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황제, 가을

1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다. 벌써 10월초니 그럴 만도 하다.
어제까지 입고 다니던 짧은 소매 여름옷을 벗고
두툼한 긴 소매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집에도 에어컨 대신 히터를 켰다.
계절의 변화는 변덕스럽기가 마치 갱년기 여인들의
마음 같다. 언제 어디로 튈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때마침 한 선배분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하는
윤동주의 시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그분은 가을의 뭐가 그리 좋으실까?  청춘도 아니고 從心의
나이인 七旬을 훨씬 넘기신 분이...    
 
여름이 채 떠나기도 전부터 그분으로 받은  
가을이 담긴 이메일들이 족히 수십 통은 될 것이다.
그 분은 일 년 내내 가을 앓이를 하는 별난 가을사람이다.
하긴, 가을이 좋아서 이름을 아예 가을로 바꾼 지인도
있기는 하지만.
 
2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봄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나는 노래할 것이다. 가을은 계절의 황제이라고.
 
봄은 인생에서의 청춘이다.
청춘은 소록소록 돋아나는 연둣빛 새싹이다.
가을은 인생에서의 황혼기다.
황혼기는 오손도손 물들어 가는 빨갛고 노란 단풍잎이다.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청춘은 일출을 기다리는 새벽노을이다.
황혼기는 밤을 기다리는 저녁노을이다.
황홀하기는 마찬가지다.
 
청춘은 발자국 흔적이 없는 하얀 눈길이다.
황혼기는 듬성듬성 발자국 흔적이 수놓은 하얀 눈길이다.
겨울 눈길이기는 마찬가지다.
 
청춘은 산 속에서 혼자 불러보는 독창이다.
황혼기는 산 속에 은은하게 되돌아오는 메아리다.
귀에 향기롭기는 마찬가지다.
 
청춘은 파도로 출렁대는 반추(反芻)없는 호수다.
황혼기는 하늘, 단풍들이 반추된 잔잔한 호수다.
언제 어찌 변할지 예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청춘은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헤는 마음으로
시작을 꿈꾸는 나이다.
황혼기는 숲 속에 뒹군 낙엽을 밟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을 꿈꾸는 나이다.
꿈이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3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순수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후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다.
황혼기는 청춘처럼 화사하지는 않다.
그러나 단풍처럼 아름다운 시기가 인생의 황혼기다.
 
청춘은 순진하다. 순진하기에 쉽게 더럽혀지고 물든다.
황혼기는 순수하다. 순수하기기 안정적이고 우아하다.
순수는 온갖 세상풍파를 거치며 물들고 더럽혀진 후에
다시 거듭난 성숙한 순진의 모습이다. 성숙한 어린이 같은
마음이다.          
 
어린이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제 박이 터지게 싸우던 적과 오늘은 친구가 되어
재미있게 어울리는 것이 어린이들이다.  
삶이 증오할 원수를 만들만큼 심각하지가 않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지식을 쉽게 배우고 익힌다.
지난 지식이 새로운 배움의 벽이나 장애물이 아니다.
어린이들에게 삶은 순간순간 배움의 연속이다.
 
또, 어린이들 삶에는 내일이 없다. 내일이 곧 오늘이다. 
  
4
 
한 순진한 어린이가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내일이 언제냐" 고 물었다.
아버지는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내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빠, 오늘이 내일이야?" 하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내일이라고 말했잖아"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 해서 물었다.
며칠 후, 아버지 인내심은 성질 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이 바보야! 내일이 내일이지 어찌 오늘이 내일이야"
하며 아들을 윽박질렀다.
 
그제야 아들은 깨달았다.
 "아! 이 세상에는 내일은 없구나. 오늘이 바로 내일이구나!" 하고..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이 아름다운 가을에 내가
깨달아야 할 어린이같이 순수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