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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없이 나누는 ‘인’(仁)한 사람이 필요하다<논어>에서 배우는 교회개혁`(2)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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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1월 30일 (금) 17:23:39 [조회수 : 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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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曰巧言令色(자왈교언영색)은 鮮矣仁(선의인)이니라.”

   
 
   
 
이 말을 해석하자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입니다. 인간 세상은 공자가 살던 시대나 예수님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한가 봅니다.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타락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타락된 죄의 굴레를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런 굴레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의 유전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 당시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은 분명히 공자가 말한 교언영색의 얼굴로 접근하였을 것입니다. 아주 사랑스럽고 인자하고 은혜로운 얼굴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부추겼을 겁니다. 흔히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면 먼저 명함을 교환하게 됩니다. 명함 속에는 자기의 온갖 학력과 이력과 학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유별나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합니다. 그리고 표정 관리와 매너 관리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감이 가지만 몇 번 접하게 되면 그 속셈을 알게 되어 곧 멀리하게 됩니다. 교언영색의 말일수록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실속이 없습니다. 얼굴빛을 자주 바꾸는 사람치고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기쁘거나 슬플 때를 빼고는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옷 잘 입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만 왜 명품 브랜드에 목숨을 걸고 난리를 칩니까? 교언영색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지요. 실용적인 검소한 옷보다는 거품 가격으로 도배한고가의 명품 브랜드로 자신이 신분을 과시하는 행태는 분명 어질지 못한 행위입니다. 예부터 얼굴 꾸미고 옷 잘 입는 남자를 ‘기생오라비’로 불렸습니다. 화려하게 화장하고 옷을 입는 여자는 대개가 유흥집 종사하는 여자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전 국민이 작정하고 ‘기생오라비’로 ‘천박한 여자’로 가자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공자가 교연영색을 ‘선의인’(鮮矣仁)이라고 말함은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 속에 자신의 생존과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 남을 속이고, 아부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므로 그들에게 ‘인’(仁)을 찾기란 어려운 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도 그랬다면 지금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국회의원들이 선거철에 교언영색한 얼굴로 유권자를 만나고, 백화점 매장에서는 손님들에게 교묘한 말과 부드러운 얼굴로 고가의 물건을 구매하기를 권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이 교언영색의 얼굴로 성도들을 마케팅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사회 질서 속에 사는 인간들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죄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회 구조인 셈입니다. 아파도 돈이 없으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마치 공기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돈이 매개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도 돈으로 매개가 되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여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의 신적 능력을 가진 맘몬 사회 구조인 셈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삭빠르고 눈치 있게 투기를 하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논어> 속에는 강직하고 의연하고 질박하며 어눌한 사람은 인에 가깝다(剛毅木訥近仁 강의목눌근인)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는 약삭빠를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복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기 쉽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군대 가면 줄서기를 잘해야 편하게 군대 생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에 가도 눈치만 빠르면 고기를 얻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요령과 눈치의 처세를 단면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仁)한 사람이 없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인에 가까운 강직하고 의연하고 질박하며 어눌한 사람은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여기서 잠깐 인의 글자를 분석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공자가 말한 ‘仁’이란 글자는 사람인 변에다 두 이자가 합친 말입니다. 즉 사람은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라 두 사람과 어울려 살면 어질게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친구 관계, 부부 관계도 그렇습니다. 인이란 말을 성경적으로 풀어보면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고 난후 보기시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두 사람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어질고 사랑스런 마음이 공자가 말한 인의 원초적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렇고, 대형 교회 브랜드 목사들의 언행을 보면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인지 아닌지는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논어> 속에 나오는 일반적인 인간됨의 조건에 비추어 보더라도, 한국교회 일부 브랜드 목사들의 인간됨이 수준 미달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기생오라비 같은 모습과 개그맨 같은 만담으로, 가벼운 웃음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공자가 말한 인의 모습과는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 하고 아무런 인간적 처세도 하지 않고 어수룩한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노회나 총회나 연합회의 감투를 탐하지 않고 대형 교회로 성장하려는 인간적 야망을 버리고 그저 말씀만 전하는, 소위 하는 말로 ‘진국’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공자가 말한 인(仁)한 사람입니다.

