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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신학자 박경은 목사와의 질의와 답변 4샬롬 신앙공동체 김경호 목사의 반론 포함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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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22일 (금) 02:25:52 [조회수 : 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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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의 첫번째 질의

1984년 봄 저는 서울 수유리 송암교회(기장)에 나가면서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했었습니다. 처음 새벽기도회에 나간 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보수주의 개신교 쪽에서는 기장에는 성령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일 낮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고 기원형 목사님이 인도하고 계셨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이사야 7장을 기 목사님이 강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기 목사님이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고 하셔서 제가 그 분은 유다왕 히스기야로 봐야 한다고 항의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기 목사님이 웃으시며 역사적 의미로는 히스기야가 맞지만 예언적 의미로는 그리스도님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기 목사님의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 묻지를 않았었습니다.

위의 이사야 7:14의 '처녀'는 히브리어로 '알마'이고 그 뜻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인(약 13세부터 약 40세까지)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마태복음사가가 이를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그리고 70인역에서 최초로 이를 '동정녀'로 번역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러한 것들을 82년도에 한신대 구약학 장일선 교수의 "구약신학의 주제"라는 책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루터는 자신과 동시대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이유로 인해서 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한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박경은 목사님의 좋은 답변을 기대합니다. 그럼...

(2) 저의 두번째 질의

이사야 예언자(선지자)는 기원전 8세기에 남 유다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당대에 예언한대로 남 유다가 약 2백년 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됨으로써 그의 예언의 진실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약 800년 후 마태복음사가가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탄생의 예언을 이 이사야 7장에서 찾았습니다.

오늘은 박경은 목사님에게 이사야 7:14절을 '새로 오실 메시야의 탄생의 의미', 즉 소위 '예언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질의합니다. 위의 이사야 7장 본문은 임마누엘이라는 아이의 출생을 기점으로 하여 그 아이가 채 성장하기 전에 당대의 두 나라(시리아와 북 이스라엘)가 멸망을 하게 될 것을 예언(소위 역사적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탄생의 '예언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근거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질의합니다. 과거 주석서들을 보니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을 유다왕 히스기야로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만 25년 동안 종종 고민해 오고 있습니다. 그럼...

(3) 박경은 목사의 답변

구약은 예수탄생을 예고한 적 없다

사7:14가 마:23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저자의 재해석의 결과이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사7:14를 예수 그리스도 탄생예고로 보는 것은 후세대 사람들의 재해석 관점

예언자란 항상 자기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앞으로 닥칠 심판이나 혹은 영광 가운데 도래하게 될 구원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쟁을 걱정하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남유다 사람들에게 800년 이후에나 있을 예수의 탄생예고를 통해 “구원의 희망”을 말했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며 예언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800년 뒤에나 있을 일을 800년이나 앞서서 미리 말하는 것이 그 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800년 이후에나 있을 일을 ‘지금 미리’ 말하라고 예언자에게 말씀을 맡기시고 그것으로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한 구원의 말씀이 되게 했단 말인가?

• 전쟁 분위기 속에서 들어야 하는 본문의 원래의 메세지

이러므로 사7:14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지금으로 부터 2800년 전, 저 팔레스틴 지역에 불어닥쳤던 전쟁의 분위기를 설정하고 이사야의 메세지를 그 안에서 듣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징조’라는 단어가 ‘알마’라는 ‘젊은 여자’에 걸리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게 된다. 얼핏 보면 ‘징조’라는 단어가 ‘알마’라는 단어를 제한하여 ‘남자를 모르는 처녀’라고 그림 그리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또한 임마누엘을 히스기야로 보고 ‘알마’로 지칭된 ‘젊은 여자’는 히스기야의 모친일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본문상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8장~9장을 통으로 읽을 때 그 ‘젊은 여자’는 차라리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역시 단정할수 없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젊은 여자가 처녀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징조란 처녀출산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시는 하나님의 승리

주전 8세기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했던 이사야의 예언은 시리아와 에브라임의 연합군이 남유다를 향해 개미떼 같이 밀고 들어올 전쟁의 위협앞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앞날을 두려워하던 남유다 사람들에게 선포한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 메세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는 이사야가 ‘징조’라는 단어를 ‘젊은 여자’를 나타내는 ‘알마’에 걸어서 그 ‘젊은 여자’가 “처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어로 사용했다고 볼수 없다. 왜냐하면 내용의 흐름을 볼 때 ‘징조’는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 그 아이가 다 성장하기 전에, 다시 말하면 “아이 출생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은 때”에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밝히 드러나게 되리라는 위대한 승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이 선포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두려워 떨지 말고 몇 년 지나지 않으면 곧 받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으라는 힘찬 격려의 “희망주기” 메세지였다.

