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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5국 10개 도시에서 한반도 평화를 외치다 ②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2편 독일 – ① 하노버, 베를린
심자득 김정애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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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7월 15일 (토) 12:42:56
최종편집 : 2023년 07월 28일 (금) 06:37:08 [조회수 :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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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버 중앙역에서 찬양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연재] 유럽5국 10개 도시에서 한반도 평화를 외치다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1편 네덜란드 – 암스텔담, 헤이그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2편 독일 – ① 하노버, 베를린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3편 독일 – ② 비텐베르그, 라이프찌히, 드렌스덴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4편 폴란드 -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5편 체코 - 프라하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6편 오스트리아 - 비엔나

 

하노버

 

순례단은 헤이그에서 베를린 까지 가는 가는 700km의 긴 여정 중에 415km 지점의 하노버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하노버 중앙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기로 했다.

하노버(Hannover)는 라이네(Leine) 강 중류에 위치한 독일 니더작센주의 주도이다. ‘높은 강둑’이란 의미를 지닌 하노버는 라이네강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다. 독일에서 가장 심심한 도시로 선정됐다고 하는 하노버는 14세기에 한자동맹(Hansa同盟)에 가입하면서 국제적인 교역도시로 위상을 높였다. 영국 왕을 배출한 하노버 공국 시절에는 정치도시로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는 아픔도 겪었다. 하노버는 오늘날 유럽 최대 박람회 개최지이고 교통 요충지이자 독일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들 중 하나로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 긴 이동 시간 중에 유경동 교수가 상금을 걸고 '평화드림5만리'로 7행시를 짓는 즉석 경연을 열었다.
   
 
   
▲ 순례단의 매식체험
   
 

 

순례단은 하노버에 도착하여 고영기 목사(중앙연회 유럽지방 취리히한인사랑교회 소속 독일선교사)의 안내로 하노버 투어를 시작했다.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이어서 순례단은 각자에게 지급된 20유로를 가지고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마르크트 교회 주변에서 각자가 원하는 식당을 찾아 매식하는 체험을 했다.

마르크트 교회는 도시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다. 이 교회는 시민들의 힘으로 건축하고 복원한 유적이다. 14세기에 건축된 독일 신고딕 양식의 마르크트 교회는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나 화려한 대리석이 아닌 벽돌로 내외부를 쌓은 점도 특이하다. 건축된 이래 여러 차례 발생한 화재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이 힘을 모아 복원했다. 교회 입구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고 육중한 철제 출입문에는 유대인 학살을 표현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교회 오른편에는 마르틴 루터 사상을 이어온 교회임을 보여주는 마틴 루터의 동상이 서 있다.

 

   
▲ 시민들이 모금해 건축했다는 마르크트 교회 전경
   
 
   
 
   
▲ 고영기 목사(독일선교사)가 마르크트 교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육중한 철문에 유대인 박해가 묘사되어 있다.

 

익숙치 않은 외국에서의 매식 체험으로 시간을 약간 지체한 순례단은 빠른 걸음으로 하노버 중앙역으로 향했다. 퍼포먼스와 서명활동을 펼치기로 약속하고 고영기 목사가 하노버 경찰서에 집회신청을 해 놓아 예정된 시간에 도착해야 했다.

하노버의 열차 노선과 도로는 거미줄처럼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다. 교통 요충지 하노버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은 중앙역(Hauptbahnhof)이다. 하노버 중앙역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독일 철도(Deutsche Bahn)의 중심지다. 독일 고속철도 이체에(ICE; InterCity-Express)의 시험운행은 1990년 하노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91년 2월 28일 ICE 일반승객을 태우고 뷔르츠부르크(Würzburg) 중앙역까지 운행을 시작한 곳도 하노버 중앙역이다. 상업운행을 시작할 당시 ICE 최고 속도는 시속 250km로 당시 지상에서 가장 빠르고 편안한 열차였다. 하노버 중앙역은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비해 작지만 열차의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사인보드는 훨씬 빈번하게 바뀐다.

 

   
▲ 하노버 중앙역에서 찬양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하노버 중앙역에서 서명활동을 펼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하노버 중앙역에서 서명활동을 펼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하노버 중앙역에서 서명활동을 펼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하노버 중앙역에서 서명활동을 펼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서명활동이 벌이는 동안 조성현 목사(일산광림교회)가 찬양을 인도하고 있다.
   
