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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한 단상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인가를 확실시하여야 한다.
박철  |  pakchol@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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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1월 03일 (토) 17:06:18 [조회수 : 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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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속내를 다 들어 내놓고

신에게 가장 솔직해 지는 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사람이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길이다.

한번도 가지 않은 낯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신이 보낸 사람이 틀림없다.

-박철. <길>-


나는 올해 운전면허증을 딴 지가 13년이 되었다. 지난 13년 동안 수많은 길을 다녔다. 도심 한복판엘 들어갈 때도 있고, 탁 트인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 비포장 길을 털털거리며 가기도 한다. 운전경력이 과히 짧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도무지 길에 대해선 여전히 까막눈이다. 조수석에 아내를 꼭 동반한다. 늘 다니는 길도 찾지 못해서 헤맨다. 아내의 도움을 더러 받기도 하지만, 아내도 나랑 비슷한 처지여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어디 낯선 곳이라도 갈라치면 교통지도를 펴놓고 열심히 사전 숙지를 한다. 머리에 모든 정보를 입력해 두지만, 건망증의 달인답게 금새 저장해 둔 정보가 사라지고 만다. 서울에서 15년을 살았지만 지금도 명동이나 종로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가는 길을 잘 모른다. 길눈이 어두워도 보통 어두운 게 아니다. 아내 말로는 똑바로는 잘 가는데 옆으로는 잘 못 간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다른 동료 목회자들과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7명의 목회자중 내가 여섯 번째로 젊었다. 배낭을 메고 11개 나라를 돌았는데,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길을 잃어버리거나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감리교본부에 있는 손인선 목사를 애인처럼 꼭 따라 다녔다.


   
  ▲ 나는 시방 길을 가고 있는 구도자이다. 도상(途上)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남에게 길을 안내해주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사람이다.  
 
한번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엘 가게 되었다. 들어가기 전에 두 시간 후에 박물관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행동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 일행의 안내자격인 선배 목사가 시간약속에 엄격(?)할뿐더러, 그날그날 여행 시간표가 짜여 있기 때문에 약속시간을 칼 같이 지켜야 했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이 그렇게 넓은 줄 몰랐다. 한 시간은 박물관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보냈고, 한 시간은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데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영어가 서툴러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아도 사람들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때 어느 일본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출구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그 여인에게 손바닥에 <出口, EXIT>라고 써서 보여주었더니 5분 만에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닌가.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했다.


몇 해 전,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호주의 퀸즈랜드대학 (The University of Queensland)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같은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송○○라는 분의 전화였다. 나의 ‘길’ 이라고 시를 읽고 너무 감명을 받고 감정이 북받쳐 울면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맙기도 하고 한편 부끄러웠다. 송 박사라는 분도 분명 ‘길’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길의 의미는 서로가 다른 것이겠지만….


이 어지러운 세상에 바른 길을 좇아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길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공과 행복, 삶의 의미와 진실을 목적 삼고 찾아 가야 하는 길이 인생의 행로라면 결코 쉽게 얻어질리 없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편안한 길,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좁은 길, 험한 길을 애써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의 길은 마음 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어딘가 바보처럼 보이고 뭔가 손해 보며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밝은 길이 어둡게 보이고, 나아가는 길이 도리어 물러나는 길로 보이며, 평탄한 길이 울퉁불퉁 험하게만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훌륭한 선비는 길에 대해 들었을 때 이를 열심히 실천할 것이다. 중간치 선비는 이를 반신반의할 것이고, 가장 수준이 낮은 선비는 길에 대해 듣자마자 크게 비웃을 것이다. 만약 이런 수준 낮은 선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길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다.”(上士楣 勤而行之  中士楣 若存若亡  下士楣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오랜 인류의 역사는 방황과 미로의 수많은 흔적을 기록하였으며, 희귀하게 좋은 길잡이가 나타난 일도 있으나, 보다 많은 오도의 안내자들이 인류의 역사와 그 당대의 시대정신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였고, 오늘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도 예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웃지 못 할 사실이 엄연히 그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고 그 일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일이 어찌 예수 당대에만 있었던 일이겠는가? 구약 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로 인해 그 시대가 얼마나 오염되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실현에 피해가 컸던가? 이 점을 생각할 때 길을 안내한다고 강단과 교단에서 떠들어대는 그 무수한 소리들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수는 길을 묻는 도마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한 빌립에게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알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의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는 지금 이 말속에서 그 자신의 개인을 큰 보편자 속에 투입시켜 나타낸다. 예수 개인은 이미 하느님과 같은 동질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길을 묻는 자에게 길을 제시하는 자로 있지 않았다. 동대문에서 서대문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동대문에서 서대문에 가려면 종로 5가를 거쳐 광화문을 지나 적십자 병원 앞으로 가시오.”라고 가르쳐 준 분이 예수가 아니라, “서대문을 가려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 분이 예수다.


예수도 그의 제자도 다 구도자로서 하느님께로 향해 길을 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개인이면서 보편자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하느님과 같이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길을 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들 자신에게만 멈춰 있어,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묻고 있었다.


예수는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제자들은 지금 길을 묻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갈구하고 있다. 예수가 알고 믿는 바에 의하면, 제자들 역시 그들이 길로 들어서고, 진리 속에 있고, 생명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 예수 그 자신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었다. 길은 언제나 부단히 물어질 것이다. 길을 묻는 자는 길을 잘 물어야 한다. 길이 잘못 안내되면 그의 평생이 헛수고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부터 착실하게 생명과 진리에 이르게 하는 그 길을 찾고자 노력할 뿐이다. 오늘도 갈급한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또 지도자로서 길의 안내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신 없는 위선적 언어와 행동을 삼가야 한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특히 그들의 가르침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인가를 확실시하여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이 만병을 통치하는 약인 양 떠들어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예수가 들어선 그 길, 예수가 서 있는 그 진리의 기틀, 예수가 숨 쉬고 있는 그 생명의 호흡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실을 가르칠 자질을 갖춘 것이 못된다.


계절은 시나브로 상강(霜降)을 지나 가을 한복판에 들어섰다. 나무가 옷을 벗는 계절이다. 이 계절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자기 존재의 지점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돌이켜야 할 것은 돌이켜서, 더는 한눈팔지 말고 내가 가야할 길을 똑바로 가야 하겠다. 나는 시방 길을 가고 있는 구도자이다. 도상(途上)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남에게 길을 안내해주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사람이다. 나부터 착실하게 생명과 진리에 이르게 하는 그 길을 찾고자 노력할 뿐이다. 오늘도 갈급한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오 주님,

내가 당신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지요!

내가 당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지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오늘의 삶에 매몰되어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당혹감이나 망설임 가운데서 흩어질 때,

당신께서는 내게 확신을 주십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여

선한 길이 모두 막히지는 않도록

배려해 주시리라는

고요한 확신을 내게 주십니다.

결코 나 홀로는 발견하지 못했을 그 길,

절망을 통과하며 나를 이 지점까지

이끌어 온 그 길을

이제 나는 세속적 명예의 용마루에 우뚝 서서

놀라움 가운데 뒤돌아봅니다.

나는 이 지점으로부터 당신의 환한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빛을

당신께서는 내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취할 수 없는 만큼의 빛을

당신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할당하실 것입니다.

-A. 솔제니친-

 

-이 글은 고 채희동 목사를 기념하는 계간 ‘샘’지 요청으로 쓰여진 원고임을 밝혀둡니다. 2007년 가을 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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