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섬통신-2>

클레멘타이의 고향 파라커웨이
등촌 이계선

파라커웨이로 이사 온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뉴욕 케네디공항 뒤에 있는 파라커웨이는 동서로 뻗어나간 섬입니다. 동쪽 비치채널1가(街)부터 시작하여 서쪽 비치채널 221가에서 끝이 납니다. 221가에서 더 가는데 그곳은 황무지로 남아 있어 아예 번지수가 없지요. 미국판 심청가(沈淸歌) “클레멘타이”의 고향이 바로 파라커웨이라는 걸 요즘 알았습니다. 나는 Far Rockaway 를 “돌섬”이라 부른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돌섬바닷가를 걷습니다. 날마다 보는 파도와 갈매기와 바람소리인데도 매일 새롭습니다. 혼자서 바닷가를 걷다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클레멘타이의 늙은 애비가 된 듯 그리움에 젖은 노래가 절로 나오지요.

동쪽바닷가를 따라 두 시간을 걸어가 봤습니다. 애틀랜틱 비치만 나올 뿐 수평선은 더 멀리 있었습니다. 다음날 이번에는 서쪽을 걸었습니다. 대서양을 품으려는 듯 활처럼 굽어지면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해변 끝에 등대가 가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수평선과 이어져 보입니다. 수평선을 향하여 걷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구도자(求道者)라도 된 기분입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데리고 서천서역국을 가는 삼장법사를 생각하다가 문득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내 곁에서 사람들이 하얗게 걷고 있어요. 흑인지역인 80가까지는 대서양과 마주하고 있어서 바람과 파도가 억세고 사납지요. 가끔 까만 옷을 입은 흑인들이 보드워크를 걸어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걷고 있는 80가 부터는 하얀 세계입니다. 아직 여름이 멀었는데도 백인들이 몰려나와 해수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곳은 바다가 포구로 들어와 있어서 비치가 아늑합니다. 앞에 보이는 부르크린과 스테이트 아일랜드가 바람을 막아줘서 따듯합니다. 그래서 성급하게 옷을 벗고 있네요. 백인들이 왜 벗기를 좋아하는지 난 오늘 그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왜 여자들이, 특히 미녀일수록 벗기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말입니다. 벗으면 벗을수록 하얗게 드러나는 속살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어서 백인들은 벗기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흑인들이야 벗어봤자, 검은 속까지 속속 들어나기에 아예 검은 옷을 덧입어 검은 몸을 가립니다.

80가에서 220가에 이르는 백인지역은 완전히 개발돼 있었습니다. 바다 쪽에 있는 모래언덕을 밀어서 넓은 백사장을 만들었어요. 그 길이가 수십 리입니다. 시내 쪽 공터에는 대리석 고급주택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습니다. 부자 백인지역이지요. 우리 동네에서 3시간 반을 걸으니 등대가 나타났습니다.

150가에 있는 National Recreation Area.. 그런데 수평선은 고사하고 섬의 끝이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나는 털석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옆에 백인노인이 한 마디 합니다. “파라커웨이의 끝까지 가려면 아직 2시간은 더 걸어야 할걸요. 그만 중단 하시지요” 나는 피곤한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하던 버릇대로 동네 해변으로 나가 보드워크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파도를 봐도 비치를 봐도 예전처럼 흥분과 감동이 없습니다. 어제 걸어본 화려한 서쪽 길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초라하고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도 비키니를 입은 백인미녀아가씨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몇 명의 흑인들이 검은 옷을 입은 채 보드워크를 걷고 있을 뿐. 그들은 비무장지대의 새벽을 보초서는 흑인병사들처럼 피곤해보였습니다.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여기는 미녀의 웃음소리, 백인부자들의 자랑소리는 없어도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있구나!’ 여기는 자연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파라커웨이 서쪽은 개발하여 백인천국을 만들어 놨습니다. 나무와 숲을 잘라내고 고급주택을 지었습니다. 새들이 알을 품는 모래 산을 밀어내어 인간들이 뒹군 백사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풀도 나무도 없어서 갈매기도 날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보급의 일류비치 National Recreation Area입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 비치는 자연그대로입니다. 길 오른쪽은 나무와 잡풀이 우거진 넓은 사막들판이 이어저가고 있는데 그 크기가 맨해튼 센트럴파크만 합니다. 산새 들새들이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왼편 바다 쪽으로는 풀들이 듬성듬성한 모래 둔덕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 모래 둔덕에 오리 갈매기 거북이들이 알을 품은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고요. 그 아래 모래밭에는 조개가 많아 갈매기들이 몰려들고 우리가 걷는 보드워크는 갈매기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하얗게 깔려있습니다. 미개발지역이라 자연 그대로입니다.

‘문명은 인간의 작품이요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솔로몬의 왕궁보다 들꽃 한 송이를 더 아름답게 보셨나 봅니다.’ 문명의 잠에서 깨어난 나는 대오 득도한 파계승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새소리를 찾아 숲속으로 뛰어드는데, 이게 뭡니까? 내 앞에 입산금지 줄이 처져있고 무시무시한 경구(警句)가 붙어있었습니다.

“경고!! 이선을 넘어 들어가는 자는 즉석에서 체포한다. 그리고 체포된 자는 재판을 받고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는 새들이 알을 품는 보금자리가 있는 곳이니 이곳에서 얼씬거리지 말라” 나는 경고문구 앞에서 곧바로 순종하며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경고문구 앞에 나의 답을 부쳤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자는 자연을 강간하는 자와 같으니, 감히 자연을 사생아로 만든다면 그날은 지구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니 얼씬거리지 말지어다.”

▲ 등촌 이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