▲ 하노버 중앙역에서 서명활동을 펼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하노버 중앙역에 도착해 찬양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끈 순례단은 곧바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기록홍보팀은 이 광경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기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순례단 각자의 SNS에 평화드림5만리 활동을 알려 팔로우들에게 통일과 평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있었다.

외국인을 만나 한반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해 달라는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고 서명을 요청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명지 상단에 13개국 언어로 서명을 호소하는 문구가 있다해도 그 과정에 이르는 동안 아무래도 몇마디 대화는 나눠야 하기에 비영어권에서 의사소통은 서로가 고통이었고 무언가를 부탁해야 하는 이번 순례의 특성상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순례단원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럴 땐 미소가 답이다. 웃는 얼굴에 침뱉으랴.

30여분 정도의 서명활동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20명이 50여개의 사인을 받아낸 게 고작이었다. 우선 팀을 정비해야 했다. 기록홍보원 1명, 서명요원 3~4명으로 조를 이뤄 총 6개조로 활동했는데 기록홍보원까지 서명활동에 참여해 총 10개조로 개편했다. 나머지 10여명은 서명활동을 벌이는 동안 찬양을 하거나 현수막을 들었다. 이 효과는 베를린에서 나타나게 된다.

 

   
▲ 하노버 오페라 광장에 마련된 홀로코스트 추모비 앞에서

서명활동을 마치고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하노버 신 시청사까지 가는 길에 하노버 오페라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유대인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과오를 곳곳에 남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게토로 격리했다. 하노버의 유대인 2,400명이 추방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38년 하노버에는 4,800여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1945년 4월 10일 미군이 진군하였을 때 남아있는 유대인의 수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기디엔 교회(Aegidien Church)

   
▲ 2차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된 아이기디엔 교회(Aegidien Church)
   
▲ 히로시마 시가 1985년에 기증한 평화의 종(bonshō)
   
▲ urt Lehmann의 작품 "Demut (겸손)"
   
 
   
▲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 아이기디엔 교회(Aegidien Church)

순례단이 또 찾은 곳은 2차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된 아이기디엔 교회(Aegidien Church) 유적이었다. 하노버는 생산 중심지이자 교통 요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석유 작전과 같은 전략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전쟁 기간중 88회의 폭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도시의 90%가 파괴되었으며 6천여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347년에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2차대전 중 1943년에 있었던 야간공습으로 파괴되어 지붕이 모두 날아간 채로 마르크트교회에서 신시청사로 가는 길목인 Breite Strasse와 Osterstrasse 교차로에 서 있다.

하노버시는 폭격으로 파괴된 이 교회를 재건 할 것이냐 그냥 둘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폭격 맞은 그대로 두어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으로 남겨두기로 했다고 한다.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 자신들의 범죄를 떠올리게 만드는 흉물이지만 왜곡하고 숨기고 때론 뻔뻔하게 부인하는 우리 이웃 섬나라하고는 많이 다르게 근처의 유대인추모비와 함께 부끄러웠던 과거일지라도 숨기기보다 드러냄으로써 반성하며 교훈을 삼고자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돋보였다.

하노버의 자매도시인 히로시마는 1985년에 평화의 종(bonshō)을 기증했다. 평화의 종은 탑 아래에 매달려 히로시마의 날(6월 7일)에 연례 예배에 사용된다고 하는데 자신의 피해를 아파하는 만큼 남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서도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겠다.

 

 

   
▲ 하노버 신시청사 * 사진출처;위키대백과
   
▲ 하노버 신시청사
   
 

신시청사

하노버 상징적인 건물인 신시청사는 1913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올해로 100년이 됐다. 지금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원래 설계대로 복원한 것으로 바로크, 네오고딕, 분리주의 양식 등 여러 건축양식을 절충하여 완성했다. 궁전과 성을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웅장한 신시청사는 견고하고 딱딱한 외관과 다르게 내부는 너도밤나무 소재로 마무리해 푸근함이 느껴진다. 높이 100m에 이르는 이곳 옥상의 전망대는 도시와 라이네강을 따라 조성된 주변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기라고 한다. 이 랜드마크는 누구든 방문할 수 있게 항상 문이 열려 있다. 순례단은 신시청사를 잠간 견학하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아직 300km를 더 가야 한다.

