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

김달성

작년 봄 결혼한 딸, 사위와 함께 인천추모공원에 갔다. 외국에 나가 있는 아들이 올해는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공원 여기저기 실비를 맞고 있는 개나리를 보며 먼저 간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내는 6년 전 봄기운이 막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팔 년 간의 처연한 투병을 끝내고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혼이, 파킨슨병으로 마른 명태처럼 오그라든 육신에서 빠져 나와 귀천한 때는 부활절 다음 날이었다.

우리는 시편23편을 읽고, 찬송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부르며 고인을 추도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사위는 장모를 본 적이 없지만 진지한 자세였다. 훌쩍이는 딸은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예배에 이은 식사를 마친 뒤, 귀가하려는 나에게 딸은 병원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의외였다. 오늘이 마침 임신 이후 받아온 정기검진일이라 한다. 좀 어색한 마음이 들어 '네 신랑과 함께 가라'며 사양했지만, 딸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 신랑과 함께 가면 충분할 텐데, 왜 굳이 나의 동행을 고집하는 것일까?
요즈음 내가 심적으로 의지할 만큼 독립심을 보이던 딸이 오늘은 왜 어리광을 부릴까?
제 엄마의 기일을 맞아 허전한 마음 때문인가?
어미 대신 나에게 배부른 모습을 보이며 당당히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혹은 나를 통하여 엄마를 느끼고 싶은 것인가?

동행요청 이유를 나는 알 듯 말 듯했다. 행여나 딸의 마음이 상할까봐 그 까닭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음을 병원으로 가는 내내 꼬옥 쥐고 있었다.

‘아무개 여성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 병원은 동네 산부인과와 달리 규모가 컸다. 출산전문병원 같다. 한 쪽을 아담한 커피숍처럼 꾸며 놓은 대기실에는 젊은 부부들로 북적인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온 젊은 아빠들이 많았다. 새로운 풍속도를 보는 듯했다. 간혹 예비 할머니들도 눈에 띄었다. 예비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친정 엄마겠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을 가리키며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옆 의자에 앉아있던 딸은 날 쳐다보며 당연하다는 양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다. 하지만 눈으로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뒤 그 말을 더 이상 들려주고 싶지 않은 지, 천장을 쳐다보며 두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허리를 주무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순서를 기다리던 딸은 진료실에도 함께 들어가자는 눈치였다. '병원까지 동행한 것으로 만족하겠지.'하는 판단으로 느긋하게 앉아 있던 나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는 딸은 지난 달 이미 병원서 받은 태아사진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런데도 진료실까지 함께 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간호사가 딸의 이름을 호명했다. 딸이 먼저 들어간다. 잠시 뒤 주저하던 나는 사위 뒤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자 곧 커튼이 열린다. 딸은 부른 배를 다 드러내놓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가 초음파진단하며 영상으로 배의 속을 보여 주었다. 사람의 형상이 제법 뚜렷한 태아의 모습이 보였다. 콩콩 뛰는 심장박동소리도 들린다. 의사는 산 모, 태아 모두 건강하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나온 딸은 나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네 엄마가 여기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딸은 “저도 그래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밖으로 나오자, 봄볕을 품에 안은 병원이 우리를 배웅한다. “아빠, 고마워요.”란 말에 “잘 가라, 너희 셋 모두 감기 조심하고.”라는 대답으로 딸 내외와 작별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설마 분만실에도 내가 동행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하며 상념에 잠겼다.
친정 엄마의 빈자리를 내가 조금이나마 채워준 것인가?
제 엄마가 살아 있다면 딸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오늘은 "엄마,하나님"이라 부르며 기도하고싶다.
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