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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은 왜 아름다운가?
박철  |  pakchol@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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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17일 (월) 18:46:10 [조회수 : 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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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세상에 살다가 어느 날 훌쩍 예고도 없이 떠나가지만, 그가 전 생애를 통해서 진실로 추구했던 진리가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 무엇을 그가 이 세상에 남겼든 간에 온갖 회의와 고뇌, 방황을 통해서도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진실로 그가 찾아 얻고자 했던 진리가 있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이야말로 이 세상에 기쁨과 생명, 사랑을 안겨 주는 위안이요, 이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름을 물에 쓴 자, 이곳에 영면(永眠)하다.'라는 자신의 묘비명을 남겨 놓았던 존 키츠(John Keats)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

그 사랑스러움은 끝이 없나니

그것은 결코 무(無)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를 위해 고요한 나무 그늘 휴식처…


   
 
  ▲ Tseng Kwong Chi Lake Ninevah, Vermont 1985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했다. 작다는 것 자체로써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의 삶 한가운데 숨어 있는 신비와 침묵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는 요란스럽게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에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인다.


땅 속에 묻힌 보석들이 지상에 그 흔적만을 드러내듯이 "작은 것이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요, 초월의 세계로 향하여 빛과 생명의 흐름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은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하느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애절한 기도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고 심오한 존재의 밑바닥에서 울리는 가장 낮은 목소리이다. 그러나 이 애원성(哀願聲)이야말로 어둠 속에 잠든 삼라만상을 첫새벽의 여명(黎明)이 되살려 내듯,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나의 내면에 생명의 빛으로 쏟아 붓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요란스럽고 거창한 공약과 떠들썩한 선전과 목청을 높이며 굳은 결의로 만천하에 공포했던 약속이 우리를 얼마나 실망시키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이렇게 누적되는 실망 속에 많은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져 무관심하거나 자조적인 태도로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타인에게 유보하거나 스스로 상실해 가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절감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갖가지 형태의 속임수는 증오를 낳고 이 증오는 폭력을 낳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갖가지 폭력, 살인, 강도, 강간, 인신매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드러나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은 바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 즉 온갖 거짓과 속임수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기심에서 출발한 거짓과 속임수는 증오를 낳고, 이 증오는 폭력을, 또 이 폭력은 다른 폭력을 낳는 이른바 악의 고리,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짧은 현대사 속에서 너무나 잘 체험하고 있다.


어둠의 세력에 잠식되어 있는 인간성, 즉 폭력의 고리를 끊고 구원받아야 할 인간에게 인간 해방을 선포하신 나자렛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마가1,15;마태4.17) 그리고 예수는 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을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비유의 말씀이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라 하겠다.(마가4,26-32;누가13,18-19)


그러나 이 비유의 말씀은 온갖 고난과 수치로 강대국 식민치하에서 억압받고 학대받던 당시 이스라엘 청중들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비유의 말씀이었다. 보다 강력한 통치와 무력으로써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새롭게 탄생될 '하느님 나라'를 고대했던 그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로마제국보다 큰 것은 고사하고 가장 작은 '겨자씨'라는데 그들의 실망과 좌절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가히 짐작이 간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무력과 폭력으로써 성취되는 나라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 사랑과 희생으로써 남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수용하는 나라이고 나 혼자만이 차지하는 이기적인 공간이 아니라 온 나라 만백성이 한 공동체로써 참여하는 나라요, 기쁨과 행복, 생명과 평화가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는, 이른바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 Tseng Kwong Chi Grand Canyon, Arizona 1987  
 
모든 악의 세력, 폭력과 증오가 사라지고 괴로움과 고통, 슬픔과 질병, 죽음을 뛰어넘어서 이룩되는 하느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 이 지상에서 작은 씨앗 중의 하나인 겨자씨와 같이 떨어지지만, 하늘을 덮는 나무와 같이 무성하게 자라나서 하늘의 새들이 그 위에 보금자리 치듯, 세상의 만백성들이 초대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 하늘 새 땅'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고 미약하게 시작된 이 나라는 세상의 그 어느 왕국이나 제국보다 더 크고 강력한 주권을 지닌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치셨다.(마가4,1-9)


한 알의 작은 씨앗이 어두운 땅 밑에서 움터나듯, 밀가루 반죽 속에서 녹아 밀가루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이 이와 같아야 하다는 예수는 말씀하셨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성급히 결과만을 유일한 목적가치로 추구하는 이 사회 속에서 '겨자씨의 신비'를 이 땅에 증거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바로 이것이 복음 선포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폭력을 제거한 용서와 사랑의 일치 속에서만이 악의 고리가 끊어질 것이고, 가장 무력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배우고 깨닫고 행동하는 곳에서만이 우리는 장차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이 자리'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가장 작은 가능성으로 보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믿음의 텃밭에 떨어질 때, 성실함과 인내로써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바로 그 순간, 그것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고 바로 그곳은 영원을 향한 빛과 생명의 흐름이 시작되는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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