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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설(原罪說)에 대한 단상(斷想)그리스도교인들은 원죄설을 똑바로 이해해야만 하고 성선설을 배격해야만 한다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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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10일 (일) 00:00:00 [조회수 : 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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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연합신문 2000년 2월 13일 5면의 기고문 중 일부 삭제와 수정 추가

조선일보사의 월간조선은 신년호의 별책단행본으로 "2000년 한국인 백과사전 '한국인의 일생 통계를 통한 한국인의 재발견' '출생에서 사망까지 일어나는 모든 정보의 수치화'"라는 긴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한국인의 종교생활'이라는 '난'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있고 유익한 통계자료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특히 그것들 중에서 관심이 쏠리는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 첫번째 개신교 신학대학 신입생들 중 26.9%가 성경을 한번도 통독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 평생을 목사로 보내고 70세가 넘어 은퇴한 원로목사의 6%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세번째 천주교 신자의 86.5%가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들 중 59.4%가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고 45.3%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토정비결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며, 네번째 우리 한국인의 19.7%가 개신교인이고 6.6%가 천주교인이라는 것이며, 다섯번째 우리 한국인의 55.8%가 성선설을 신봉하고 있는데 반해 단지 2.4%만이 성악설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구교 교인이 전체 국민의 26.3%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성악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단지 2.4%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그리스도교는 성악설 즉, 원죄설을 가르쳐 오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원조의 타락을 기본으로 하고 출발함으로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교인일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리적 체계를 가장 중요시 하고 있다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원죄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인 셈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가장 가치있는 계명이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사상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는 것인가 ?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게는 그러한 힘과 의지가 전혀 없다. 이것이 원죄로 인한 것이고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이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느님을 완전하게 의식하고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오직 성령에 의한 중생으로써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태초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끔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는 그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태에 빠져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도 이 땅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가고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불신자로 태어난 필자는 당연하게도 성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전혀 몰랐다. 항상 의인이라고 착각도 했고 행세도 했다. 하느님께 기도할 줄도 몰랐다. 이것도 원죄의 결과이다. 원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 인간의 이성도 또한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을 요사이 절실하게 깨닫는다. 이십 수년 전 들었던 얘기나 증언이 요사이에 와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들이라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것들의 가치나 중요성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성이 부패했다고 해서 이성의 예술적, 수학적, 과학적 기능 등도 또한 부패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유대교를 아주 멸시했던 19세기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원죄설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 진화론으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20세기 예수회 신부 데이야르 드 샤르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필자의 입장으로서는 창세기의 창조 설화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죄의 교리는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를 뿐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원죄설을 똑바로 이해해야만 하고 성선설을 배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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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2.126.237.27)
2007-06-12 20:41:39
성서해석이 집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서해석이 집착이 되어서는 안된다.
창세기는 그당시 고대 근동에 수많은 신화 가 있는 상태에서 그 신화를 거부하는 히브리인들의 놀라운 계시, 창조 담론입니다.

그당시 수많은 신화는 당시 왕, 군주, 귀족들을 영구 지탱하게 하는 신화로 투영이 되어 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이 많아서 이세상을 만든 신은 가장 하위의 신으로 규정되어있었지요. 그러기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가장 신분이 낮은 인간이 만드는,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고,

당시의 왕, 귀족, 군주들은 신이 되어있었씁니다. 신 자체이지요.
인간은 신이 아닌 하위 존재 이었습니다. 그 인간들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신들(왕,귀족등등)은 놀고 즐기는 것이 그당시의 구조이며, 신화는 그것을 투영하여 만들어 진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신은 가장 낮은 하위의 신이며 다른 신들을 더 높고 위대한 신들이지요.

거기에 히브리인들(바벨론 포로시 등등 노예, 일하는 가난한 떠돌이들,하비루들)이
창조 담론을 말하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하나님)은 오직 한분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고 주장한 것이 창조담론(설화: 혀로 전해진 이야기)으로 전달 되어 온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이야기는 뭘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차별이 없고(신약: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차별이 없느니라, 롬)왕이든 귀족이든, 노예든 모두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담론입니다 (이것을 후대에 "참된 계시"라고 말하지요)