• 마태복음 저자가 재해석한 이유와 목적

그러므로 이사야가 자신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할 때 80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있게 될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 예고한 것으로 보는 것은 후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재해석이다. 마태복음 저자가 사7:14의 “징조”라는 단어를 “젊은 여자”라는 단어에 걸리는 것으로 보고 젊은 여자를 “처녀”로 번역한 이유는 800년 이후의 후세대 사람인 복음서 저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유대전쟁이라는 엄청난 재앙속에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불가능이 없으신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생겨난 결과이다.

참고로, 국역 성서들이나 영역 성서들은 사7:14의 ‘알마’라는 단어를 한결같이 ‘남자를 모르는 젊은 여자’를 떠올리도록 ‘처녀(virgin)’로 번역했다. 분명히 이것은 구약을 보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이 들어간 번역이다. 그러나 독역 성서들인 엘버펠더 역이나 1545년 판 마틴 루터 역은 사7:14의 히브리어 ‘알마’를 ‘Jungfrau’로 번역하여 ‘젊은 여자’라는 의미가 나타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역 성서는 히브리어 구약 원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자를 모르는 미혼의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신약에 있어서는 이와 좀 다르다.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이미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내용이 18절에서 나왔기 때문에 독자들은 마1:23에 나타난 ‘젊은 여자’의 수태는 곧 “동정녀 수태”라고 인식하게 된다.

• 마태복음 저자의 재해석의 원리 - “그 때 거기서”와 “지금 여기서” 사이의 연속성

그렇다면 마태복음 저자는 무엇에 근거하여 사7:14를 말씀을 이처럼 재해석했던 것일까?

여기서 마태복음 저자가 동 구절을 자기의 시대 사람들에게 선언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재해석의 원리”를 볼수 있다. 800년 전의 남유다 사람들은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극도의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 때에 이사야는 남유다를 향하여 위탁된 하나님의 승리에 의한 구원의 말씀을 선포했다. 이와 비슷하게 800년 뒤에 촉발된 유대전쟁은 800년 전에 남유다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심 그 이상을 느끼게 하면서 사람들을 엄청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어 버렸다. 복음서 기자가 서 있는 “현재”의 상황이 800년 전의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큰 “맥”을 볼수 있다.

• 재해석된 내용-언제나 동일하신 구원의 소망, 기적의 하나님

바로 이런 연속성의 맥락안에서 마태복음 저자는 이사야의 심정을 갖고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희망을 선포했다. 그는 사7:14에서 800년 전에 남유다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800년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변함없이 그대로 역사하실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당대의 사람들에게 강력한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재해석된 사7:14는 [하나님은 800년 전이나 800년 후인 지금이나 “동일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구원의 하나님, 절망의 한복판에서 강력한 희망을 주시는 기적의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내용의 메세지로 재해석되어 장대한 구원의 희망을 선물받게 했다.

• 사7:14에 대한 마1:23에서의 재해석 원리와 적용된 메세지

이 장대한 구원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재해석되었음을 보게 된다.

(1)이 참혹한 상황속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정말로 “불가능이 없으신 800년 전의 그 하나님”이시란 것을 과연 어떻게 알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므로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임을 나타내셨다.

(2)이 참담한 현실속에서 800년 전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육으로 오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밝히 드러내셨다.

사7:14는 이렇게 성령의 감동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재해석되어 강력한 “임마누엘”의 구원 메세지로 선포된 것이다.

• 성서의 재해석과 성서의 권위

그런데 “본문의 원래의 의미”가 후대에 이르러 재해석되었다고 하면 혹자는 성경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수 있을런지 모른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제멋대로 구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는 생각이 들어 실망감에 젖어들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재해석된 신약의 본문을 현대의 입장에서 또 한 번 재해석하면 전혀 감당할수 없는 왜곡과 궤변 일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회자들의 설교마저 불신당하게 될런지 모른다.

