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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유럽5국 10개 도시에서 한반도 평화를 외치다 ③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3편 독일 – ② 비텐베르그, 라이프찌히, 드렌스덴
심자득 김정애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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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7월 28일 (금) 06:36:00
최종편집 : 2023년 08월 02일 (수) 00:18:11 [조회수 :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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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그 시청사 앞에서. 광장에는 마르틴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걸었던 비텐베르그 성교회(Schloss Kirche) 문 앞에서

 

[연재] 유럽5국 10개 도시에서 한반도 평화를 외치다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1편 네덜란드 – 암스텔담, 헤이그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2편 독일 – ① 하노버, 베를린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3편 독일 – ② 비텐베르그, 라이프찌히, 드렌스덴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4편 폴란드 -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5편 체코 - 프라하
평화드림5만리 유럽순례 6편 오스트리아 - 비엔나

 

엊그제 갑작스레 버스 에어컨이 고장이 나면서 어제 하루종일 이동 간에 더위와 한바탕 씨름을 했던 터였다. 통유리로 된 차창이어서 창문을 열 수도 없었기에 몇몇은 더위를 먹어 탈수증세가 오기도 했다. 오늘도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던 순례단은 더 이상 에어컨이 고장난 채로 이동할 수는 없어서 체코국적의 버스기사가 에어컨을 고쳐올 때까지 호텔에 머무르기로 했다. 어느정도 이 결정은 인솔자가 현지 버스회사에 줄기차게 대차를 요구해도 기다려보라고만 할 뿐 아무 조치가 없는 버스회사를 향한 시위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날 오전에 예정되어 있던 페르가모 박물관 방문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이 결정으로 페르가모 박물관에 전시된 구약시대 유물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점심 무렵이 됐을 때 에어컨을 고쳐오겠다던 기사는 에어컨을 고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품이 없더라는 이유를 댔지만 회사로부터 버스 차고지가 있는 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라는 지시를 받은 게 아니었나 싶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버스 에어컨 수리가 자가용처럼 몇 시간 만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비용도 만만찮게 드는 작업이라고 한다. 프라하에서 베를린까지 빈 버스를 한 대 보내고 받는 일도 다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어서 어떻게든 이틀 후에 도착할 프라하까지 뭉게고 갈 작정으로 보였다. 이 순간 우리 일행은 철저하게 ‘을’일 수밖에 없었다. 이역만리 말도 안통하는 곳에서 시위한들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면 우리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마침 하늘이 잔뜩 흐렸고 간간이 비가 뿌려지는 날씨여서 순례단은 일단 이동해 보기로 했다. 베를린-비텐베르크-라이치히 간격이 약 100여km로 그리 멀지 않아 여차하면 차를 세우고 쉴 작정이었다. 버스 천정에 달린 비상탈출구를 비스듬히 열어 젖혔더니 나름 시워한 바람이 들이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오면서 닫아야 했지만.

그렇게 순례단은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그에 도착했다. 아래는 순레단을 안내한 베를린 백림교회의 김정애 사모가 기고한 글이다. 

 

   
▲ 필자인 김정애 사모

 

비텐베르크(Wittenberg)

글 김정애/사진 심자득

비텐베르크는 동서독이 통일되기 이전에는 동독 지역에 속했던 곳이며, 인구가 약 5만 명가량 되는 작은 도시이다. 독일에는 루터의 도시(Lutherstadt)라고 불리는 곳이 여러 곳 있지만 그중 비텐베르크는 단연 독보적이다. 비텐베르크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연구하고, 설교하고, 또한 종교개혁사상을 실천에 옮긴 도시이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아이스레벤(Eisleben)에도 루터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루터가 38년 동안이나 활동한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라는 이름에 가장 적합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1. 성교회 (Schloss Kirche)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는 16세기 초 비텐베르크는 약 2000-2500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였다. 1502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뜻에 따라 이곳에 대학을 세우고, 대학 이름을 ‘Leucorea'라고 지었다. 그리스어인 'leukos'와 'oros'의 합성어로 ’하얀 언덕‘이라는 뜻인데 이 지역의 토질 특성 상 이곳 주변 언덕이 하얗게 보이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대학을 세운지 2년 후인 1504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뜻에 따라 비텐베르크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수도사들의 복장이 검은 색이기 때문에 ‘검은 수도원’이라고 불린 이 수도원에서 루터가 수도사 신분으로 살았고, 후에 이 건물은 선제후가 루터에게 선물함에 따라 루터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가 오랜 세월 후 다시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반환되었다. 현재는 루터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506년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비텐베르크에 자신이 거주할 성을 지었고, 성에 속한 교회도 세웠는데, 그 교회가 바로 성교회(Schloss Kirche)이다. 