 

 

베를린

 

평화드림5만리 순례 4일째인 6월 28일, 순례단은 유대인박물관을 찾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유대인 박물관에서 나치가 벌인 잔학상을 보고 나서 독일에서 가장 큰 베를린 돔교회를 찾아 여행객을 위한 예배에 참석한 뒤 퍼포먼스와 서명활동을 벌였다. 오후에는 유대인 추모공원을 방문하고 독일통일의 상징 부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명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독일 국회의사당을 견학한 뒤 백림교회(이병희 목사)에서 베를린 자유대학의 김상국 교수가 “유럽 안보와 한반도 평화통일: 전쟁,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를 제목으로 진행한 포럼에 참가했다.

특히 브란덴 브르크문에서 순례단이 연습해 간 우크라이나 찬양 “МОЯ МОЛИТВА НЕХАЙ ЛИНЕ(내 기도를 들으소서)”를 부르자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이 군중들 틈에서 순례단으로 찾아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현상은 순례단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우크라이나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벌어졌다. 낯선 땅에서 한국의 낯선 청년들이 부르는 모국어 찬양에 위로를 받았으리라. 순례단은 이들을 안아주고 박수로 격려했다.

 

Моя молитва нехай лине

 

내 기도를 들으소서

 

1. Моя молитва нехай лине

до Тебе, наче фіміам,

і серце лине безупинно

в чудовий Твій небесний храм.

1.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은 백합꽃 향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 천하를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심장은

지금도 계속 뛰고 계심을 믿습니다.

Приспів:

Боже, я молю за Україну,

Боже, молю Тебе за людей.

Ти їх прости, Ти їх спаси

і милість Свою нам яви.

Боже, я знаю, що Ти будеш з нами

в храмі Своєму під небесами.

Радість і мир Ти дарував,

життя за людей віддав,

в Книгу Життя нас записав.

 

[후렴]

하나님,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백성을 위해 당신께 기도합니다

우리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높고 거룩하신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습니다.

2. В Твоєму Слові Живому

Ти для життя веління дав,

щоб люди всі молились Тому,

Хто на хресті за них вмирав.

2.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독일에서 순례단을 안내한 이는 베를린 백림교회의 김정애 사모다. 김정애 사모는 1991년 남편 이병희 목사와 함께 독일 선교사로 파송받아 백림교회를 개척하여 현재까지 목회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와 숭실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로이틀링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석사과정 수료했다. 저서로 [생각하는 나라 독일이야기](코람데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코람데오)가 있다.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이 이날 방문한 방문지의 설명은 김정애 사모의 글로 대신한다.

 

 

글 김정애(베를린 백림교회)

 

1. 베를린 유대인박물관 (Jüdisches Museum Berlin)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은 해체주의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했다. 리베스킨트는 1946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간 유대인으로, 현재는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1999년 베를린 시내 중심부에 완공된 이 박물관은 2001년 9월 11일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이날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로 인해 개관 예정일을 이틀 연기하여 9월 13일에 공개되었다.
 
리베스킨트의 작품들을 보면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비극으로 점철된 유대인의 역사를 가장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단어는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는 번제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리베스킨트는 유대인의 참혹한 역사, 분노, 그에 대한 기억을 ‘박물관’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사라져간 유대인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로 먼저 베를린 지도에서 유명한 유대인 작가, 작곡가, 예술가, 과학자, 시인 등의 거주지를 선으로 연결했다. 그 선들은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메트릭스를 이루었는데, 리베스킨트는 이 메트릭스를 그대로 적용하여 특별한 모양의 박물관을 건축하였다. 

박물관의 외관에 보이는 금속성 외벽 패널에 길게 패인 날카로운 흔적들은 단순한 선처럼 보이지만 나치에 의한 학살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리베스킨트의 건축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에 ‘상처’를 냄으로써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외관에서부터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건물에는 의도적으로 출입구를 만들지 않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옛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간 뒤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박물관의 내부 공간은 매우 폐쇄적으로 설계되었다. 미로로 이어지는 좁다란 복도는 공간지각을 혼란하게 하여 길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갖게 한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은 전시 내용을 효율적으로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 동선의 흐름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지만, 리베스킨트는 구획을 복잡하게 짜고 동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유대인이 처했던 불확정적인, 불안한 상황을 공간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도록 설계하였다. 

