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서 온 편지
할머니 권사님의 아픔과 눈물을 드립니다.

이 글은 얼마 전 영월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가 편지로 보내온 글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작은교회 목회를 하고 있지만 이 후배의 글을 보고는 농촌 작은교회의 모습을 좀더 진지하게 느꼈습니다. 이 글은 사실 무척 슬픈 글입니다만 읽어내려갈수록 기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 후배 목회자의 마음 씀씀이 때문입니다. 할머니 권사님과 젊은 목사의 삶에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발견합니다. 권사님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워낙 의지가 강하신 분이시라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더군요. 후배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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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월입니다. 부활절을 앞 둔 성금요일 저희 교회 할머니 정금주 권사님께서 갑작스레 풍으로 쓰러졌습니다. 현재는 오른 쪽 팔과 다리가 마비가 되었고, 마비가 점점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주 후에 경과가 확실히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일흔 일곱 평생을 흙의 사람으로 생명을 돌보았던 권사님은 풍으로 쓰러지기 그날 역시 굽은 등에 힘겨운 발걸음으로 호미를 지고 땅을 일구셨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은 너무나도 무겁고 가슴은 저리며 눈물이 앞을 가리고 또 가립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저는 알 길이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께 위탁하고 빌고 또 빌어 온 마음으로 기도 드릴 뿐입니다. 5년 전 시골 생활이 무엇인지 목회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전도사가 서울에서 온다고 두유3개를 손에 꼭 져주시며, 왜 이리 사람도 없는 곳에 왔냐고 그리도 안타까워하며 저를 따사로이 맞이해준 분이 권사님 이십니다.

한 동안 권사님과 둘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글은 읽으실 줄 아시는데 숫자를 잘 모르시는 권사님 그래서 찬송가를 부를 때면 강대상에서 제가 “몇 장 찬양 하겠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 찬송가를 찾아 드리고 강대상 위로 다시 올라갑니다. 예배가 마칠 때 까지 4번 정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전도사님이요 이 나이 먹도록 늙어가지고 서리, 숫자도 모르고 미안하드래요”를 4번 반복하시며 빠진 이를 보이시며 허허 웃으십니다.

몇 해 전 겨울 총각으로 있을 때 근방의 네 교회가 모여 저희 교회에서 구역회를 가졌답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하는데, 이만 저만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권사님께서 저의 고민을 아셨는지 홀로 삼십 인분 만두를 그 늦은 새벽까지 빚으셔서 아궁이에 나무불을 지펴 만두 국을 만들어 식탁교제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5년 동안 저와 동고동락을 하며 글로 표현 못할 기쁨과 아픔의 사연들이 빼곡히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권사님은 그 동안의 구비 휘어진 삶의 고단함을 말해주듯 등이 굽으셨고, 그 힘겨운 세월의 길목이 이제는 힘겨우신 듯 지팡이를 의지해야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가난의 고통도 홀로 싹이시며, 말로 다 못할 한 생 짊어지고 힘겨운 걸음 걸으셨던 권사님, 단 한 번도 자기만을 위한 것을 가지시지 못한 권사님. 예배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시며, 이 부족한 종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를 올리신 권사님. 자녀들에게 결코 신세를 지지 않겠다며 객지의 자녀들과 못난 종을 위해 여름 내내 허리 한번 펴지 못하시고 농사지었던 곡식들을 자루에 꽁꽁 묶어 자녀들에게 주시는 권사님, 자신은 변변한 옷 한 벌을 헤 입지도 못하고 아껴두었던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손자들 용돈으로 주시는 권사님, 119가 도착하기 전, 마른 입술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며 눈 자락에 눈물 촉촉이 젖고, 그 눈물 가슴 한편에 쓸어안고 저와 손 맞잡고 기도 올리신 권사님.

오늘 예배당에서 권사님을 위해 기도를 올리며, 예배당에 걸린 굽어진 십자가를 하염없이 바라다보았습니다. 이곳에 처음 부임해 버려진 겨울나무를 가져와 몇 주 동안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낫으로 나무를 다듬고 중간에는 짚 끈으로 쟁쟁 묶어서 예배당에 걸어놓았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모양새가 꼭 구부러진 우리 할머니 권사님 등 같고, 그 나뭇결은 몇 십 년 동안 땅 갈무리를 하신 할머니의 거친 손 같아서 코 짠 등이 시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구부러지고 거친 십자가의 삶이 우리 할머니 권사님의 삶입니다. 그럼 그렇고 말구요. 하늘로만 자꾸 뻗어나가는 높고 높은 교회의 십자가를 노동의 세월로 등이 굽어버린 우리 할머니는 쳐다보기가 힘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땅에 엎드린 십자가. 무릎걸음으로라도 기어이 기어가서 가난한 영혼을 사랑으로 품는 그런 십자가의 삶입니다. 오래전 일기에 '목사'는 '목숨 걸고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쓴 글이 떠오릅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목회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똑똑히 일러주십니다. 주께 감사드립니다.

벗님들 마음을 모아서 기도의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하루를 기도하지 않고 지 낼 수 있다고 하였나요. 저희 교회는 매일 정오 12시 각자의 처소에서 권사님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함께 하실 수 있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기도만큼 책임 있는 일이 어디 있으며, 그만큼 무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한편 기도만큼 우리의 나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따스한 하느님의 인간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주님 저희들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아픔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합니다.

벗님들 저희 정금주 권사님의 아픔과 눈물을 드립니다.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동강에서. 마음을 드높이며

일흔 한평생을 밭을 일구느라 손마디 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고,
그 두 손으로 오늘의 삶을 감사함으로 기도한 권사님

"기도하고 일하라, Ora et labora"는 가르침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과연 권사님은 피조물의 세계를 어김없이 돌보시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참 자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