남의 비위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을 양심과 윤리적인 심성을 충실하게 하는 일을 경시하기가 쉽습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브랜드 목사들은 성도들의 왜곡된 영적 비위를 맞추고 부자 성도들에게 알랑거립니다. 자기의 목회 성공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과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매개하여 목회 성공 욕망의 고지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교언영색의 얼굴과 처세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를 무대로 하여 자기 명함을 화려하게 장식해 보겠다는 열심이 어리석은 성도들을 감동시키고 위장된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교언영색의 대표적인 직업은 영화배우, 탤런트와 개그맨, 패션모델 등 입니다. 이들은 직업적인 연기와 배역으로 우리들 앞에 다가섭니다. 부흥사와 브랜드 목사들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세상의 인기 스타가 요구되는 각가지 방법들을 차용합니다. 그들은 웃기고, 설득하고, 성공·출세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컨설팅 수준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고 목회를 합니다. 이들은 한낱 인기 개그맨과 인기 강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삯군 목사들이 하나님의 충성스런 종으로 일반 성도들에게 어필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성도들의 영적 신앙 수준이 유치원 수준이어서 삯군 목사들이 그런 교연영색의 가면을 벗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자기들을 그저 웃기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의 철학적, 신학적, 사회적인 골치 아픈 이야기보다 달콤한 간식 같은 이야기를 더 원합니다. 그래서 유치원의 공간이 절대적인 자기들의 안식처로, 놀이터로, 즐기고 웃는 곳으로, 인식됩니다. 한국교회도 바로 이와 같은 유희적 종교 공간으로 전락하고는 있지 않는지 하나님 말씀으로 곰곰이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공자는 특히나 말을 잘하는 사람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대나 지금이나 말을 잘 하는 사람치고 사기꾼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교언영색으로 말 잘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인’을 실천하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겉만 번지르르하게 장식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쉽사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사기꾼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지요. 공자가 만약 한국교회 브랜드 목사들을 본다면 인(仁)과는 멀다고 증오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예 “나의 종이 아니다”라고 채찍질하실 것입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사회·교회 구조 속에서 성공과 출세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언제나 화려한 학력과 경력과 훌륭한 성경적 논리를 대입합니다. 하지만 모든 목회 성공 종착점은 자신의 거짓 욕망 때문임을 우리는 심심찮게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형 교회 브랜드 목사들이 연봉이 억대라라면 그건 기업의 CEO나 회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만한 여유가 있다면 절반을 때어서 가난한 농어촌 교회 목사님들에게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배불리 먹자고, 옷 잘 입자고, 고급 승용차 타자고, 섬김을 받자고 목회의 길을 들어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골골짝으로, 빈들로, 십자가의 길로 가겠다고 하신 분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성공의 길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리로, 교주의 길로 가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종인데 누구는 산삼뿌리 먹고 누구는 무 뿌리도 못 먹고 굶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의 사치스런 작태는 분명 옳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눔의 실천이 목회자들 간에 먼저 필요합니다. 그저 몇 십 만원으로 거지 동냥하듯 할 게 아니라 연봉의 절반을 때어내는, 믿음을 보이는, 목사가 있다면 그가 진정 어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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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오균 (125.183.28.41)
2007-12-04 12:08:58
마지막에
목사님의 이번 글 감며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눔의 실천이 목회자간에 필요하다고 끝을 맺는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목사님 전도사들은 어찌됏든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인들 헌금으로 보호는 받습니다 그런데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소외된 이웃들보다 목사전도사가 우선은 될수 없습니다

어찌됐든 요즘교회안의 목사님들은 작든 크든 선교비라는 미혹하에 목사 전도사들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서로추천하고 추천받고 서로 끼리끼리 선교비명목하에 구제하고 받고 있는실정입니다 한마디로 목회자들을 위한 먹고살기네트워크인 셈입니다 제가아는 국가보조를 받아 생활하는 장애인교회 1년헌금 9천만원 중 절반이 목회자에게 집중되고 매월6ㅇ만원의 선교비 목회자들의 생활비보조로 지원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80명되는 교인들 주일점심값 보조가 4만원 구제헌금100여만원 그야말로 병든 장애인 교인이 교회에 물어찿아와도 헌금만 ㅇㅅ구하지 어디가 불편하시냐고 병원에는 잘다니시냐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교회에 나올리 없지요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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