 

   
▲ 베를린 유대인박물관 (Jüdisches Museum Berlin) *출처:위키대백과
   
 

 

 

⁕ 3개의 축(Achsen)

건물 내부에 3개의 축을 구성하였는데 첫 번째 축은 연속의 계단, 두 번째 축은 추방, 세 번째 축은 홀로코스트이다.
           
첫 번째 축인 ‘연속의 계단’은 역사의 연속을 강조한다. 구조물들을 사선으로 기울여 건축하여 시각적으로 방향성에 집중하게 하면서도 선들을 중첩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동선 안에서 비극적인 과거와 반성하는 현재, 그리고 밝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고자 한다.

두 번째 축을 따라 외부의 정원으로 나가면 베를린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호프만 가든’과 연결된다. 가로 1.5m, 세로 7m 크기의 49개의 기둥이 좁은 공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바닥은 약간 경사지게 하고, 울퉁불퉁하여 걷기에 힘들게 만듦으로써 이 역시 베를린에서 추방당해 떠나가는 유대인들의 불안한 상황과 미래를 대변한다. 콘크리트 기둥들은 마치 죽어간 유대인의 묘비처럼 느껴진다. 

   
▲ 순례단을 인도하는 김정애 사모(가운데 빨간 옷)
   
▲ 베를린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호프만 가든’
   
 
   
 

 

세 번째 축인 홀로코스트 축을 따라 가면 복도에 설치된 전시장에는 비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이 지녔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고, 복도 끝에는 무거운 철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홀로코스트 타워이다. 홀로코스트 타워로 들어가 철문을 닫으면 사방이 막혀 있는 좁은 공간 속에서 어둠을 경험한다. 그러나 천정 귀퉁이에 있는 작은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데, 이 빛은 절망적인 공포와 비틀린 역사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 홀로코스트 끝에 있을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 홀로코스트 타워

 

⁕ 공백의 기억 (Leerstelle des Gedenkens / Memory of Void)

박물관 내부에는 ‘공백의 기억(Memory of Void)’이라는 곳이 있다. ‘공백의 기억’ 바닥에는 이스라엘 현대미술가인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hman)의 작품이 깔려있다. 희생된 유대인들의 얼굴 형상을 한 10000개의 원형 강철 조각들이 바닥에 불규칙하게 깔려 있다. 관람객이 밟고 지나갈 때 강철 조각들이 내는 마찰음은 마치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때의 비명소리처럼 좁고 깊은 공간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 공백의 기억 (Leerstelle des Gedenkens / Memory of Void)
   
▲ 공백의 기억 (Leerstelle des Gedenkens / Memory of Void)
   
▲ 공백의 기억 (Leerstelle des Gedenkens / Memory of Void)
   
▲ 공백의 기억 (Leerstelle des Gedenkens / Memory of Void). 철제가면을 밟고 지나가면 철제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인간의 절규처럼 들린다.

 

박물관 내부를 보면 구조적, 공간적으로 비어 있는 곳이 있다. 이는 리베스킨트가 건축물의 기본 개념으로 택한 ‘공백’이다. 단절된 역사, 베를린에서 유대인이 떠난 자리, 재가 돼 버린 인간성 등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종류의 공백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비극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들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특별한 건축물이다. 우리가 평소 겪어온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과 달리 기울여진 구조, 동선을 파악하기 어려운 복도,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건물 규모에 비해 무척 작고 불규칙하게 기울어진 창문, 드문드문 비어 있는 공간 등을 통해 과거 유대인들이 느꼈을 삶의 공포와 불확실성을 전달할 뿐 아니라 그들이 떠나고 난 뒤의 빈자리, 공백과 단절을 표현한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기억하기’라는 깊이 있고 심각한 주제를 박물관 전체 공간을 통해 실재감 있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표현하였다.

 

   
 
   
 
   
 
   
 
   
 

 


2. 베를린 돔교회 (Berliner Dom)


베를린 돔교회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박물관섬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돔교회의 외형만을 보고 베를린 대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곳은 가톨릭성당이 아닌 개신교회이다.

 

   
 

베를린 돔교회는 1465년에 세워졌다. 이후 1539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였던 요아힘2세 (Joachim ll von Brandenburg)가 마르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받아들여 브란덴부르크 지역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이후 이 교회는 지금까지 개신교인 루터교회로 이어져오고 있다.

