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아침 6시경, 아침밥을 먹었다. 주방장이 미역국 만들어 내놓았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주방장에게 물어보니 멸치를 우려내어 국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든 일행들이 네팔 주방장 솜씨에 감탄을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길을 나섰다. 지누단다에서 촘롱으로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아침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숨이 턱턱 막힌다. 경사가 심해 올라가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이루어져 있다.

올라가는 길 모퉁이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고인의 아름다운 흔적이 남겨져 있어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으니, 하여간 사람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잘 살고 잘 죽어야 하겠다.

▲ 촘롱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경사도가 심해 숨이 막히지만 전망이 확 트이고 이따끔 민가들이 나타나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경사면에 터를 닦아 집을 세웠으니 마당은 좁고, 집들도 대부분 작았다. 현지인들은 별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수많은 트레커들을 상대했을 것이다.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나 무슨 물건을 만드는지 망치질을 하는 남정네도 남을 의식하지 않으니 표정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집집마다 외양간에 소를 키우는데 우리네 시골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외양간 옆으로 소똥을 잔뜩 쌓아놓고 비료로 만들고 있었다.

깎아지른 산비알마다 밭을 일구어 무엇인가를 심었는데 밭고랑의 경계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밭뙈기 폭이 우리나라 다랑논 폭보다 더 좁다. 그 좁은 밭뙈기가 저들의 생명의 보고가 아니던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어제보다 걷기가 수월해졌다. 어제 단단하게 뭉쳤던 오른쪽 다리 근육이 많이 풀어진 것 같다. 그렇게 시간 반쯤 걸어 촘롱(Chomrong)마을에 도착했다. 촘롱은 안나푸르나 산맥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다. 그리고 비교적 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촘롱으로 들어서자 산세가 더 험해지고 더욱 웅장해 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이다. 우선 시야가 확 트여 남 안나푸르나 봉우리와 마차푸차례가 이마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촘롱은 마을전체가 분산되어 있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단히 목가적인 풍경이다.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며 뜨거운 밀크 차를 마셨다. 산양 젖에 홍차를 섞은 것인데 생각보다 맛도 있고 갈증도 해소된다. 우리 일행들 중 어떤 사람은 맛이 없다고,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잠이 안 온다고 안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주는 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 마셨다.

▲ 시누와로 가는 길에 등교길인 동네 아이들과 만나다.

촘롱에서 30분쯤 쉬고 다시 일어섰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도반(Doban 2600미터)이다. 오늘은 총 8-9시간을 걸어야 한다. 촘롱에서 시누와를 거쳐 뱀부로, 그 다음이 도반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촘롱학교가 눈에 띤다. 운동장도 없는 아담한 학교이다. 마침 등교시간인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재잘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연신 “나마스떼!”를 외치며 손을 내민다. 트레커들이 가방에서 사탕이나 초콜렛을 꺼내 아이들에게 주자 서로 더 갖겠다고 몰려드는 것이었다.

촘롱에서 시누와로 내려가는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다. 자연석을 정으로 다듬어 계단을 만들었는데 대단히 운치가 있다. 네팔 사람들의 미학적인 수준이 대단한 듯싶었다. 2010년 봄 중국 황산엘 갔었는데 황산의 돌계단과는 차원이 다르다. 황산 돌계단은 마치 톱으로 켠 듯이 기계로 돌을 깎아 만들었다면, 히말라야의 돌계단은 똑같이 돌로 만들었지만 가공이 덜 되어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계단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다. 내려갈 때 충격이 자기 몸무게의 7,8배라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배가되는 것인가. 나는 스틱에 몸의 하중을 분산시켜 가급적 다리에 무리가 덜 가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반드시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발목이나 무릎관절에 무리가 덜 간다는 것이다.

촘롱에서 뱀부를 가는 숲길
에델바이스가 무리지어 피었다
이제 꽃으로 생명은 다했고
바짝 말라 시들어가고 있다

아침 등굣길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무리지어 산길에서 내려오고 있다
배낭에서 초콜렛을 건네주자
‘나마스떼’하면서 수줍은 듯이 웃는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
나무도 숲길도
산비알에 아슬아슬 일구어놓은 밭도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도
아무런 과장도 가식도 없다

호젓하게 히말라야 숲길을 걷는다
산길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나도 그리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뉘우침이 생긴다

▲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도반' 도착하다.

어제보다는 몸이 많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오른쪽 발목과 무릎에 통증이 왔다. 조심하면서 걷는 수밖에. 그런데 가도 가도 계단이 끝이 없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계속 바치면서 길을 걸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엔 사랑을 심게 하고 다툼이 있는 곳엔 용서를 심게 하고 불화가 있는 곳엔 일치를 심게 하소서….”