이것은 그 기본정신이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인간 평등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의 어떤 신화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인간을 위한 진리의 증언 이며 계시 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의 왕귀족들을 대변해 왔던 신화들을 뒤집어 엎는 것이며, 당시 고대 근동의 힘있는 억압의 구조를 저항하는 진리 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이런 정신을 모르고
무조건 사탄이니, 원죄설이니, 이런것만 주장하면
창세기가 말하고자는 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만민 평등 사상과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수혜자 이며, 그것이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운동(또다시 고착시켰던 유대교를 대응하여)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또한 증언하고 믿고 , 그 하나님 나라를 받들고 추구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지 아니하고 무조건 원죄설을 알아야 한다느니 등등의 논의는 너무 지나친 집착의 논리이며, 그러한 교의와 교리는 어거스틴 을 중심하여 서구 관념주의 아래서 집성된 플라톤적 사고 의 교리로 성서가 교리화된 주장입니다.
월죄론은 오늘날도 유효한 건강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정신이 옳바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의 출발은 삼층적 세계관이 우리의 사고였을때 만들어 진 교리이기때문에
원죄론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겠지만 그 의미와 정신은 성서적 사고에서 왜곡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은, 하나님중심이어야 하는 에덴을 인간의 욕심으로 에덴을 잃게 되었고(당시의 바벨론 앗수르 이집트 등등의 제국적 욕심투영됨), 그욕심은 모든인간이 가지는 공통된 욕심이라는 뜻으로의 상징의 담론으로써 원죄의 이야기 일뿐이지, 그것이 마치 물질적인(인간속에 있는 물체처럼)것처럼
오염된 어떤 물질 식으로 풀이해 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주장은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싸움만 만들어내는 밤에 마귀가 뿌리고간 가라지의 씨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어린이를 안으시고"이와같이 어린아이처럼 되지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오히려 비유는 고사하고 어린아이속에 있는 원죄를 혐오하셔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너무 성서를 한곳으로 풀고 그것을 오늘의 가지치기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집착이고, 진리에 이를 수 없는 길이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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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픈기린 (210.205.148.17)
2007-06-12 10:27:53
원죄와 사탄
사탄을 헬라어로는 디아볼로스(Diabolos)라고 한다. Diabolos는 복합어로서 dia(..의 사이) bolos(던지다) 즉 누군가의 사이에 끼어들어 중상하고 모함하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실낙원은 사탄의 모략에 속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어리섞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모르고 계셨을리는 만무하다. 인간을 타락시킨 사탄에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동정녀의 후손-그리스도)에게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창조와 실낙원, 타락한 피조물로서의 존재불안과 잠재된 원죄의 불안 속에서 아담과 이브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하고 지키기 위해 수고하고 고통당하며 지상의 삶을 살게하신 하나님의 큰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고된 역사와 현실을 깊이 생각해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 즉 천지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두 번째 창조, 창조이 완성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까지.

사탄만큼 그 누구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구원의 계획을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없다. 사탄은 지금도 사회나 가정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그의 속성대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진리, 그리고 인간과 그리스도의 모든 관계를 훼방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과학은 새로운 진리가 증명되면 수정되는 불완전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이 진실일까. 그러나 우주의 어느 점에 서 있다고해도 그 곳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것이 증명된 현대과학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

이 세상은 천국을 향한 Screening(걸러냄)의 두려운 과정일지 모른다는것.

(2007-06-12/아침에) www.iwi.pe.kr/오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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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이 (221.222.232.73)
2007-06-11 23:59:44
이런 기사가 왜?
당당뉴스는 독자가 만드는 신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글이나 다 쓰면 기사화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왜 메인 화면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원죄론은 논란이 많은 교리이다. 원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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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196.115.133)
2007-06-11 09:14:42
사랑하며 삽시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가장 가치있는 계명이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사상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는 것인가 ?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게는 그러한 힘과 의지가 전혀 없다. 이것이 원죄로 인한 것이고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이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느님을 완전하게 의식하고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오직 성령에 의한 중생으로써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태초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끔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는 그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태에 빠져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도 이 땅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가고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게 무슨소린가 ?
예수님이 지금 장난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해놓고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해놓고

인간은 사랑할 수 없으니
성령 받으라고?

성령받으려면 어떻게 하면되는데?
지금 예수님이 장난하나?

이땅에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천국가서야 사랑할 수 있다?

이게 뭔소린가 ?

지금 예수님이 장난하나?

지금 까지 교회에서 이런 논리 아니던가?

뭘 말하려고 하는가?

사랑해도 그건 참사랑이 아니고 확인을 해봐야 된다는 건가?
뭘로 확인을 한다는 건가?

예수님이 확인할 수는 없고
성령받은 사람이 확인 한다는 건가?

예수님이 그말을 하려고
우리를 어렵게 하셨는가?
예수님이 그런분이 셨던가?

왜 자꾸 어렵게 말을 하는가?

이것은 우리눈에 다메섹이전에 벗겨지지않은 바울의 눈꺼풀 아닌가?

순자손은 들어주고, 맹자는 천하에 지옥에 갈늠으로 판정하는게 성서인가?

떼야르드 샤르뎅이 그런말 했는가?
어거스틴은 플라톤을 아버지로 모신자 아니던가?

아!

피곤하고 졸립네..

믿는게 이렇게 어려우니

그냥 사랑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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