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터가 힘들게 짐을 나르고 있다. 네팔에선 다음 생에 '포터'로 태어나라고 하는 것이 욕이라고 한다.

지누단다(Jhinu danda)에 도착하자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첫날의 고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룻밤을 묵게 될 로지 방을 배정받았다. 2인 1실 구조였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정갈했다. 출입문 맞은편으로 가운데 작은 창문이 있었고, 양쪽으로 하얀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지누단다에서는 아래쪽으로 30분 거리에 노천온천이 있는데 일행들 중 몇 사람은 온천에 다녀오겠다고 부산을 떤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몸이 천근만근이다. 내일 산행을 위해서 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따라 나서지 않았다.

▲ 지누단다 롯지에서.

저녁8시쯤 주방팀에서 만들어 준 저녁식사를 했다. 김치찌개였다. 현지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히말라야 산속에서 먹는 김치찌개라니, 그런데 맛도 일품이었다. 네팔 주방장이 6개월 동안 한국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6개월 배운 실력치고는 수준급이었다. 재료도 변변치 않고 조미료도 전혀 쓰지 않으면서 한국음식을 만들어내는데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 매 끼니마다 숭늉을 만들어주는데 그 맛도 훌륭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트레커들은 여전히 식당에 머물러 있었다. 식당 안이 제일 따뜻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들과 여러 나라에 온 트레커들은 맥주와 차를 나누면서 회포를 풀고 있다. 주로 산 이야기나 자신의 산행 경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늘 낮에만 해도 날씨가 한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더웠는데 지금 지누단다 고지의 밤기운은 제법 쌀쌀했다.

내가 오늘밤 묵게 될 롯지 방은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데,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집이서 발로 밟을 때마다 ‘삐거덕’소리가 나는데 싫지 않았다. 운치가 있었다. 방에 작은 전등을 달았는데 10와트쯤 될까 간신히 책을 읽을 정도로 어두웠다. 방마다 벽이 널빤지로 막은 것이어서 옆방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70년 대 우리나라 여인숙 풍경이 연상된다.

우리 옆방에는 독일에서 온 젊은 여성 둘이 묵고 있었다. 독일 특유의 강한 악센트가 꼭 싸우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쌀쌀해서 조끼까지 끼어 입었는데 이들은 하나도 춥지 않은 것인지 속옷 같은 차림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실외를 돌아다닌다. 그녀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 산비알 다랑논. 벼나 메밀을 심는다. 소가 쟁기질을 할 수 없어 모든 걸 사람이 직접해야 한다고 한다.

트레킹 내내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는 과천에서 온 ‘이형택’이라는 분이었다. 골프장 사업을 하고 있단다. 이형택 씨는 나보단 나이가 네 살 아래인데 성격이 활달해서 롯지 전체를 자기 집처럼 휘젓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만들었다. 첫날 포카라에서 저녁 대화를 나누다가 느낀 것은, 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보편적 역사인식이라든가 시국관에선 더욱 그랬다. 가급적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저 사람 살아가는 일상적인 이야기나, 산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히말라야까지 와서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얼굴 붉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배낭에서 집에서 떠나올 때 프린트 해 온 시편 페이퍼를 꺼내 묵상하기로 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은 시편 139편 말씀이었다. 저절로 감사기도가 나왔다. 그러자 최진배 시인의 ‘정작 감사한 것들’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코끝에 와 닿아있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살결에 와 닿아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싱싱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발밑에 와 닿아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단단하게 딛고 서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우리 속에 가득차 있었다.
초라한 모든 것을 끌어 안아야하고
불의로운 모든 것을 바르게 펴야한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 가슴 깊은 곳에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지나단다 롲지. 방이 절갈하고 평화롭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오른쪽 다리의 근육통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은 내 발끝에도 내 소맷자락에도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감한 하루이기도 했다.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절실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현지 가이드 리마씨가 끓인 물을 방마다 다니면서 전해준다. 뜨거운 물을 날진 물통에 담아 잠을 잘 때 침낭 발밑에 넣고 자면 좋다고 한다. 트레킹 내내 나는 날진 물통 두 개에 물을 담아 하나는 발밑에 하나는 애인처럼 끌어안고 잤다. 그러면 온몸이 따뜻해진다.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까지도 따뜻해진다. 

불현듯 유년시절이 생각났다. 그 시절 나는 강원도 화천 논미리에서 화천읍내에 있는 화천국민학교를 다녔다. 아이들 걸음으로 왕복 두 시간 쯤 걸렸을까? 아침 등굣길에 어머니는 손바닥만한 차돌멩이 두 개를 화롯불 재에 파묻어 두었다가 누나와 내게 주곤 했었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따뜻했다. 그 차돌멩이가 식을 때까지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면서 학교에 갔었던 기억이 오버랩 되는 것이었다.

묵상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허리가 잘 펴지지 않는다. 오른쪽 다리도 몸을 조금 비틀기만 해도 통증이 오는 게 심상치 않다. 내일이 걱정이다. 그러나 걱정은 붙들어 매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그분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눈을 붙였는데 허리통증과 종아리, 발가락 통증이 심각하다. 유피여행사에서 건네준 고산증에 효험이 있다는 정체불명의 알약 반 알과 내가 준비해간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피곤하면 잠이 와야 하는데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고 잠이 오질 않는다.

▲ 지누단다에서 별꽃 향연에 만끽하다.

바람소리에 눈을 떴다. 캄캄하다.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4시 5분 전이다. 사위가 조용하다. 더 잘까하다가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잠을 푹 자야 했었는데 좀 설쳤다. 두어 시간 잤을까.

룸메이트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야말로 별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별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할까. 지난 초여름 소백산 이필완 목사 움막에서 보았던 별들의 잔치를 히말라야에서도 보게 된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많고도 영롱한 별들이 어쩌면 그렇게 바로 머리가까이 떠 있는지. 그 별들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30분쯤 롯지 마당에 서 있었을까? 별똥별이 밤하늘을 가로 질러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자 50중반을 넘어선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새벽 별보기, 이 또한 히말라야 트레킹의 백미 가운데 하나였다.

▲ 지누단다 화장실 풍경. 대부분 히말라야 롯지마다 비슷하다.

롯지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다. 앉은뱅이 변기 앞에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고 물통이 있다. 볼일을 보고나서 그 물에 손을 씻고 손 씻은 물로 변기에 붓게 되어 있다. 동양과 서양의 적당한 조화가 아니겠는가. 나는 찝찝한 생각이 들어 물티슈를 사용했다.

밖은 아직도 어둠이다. 잠시 후, 롯지 방마다 서서히 불이 켜지고 트레커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한다. 그러면 이내 화장실 앞에 줄을 서고, 사람들마다 칫솔을 물고 수돗가로 간다. 아침마다 롯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오늘은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와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산에 오르기로 했다. 아침 6:30분 산행이 시작된다. 처음 1시간 30분정도는 경사가 심한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안나푸르나에서 제일 큰 ‘촘롱(Chomrong·2170m)’이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는데 거기에선 그동안 뜨겁게 연모해왔던 안나푸르나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오늘 산행이 기대된다. 제발 오늘 하루 내 몸이 잘 버텨줬으면 고맙겠다. 그리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