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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목사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황규학  |  hpastor@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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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12일 (수) 12:32:43 [조회수 : 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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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협성신학교 영문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예수님처럼 33살의 비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용도의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도 이용도는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감리회 소속으로 그는 1930년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1933년 이단으로 면직되었다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3회 총회에서 이용도목사에 대한 명예복직이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장로교에서는 주기철 목사가 복권되었듯이 감리교에서는 이용도목사가 66년 만에 복권된 것이다.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홍씨의 셋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 1915년 개성 한영 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가 됨)에 입학하여 4년 수업년한의 과정을 독립운동 하느라 9년에 마쳤다. 1919년에서 24년까지 5년 동안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 네 번 투옥 당하였고 3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도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는 모범수였다. 철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자기 뱃속에 품어서 녹여 주고, 배고파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서 고요히 기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교도관, 판검사도 감동했다고 전하여진다.

이용도도 예수처럼 실제적인 사역기간은 3년밖에 안되지만 그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용도는 새벽 3시에 습관대로 교회에서 기도를 하곤 했다. 그는 “나의 혼을 빼어버리고 예수에게 아주 미쳐 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예수에게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겨내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사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그의 호도 시무언이다.

그의 설교도 유명해서 듣는 이마다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1931년 재령집회에 관한 그의 일기는 자신의 설교가 눈물의 설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눈물은 나의 설교로다. 나는 중심에 있는 말을 다할 수 없어

전신의 힘을 모아 쥐어 손을 드노라. 들은 손이 곧 나의

설교로다. 나는 말할 수 없으매 엎으려 기도하노라. 이는 곧

나의 설교로다. 나의 등에서 흐르는 땀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진실한 설교로라. 보라 말없는 예수를!

특히 재령집회에 관한 일화는 지금까지 유명하다. 그것은 교인들이 강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1931년 2월 18일 이용도목사가 재령집회에 올 때, 저녁 무렵 남루한 무명옷에 중절모를 뒤집어써서 그 초라한 모습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목사같이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선천집회를 위해서도 선천역에 내렸으나 너절한 회색 두루마기, 굵은 베바지, 고무신, 겨울모자 때문에 사람들이 이 목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재령교회에 미리 들어가 강대상에 납작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다가 담임목사가 강사가 오지 않았다고 하자 갑자기 일어났다. 이용도를 알아보지 못한 성도들을 향해 이용도는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당신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설교가들이 외국 옷과 안경,

금시계 줄에 가죽 신발만 신고 다닌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이 역으로 갔던 그날,

당신들은 기다리던 목사를 만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값비싼 물건으로 치장한 신사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목사를 만나러 나왔다면

당신은 그를 만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초라한

옷차림의 한국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

그날 첫시간 부흥회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가게문을 닫고 집회에 참여했고, 중고등학생들까지 학교에도 안가고 집회에 참여했으며, 언론단체와 사회의 유력인사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밤새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집회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100여명이 기도하고, 4-50명이 철야기도 하는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평생을 이용도전집을 내는데 바쳤던 변종호씨는 이용도가 부흥사가 된 후의 달라진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달변가였으나 침묵자가 되었고, 사교활동가에서 많이 눈물을 흘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인본주의 신앙에서 신본주의신앙이 되었고, 머리로 따지고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가슴 속 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너무 예수를 사랑한 나머지 이용도는 원산에서 나는 예수라고 하는 유명화가 진짜 예수인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그만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용도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회개했다.

예수처럼 3년간 사역을 하고 33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이용도는 당시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시대가 어수선할 수록 이용도처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목회자, 남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쓸 줄 아는 목회자, 교인들이 강사를 못 알아볼 정도로 초라하고 검소한 목회자, 눈물로 설교하는 목회자, 국가에 애국하는 목회자, 새벽3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목회자, 사랑이 많은 목회자가 필요하다.

이용도목사가 오늘 다시 그리워지는 것은 횡령, 성범죄, 세습, 기득권, 골프, 에쿠스 등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세속적인 목회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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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10.124.236.18)
2007-09-17 14:27:41
황규학씨 그런데...
귀하의 홈피(에클레시안)에서 댓글은 왜 다 삭제해버렀소?

게다가 댓글다는 기능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렸던데?

지금까지 그곳에 댓글을 달았던 분들의 모든 수고를 한 순간에 무효로 만들다니....

안수받은 성직자가 자기 홈피를 만들어놓고 예고도 없이 공지도 없이 그러면 됩니까?

교회 개혁과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이처럼 70년대식 언론 독재와 파쇼를 추구하다니...

도량이 그 정도밖에 안되면 누가 귀하 홈피를 궂이 찾아오겠소?

불신자들도 그런식으로는 안합니다...질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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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이용섭 (121.129.175.144)
2007-09-12 15:34:49
추가
황 목사님도 예언의 은사를 어느 정도 아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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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이용섭 (121.129.175.144)
2007-09-12 15:33:37
황규학 목사님
성공회 이현우 신부님(이호빈 목사님의 손자)으로부터 70년대 말 직접 들은 것인데 유명화에게 무릎을 꿇고 그녀더러 "주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녀의 입으로부터(예언의 은사) 뭔가 사적 계시가 나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은사를 아는 사람들은 이걸 쉽게 이해하지만... 황 목사님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니 황 목사님이 이 문제를 바로 잡아주십시오. 황 목사님은 더구나 저널리스트가 아닙니까 ? 이것이 황 목사님의 사명들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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