 

   
▲ 비텐베르크 성 교회(Schloss Kirche). 1524년 카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전환되었다.
   
▲ 청동문에 라틴어로 새겨진 95개 논제. 원래 목재문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되면서 청동문으로 바뀌었다. 문위의 아치형 성화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경을 든 루터가, 오른쪽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든 멜랑히톤이 서있다.
   
▲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걸었던 비텐베르그 성교회(Schloss Kirche) 문 앞에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이 교회의 문에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95개 논제의 원래 제목은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었다. 루터는 신학자들과 토론하기 위해서 라틴어로 쓴 95개 논제를 교회의 문에 내걸었는데, 루터가 의도하고 기대했던 것처럼 신학자들의 토론을 촉발시킨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그리고 4주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독일에서의 본격적인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95개 논제를 걸었던 원래의 문은 1760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858년 청동으로 똑같은 문을 만들어 여기에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새겨놓았다.

청동문 위에 있는 그림은 루카스 크라나흐(Lukas Cranach)의 작품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왼쪽에 성경을 들고 있는 루터, 오른쪽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들고 있는 멜랑히톤(Phillip Melanchthon, 1497-1560)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교회의 탑의 높이는 88미터인데 탑 위의 둥근 부분에 루터가 1529년 작사, 작곡한 찬송가의 가사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ein gute Wehr und Waffen)'가 새겨져 있다.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이 있다. 교회의 좌우 양 바닥에는 두 사람의 묘비 동판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양 벽에는 두 사람의 전신상이 세워져 있다. 루터는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임종을 맞이하였고, 또 그곳이 그의 출생지였던 까닭에 아이스레벤 사람들은 루터의 무덤을 아이스레벤에 두고자 했지만 워낙 루터를 아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루터의 유해를 비텐베르크로 옮겨와 이 교회 안에 안치하였다. 매년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이 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린다.

 

   
▲ 성교회(Schloss Kirche) 안뜰
   
▲ 최근에 개장했다는 성교회 박물관.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됐다.
   
▲ 95개조 논제
   
▲ 성교회 내부. 나무의자 옆에 21개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 제단 바로 뒤 중앙에 그리스도 , 오른 쪽에 바울이 말씀을 상징하는 검을 들고, 왼쪽에 베드로가 교회를 상징하는 열쇠를 쥐고 서있다
   
▲ 성교회 예배당 설단 아래의 왼쪽에 멜랑히톤 무덤이 있고
   
▲ 오른쪽에 마르틴 루터의 무덤이 있다.
   
▲ 루터가문의 문장
   
 
   
▲ 설교단
   
 
   
▲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성교회가, 동쪽에 성모마리아교회(평민교회)가 있다.
   
▲ 비텐베르그 광장 뒤편으로 평민교회의 두 탑이 보인다

 

 


2. 구 비텐베르크 대학 (Leucorea)  

 

   
▲ 비텐베르그 대학

1502년 프리드리히 선제후에 의해 비텐베르크에 대학이 세워진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비텐베르크는 유럽의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이 될 루터와 멜란히톤의 명성으로 인해 대학에 입학지원자가 너무 많아 걱정할 정도였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주민은 약 2천 명가량 되었는데, 각지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약 2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멜란히톤은 당시 어떤 편지에 ’오늘 밤 나는 내 책상에 둘러앉은 학생들과 11개국의 다양한 언어로 대화하였다.‘라고 써서 보내기도 했다.  