1893년부터 12년에 걸쳐 교회를 완전히 새로 건축하였는데,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모델로 삼아 1905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공되었다. 2차 대전 시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1974년부터 1993년까지 완전히 복원하였다. 규모로는 독일에서 가장 큰 루터교회이다. 매 주일 오전 10시, 저녁 6시에 예배를 드리고 있고, 매일 낮 12시 열리는 정오예배에는 주로 관광객들이 참석하고 있다.

돔교회 정면 계단 양쪽에 마르틴 루터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의 부조는 보름스 의회에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는 루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른쪽 부조에는 멜란히톤 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루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교회 정면에는 루터문장이 새겨져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돔을 받치고 있는 8개의 기둥 위에 종교개혁 공로자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마르틴 루터, 필립 멜란히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루터와 츠빙글리의 화해를 위해 자리를 주선해주었던 헤센의 필립공, 브란덴부르크의 종교개혁을 이끈 선제후 요아킴 2세,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공작 등 8명이 조각되어 있다. 천정에는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베를린 돔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 유산을 지키고 이어가는 독일 루터교의 1번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 교회를 중심점으로 해서 사방의 지역들의 거리를 측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신앙, 개혁신앙을 삶의 중심,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베를린 돔교회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 가장 중심에 있어 사방의 거리를 측정하는 중심점이 되듯이,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해 새롭게 개혁하는 신앙이 우리들의 삶의 중심,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베를린 둠교회
   
 
   
 
   
 
   
 
   
 
   
 
   
 
   
 
   
 
   
▲ 루터 문
   
▲ 보름스 의회에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는 루터의 모습
   
▲ 성경을 번역하는 루터의 모습
   
 
   
 
   
 

 

 


3.  유대인 추모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관 Holocaust Mahnmal)


베를린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을 상기시키는 곳들이 많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곳들이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키고, 수많은 유대인들, 집시들을 학살한 과거를 가진 독일은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며, 다시는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다. 

 

   
▲ 유대인 추모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관 Holocaust Mahnmal)

베를린 가장 중심지이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인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나치 통치의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유대인 추모공원이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위해 두 차례에 걸친 국제공모전이 있었고, 1997년 두 번째 공모전에서 건축 철학자 혹은 철학 건축가로 불리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설계안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아이젠만의 설계안으로는 본래의 건립 목적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다는 논쟁이 2년 간 지속되었고, 1999년 독일 국회는 추가적으로 정보관(Place of Information)을 더 지을 것을 결정하며 전체적인 계획이 확정되었다.

아이젠만의 설계안은 다시 치열한 논쟁을 거쳐 2003년에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2년의 작업 기간 동안 약 19000 평방미터의 면적 위에 2711개의 각기 다른 크기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격자 모양으로 세워졌고, 지하에 부설 정보관이 건축되었다. 가까이서 보면 좁은 통로를 두고 사이사이 크고 작은 기둥들이 모여 있는 것 같지만 멀리서, 혹은 위에서 보면 마치 콘크리트 기둥들이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각기 다른 크기의 2711개의 돌은 저마다 다른 외양, 다른 사연을 가졌을 수많은 희생자들의 묘비를 연상시킨다. 매년 전 세계에서 4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와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며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지하에 위치한 정보관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확인된 모든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명단을 볼 수 있다.

 

   
▲ 유대인 추모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관 Holocaust Mahnmal)
   
▲ 유대인 추모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관 Holocaust Mahnmal)
   
▲ 유대인 추모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관 Holocaust Mahnmal)

 


4.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나아가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옛 베를린의 1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문으로써 1788년부터 1791년까지 3년에 걸쳐 세운 이 문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모방하였고, 베를린이 새로운 아테네, 즉 학문과 예술의 도시가 되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건설할 당시에는 평화의 문(Friedenstor)라고 불렀다. 문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의 여신 에이레네를 태우고 달리는 모습을 한 4두 마차(Quadriga) 조각이 세워져 있다. 

