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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회심했다면 ‘오직 은혜로만’은 가짜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다메섹 사건은 회심, 회개, 또는 개종의 기점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이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자기를 돌아 보았다(고전15:10). 그 결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아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전15:8). 그리고 그것을 바탕삼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해 신실한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충성만 했다. 하나님은 그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기에 그에 합당한 거룩한 일을 주신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므로 사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조건여하에 따라 반응하셨다는 반바울적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고장난 인간을 얼마든지 고쳐 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쪽에서 회개를 한다느니, 용서를 구한다느니 하는 것은 바울신학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바울은 인간쪽의 조건은 어느 것이든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악인도 악한 날에 적절하게 쓰시는(잠16:4 참조) 창조주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붙잡혀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종살이 했던 인물이다.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들여서 주의 일을 행하도록 사명을 주셨고 그는 그런 하나님에게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붙잡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했다. 바울친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위엄에 눌려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했던 종으로서의 인간 바울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이신칭의와 태내 예정론은 인간쪽의 회개를 조금도 전제하지 않는다. 태내 때부터 종인 자는 그가 악하든 선하든 주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이 제 주제를 모르고 주인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들의 세상에서의 후속행태에 해당한다. 그래서 후세대의 신약편저자들이 “행함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나중 시대의 교인들이 바울의 이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왜곡하면서 비신앙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신약서신들 특히,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와 같은 신약서신들이 이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니라(약2:24...not by faith alone)고 한 것이다.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는 절대은총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깨끗해진 인간이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후세대의 감상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이든지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듯이 먼저 깨끗케 씻겨 놓고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쪽에서 볼 때 인간쪽에서의 인간의 행위를 나타내는 “회개”는 하등 필요치 않다. 사로잡힌 자의 충성만이 요구될 뿐이다.
• 인간의 회개는 감동적일지언정 별로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마가복음 2:3~12의 중풍병자 치유사건은 죄사함의 권세는 인간이 회개할 때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을 보여준다(마9:2~8; 눅5:18~26).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고 용서받아 새사람이 된 후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일을 감당한다는 식의 구도는 복음서들보다도 일찍 기록된 바울서신에서는 생각되기 어려운 사상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쪽에서 해결하실 문제이지 인간쪽에서 회개하고 돌이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회개해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씻기신 후에 일을 맡기신다는 생각은 인간을 강권적으로 다루신다는 바울신학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수용될 수 없다.
바울의 급격한 변화를 바울이 회개하고 돌이켜 개종한 것이라고 보는 사고는 후세대, 예를 들어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와 같은 비유를 통해서 각인된 나중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다. 바울이라는 인물은 결코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식의 구도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사람’이 아니다.
• 율법과 단절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 전한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율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선언되었지만(롬10:4) 그것은 결코 율법 무용론, 율법 폐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면서도(빌3:8) 여전히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라고 말했다(롬7:1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율법 예찬론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롬7:13a; 7:14a; 7:16b). 이것은 그가 율법과의 연속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근거가 된다.
그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다(갈2:3). 그렇지만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헬라인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피를 가진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시행했다(행16:3). 이것은 바울이 율법과 완전히 단절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전9:20b 참조).
그렇다면 그의 급작스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변화는 신앙적이거나 종교적 또는 심리적, 아니면 사상의 전환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증언하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하나님께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한 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서 우러난,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른 자발적인 충성이었다. 그 충성이 다메섹 사건 이후에는 예수 증언이라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던 것이다.
• 업무의 성격이 바뀐 것 뿐이다
사도행전 자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친서들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를 만나기 전, 유대교를 향한 그의 충성과 열심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입각한 인간주도의 과제수행이었다(빌3:5~6). 그가 보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를 이간시켜 망가뜨리는 위험스런 이단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유대교내의 예수파를 좌시하지 않고 정리해 보겠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 과제를 풀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인데 그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핍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주를 만난 이후 이와 같은 형태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열심이 그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주께로부터 강권적으로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바뀌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그래서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시키는대로 감당하는 종된 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다메섹 관련 세 자료는 모두 이를 명백히 뒷받침한다(행22:10; 행9:4~6; 행26:15~16).