멜란히톤이 살던 집은 지금 멜란히톤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되었다. 멜란히톤은 독일 남부에 위치한 튀빙엔대학에서 학업한 후 양아버지인 요한 로이힐린(Johannes Reuhillin, 1455-1522)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헬라어 교수가 되어 1518년 8월 비텐베르크로 왔다. 멜란히톤은 생전에 이미 ‘독일의 스승’(Lehrer Deutschlands)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학문적 명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 멜랑히톤

원래 비텐베르크 대학은 로이힐린을 교수로 초빙하고자 했는데, 로이힐린은 자기 대신에 헬라어 능력이 뛰어난 멜란히톤(1497-1560)을 추천하여 그를 비텐베르크로 보냈다. 로이힐린 대신 멜란히톤이 비텐베르크로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히브리어 학자였던 로이힐린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기에는 학문적으로 지원했으나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 방향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고, 멜란히톤이 그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루터를 추종하며, 적극 돕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만일 로이힐린이 비텐베르크 교수로 왔다면 루터는 개혁 작업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루터는 멜란히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표현하였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성경번역을 도왔고, 루터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기초하고, 정리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1817년 할레 대학과 합하여 ‘마르틴 루터 할레 비텐베르크 대학’(Martin Luther University Halle-Wittenberg)이라는 긴 이름으로 변경하였고, 할레로 옮겨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3. 루터하우스 (Lutherhaus) 

 

   
▲ 루터 하우스(Luther House). 원래는 16세기 초에 세워진 수도원의 일부로 루터가 생전에 거주지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박물관이다. 내부에서 사진쵤영은 금지되어 있다.
   
 

현재 루터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인 이 건물은 원래는 수도원이었다. 1503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들은 토지를 배당받아 1504년 수도원을 지었다. 검은 수도원(Schwarzer Kloster der Augustiner-Eremiten)이라고 불린 이 수도원 건물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들의 대학과 연계한 수도사교육시설과 숙소로 사용되었다. 에어푸르트(Erfurt)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크 교구로 파송되었고, 이 수도원에서 살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 수도원은 해체되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1524년 수도원 건물을 루터와 그의 가족(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와 그의 여섯 자녀들)에게 주었고, 루터의 가족은 루터가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때로 루터와 카타리나는 이 집에서 페스트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20명씩이나 돌보기도 했다. 또한 루터를 찾아오는 많은 손님들로 인해 이 집은 늘 붐볐고, 카타리나는 매일 많은 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숙식을 제공해야 했다. 

 

   
▲ 루터의 부인 카나리나

 

   
▲ 카트리나의 문

 

루터하우스에는 ‘카타리나의 문’(Katharinenportal)이라는 특별한 문이 있다. 카타리나 문은 1540년 카타리나가 루터의 박사학위 취득을 기념하여 만든 선물이었다. 사암으로 만든 이 문의 왼쪽 위 원형 안에는 박사모를 쓴 루터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루터의 장미문장이 새겨져 있다. 루터의 장미문장은 그가 직접 고안한 것이다. 검은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의미이고, 붉은 심장은 뜨거운 마음, 주님의 향한 열정, 그리고 흰 장미는 순결한 믿음의 기쁨을 의미한다.

박물관 안에는 수도원 시절 수도사들의 식당으로 쓰였던 공간, 강의실, 루터의 서재 등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당시의 생활 모습, 살림살이 등을 재현한 미니어처, 루터가족의 초상화 등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4. 마리아 시립교회 (St. Marien Kirche, 시교회 혹은 평민교회라고도 불린다.)


마틴 루터는 1514년은 비텐베르크 교구사제로 파송받아 1514년(31세)부터 이 교회에서 설교를 담당하였다. 마리아 시립교회는 당시 종교개혁의 본거지 역할을 했고, 종교개혁정신에 입각한 첫 독일어예배가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에는 개혁사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흐가 1539년에 시작하여, 아들 크라나흐가 1547년 완성한 제단화는 1547년 4월27일 봉헌되었다.

 

   
▲ 마리아 시립교회 (St. Marien Kirche, 시교회 혹은 평민교회라고도 불린다.)
   
▲ 평민교회 처마에 유대인을 폄하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독일사람들의 뿌리깊은 유대인 혐오사상을 알수 있다.
   
