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은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윤선도와 정철은 시골 바닷가로 쫓겨나 청산별곡(靑山別曲)과 어부사시조(漁父詞詩調)를 노래하는 바람에 명성을 떨쳤고요. 제갈량은 파서로 내려가 둔전(屯田)을 하면서 중원정벌의 군사력을 길렀지요. 목사님도 유명인사가 되려고 조각밭농사를 하는 건가요?”
휠체어를 타고 산책코스처럼 아침마다 들리는 서양노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농사짓는 농부가 아니라 밭에서 예술(藝術)이나 도(道)를 닦고 있는 도인처럼 보입니다. 잡초도 없고 채소들은 잘 자라는데 당신부부는 매일 아침마다 엎드려 있군요. 농사예술을 하시나요?”

고향의 어린 시절 나는 흙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農事天下之大本)이라지만 농사꾼은 천민이나 다름없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난 아버지가 농사꾼 이라는 게 창피했습니다. 아버지가 면장이나 지서주임 교장인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6년 동안 반장을 했으면서도 졸업할 때 까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학교에 올수가 없었습니다. 학부형회의에도 말입니다. 농사꾼 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아들의 심정을 당신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6년 동안 반장을 하게 된 것도 농사일하는 게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7남매인데 농사철이면 애어른 할 것 없이 논밭으로 달려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습니다. “셋째는 일하러 나오지 말고 집에서 공부나 하거라. 너는 반장이니까” 그 바람에 6년 반장 6년 일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로 올라가고 부터는 달랐습니다. 친구들은 서울중 경복중 용산중에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갔는데 난 아버지의 반대로 시골중학교로 떨어졌습니다. 낙향한 낙방거사처럼 울분으로 3년을 지냈습니다. 내 책가방은 술병과 소설책으로 무거웠습니다. 중학교 때 삼국지를 열 번이나 읽었으니까요.

집에서는 노예처럼 일을 했습니다. 여름에는 중3인 형과 논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고두 레로 3천 두레박을 퍼 올렸습니다. 두길 넘는 우물바닥 물까지 박박 긁어 올려야 하는 고두레 질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3천 두레를 퍼 올리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듯 합니다. 학교 갔다 오면 논밭으로 뛰어다니면서 일했지요. 그런데 논 밭일보다 제일고역은 가마니를 지고 등교하는 일입니다.

농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서 시장에 내다팔았습니다. 중학교가 시장 옆이라 나는 학교 가는 길에 가마니를 지고 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들려야 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6킬로를 갑니다. 힘든 것 보다 학생들을 만나는 게 더 괴로웠습니다. 평소 마음에 둔 여학생과 마주치면 너무 창피하여 쥐구멍을 찾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 한 나는 아예 품팔이를 다니는 농사꾼이 됐습니다.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쟁기질도 했습니다. 논일이 제일 힘듭니다. 모심기 3일이면 코피가 났습니다. 벼 베기는 더 힘들지요. 물에 젖은 볏단을 지개에 지고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수렁논을 빠져 나올 때는 허리가 끊어질듯 합니다.

앞서간 일꾼들의 지개에서 떨어진 물로 반질반질해진 논 두럭 위로 기어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미끄러워 짐 채 넘어질듯 하지요. 넘어졌다간 불합격이라 품팔이도 못합니다. 정신집중으로 가까스로 올라와 무거운 볏단을 지고 좁은 논 두럭을 걸어가는데 줄타기만큼 아슬아슬 진땀이 납니다. 농사일이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일 년 농사를 짓다가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 농촌을 탈출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고등학교와 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됐습니다. 도시목회만 하면서 농사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들 3남매는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가면 그렇게 농촌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부모님을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애들은 엄마 아빠가 굉장한 줄 알고 자랑하지 못하여 안달이구요.

“우리학교에서 학부형 일일교사를 하려고 해요.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중에 공부도 많이 하시고 아주 훌륭하셔서 일일선생님 하실 부모님을 모신 학생 있나요?”
선생님이 물으면 우리 삼남매들은 언제나 제일먼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나와 아내는 일일교사로 일일교장으로 여러 번 불려가곤 했습니다.

내가 고향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되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농사꾼 아버지가 위대하게 생각 되고 고통스럽기만 했던 농사일이 그리워 지구요.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시고 7남매들은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삽니다. 97세가 되신 어머니는 형님이 모십니다. 고향에 찾아가도 부모형제와 문전옥답이 없는 고향은 그리운 고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미국에 고향의 어린 시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지난 2월 시니어아파트로 이사 와서 밭(Garden)을 신청했습니다. 가구당 15평짜리를 주는데 영농자금(?)으로 40불을 줍니다. 2가구분 30평을 얻었습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광복은 36년 만에 됐지만 난 53년 만에 만져보는 흙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삽을 들고나가 풀을 뿌리 채 뽑아 버린 후 흙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씨를 뿌린 후에 흙비료를 주고 덮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왼쪽 오른쪽으로 바꿔가면서 삽질을 하는데 즐겁기만 합니다. “와! 당신은 타고난 농사꾼이군요. 삽질하는 폼하며 씨 뿌리는 기술이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럼, 내 몸에는 유명한 농사꾼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아내는 밭일을 하면서 허리통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흙속에서 하는 일만이 참된 노동 같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펜과 전화로 하는 노동들은 스트레스를 주어 육체를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흙을 묻혀가면서 하는 농사일은 병든 몸을 치료해줍니다. 우리식탁은 밭에서 거둬드린 무공해 채소 요리로 넘칩니다. 시금치 배추 열무 상추는 벌써 뽑아먹고 두 번째 씨를 뿌려 2모작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침에 일어나면 밭으로 나갑니다. 흙냄새 풀냄새를 맡으면서 밤새 자란 잡초를 뽑아주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아침이슬로 말갛게 씻어낸 토마토 잎 냄새 들깻잎냄새를 맡고 있으면 내 마음은 어느새 고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습니다. “들깻잎 냄새 토마토 잎 냄새는 불란서 향수보다 더 좋은 자연의 향기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