다는 견해는 실로 충격적이다. 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에서는 공자의 사당이라고 하는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다던 공부(公俯), 공자와 공자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는 공림(孔林) 등 곡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역사관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중국은 문화혁명시기 공산주의에 의해 자기 것이 아닌 모든 문화유산은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그 때 도시 전체가 사라진 곳도 있다. 이후 1980년 개혁개방정책으로 일부문화유적은 복원되었지만 대부분 회교사원이나 유교 아니면 도교, 아니면 한ㆍ당ㆍ송의 역사와 관련된 사당 등으로 바뀌어 그 실체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을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 이번 역사와 만나는 가족문화기행에서는 공자의 사당이라고 하는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다던 공부(公俯), 공자와 공자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는 공림(孔林) 등 곡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역사관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산동성 일대는 본래 대륙백제(서기 5세기 후반이후 7세기 후반)의 중심지로 지금의 곡부시(曲阜市)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던 소도읍 이었다. 하지만 바로 서쪽에 맞붙어 있는 연주시(兗州市)는 백제 때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던 최대사찰 왕흥사를 건립했던 곳이다. 지금 연주에는 소릉대(少陵台)와 청연각(青莲阁) 및 흥륭탑(兴隆塔)을 비롯한 왕인(王因), 서오사(西吴寺), 상원(桑园) 등 웅장한 규모의 사찰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 충남 부여에는 왕흥사라고 추정하는 터가 있을 뿐 정작 그곳이 백제의 왕흥사인지는 알 수 없다.

백제의 국찰(國刹) 왕흥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위치는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과 낙화암(落花岩), 고란사(皐蘭寺)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고 한다. 왕흥사는 600년(무왕 1)부터 634년(무왕 35)에 걸쳐 지은 백제의 대사찰이며, 당시 법왕은 30여 명을 출가시켰다고 전해진다. 백제 멸망 뒤 이 절에 남아 있던 백제 병사 700여 명이 신라의 태종무열왕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 폐허가 되었단다. 왕흥사는 백제의 사찰 중에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 절이 물가에 있고 단청이나 장식이 크고 화려하며,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절이 산기슭에 있고 물가에 접해 있으며 꽃과 나무가 고와 사철 내내 아름답다. 왕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그 풍경을 감상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산동성 연주시를 꼭 한번 찾아가보길 바란다.

   
▲ 공림으로 향하는 길은 고요한 명상 길, 공묘와 공부에서 약간 떨어진 공림은 왕궁에 딸린 후원 같았다.

이번기행에서 또 다른 핵심은 올바른 강역이해다. 근세조선사 이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이라는 책의 도움이 컸다. 일부내용을 발췌해 보면 "건국 이후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조선은 기존 한반도의 역사를 없애버리고 대륙에서 이루어진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적용시키는 작업을 실시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한반도로 묶어버렸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세종 때만 하더라도 대륙의 역사를 감추거나 없앨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리 강역 옛 지명의 유래가 정확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반도 역사와 대륙의 역사를 구분 짓게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고서(古書) 수거령'이 내려졌던 세조 때부터 상고사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고, 예종을 거쳐 성종 때에 이르러 반도사관은 근간을 갖추게 되었다. 대륙에서 반도로 이동한 근세조선의 옛 땅을 차지한 명나라가 그곳을 하한족의 역사 강역으로 둔갑시켰듯이 한반도로 이주해 온 조선 역시 같은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여기서 원래 노나라의 곡부는 사천성에 있었으나 14세기 말 대륙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정권을 잡았으나 15세기 초 명나라에 밀리면서 정확히 세종 때 반도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 때 반도는 탁라(乇·羅)국의 강역이었으나 탁라(왕족은 고씨, 부씨, 양씨)국의 핵심 집권층들을 죽이거나 제주(濟州)도로 몰아낸다. 이 때 반도조선의 강역은 북동으로는 연해주로부터 남서로는 간도(동ㆍ서ㆍ북), 간도에서 남서로 요동반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마지막까지 영토로 확보하고 있던 산동성을 명나라에게 내주고 명나라는 서쪽의 지명을 고스란히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조선건국시 신도안이 곡부로 바뀌어 불려지게 된 것이다. 반도조선은 산동성에 있던 신도안을 지금의 충남 계룡시 신도안으로 지명을 옮긴다. 이러한 과정이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최초 도읍을 정하고 1년여 동안 궁궐과 성곽을 지었다는 위치에 대한 의혹은 어느 정도 풀린다.