 
   
 
   
▲ 제단에 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부자(父子)의 작품
   
 

 

제단화의 그림은 전부 4개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에는 세례를 집례하는 멜란히톤, 중앙에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오른쪽에는 회개의 고백을 듣고 안수하는 부겐하겐목사, 하단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설교하는 루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을 나누는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는 다른 구도인 둥근 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제자들의 모습으로 루터와 비텐베르크 시민들을 모델로 하였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자들이 이루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하단의 그림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림에서 루터는 중앙에 위치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가리키며 설교하고 있고, 회중들의 시선은 설교자에게 향해 있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중요사상이 세례, 성찬, 회개, 말씀선포임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제단 뒷부분에는 포도원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그림에서 루카스 크라나흐는 가톨릭 사제들의 횡포와 루터를 비롯한 개혁신앙가들의 헌신을 포도원 농사를 통해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독일의 첫 번째 개신교 목사이자 이 교회에서 목회했던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es Bugenhagen,1485-1558) 목사는 루터가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도록 용기를 주었으며, 두 사람의 결혼예배를 집례하였다. 부겐하겐은 루터와 개혁신앙에 대해 서신을 교환하다가 1521년 비텐베르크로 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523년 루터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의 가장 오래 된 교회인 시교회(현 마리아 시림교회)의 담임자가 되었다. 부겐하겐은 이 교회의 담임자가 되기 1년 전 결혼했으므로 기혼자가 교회 담임자로 임명된 것은 당시 가톨릭 성직자의 독신과는 반대되는 개혁신앙의 명백한 표식이 되었다.

교회 건물 꼭대기 부분에는 특이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Judensau’라고 불리는 이 부조는 유대인혐오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이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와 연관시켜 유대인을 표현하는 자극적인 풍조는 중세 초기 유럽에 널리 퍼져있었다. 부조에 쓰여 있는 글씨 ‘Schem Ha Mphoras'는 비밀스러운 알파벳, 단어의 조합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하는 유대 신비주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Kabbalisten)은 하나님의 본래적 이름을 유대 랍비식으로 표현하는 이 알파벳의 배열이 다방면에 걸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Shem Ha Mphoras'의 의미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성스럽지만,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겨졌다고 믿었다.

루터는 1543년 [Vom Schem Hamphoras und vom Geschlecht Christi] 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아니라고 하며 유대인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특별히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미신적인 행위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였고, 반유대주의적 저서들을 여러 권 저술하였다. 루터는 아이스레벤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할 때에도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적 신앙을 고백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그 어떤 신체적인 폭력도 기독교신앙에 비추어볼 때 옳지 않으며, 유대인들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작센주는 이 부조를 없앨 것인지에 대해 오랜 기간 토론하였고, 그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의미로 부조를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신 유대인을 혐오하고 학살했던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되풀이 하지 않고자 하는 의미로 추모동판이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고, 1938년의 유대인 대학살(Kristalnacht)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부조의 아래 쪽 바닥에 동판을 설치하였다. 동판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봉인 된 성경이 묘사되어 있고, 사면 모서리에는 히브리어로 시편 130편 1절의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나이다“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5. 시청 앞 광장의 두 동상

 

   
▲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에 성경을 펴든 루터 동상(오른쪽)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문을 든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있다.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 중앙에는 성경을 들고 있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며 1817년에 세운 것인데, 동상 하단 4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 인간의 행사는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복음을 믿으라
⁕ 만스펠트 주민의 모금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루터 상을 세우다 

루터의 동상은 항상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이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장 귀하게 생각했고,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운동을 실천해나갔다는 것을 표현한다.

 

   
▲ 루터의 종교 개혁 300년을 기념하여 1817년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서민들의 돈을 모금해 세운 이 루터의 동상은 이후 루터 동상들의 본이 되었다.

 

루터의 동상 왼쪽에는 그 손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들고 있는 필립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멜란히톤 사후 300년을 기념하여 1860년 세웠는데, 동상 하단 4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 근원의 샘으로 돌아가면 진리를 맛보기 시작한다.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 (시119:46)
⁕ 독일 개혁교회의 선생 빌헬름 왕이 이 동상을 세우다 (1860. 4. 19)

