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묵상기도를 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오늘 일정은 아침 6:30분 도반에서 출발하여 히말라야를 거쳐 데우라리, 그리고 마차푸차례 베이스 캠프(MBC 3,700미터)까지 오르는 것이다.

▲ '데우라리' 롯지

아침 7시, 길을 나섰다. 도반에서 첫 번째 포인트인 히말라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한 길이었다. 내 몸이 잘 알아서 따라주니 고맙다. 훨씬 몸상태가 좋았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몸상태가 제일 좋았던 날이었다.

히말라야 롯지에서 30분쯤 쉬며 숨을 골랐다. 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급한 경사로이다. 여기서 눈사태가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길을 가다 양귀비꽃을 발견했다. 옛날엔 비상약으로 사용하기 위해 시골에선 양귀를 한 두 송이를 키우곤 했었는데, 히말라야에서 진짜 양귀비꽃을 만난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 몇 개의 강을 건너니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데우라리의 롯지가 보인다. 오른쪽의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며 무섭게 흐르고 있다. 드디어 강가의 데우라리 롯지에 도착했다. 안개 속으로 데우라리 롯지가 빤히 보여서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는데 얼추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데우라리 롯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여기서 메모를 하지 못해 무얼 먹었는지 지금 생각하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서둘러 짐을 챙겨 다시 MBC를 향해 길을 나섰다. 마을 뒤편의 오르막을 넘으니 조금 넓은 길이 보라색 꽃밭 사이로 나타난다. 보라색 꽃….(나중에 현지 가이드 리마씨에게 물어보니 그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 고소증을 일으키게도 한다고)

그런데 길이 제자리에서만 맴돌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뭔가 이상야릇한, 불안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왔다. 갑자기 안개가 몰려온다. 사방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안개뿐, 들리는 것이라고는 무섭게 흐르는 강물소리뿐이었다.

▲ '마차푸차례' 베이스 켐프를 오르며. 잠깐의 휴식

간간히 천둥소리도 들린다. 바로 눈 앞에 눈(雪)을 이고 서 있는 산봉우리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리마씨에 의하면 이 길에서 해마다 눈사태로 여러 사람들이 죽는다고 한다. 오른 쪽으로 강물을 두고 내내 걸었다. 계속해서 예수 기도와 성 프란치스코 기도를 바치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강물을 건너 MBC 롯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무사히 다 왔다는 안도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감정이 북 박쳐 오른다. 모두에게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긴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 '마차푸차례' 롯지 앞에서 현지 가이드 리마씨 부자와 함께

오후 3:15분, 마차푸차례 베이스 켐프에 드디어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30분가량 빠르게 올라 왔다. 마차푸차례 베이스 켐프에 도착하니 지난 십년 동안 연모해 왔던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른쪽으론 전문 산악인들도 등정이 불가한 마차푸차례 봉우리가 짙은 안개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마차푸차례 베이스 켐프 한쪽 공터에선 포터들이 배구를 하며 젊음을 자랑하고 있다. 날씨가 매우 차다. 부산에 떠나던 날, 이윤기 권사가 사준 겨울 등산용 파카로 갈아입고 바지도 겨울용으로 갈아입었다. 완전 무장을 한 셈이다.

이틀째 세면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몸에선 땀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참을 만하다. MBC 올라오는 길은 매우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천연고도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이름모를 들풀들조차 정겹기만 하다.

트레킹 대장이 고산증을 예방하기 위해 나누어준 알약을 아침저녁으로 반 알씩 갈라 먹은 게 효과를 본 것인지 한 20여 분간 손끝이 찌릿찌릿한 게 스틱을 잡기 불편할 정도였다. 그러다 이내 그 증상이 사라졌다.

바람이 찬데 지금 MBC 롯지 마당 평상에 앉아 뜨거운 밀크티를 한 잔 하면서 이글을 쓰고 있다. 도종환 시인의 ‘너와 나’라는 시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나는 너를 안고 산으로 간다
나는 너로 인해 출렁거렸지만
나는 너로 인해 산 그늘 짙었다.

이런 호사를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히말라야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오십 중반까지 건강을 지키며 살아올 수 있도록 나의 삶의 배경이 되어준 나의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한다.

▲ 물고기 꼬리 형상의 '마차푸차례' 봉우리에 저녁노을이 물들다

그동안 너무 욕심만 부리고 달려온 나의 삶을 반성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더욱 겸손해져야 하겠고, 더욱 치열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하면 살아야겠다. 트리킹 내내 함께 길을 걸은 대장 박종철 사장, 그리고 동반자 13분 현지 가이드 리마씨 포터들과 주방팀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금방 안개가 걷히고 마차푸차례 봉우리가 눈으로 덮인 맨살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다. 트레커들이 마당으로 나와 환호를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그것도 잠깐, 여전히 안개로 인해 수시로 산의 면모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오늘은 MBC 롯지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새벽 4시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ABC)에 오르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짝사랑해 왔던 안나푸르나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가. 내가 그대를 지난 10년 동안 연모해왔노라고 털어놓아야 하는가. 안나푸르나는 내 심정을 알고 있을까. 산은 언제나 산 그대로 있고, 나의 연모의 방식은 그저 끝까지 마음으로만 담아두어야 하는 것인가.

저녁6시 식당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데 캐나다에서 온 트레커 한 사람이 우리 쪽으로 자꾸 시선을 보낸다. 우리가 먹는 김치와 김에 관심이 있어서였다. 내가 ‘코리안 푸드’ 했더니 ‘김치’하고 대꾸를 한다. 그래서 접시에 김치와 김을 주었더니 ‘굿’을 연발하며 맨입으로 잘 먹는다.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고 다시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내일 아침 안나푸르나와의 조우를 내심 기대하고 들뜬 기분이었다. 모두 추웠는지 털모자를 눌러썼다. 그렇게 얼마동안 다른 사람의 수다를 듣다가 롯지 방으로 들어왔다. 내일 아침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바라며 따뜻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 '마차푸차례' 롯지에서. 저녁밥을 기다리며

지금까진 침낭이 작기도 하고 갑갑해서 지퍼 다 열고 이불처럼 덮고 잤는데, 오늘밤은 조금 갑갑하지만 지퍼를 꼭꼭 채우고 긴팔 셔츠까지 껴입고 자기로 했다. 바람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 평화로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