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8일 새벽 4시, 드디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첫날이 밝았다. 긴장과 설렘에 수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카고백에서 오늘 필요한 짐을 챙겨 배낭에 옮겨 넣었다. 배낭(30리터)을 너무 작은 걸 가지고 와서 별로 넣은 것도 없는데 빵빵하다. 잠시 묵상기도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 '포카라' 도시에 소들이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식당은 어제저녁 식사를 했던 한인 식당이었다.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맛은 별로였다. 식사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체크아웃하고 전세한 버스에 올라탔다. 상태가 시골 버스 수준이었는데 가이드 리마 씨에 의하면 네팔에선 최고급 버스라고 한다.

포카라 시내를 관통해 가는데 신작로에 사람과 차가 한데 엉켜 혼잡하기 짝이 없다. 차마다 경적을 울려 대는데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 비키라고 빵! 코너 돌면서 빵! 앞지르기하면서 조심하라고 빵! 신호등도 없고, 인도나 차도가 따로 없어서 경적이 유일한 교통정리 수단인 셈이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 나야폴(1,070미터)로 가는데 도로포장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차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메모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이한 것은 버스 앞쪽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운전사와 조수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강도가 많아서 그렇게 만든 것인가. 차선도 없고 도로 폭이 좁아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마주칠 때는 습관적으로 경적부터 울리고 조수가 나와 백미러를 젖히고 비껴가는데 간격이 5센티 정도 될까, 아슬아슬한 게 완전 묘기 수준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진기명기'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을 달려 나야풀에 도착했다. 나야풀은 안나푸르나 등산 기점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세계 각국에서 온 트레커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버스에서 짐을 내리자 포터들이 카고백 두 개를 노끈으로 묶어서 등에 지고 노끈을 이마에 둘러서 이고 가는 형태이다. 이때 양손으론 이마의 끈을 양쪽으로 당기며 균형을 잡는다.

포터 중엔 뚱뚱한 사람은 거의 없다. 키도 작은 편이다. 주로 반바지를 입었는데 신발도 등산화가 아니라 짝퉁 운동화이다. 종아리가 새 다리처럼 가늘지만, 알이 통통하게 배었다. 완전 근육질 몸매이다. 어떻게 저런 작은 몸으로 40킬로 육박하는 짐을 지고 그 험산 준령을 갈 것인가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 포터들이 힘겹게 짐을 나르고 있다.

가게 옆 샛길로 들어서니 나야풀의 거리가 펼쳐지는데 분위기가 아기자기하다. 트레킹 시작과 종착점이니만큼 트레커들을 위한 상점이 대부분일 것 같은데 일반 가옥들도 제법 많았고, 마을 규모도 꽤 큰 편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닭을 지고 가는 네팔리를 만났다. 얼핏 보아도 생닭 무게와 닭장 무게를 고려하면 50킬로는 족히 되어 보인다. 그런데 발걸음이 가볍다. 아마 어느 롯지나 티 하우스에서 주문한 물건인 듯하다. 수많은 짐꾼이 달인 수준의 짐을 지고 가는데 가장 압권은 대형 LPG 가스통 하나를 지고 가는 광경이었다.

네팔 말로 사람을 '만체'라고 한다. 그런데 네팔 사람을 단순히 '네팔 만체'라고 안 하고 '네팔리'라고 부른다. 어원을 따지자면 '네(Ne)'는 힌두의 성자(聖子)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팔'은 '팔보아(Palboa)'의 약자로 '돌보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네팔이라는 국호는 힌두의 성자가 돌보는 땅이라는 뜻이고, '네팔리' 역시 성자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을 모시는 데 성심을 다하는 사람들, 네팔은 아직도 문명의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자본의 힘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신성함이 살아 있는 땅이다.

우리 일행은 잠시 기념사진을 찍고 일렬로 걷기로 했다. 유피여행사 박종철 대장이 제일 선두에 서고 그다음 나이순으로, 내가 네 번째 섰다. 스틱을 키에 맞추고 길을 걷는데, 스틱을 사용해 본 경험이 없어서 영 어색하기만 하다. 내 몸의 하중을 20퍼센트 분산시켜 준다니 불편하더라도 짚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곧 익숙해지겠지.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온도를 재 볼 수는 없었지만, 땡볕에는 섭씨 30도쯤 될 것 같았다. 내가 11월 중순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제일 많이 물어본 것이 네팔은 춥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히말라야 설산 고봉만 생각하고 네팔을 추운 나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네팔은 인도의 북쪽을 접하고 있는 매우 더운 나라이다. 고도가 1,000미터가 넘어가도 추운 느낌은 없고 식물도 잘 자란다.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이마에 밴드를 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일단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을 밴드가 막아 주니 안경을 벗지 않아도 되었다. 생경한 거리와 마을들이 얼마 동안 반복되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길바닥에 소똥의 잔해가 완전 지뢰밭 수준이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소똥을 밟기 일쑤이다.

▲ 소년이 염소를 안고 인사를 한다. 초콜릿을 주자 좋아한다.

동네 꼬마 아이들이 길모퉁이에 나와서 트레커들을 환영한다. 자기 나라 말로 '나마스테'하면서 손을 내민다. 사탕이나 과자를 달라는 것이다. 주머니에서 사탕하고 초콜릿을 나눠 주었다. 아이들 눈썹이 짙고 인형처럼 콧날이 오뚝하고 예쁘다. 금방 주머니의 사탕과 초콜릿이 동났다.