1793년 요한 고트프리드 쉐도우(Johann Gottfried Schadow)에 의해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설치된 4두 마차(Quadriga) 조각은 수년에 걸쳐 세 번이나 철거되었었다. 1806년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함락시킨 후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으로 가져가 전시해놓았던 것을 1814년 나폴레옹 패망 이후 다시 찾아왔다. 이후 이 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으나 1955년-58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동서독이 나뉜 후 동독정부는 1961년 8월 13일 서베를린을 둘러싸기 위해 155km에 달하는 장벽을 세웠다. 장벽이 세워진 이후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볼 때 서베를린 쪽에 설치되었던 이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동서독 통일과 함께 무너졌고, 브란덴부르크 문은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4두 마차(Quadriga)는 통일 축하 행사, 특히 1989/90년 새해 전야에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2년 후 다시 한 번 복원해야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경계로 구 동베를린 쪽은 운터 덴 린덴 거리(보리수길이라는 뜻)이고, 구 서베를린 쪽은 6월17일 거리인데, 1953년 6월 17일 이곳에서 일어났던 반공데모를 기념하여 붙여진 거리 이름이다.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과 함께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과 함께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과 함께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과 함께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을 안아주는 순례단원
   
▲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이지연양의 개인 퍼포먼
   
 
   
 
   
 

 

 


5. 국회의사당 (Reichstag)

 

   
▲ 국회의사당 (Reichstag)

이 건물의 정확한 명칭은 국가의회 의사당이다. 1871년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독일제국을 세운 이후 독일 국회의사당을 설립할 것을 계획하여, 1894년에 이 건물이 완공되었으며 프랑스로부터 받은 전쟁보상금의 일부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1918년 11월 이곳에서 바이마르공화국(1918-1933)이 선포되었고, 1933년 1월 바이마르공화국을 무너뜨린 아돌프 히틀러가 이곳에서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1933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이 불탔는데, 당시 화재는 공산당원의 범행으로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히틀러는 독일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국회의사당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더욱 크게 파손되었으나 1970년 새롭게 복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시대에 독일 국회의사당은 바로 옆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냉전의 최전선으로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서베를린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전쟁 이후 서독 정부는 본에 설립되었고, 독일 국회의사당은 폐허에 가깝게 낙후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재건에 대한 논쟁 끝에 건축가 파울 바움가르텐(Paul Baumgarten, 1900-1984)에 의해 1970년 재건축이 완료되었으며, 의회 위원회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된 후 통일독일의 역사적인 첫 연방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1995년 6월 24일, 환경 설치 예술가인 크리스토 클로드(Christo Claude)와 장 클로드(Jeanne Claude)는 의사당 건물 전체를 하얀색 직물로 완전히 감싸는 프로젝트를 완료하였다. 이 작업은 90명의 암벽등반 전문가와 120명의 노동자가 투입된 예술 프로젝트로 24년간의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건물을 싸는데 사용한 엄청난 양의 직물은 프로젝트 완료일로부터 14일 뒤에 뜯어내서 재활용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난 후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에 의해 국회의사당을 재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기존 건물의 역사적인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독일의 위상을 보존하면서도 내부에는 기능적인 디자인과 혁신적인 친환경적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과 현대의 조화, 그리고 독일이 통일 후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담고자 하였다. 또한 노먼 포스터는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이 건물은 민주주의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개방성, 투명성을 담게 되었다. 

그는 국회의사당의 벽을 제외한 건물 내부의 모든 골격을 뜯어낸 뒤 맨 꼭대기에 가벼운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만든 돔을 설치했다. 거울로 덮은 환기통이 돔에서 내려와 아래층의 조명과 환풍을 동시에 해결하게 만들었는데, 투명한 돔을 통해 들어온 태양광은 회의장의 내부 조명으로 쓰인다. 돔 구조는 직사광선이 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내부 온도가 지나치게 상승하거나 눈부심을 방지해준다. 양 옆으로는 나선형 경사로를 달아서 공사 중에도 의회가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방문객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전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돔은 기술적 혁신을 담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개방성을 담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본회의장을 내려다보는 것도 가능하며, 회의장보다 방문객이 오가는 돔이 더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국민이 정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설계이기도 하다.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은 정치적 의사 결정이 벌어지는 장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곳은 과거 독일의 민주주의가 좌절된 장소였지만 통일 후 새로운 독일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탈바꿈했으며, 맨 꼭대기의 유리 돔은 베를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 국회의사당 (Reichstag) 유리돔
   
 


6. 페르가몬 박물관 (Pergamon Museum)