   
▲ 곡부에서 본 '영성'이란 글귀는 중국의 고대 천문학에서 학문의 별을 뜻하며, 여기서는 공자가 바로 학문의 신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7일 대륙송경(산동성 임청시)의 고려(高麗) 왕궁인 수창궁(현 회교사원으로 쓰이는 청진사)에서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한 다음 천도(遷都)할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에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궁궐(宮闕)과 도성의 축조에 착수한다. 이 때 권중화(계룡산 길지설(吉地說))가 궁궐을 직접 짓게 된다. 기록을 보면 1393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태조 일행은 계룡산 신도안 새 도읍지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진행하는데 태조가 직접 여러 신하들과 함께 산수형세를 살펴보고,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 ·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 ·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에 명하여 조운(漕運)의 편부(便否), 도로의 험이(險易) 관계를 조사하게 하며, 또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 및 남은으로 성곽의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10일에는 권중화가 신도에 건설할 종묘 · 사직 · 궁전 · 조시(朝市)의 형세도를 작성하여 드리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이 노끈을 가지고 실지 측정을 하고, 여기서 계룡산 하의 신도설정(新都設定)을 결정한다. 그리고 태조 일행의 귀경과 함께 김주(金湊) · 박영충(朴永忠) · 최칠석(崔七夕) 등의 관원으로 현지에 남아서 신도영건(新都營建)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 그 해 3월에는 신도 기내(畿內)에 속할 주현 · 부곡 · 향 · 소 등 81개소를 정하고, 8월에는 경기내(京畿內)의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하여 민정에게 나누어 주는 등 건설공사와 함께 행정관계의 여러 가지 조치도 진행하였다라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상언에 의하여 계룡산의 도읍이 불가함을 말하였는바 첫째 도읍은 나라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역이 남쪽에 치우쳐 있어 동·서·북면과 거리가 멀다. 둘째 계룡산의 지리는 산은 건방(乾方)(서북방)에서 왔는데 물은 손방(巽方, 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이것은 송조(宋朝) 호순신(胡舜臣)(申)의 말하는 '수파장생 쇠패입지(水破長生 衰敗立至)'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신법(地理新法)"에 신도공사는 곧 중단되고, 새로운 땅을 찾으니 불교계 무학대사의 인왕산과 유교계 정도전의 북악산을 놓고 고심하다가 정도전의 북악산 밑을 도읍으로 정한다. 

   
▲ 오래된 미래궁 공묘는 성벽 같은 요새에 둘러싸인 대성전까지 10개의 문을 통과해야 도착할 수 있으며, 화려하고 뜻 깊은 문구들을 살펴보면 제1문이 금성옥진방이다.

이로서 태조(太祖)는 즉위 3년에 한양 도읍을 결정하여 10월에 천도하고 다음해에 경복궁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여러 대신들과 권문세가들의 근거지였던 한양을 버릴 수 없었음이리라. 그 당시 신도안은 지금 공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행정수도이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대륙에서 반도로 옮길 때 수도서울의 도읍은 세종 때 졸속으로 건설이 추진되어 반조조선의 경복궁이 그 창건 초기부터 조선조 멸망까지(1411년~1910년) 조선의 정궁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불운의 궁이 되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에 사람이 기거했던 기간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의 위치와 건축형태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기에 오랜 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던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궁인 것이다.

곡부에서 첫 번째로 들른 곳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는 공림이었다. 공림의 커다란 관문이 일행을 반겼고, 천천히 걸으면서 입구 광장으로 들어서니 도장과 서예도구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은 노점들이 제법 관광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단 세군데 입장료가 105위안(약 13,000원)으로 꽤 비싸다는 것을 알고는 공묘는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입구주변과 마을들이 줄지어 있는 공림주변의 농촌풍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예상보다 허름했다. 매일 끊이지 않는 관광객들로 현란하게 꾸며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곳의 인구 중 반은 공(孔)씨 성을 가졌고, 관광사업과 농업 외에 별다른 소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자연히 소박한 생활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도시다.