신학자이자 헬라어학자인 필립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사상을 정리해서 1521년 [신학강요]를 집필하였고, 1530년에는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발표한 종교개혁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필립 멜란히톤, 요하네스 부겐하겐, 루카스 크라나흐와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멜란히톤은 학자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였고, 루터의 성경번역을 도왔다. 크라나흐는 화가로써 루터의 개혁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대중들에게 전파하였고, 부겐하겐은 목회자로써 개혁적인 설교를 통해 당시 신자들의 삶이 변화되도록 이끌었다. 하나님 나라의 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어느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헌신적인 동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500년 전 비텐베르크에서 있었던 이들의 헌신적인 동역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비텐베르그 일정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더니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다. 기사가 엔진룸을 열어 젖히고 이것저것 만져 보았더니 작동하더란다. 쌍팔년도 테레비 고치듯 두드려 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시도해 볼 것이지 수리센터는 하릴없이 왜 오간 것일까.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기사가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 놓아 몇번이고 줄여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다음날인 7월 1일.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의 여정은 독일통일의 씨앗이 되었던 니콜라이교회가 있는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됐다. 

 

라이프치히


1. 토마스 교회 (Thomas Kirche)

 

   
▲ 성 토마스교회

토마스 교회의 시발점은 1212년에 세워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카논수도원이다.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른 1409년 토마스 수도원에 라이프치히 대학이 세워졌다. 중세에는 수도원이 교육기관의 역할을 병행했는데, 이는 수도사들이 성경과 기독교문헌들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해야 했으므로 자연히 교육기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중세 유럽에 세워진 대학들은 대게 수도원에서 출발하였다.
 
1519년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엑크(Johann Maier von Eck, 1486-1543)는 종교개혁에 관한 논쟁인 라이프치히 논쟁을 시작하며 토마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1539년 마르틴 루터는 이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고, 이후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토마스 교회의 합창지휘자로 재직하였다. 올해는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한지 300년 되는 해로 많은 기념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바흐는 사후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비석이 없어져 찾지 못하다가 이후 발견한 유골의 모습과 DNA 검사를 통해 바흐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1950년 토마스 교회 제단의 성가대석 중앙으로 이장하였다. 

1685년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출생한 바흐는 아이제나흐에 있는 게오르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르네상스시대의 끝자락에, 고전이 대세인 시대에 살았던 바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자’는 시편의 말씀을 따라 매주 새 노래를 작곡하여 예배 때 성가대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였다. 또한 새로운 곡을 작곡할 때마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라고 적어 넣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작품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고백하였다. 바흐는 생전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흐보다 약 130년 후에 출생한 멘델스존이 바흐의 재능과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바흐가 작곡한 마태수난곡을 초연하면서 바흐를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연합,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와 라이프치히시에서 조성한 기금, 그리고 3년간 모은 일반 기부금을 합한 천만마르크로 토마스교회를 수리하고 새로운 오르간을 제작, 설치하여 2000년 ‘바흐오르간’이라고 명명한 새 오르간의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8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교회의 어린이합창단 토마노코아가 유명하다.

 

   
▲ 바하의 동상앞에서
   
 
   
▲ 바하의 무덤
   
 
   
▲ 성 토마스교회 인근에 멘델스존의 동상이 있다

 

 

2) 니콜라이 교회 (Nikolei Kirche)


니콜라이 교회는 토마스 교회와 비슷한 시기인 1165년에 설립되었다. 외져(Adam Friedrich Öser)라는 화가가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려 설치하였는데, 제단 위에는 평화의 천사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 있다. 이 교회는 특별히 기둥을 종려나무로 디자인하였다. 니콜라이 교회는 독일의 평화통일의 시발점이 된 평화기도운동을 한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교회 제단에 평화의 천사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 있는 점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군중들이 흔들던 종려나무 가지 모양으로 교회 기둥을 디자인한 것이 마치 이 교회가 독일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할 것을 미리 예견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 니콜라이 교회.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 니콜라이교회 앞에서 노래하는 순례단
   
▲ 니콜라이교회 근처에서 서명활동을 벌이는 순례단

1980년대 초반 당시 서독에서는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으나 동독에서는 계속 군비확장을 하고 있었어도, 이에 대항하여 시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1983년 가을 라이프치히 광장에서 50여 명의 청년들이 동·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의사 표시로 촛불시위를 했고, 경찰이 체포하려고 달려들자 이들은 근처 니콜라이 교회 안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평화의 기도회는 매주 월요일 오후 6시에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렸고, 기도회를 통해 예배와 함께 자연스럽게 정보와 성명서가 교환되었고, 참석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격려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이들은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것 뿐 아니라 여러 사회문제,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허가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 기도하였다. 대기오염, 수질오염,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들과 남반구의 빈곤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양극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회가 깨어 있는 젊은이들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이에 여러 단체들이 합류하였다. 
 
