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가는 노인

  봄꽃들이 한창이다. 움츠러들었던 사람들을 집 밖으로 자꾸 불러낸다.하얀 싸리꽃,벚꽃, 목련꽃 등으로 환해진 아파트단지 안에 '알뜰시장'이 섰다.단지 중심도로 양편으로 가설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순대,튀김,족발,뻥튀기 같은 먹을거리와 의류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도 보였다. 한쪽엔 생활필수품들을 파는 좌판도 눈에 띄였다.그런데 그 옆에 나의 발길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칼을 가는 노인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그는 숫돌에 물을 뿌려 가며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양 손으로 칼의 손잡이와 끝을 각각 잡고 위 아래로 밀고 당기며 칼을 갈았다. 잠시 멈추어 칼날을 눈에 가까이 대고 살피거나 엄지 손가락 피부 감각으로 날카로움의 정도를 가늠하곤 했다.어릴적에 시장이나 동네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을  오랜만에 보았다. 숫돌 옆에는 십여 개의 칼들이 얌전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큰 칼,작은 칼,새 칼,낡은 칼,부엌칼,과일칼...

   칼은 이기利器이면서 흉기도 된다.요리를 할 때 그것은 이기이지만 범죄용으로 쓰인다면 흉기가 된다.칼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마음의 칼을 문득 떠올렸다.사람은 마음의 칼도 갈며 산다.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던 어린이가 있다. 할머니, 이모와 함께 사는 5세 남자 아이다. 양부모가 사정상 해외에 장기간 나가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겉으로 명랑한 그 아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예배 후 목사님과 상담을 하는 할머니와 이모 곁에 있던 아이가 할머니를 미워한다는 말을 불쑥 한 것이다.미움을 넘어 죽이고 싶다고 했다.아마도  부모 없이 생활하면서 할머니의 잔소리와 훈계에 매우 화가 났던 모양이다.그 증오는 단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것 같았다.아이는 무엇으로 죽이고 싶으냐,는 물음에 지체없이 칼이라 했다. 어떻게,하고 묻자  놀랍게도 배를 찔러 죽이고 싶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실제로 찌르는 흉내를 내면서.

  마음속에서 날카로운 날을 세운 칼은 현실에서 흉기로 사용되어지기 십상이다.칼 같은 말로 남을 함부로 찌르거나 때로는 실제 칼로 해치기도 한다.

   노인은 칼을 돌려주기 전에 주인 앞에서 칼을 시험해 보였다.칼로 종이를 자름으로 칼날의 성능을 선보이는 것이다.그는 날선 칼로  한손에 쥐어진 낱장의 종이를 세로로 단번에 잘라버렸다.그러면 주인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칼을 받아갔다.나는 노인을 바라보다 내 마음의 칼을 맡기고 싶은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을 베는 칼 말이다.  

  3 년 전 아들과 민감한 사안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이 몹시 상한 적이 있다.아들이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 버럭 화를 냈기 때문이다.예전 같으면 내가 아들에게 더 큰 분노를 했겠지만,그 날은 그렇게 나아가지 않았다.  순간 아들의 얼굴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아들 속에 반복하여 새겨놓은 거친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키워놓은 사자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깨닫는 순간,나는 마음의 칼을 커내 내 안의 사자를 찔렀다.그리하여 습관적인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성을 내는 아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다.그러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들도 이내 잠잠해지고.

   예리한 칼로 악한 생각,상한 마음,썩은 마음을 늘 베어버리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칼로 마음을 가꾸면 삶이 훨씬 풍요로와질텐데. 미움,시기,비난,자만,탐욕,분노,불안,슬픔 등은 당장 잘라 버리고 싶은 것들이다.나아가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뿌리까지 도려낼 수 있다면 참으로 기쁠 것이다.

   "부패한 마음을 베는 칼을 잘 갈아주는 분은 어디  있나요?"

   노인에게 묻고 싶었다.

김달성목사(부평동지방 십자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