   
▲ 공부는 공묘 동쪽에 있으며,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공씨 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16만㎡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다음 목적지는 공림에서 자전거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공부로 향했다. 공부는 관광객들로 만원이라 붐볐다. 공묘 바로 옆 담장을 사이에 두고 비교적 큰 규모의 고건축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입구로부터 오밀조밀 늘어선 고택 하나하나에 애정을 가지면서 차근차근 다양한 공간들의 쓰임새를 생각하면서 돌아보았다. 공부는 1038년에 세워져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이라고 하는데 공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공씨 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16만㎡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중앙의 대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나뉘어 주 공간과 부속 공간, 사람과 물건의 공간, 큰 공간과 작은 공간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미로다. 대대로 공자의 적자손(嫡子孫)이 연성공(衍聖公)의 작위를 지니고 세시 제사를 올리며 거처하던 곳이란다. 1055년 송(宋)대의 인종제가 공자의 제46대 손자에게 연성공(衍聖公)을 봉한 바 있고, 공자의 후손들은 이 작위를 민국(民國)연간까지 32대에 걸쳐 880년 동안 계승하여 왔단다. 현재 공자의 자손들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이번기행에서 또 다른 핵심은 올바른 강역이해다. 곡부가 공자의 사당 보다는 한 나라의 도읍으로서 왕성 및 왕궁 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중국 역사상 제일 긴 봉건귀족의 장원이자 봉건사회의 관청과 저택이 합쳐진 전형적인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허나 공부를 납득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조선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면서 우리에게 공자가 떴지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헌데 천하제일가라고 불릴 정도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택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점과 미로 같은 전각 군들이 거대한 벽화를 이루는 점, 공자의 후손이 황제만이 머물 수 있는 대성전으로 집무를 보러 갔다니 이해할 수 없다.

공부의 고택들은 비록 많이 퇴색되어 그 빛깔을 잃었지만, 옛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그 의미가 더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공부의 후원에는 유리온실과 찻집 등이 들어서 있었고, 후원 뜰에는 아기자기한 정원들로 여유로워 보였다. 뒤로 난 쪽문으로는 잘 정돈된 주택과 정원이 인상적이었으나 더 이상 공안의 제지로 관람이 허락되지 않아 발길을 정문으로 향했다. 앞쪽에는 관청으로 보이는 고택들과 뒤쪽에는 사택으로 보이는 공부는 과거에 무엇을 위해 존재해 왔는지 말이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벽돌을 찍어 건물의 벽체를 만들고 기와를 얹은 옛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600여년의 시공을 건너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대륙조선의 생활, 문화가 곳곳에서 그려지는 숨결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대륙조선의 최초 도읍지 신도안을 그려봤다.

   
▲ 여기서 원래 노나라의 곡부는 사천성에 있었으나 14세기 말 대륙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정권을 잡았으나 15세기 초 명나라에 밀리면서 정확히 세종 때 반도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공부를 나오자 공묘 후문이 바로다. 이곳에서 공묘 정문으로 향하는 길은 10분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길가엔 좌우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묘 동문을 거쳐 현성 밖으로 향하는 정남문이 장엄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오래된 미래의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붉은 서체로 만인궁장이라 쓴 글로보아 공자의 학문이 깊고 심오했음을 강조한다. 성벽 같은 요새에 둘러싸인 공묘는 대성전까지 10개의 문을 통과해야 도착할 수 있다. 화려하고 뜻 깊은 문구들을 살펴보면 제1문이 금성옥진방이다. 악기를 연주할 때 '금성' 처음과 '옥진' 끝을 나타내는 악기소리이다. 제례음악이 금속(편종)에서 시작하여 옥으로 만든 편경으로 끝나듯이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했다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오래된 측백나무들이 잘 가꾸어진 공묘에는 제2문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현판이 걸린 영성문이 자리했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이문은 4주3문으로 만들어진 아픔다운 자태를 뽐내는 예술작품이다. '영성'이란 중국의 고대 천문학에서 학문의 별을 뜻하며, 여기서는 공자가 바로 학문의 신이란 뜻이다. 제3문은 태화원기로 공자의 사상이 태평한 세상, 조화로운 사회와 만물이 번영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제4문은 지성묘방으로 처음에 신성묘방에서 청나라 옹정제 때 지성묘방으로 이름을 바꾸고 의미를 황제가 공자를 기려 성인을 의미하는 문선의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제5문은 성시문, 제6문은 홍도문으로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 아닌 도가 사람을 넓힌다는 뜻이다. 제7문은 대중문으로 공자의 중용사상을 발양하는 의미이고, 제8문은 동문문, 제9문은 금모천지방이다.