그런데 아이들이 유독 나를 졸졸 따라오면서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내가 인심이 좋게 생겨서 그런 것인가. 알고 보았더니 내 배낭 옆구리 그물망에 영양갱 하나를 찔러 놓았는데 그걸 보고 따라온 것이었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아이들과 멀어진 다음에 알게 되었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지누난다(1,780미터)이다. 처음엔 내가 히말라야 산맥을 걷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낮은 산봉우리들에 따라 설산들이 모조리 가려져 있으니 멀리 설산들이 보이는 포카라나 카트만두보다도 히말라야 느껴지질 않는 것이었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가끔 네팔 현지인들을 만난다. 이곳 현지인들은 티베트계의 '보테'라는 종족으로 피부색이 검고 키가 작다. 이들은 소똥을 줍거나 소 먹일 풀을 뜯는다. 또 땔감을 주워 오기도 한다. 대나무 광주리에 짐을 가득 채워 이마에 걸고 가면서도 인사를 하면 머리 위로 합장하며 '나마스테'를 외친다. 참으로 순박한 사람들이다.

한참 동안 산길을 걷다 당나귀 떼를 만났다. 당나귀들이 급경사 계단도 터벅터벅 잘 오르내리는 걸 보면 신기하다. 박종철 대장이 대원들에게 주의를 시킨다. 야크 떼나 당나귀 떼를 만나면 무조건 낭떠러지 안쪽 산비알 쪽으로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나귀는 사람을 피해 가려 하지만 자신의 등에 실린 짐의 폭은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칫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짐으로 밀치는 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때 낭떠러지 쪽에 붙어 있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촘롱' 롯지에서. 바로 정면에 안나푸르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나도 잠깐 방심했다가 한 번 낭떠러지 쪽 구석을 몰려 화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당나귀 목에는 큰 방울이 달려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워낭'이라고 하고 네팔에선 '건띠'라고 한다. 크기는 우리나라 것보다 크다. 그 방울 소리는 낭랑하다(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에서 건띠 하나를 사려고 흥정하다 돈이 없어서 포기했다).

히말라야 산길을 다섯 시간쯤 걷자 중간 지점인 킴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오른쪽 종아리가 경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척추를 심하게 다쳐 그때부터 몸의 균형이 반듯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오른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다 보면 오른쪽 다리에 무리가 갈 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증상을 예방하기 위해선 한 시간쯤 걷고 스트레칭을 해 주어야 하는데, 여럿이 가는 산행길에서 나 혼자 그리할 수도 없고 꼬박 다섯 시간을 걸었더니 오른쪽 다리에 경직이 온 것이다.

하필 오줌이 마려워 민가로 내려가서 간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킴체 티 하우스로 올라오는데 오른쪽 다리가 경직되어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었다. 이 몸으로 계속 산행을 할 수 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스틱을 의지해 올라와 등산화를 벗고 종아리를 주물렀다. 발가락부터 쥐가 나기 시작하는데 넓적다리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산행 첫날부터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현지인으로 구성된 주방 팀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오른쪽 뻗정다리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열심히 다리를 마사지했다. 그렇게 한 이십 분쯤 지나니까 괜찮은 듯싶었다.

그러자 심한 갈증이 났다. 마침 식사 전에 우유에 홍차를 섞은 차가 나왔다. 뜨거워서 식혀 먹는데 애를 먹었지만 맛있었다. 한 잔을 더 달라고 해서 마셨다. 신기한 게 갈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번 트레킹을 통해서 터득하게 된 것 가운데 하나가 더울 때, 갈증이 심할 때 찬물보다 더운물을 마시는 것이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첫 산행 점심은 라면이었다. 그런데 라면 양보다 물을 얼마나 많이 부었던지 국물이 너무 싱거웠다. 거기에 밥을 말아 먹었다. 나는 동료에게 고추장을 얻어서 그걸 조금 넣고 젓가락으로 휘저어서 먹었더니 먹을 만했다.

▲ '지누단다' 고갯마루를 힘겹게 오르고 있다.

킴체 티 하우스에서 점심을 마치고 오후 1시경 다시 길을 나섰다. 산길이 만만치 않았다. 경사도 심한 산비알을 심심치 않게 만났다. 다시 오른쪽 다리에 신호가 온다. 발목과 종아리가 단단해지면서 심한 통증이 온다. 하는 수 없이 무게 중심을 왼쪽 다리에 두고 걷는데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산행 첫날부터 예기치 않은 불청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던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히 내 입술에서 예수 기도가 나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스틱을 내밀어 땅을 짚고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예수 기도를 암송했다. 입술만 나불거리지 않고 집중해서 기도를 바쳤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땀은 비 오듯 하고 눈물이 한없이 쏟아진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고비 때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다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통증으로 당장 주저앉고 싶은데 대장에게 더는 못 가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앞에서 네 번째 자리를 계속 유지하며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이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오면서 내가 붙잡은 화두가 생각났다. '경청(敬聽)' 그래,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자. 나를 비우자. 이 고통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도 내가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그분에게 맡기자. 그랬더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 쏟아진다. 명치끝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감사와 희열이 솟구쳐 올라왔다.

계속 발걸음마다 예수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내면에서 오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산행 첫날, 지금 생각해 보면 예기치 않은 근육통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안나푸르나 트레킹 여정 중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트레킹 내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을까?

그러자 고통 중에서도 모든 게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무도, 간간이 스치는 바람도, 야트막하게 자리 잡은 고산의 민가도, 지긋지긋했던 돌계단도, 산비알 계단 논 메밀꽃도, 이따금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부드러운 하나님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 농부가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첫날 나아풀에서 장장 11시간을 걸어 지누난다에 도착했다. 대략 산길을 24킬로 걸은 셈이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예기치 않은 불청객을 만났으나 하나님의 임재를 온몸으로 느꼈던 하루였다.

지누난다에 도착하자 날은 어둑어둑해져 어둠을 향해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