페르가몬 박물관은 박물관섬(Museunsinsel)에 위치하고 있다. 베를린 중심을 관통하는 슈프레(Spree) 강에는 대략 여의도 규모의 작은 섬이 있는데, 이중 박물관 5개가 모여 있는 위쪽을 박물관섬이라고 부르고, 아래쪽은 슈프레섬이라고 부른다.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는 박물관섬에는 구 박물관, 신 박물관, 구 국립미술관, 보데박물관 그리고 페르가몬박물관이 있다. 1830년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이곳에 처음 박물관을 개관한 후 점차적으로 4개의 박물관이 더 건축되어 약 200년의 박물관섬의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다. 독일 통일 이후 장기적인 마스터플랜 하에 박물관들을 대대적으로 보수, 확장하는 공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2019년 7월 방문객 센터로 제임스 시몬 갤러리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박물관섬에서 으뜸가는 박물관은 페르가몬박물관이다. 페르가몬박물관은 알프레드 메셀(Alfred Messel)과 루드비히 호프만(Ludwig Hoffmann)에 의해 1910년-193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페르가몬 제단(Pergamonaltar), 이쉬타르 문(Ischtar Tor), 밀레토스의 시장 문(Markttor) 등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실제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페르가몬 제단은 기원전 2세기에 도시국가의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바치기 위해 에우메네스 2세 왕이 세운 기념비적인 제단이다. 이 제단은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페르가몬(현재 튀르키예 이즈미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 교회가 있었던 곳)의 언덕에 건설되었다. 신전은 제단의 너비 35.64m, 높이 33.40m로 헬레니즘 건축의 최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페르가몬 박물관에 신전 제단을 실제 크기로 재현해놓았는데 2027년까지 보수공사가 진행되므로 당분간 관람이 불가능하다.
 
독일 엔지니어 칼 후만(Carl Humann)은 페르가몬 지역에 10년 이상 머물며 개인적으로 이 지역의 유물들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1878년 베를린 박물관 팀과 함께 공식 발굴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1886년 1차 작업을 마쳤다. 발굴의 주요 목적은 제단 프리즈를 복구하고 제단의 기초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 다른 건물 단지가 발견되어 발굴 작업의 범위가 넓어졌고, 튀르키예 정부와의 협상에서 당시 발견된 제단 프리즈의 모든 조각들을 베를린 박물관에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참고: 프리즈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식된 건축물의 외면이나 내면의 연속적인 띠 모양의 부분을 말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복원가들은 수천 개의 조각에서 프리즈의 패널을 재조립하였고, 이 프리즈를 전시할 수 있도록 박물관을 건축하였다. 1901년 첫 번째 건물이 지어졌으나 1909년 철거하고, 1930년에 더 큰 박물관 건물을 완공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에 프리즈가 전시되고 페르가몬 제단의 서쪽 정면이 재건된 후, 베를린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박물관의 이름을 ‘페르가몬 박물관’이라고 명명하였다.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가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인 이쉬타르 문(Ischtar Tor)을 볼 수 있다. 이쉬타르 신전은 주전 575년 경 느부갓네살 2세(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성을 지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웅장함과 번영에 눈뜨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그곳에서 가장 강한 짐승을 잡아서 죽이는 의식을 행했는데, 바벨론에서는 짐승을 죽이는 대신 그 모습을 신전을 향해 행진해 들어가는 양쪽 벽에 새겨 넣었다. 이쉬타르 문을 향해 가는 양쪽 벽에는 가장 힘센 짐승인 사자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왕과 군인들의 행렬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신전으로 향하는 벽과 문은 짐승의 모양을 새겨 넣은 파란색 타일로 만들었다. 이 타일은 찰흙을 빚어서 짐승의 모양과 문양들을 새겨 넣고, 먼저 약 800도 정도에서 초벌구이를 한 후 원하는 색깔의 안료를 발라서 약 1300도에서 20-30시간 구워야 완성되는 고도의 기술과 노력, 정교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과 사랑의 신인 ‘이쉬타르’는 앗수르 사람들이 섬기던 달의 신인 ‘신(Sin)'의 딸이었고, 하늘의 신 아누(Anu)의 아내였다. 유대인 백과사전은 이쉬타르 여신의 기원을 창세기에 나오는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사랑의 신 ‘이쉬타르’에서 구약성경 사무엘서, 열왕기서 등에 등장하는 ‘아스다롯’(Ashtaroth)이 유래하였다. 아스다롯의 영향은 이후 온 세계로 퍼졌는데, 헬라에서는 이 여신이 아프로디테로, 로마에서는 비너스로 불리게 되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시대, 주전 600년을 전후로 만들어진 바벨론 성, 신전들의 규모와 장대함, 아름다움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남유다가 멸망하는 과정,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의 열왕기하, 다니엘서 등에서 볼 수 있다.