그렇게 두어 시간을 걸어 시누와(2360m)에 도착했다. 시누와 롯지 마당에서 마차푸차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점심으로 수제비가 나왔다. 히말라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수제비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었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다. 강원도 정선에 목회 할 때 먹었던 과수기가 생각났다. 마침 새끼손가락만한 네팔고추가 먹음직스러워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그런데 얼마나 맵고 독한지, 더운 물로 입을 헹궈도 그 매운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더니, 그 맛을 우리나라 땡초에 비교할 수 있을까?

점심을 먹고 한숨 잤으면 좋겠는데 또 부리나케 길을 재촉한다. 이제 뱀부를 거쳐 도반까지 가야 한다. 길은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로 번갈아 이어졌다. 나무다리를 건너서 사람과 말, 야크, 염소만 오갈 뿐이다. 물살이 엄청나게 거세다. 히말라야의 고도를 생각하면 물살의 흐름은 짐작하겠는데 왜 이리 물은 검은가? 떨어지면 그냥 죽을 것 같은 수백 미터의 절벽 위 좁은 길, 천 길 낭떠러지 밑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끊임없이 요동치며 흘러갔다.

온통 흙탕물이다. 검은 강이라는 이름을 지닌 ‘칼리간다기’이다.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사이를 흐르는 이 강은 히말라야 자락 중간 중간 오아시스를 이뤄 사람을 살게 한 생명의 젖줄이기도 하다. 이 강이 만들어 놓은 들판에 현지인들은 메밀이나 감자를 심는다. 또 돌이 많은 곳이라도 수분만 있으면 사과농사도 짓는다고 한다.

깎아지른 암벽 사이론 수백미터의 직탕폭포가 장관을 펼치기도 한다. 뱀부는 마치 밀림지대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뱀부에서 콜라 한 잔을 마셨는데, 지금까지 내가 마셔 본 콜라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 시누와에서 바라본 '마차푸차례' 봉우리.

몸이 편해지니 긷기도 수월하고 마음도 즐거워진다. 트레킹의 즐거움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산이 가지고 있는 표정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어제는 하도 힘들어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아내의 기도덕분이었을까,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걷는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오후 4시경, 드디어 오늘의 최종목적지 도반(2600미터)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이다. 숲속 길을 걸으며 내가 숨쉬고 또 누군가와 기도로 마음으로 교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도반에 도착하자마 수돗가를 찾아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고산에서는 찬물로 절대 머리를 감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어기고 머리를 감았다. 샤워는 할 수 없었고, 수건을 적셔 온몸을 닦았다. 땀에 젖은 옷은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귀까지 덮을 수 있는 털모자를 눌러썼다.

저녁6시, 저녁식사를 했다. 잡채와 김치찌개가 나왔다. 네팔인 주방장이 하루 세끼 한국음식을 만들어 내놓는다. 모두가 그 정성과 맛에 감동한다. 트레킹 대장 박종철씨와 주방팀 3명, 현지 가이드 3명, 가이드 리마씨 아들 한 명, 포터 10명 총 31명의 일개 소대 규모가 움직이는 것이다. 포터들은 카고백을 나르는데 보통 20kg짜리를 두 개를 나른다. 체구가 외소한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식당에 모였다. 모두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부터 체력관리를 잘 해야 하고 특히 고산증을 조심해야 한다. 대장 박종철씨가 어제처럼 정체모를 알약을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밤에 자기 전에 반 알을 먹고, 아침에 일어나서 나머지 반 알을 먹으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약이란 말인가?

기온이 점점 떨어진다. 식당 테이블 밑에 석유버너를 설치했는데 이걸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야 한단다. 공동경비로 충당하기로 하고 난로를 불을 붙였다. 식탁 밑으로 더운 바람이 올라오는데 아랫도리가 따뜻해진다. 몸이 따뜻해지자 눈이 저절로 감긴다.

▲ '도반 롯지에서.

내일 일정은 도반에서 출발하여 히말라야 롯지, 데라우리를 거쳐 MBC(마차푸차례 베이스 켐프3700미터)까지 가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고산증세가 시작된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걸어야 하겠다. 내 밖의 나와 내 안의 나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짝사랑해왔던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를 기도한다.

지금은 밤9시,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오늘 롯지의 방은 3인 1실이다. 지금 엎드려서 이 글을 적고 있는데 침낭 발밑에 넣어둔 물통의 따뜻한 온기가 내 발에 전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당나귀나 야크 목에 건 ‘건띠’(워낭)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이명(耳鳴)때문일까? 분명 그 소리를 듣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