• 회개해야 할 바울의 죄가 무엇인지 지적된 적이 없다
사도행전의 다메섹 사건을 말하는 이 본문들 중 어느 것도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잔해하며 핍박한 것이 큰 죄악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의 죄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행위의 잘,잘못과는 상관없이 그 동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주장했던 유대교내 예수파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다니는 자들을 박해했던 그 박해의 고난을 이제는 바울 자신이 그대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쪽에서의 열심있는 충성이 가져 온 판단착오였다는 뜻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판단착오의 수정, 또는 교정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메섹 사건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들인 공과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던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의 지적이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같은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유대교내 예수파 일당을 소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신앙체계를 유지하고자 공을 들이는 참다운 수고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충성을 보였던 것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 식음을 전폐한 삼일 간의 기도는 회개와 자복의 시간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식음을 전폐하며 고민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 동안 그가 그렇게도 공들였던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충성이 모두 헛 것이었음을 지적당했기 때문이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행9:4, 22:7, 26:14)은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주장하며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했던 박해와 핍박의 행위가 철저히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해야만 할 죄악이라는 것을 지적한 음성이 아니었다. 핍박의 이유를 묻는다는 것은 바울의 판단착오를 지적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음을 전폐한 삼일간의 기도는(행9:9; 11b)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죄임을 인정하고 그 씻을 수 없는 죄를 철저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반성과 뉘우침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쏟아 부었던 그의 인간적인 충성과 열심과 수고와 애씀의 공로가 전부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었음을 힘겹게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의 고백이 나왔다. 사람이 쏟아 붓는 노력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배설물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의 강도높은 절대권세를 경험한 그는 인간적인 모든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람쪽에서 주도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쏟아 부었던 모든 수고와 노력과 공력을 하나님이 “아니다”하시면 그것들은 일순간에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될 뿐이다(빌3:4~9).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지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돌이키고 변하여 새사람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율법을 조목조목 최선을 다하여 지킨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 어떤 것이든지 다 자기 마음대로 토기를 빚는 토기장이와 같은(롬9:16,18,21)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롬9:25).
• 능동적이었던 유대교 청결작업이 맡겨진 업무를 받아서 수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바울은 이렇게 율법적인 인간의 노력, 또는 수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무한은총에 의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이 이미 태내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예언자적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다(갈1:14~16). 그래서 그 후로는 자신이 스스로 주도했던 능동적인 유대교 청결운동, 유대교내 예수파 소탕 과제수행을 접고 부활하신 주께로부터 위임받은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의 증언”을 목적한 “예수전파” 업무를 받아서 수행하는 종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메섹 사건 이후에 있게 된 바울의 수고는 맡겨진 주인의 일을 수행할 뿐인 충복의 사명이 된 것이다. 그의 모든 수고와 충성과 열심은 이제 “주인을 향한 충성스런 종의 당연한 도리”라는 성격을 지니는 종의 업무수행이 된 것이다(고전15:10b).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잔해하며 핍박한 잔인하기 그지없던 인간 사울이 주님을 만난 뒤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켜 변하여 새사람된 후에 주님을 증거하는 바울이 되었다는 그림은 바울을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뿐이며 그의 이신칭의 교리를 가짜 교리로 치부해 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다메섹 사건의 의의는 이렇다
바울의 변화는 인간쪽에서 공들이고 수고한 것이 모두 헛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서 출발한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의 충성과 열심은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일을 위하여”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방향전환”이라고 볼 수도 없다. 둘 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인간주도의 능동적인 열심이었느냐 수동적으로 맡겨진 일에 대한 열심이었느냐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메섹 사건의 의의는 죄인이 의인된 것에 있지 않다. 인간의 충성과 열심이 어떻게 헛되고 공허한 것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인가에 있다.
• 종에게는 충성만이 요구될 뿐이다
주인은 종의 이전 생활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거나 헤아리지 않는다. 주인이 종에 대해 갖는 일차적인 관심은 그 종의 성품이나 인격적인 됨됨이에 있지 않다. 그가 주인에게 얼마나 충성하느냐만 문제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에게 가해지는 심판은 그가 이전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했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맡긴 사명에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이 종에 대한 주인의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이다(마25:28,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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