다니엘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일생을 바벨론에서 지냈다. 어린 나이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바벨론의 강대한 문화 속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일에 동화되지 않고 일생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앙을 지키며, 고위직의 임무를 잘 감당해낸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 외에도 페르가몬 박물관에서는 주후 12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us, 재위기간 117-138)  때 건축된 밀레투스의 시장 문(Markttor)을 볼 수 있다. 고대 밀레투스에 있었던 시장의 입구를 발굴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스의 부유한 항구도시이자 도시국가였던 밀레토스는 현재 튀르키예 영토에 속해 있다. 

 

 

평화의날 기념 세미나 “유럽 안보와 한반도 평화통일 : 전쟁,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

 

순례단은 베를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베를린 백림교회로 자리를 옮겨 평화의날 기념 세미나를 실시했다. 강사로는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김상국 교수가 초청됐다. 김상국 교수는 <유럽 안보와 한반도 평화통일 : 전쟁,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를 제목으로 발제하면서 독일의 통일 경험이 한반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두 나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진전을 위한 국제적 국내적 조건은 무엇이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발제 전문 보기>

김교수는 먼저 남북한은 형제이지만 동시에 적이 될 수도 있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고 지향하는 통일의 방식도 다른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경쟁이 한반도 전쟁의 씨앗이 되었고 분단이후 냉전시대를 거치며 안보딜레마와 동맹딜레마를 낳아 군비경쟁을 가속화 한 결과 북의 핵개발까지 이르러 이제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를 벗어나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복잡한 문제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통일에 대한 지배세력 그리고 국제적 이해관계가 우리 국민 대다수의 이해관계와 달라 통일은 요원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반도 문제는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남과 북이 원한다고 통일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반면 독일은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고 동서독의 관계 개선에만 주력한 결과 통일이라는 결실을 보았다고 했다. 즉 김교수는 독일 통일의 시작은 89년이 아니라 60년대에 미국의 간섭 배제를 선포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며 민주주의, 인권, 자유보다도 화해와 평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 꾸준히 동서독의 관계개선을 도모한 결과 통일에 이를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독일상황과 많이 달라 독일의 경험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독일은 전범국으로 분단된 반면 한반도 분단은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이었고, 독일은 동족상잔이 없었지만 우린 겪었으며, 독일은 자주적일수 있었지만 한반도는 미소중일의 간섭을 배제하기 힘들고 이해관계도 더 복잡하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이주한 사람이 300만일 정도로 서독은 동독의 이상적 사회였지만 탈북민이 3만에 그치는 북한은 남한을 그리 볼 지 알수 없고, 갈등의 정도도 경미했으며, 통일의 물리적 조건 즉 인구, 경제규모에서 차이가 한반도 보다 적어 통일의 기반이 될만 했다고 보았다.

김교수는 이렇게 독일과 한반도의 사정이 많이 다른 상황에서 “그럼에도 동서독 통일은 한반도 미래에 교훈을 제공한다”고 했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도 문제점이 없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맞을 통일과정에서 교훈을 제공할 “일종의 공구상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김교수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적, 국내적으로 조건을 갖춰가야 할 것인데 먼저 ‘신뢰’를 꼽았다. 특히 비핵화를 위한 북미간 신뢰를 위해 한국 정부가 역할을 할 것과 이를 위한 한반도 종전 선언, 중장기적인 로드맵 설정, 미국의 통일된 외교노선, 북한의 변화와 중국의 역할 등 여러 각도에서 해법을 제시했다.

특히 통일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문제 삼는 시각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단 때문에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일이 되면 분단비용은 일시에 사라지고 통일비용은 점차적으로 감소하여 언젠가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실천과제는 무엇일까? 김교수는 우리 내부에서 개방적 통일논의로 보수/진보간 대결을 극복하고 포괄적/합리적 통일 담론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김교수는 ‘평화드림5만리’ 참여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이 여론 형성의 주체로서 적극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통일 사안 이외에도 지역사회/정부/시민 사회와 연대하여 인도적 협력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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