•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그렇지만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성경을 왜 그렇게 재해석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갖게 되는 감정적인 반발심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및 신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분명하게 선포되었던 과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도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수 있도록 재해석했다. 그들은 결코, 없는 말을 있는 것처럼,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창작된 인간의 말을 주어진 계시처럼 소설같이 만들어 돌리지 않았다. 조상들에게 이미 선포되었던 명확한 ‘말씀의 자료’들에 근거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 제시했다. 재해석의 과정이 없이는 조상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곧이 곧대로 후세대 자손들에게 바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성서비평 방법들을 동원하여 원래의 의미를 밝힌 후 그것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재해석된 것인지”를 명쾌하게 알고 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부여받은 시대의 예언자들에 의해 ‘재해석’된 말씀의 결과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문제가 될 이유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구약을 대했던 신약의 저자와 똑같은 입장에서 오늘의 메말라 버린 영혼들에게 생수를 공급하는 말씀 사역자들의 역할이고 소명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방어한다는 변질된 수호정신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데 있어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인간의 오만방자함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오만방자함에서 “성경을 빙자한 내 주장”이 나오고 “말씀 필요없는 내 인생관”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오만방자함은 역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방어한다’는 변질된 수호정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도록 겸손해야 하건만 믿음을 내세운 인간들의 아집과 편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제한받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미 한 번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이제는 어떤 변경도 가할수 없이 고정되어 버린 성경본문으로 하여금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한 진지한 학문적 자세와 태도는, 아무리 성경을 조각조각 찢어낼 것처럼 보이는 연구방법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으신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적시하고 성경말씀을 “정말로 내 것 되도록 힘쓰는” 신앙적인 수고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4) 박경은 목사의 위 글에 대한 김경호 목사의 간단한 반론

http://cafe.naver.com/shalom 샬롬방 신앙공동체 김경호 목사-자유게시판 댓글

이 글은 박경은 목사의 개인적인 견해일뿐 기독교에서 보편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이는 이론은 아닙니다. 대다수 목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론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사견에 그칠 뿐입니다. 저 역시 이 글에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구약이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적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부터가 상당한 반론에 부딪힙니다.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덧붙여, 전에도 언급했지만 구약의 예언은 단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기도 하며,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언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예언이 예수님 이전 사람에 대한 것일지라도 궁극적인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언의 이같은 다중적, 복합적 특성을 감안하면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의 몸에서 나실 것임을 예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가 재해석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의 궁극적 성취입니다.

박경은 목사는 임마누엘 언약을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전인류를 향한 당신의 구속사를 전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모든 인류에 통용되는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경의 사건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에만 적용하게 되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온 인류에게 전하시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구약은 예수탄생을 예고한 적 없다. 사 7:14가 마:23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저자의 재해석의 결과다"라는 전제는 정통에 속한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며, 오히려 자유주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농후합니다.

(5) 저의 견해

나는 여기 자유게시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박경은 목사에게 질의하였고 동일한 질문을 역시 샬롬방 신앙공동체 사이트에서 김경호 목사에게도 하였다. 두 분 모두 다 친절하고 진실하며 실력있는 답변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 두 분에게 감사함을 표시한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 장장 25년 이상 고민해 오고 있다. 그러던 중 요사이 이 두 분으로 인해 이 문제의 약 90% 정도는 해결된 것 같다. 요사이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구약은 메시야(그리스도)를 예언하였지만 그 분을 100% 정확하게 묘사하여 예언하지는 않았으므로 박 목사의 "구약은 예수탄생을 예고한 적 없다"는 주장이 한편으로는 옳다.

2."성경의 사건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에만 적용하게 되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온 인류에게 전하시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라는 김 목사의 주장을 묵상 중 모세의 십계명 하사 사건(十誡命 下賜 事件)과 비교 연관시켜 생각해 보니 이 사건에도 Incarnation이 예언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이 다중적이라는 김 목사의 견해도 또한 옳은 것 같다. 구약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이 십계명 하사 사건이고 심지어 19세기 구약비평학자 벨하우젠조차도 구약의 역사는 "십계명의 해석의 역사"라고 했다고 한다.

3.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100%의 답은 얻지 못했으므로 계속 기도하고 공부하겠다.

4.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과 성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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