공묘와 공부는 곡부성내에 위치해 있지만 공림은 성밖으로 약 1.5km쯤 떨어져 있다. 공림을 들어서는 순간 수목원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황궁에 딸린 숲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공림을 공자묘를 비롯해 공자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무덤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 명나라와 근세조선의 강역지도, 건국 이후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조선은 기존 한반도의 역사를 없애버리고 대륙에서 이루어진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적용시키는 작업을 실시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한반도로 묶어버렸다.

아래는 정우락 영신대 교수 답사기를 참조하였다.

"공묘에서 특이한 것은 대성전 앞에 있는 10개 기둥, 기둥마다 2마리의 용이 상운 속을 날아오르고 있는데 이것 역시 기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공묘는 공자의 제사를 받드는 묘당(廟堂)인데, 옛날 노성(魯城)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공묘의 발전단계는 대체로 넷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초건단계(初建段階)로 삼국시대 위나라 황초(黃初) 2년(221) 처음 공묘가 세워진 시기이다. 공자가 거처하던 3간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공자 생전의 옷과 관, 거문고, 수레, 책 등을 보관했던 간소한 형태의 사당이었다.

둘째는 시수시폐단계(時修時廢段階)로 이 시기에는 위나라 황초 2년에 처음 공묘가 건립되었으나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1018)에 이르기까지는 보수와 황폐가 거듭되었다. 서진말(西晉末)에는 공묘가 더욱 황폐화되었고, 남북조에서 수당에 이르기까지 비록 중수가 끊이지 않았으나 공묘는 비루(卑陋)하여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셋째는 확대구제단계(擴大舊制段階)로 공묘가 옛 체제에서 많이 확대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송나라 천희연간, 금나라 명창(明昌) 2년(1191), 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4년(1300), 원나라 순제(順帝) 지원(至元) 2년(1336)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사당과 전당이 중수되고 낭무(廊) 등이 대대적으로 건축되었다.

넷째는 규모완성단계(規模完成段階)인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규모로 공묘가 완성된 시기이다. 이 때 건물은 명·청 양대에 걸쳐 앞 시대의 것을 중수하거나 새로 지어 그 수와 넓이를 더했다."

이곳에서 공자는 이미 황제를 넘어 완전한 신으로서 대우를 받고 있는 모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실상은 공자에 대한 사상은 중국인들이 아닌 우리가 수백년 이상 정성껏 받아들이고 모셔왔던 것이 아닌가. 사실 중국인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만치 공자의 위치를 높게 보지 않는 것 같다. 현재 삼공에 있는 수많은 비석들이 엉성하게 복원되어 있는 등 복원기술이나 돈이 없어서 그렇게 엉성하게 복원한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중국에는 유교(공자)관련 제사 방법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한때 공자에 대한 제사방법에 대해서 한국의 성균관에서 배워갔다고 한다. 이는 문화혁명이 모든 유교관련 자료를 소거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 우리와 같은 공자숭배에 대한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하튼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의 하나로 공자의 고향이라는 이곳에 대해 연구를 좀 더 해야겠다. 곡부는 정말 조그만 도시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두르면 저녁까지는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곡부의 공묘(孔廟)를 황궁과 황성으로 보는 이유는 궁전과 같은 장대한 건축물로서 북경의 자금성(紫禁城)과 태산의 대묘(岱廟)와 함께 중국 3대 건축물의 하나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며, 본전인 대성전은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에 이은 중국 제2의 건축물로 10개의 기둥에 용이 조각돼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중국에서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때문에 황제를 위한 건축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공묘관문이 9개로 황제만이 사용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공묘의 면적은 22만 평방미터에 달해 궁궐형식의 웅장함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더욱이 여러 차례 중수와 중창을 거쳐 명대(明代, 1368~1644)중반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전각이 이루어졌다니 같은 시기 이성계가 세운 조선최초의 도읍이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결론적으로 중국인들은 곡부의 공자사당(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을 세웠다함)을 2,600년 전 건축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보수와 증축을 했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다만 600년 전 조선왕조를 건국(1392년)한 태조 이성계가 1393년 음력 정월 직접 계룡산에 행차하고는 그해 3월부터 1년여 동안 건설하게 한 새 왕조의 첫 도읍지 왕성 및 왕궁건립 터였다는 사실만은 지울 수가 없다. 우리가족은 공묘에서 나와 왕성문인 정남문을 통과하여 바로 인근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향해 다음 목적지인 산동성 제령시(濟寧市)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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