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明沙十里)를 걷는 목사 

그런데 명사십리가 원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엔 “밝고 고운 모래가 10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는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수욕장이 수두룩하다. 전라남도 완도에는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니라 명사십리(鳴沙十里)가 있다. “파란파도가 하얀 모래에 부디칠 때마다 슬프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것이다.

킹사이즈의 나라 미국은 더하다. 내가 사는 파라커웨이는 해수욕장의 길이가 명사 10리를 넘어 명사 50리로 뻗어나간다. 동쪽의 애틀랜타 브릿지를 건너면 비치는 명사천리(名沙千里)가 되어 롱아일랜드섬을 일주하고 있다.

이번 돌섬통신은 나의 명사십리 풍류기. 오전에 채소밭에서 한 시간쯤 땀을 흘린 후 나는 비치를 걷는다. 해변의 여인처럼 혼자 걸어야 좋다. 그래야 황진이도 생각할수 있으니까. 50리 코스도 걸어봤지만 10리길이 더 좋다. 명사십리니까. 모랫길을 따라 동쪽으로 십리를 걸으면 애틀랜타 브릿지를 만나게 된다. 파란 물결위에 무지개처럼 떠있는 다리모습이 아름다운데 배가 들어올 때는 더 아름답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다리가 열리면 하늘 문이 파랗게 열리기 때문이다. 애틀랜타브릿지 까지 걷는 게 나의 명사십리코스다.

모래 위를 걷노라면 발자국마다 지나간 생애의 발자취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나는 다시보고 싶은 영화를 감상하듯 지난생애를 추억하면서 모래를 밟는다. 내가 내 생애를 다룬 영화의 주연이 되어 행복에 젖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나는 윗몸 들어내기를 싫어하는 남자애였다. 젖이 네 개였기 때문이다. 수영을 할 때면 애들은 “젖 넷 달랭이 젖 넷 달랭이”하면서 놀려댔다. 지금도 내 몸에는 두 개의 젖 아래로 작은 두 개가 또 있다. 중학교 때였다. 신체검사를 하는데 검사를 하던 여선생님은 내 가슴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머, 얘는 젖이 네 개나 달렸네” 선생님은 얼떨결에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처녀선생님은 시골 안중에서 보기 드문 미녀였다. 나는 가슴이 터질듯, 견딜 수 없었다.

“처녀가 왜 남자의 가슴을 만져요?” 내가 소리치자 음악선생님은 더 놀라면서 얼른 손을 뗐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엄니, 엄니는 왜 젓이 네 개나 달린 저를 낳으셨어유?”
“그게 말이다. 너를 임신하고 엄마가 몹쓸병에 걸렸단다. 한의사말이 침을 맞으면 산모가 살고 대신 태아가 죽거나 병신이 된다는 거야. 할 수 없이 침을 맞았지. 그런데 너는 네 개의 젓을 달고 나온 거야.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도 신기한 생각이 들었어. ‘이애는 장차 두목잽이를 하겠구나, 장군이 되면 별 네 개짜리 대장이 될 것이고 목사가 되면 수많은 양들을 먹이는 부흥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뭐냐”

그 후부터 나는 젖 넷이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윗몸을 벗고 젓 넷을 들어낸 채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 70노인인데도 팬티만 입으니 맨발의 청춘이다. 대서양의 오존이 섞여있는 아침햇살이 내 몸을 휘감는다. 첨에는 끈적끈적하다가 감람유를 바른 듯 매끌매끌 향기롭다. 나드 향유 맛사지가 이처럼 향기로울까?

모래 위를 흐르다가 밀려가는 썰물을 따라가 얕은 물속에 발을 잠근다. 철 푸덕 찰싹! 바다 속의 기(氣)가 발바닥을 통하여 몸으로 올라온다. 오존이 섞여있는 바닷물에 몸을 적시면 웬만한 피부병은 거의 낫는다.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가 보인다. 이놈 게 섯거라! 게도 잡고 피부병도 고치고... 비가 오면 논가로 달려가 철벙거리면서 송사리를 잡던 어린시절이 생각나 즐겁다.

그래도 명사십리의 압권은 맨발로 백사장 걷기다. 물속에 있는 모래는 물먹은 콩크리트처럼 단단하다. 물기가 마른 백사장모래는 깨끗하고 곱기가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럽고 아름답다. 알고 보면 가장 민감한 곳이 발바닥이다. 입술보다 가슴이나 성기보다 더 민감한 곳이 발바닥이다. 어린시절 웃기기 장난을 할 때 발바닥을 긁어대면 깔깔대면서 떼굴떼굴 구르지 않았던가?

나는 맨발로 하얀 백사장을 걸어가면서 그녀와 나눴던 깊고 푸른 밤의 추억에 빠져버린다. 황진이의 명사십리처럼 꿈처럼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그러나 모랫길이 끝나고 파도소리가 밀려오면 명사십리에 수놓았던 추억의 발자국들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사랑도 성공도 한낮 모래성 쌓기 인 것을.

한 시간을 걸어 애틀랜타브릿지에 오르면 대서양의 억샌 바닷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돌아오는 길은 나무판대기를 깔아 만든 보드워크를 걷는다. 명사십리가 허무하다. 작자미상의 시를 읊어본다.(벧전1:24)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마라/ 명년3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한 조각 뜬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니
풀잎에 이슬이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물위에 거품이라 일장춘몽(一場春夢) 꿈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