매주 월요일마다 기도회를 감시하는 경찰들이 교회를 둘러쌓았고, 조금이라도 소란한 일이 생기면 바로 참가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모여든 사람들은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1989년 5월 8일부터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진입로는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봉쇄되었다. 후에는 다른 지역에서 라이프치히로 들어오는 진입로, 고속도로 출구가 통제되었고, 평화의 기도 모임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정부 당국은 평화의 기도를 중단하거나 도시 외곽으로 옮기도록 압력을 가했고,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의 기도와 관련되어 체포, 연행되는 사람들이 생겼다. 

1989년 여름까지는 100명 정도가 모이는 집회이었으나, 이 해 가을에 동독의 젊은이들이 동유럽 국가들을 통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참석자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0월 2일에는 2만 명, 9일에는 7만 명, 16일에는 20만 명, 23일에는 36만 명, 30일에는 57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라이프치히 인구가 당시 55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위는 드레스덴을 포함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는 100만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자유 언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 시위들의 모든 과정이 비폭력과 무혈로 이루어졌다.

10월7일 동독건국 40주년 기념일에는 10시간 동안이나 제복을 입은 동독의 군인, 경찰들이 저항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을 때리고, 트럭에 태워 이송,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후 즉시 정부가 관리하는 신문에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반동혁명을 끝내야 한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틀 후인 10월 9일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진 가운데 약 육백 명의 독일통일사회당(SED) 당원들이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 미리 니콜라이 교회의 좌석을 점령하였다. 그들에게는 이전부터 평화의 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감시하는 임무가 주어졌었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차례 집회에 참석하면서 오히려 복음을 듣고, 복음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날의 평화기도회가 끝나기 전 몇몇 유력 인사들의 호소문이 낭독되었고, 주교의 축도 후 교회 밖으로 나왔을 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비폭력 정신이 군중들을 사로잡았고, 평화로운 힘이 되었다. 군인, 경찰, 전투부대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철수하였다. 교회 안과 밖에 수만 명이 모였으나 상점의 유리 한 장 깨지지 않았다. "Wir sind das Volk!"(우리는 민중이다!)라고 외치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혹은 "Deutschland! Ein Vaterland!"(독일! 하나의 조국!)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동서독이 한 민족,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이 순식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비폭력운동이 몇 주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이러한 변혁 요구로 말미암아 10월 18일에 18년 간 동독(독일민주공화국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을 지배했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 서기장이 물러났고,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후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은 권력을 상실하고, 구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통일사회당에 속했던 호르스트 진더만(Horst Sindermann, 1915-1990)은 죽음 직전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 하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한 준비는 하지 못했다.’ 지금도 월요기도회, 평화기도회는 라이프치히 각지에서 크고 작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니콜라이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를 주도했던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1943-2014) 목사의 주최로 1997년 이 교회에서 남북한 목회자들이 모여 남북공동예배를 드리며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독일 감리교회의 감독이었던 발터 클라이버(Walter Klaiber) 박사는 200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유럽지역 한인감리교회 신년연합성회에 참석하여 설교하면서 ‘독일 통일을 위해 우리는 단지 기도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기도에 응답하셨다.’라고 말하였다.
 

 

 

   
▲ 드렌스덴

 

드레스덴 (Dresden)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도시로 꼽히는 드레스덴은 2차 대전 말기인 2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폭격으로 민간인만 20여 만 명이 사망하였고,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드레스덴은 군수공장이나 군 주둔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주요 협력도시이며 드레스덴 은행 (Dresdner Bank)에서 나치의 정치자금을 대주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연합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었다.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진 도시를 완벽하게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독일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터전이자 세계적 오페라하우스 젬퍼오퍼
   
 

오페라하우스인 젬퍼오퍼(Semperoper)는 1985년 2월 재건을 완료하여 완벽한 재건 건축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원래 젬퍼오퍼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고트프리드 젬퍼(Gottfried Semper, 1803-1879)가 1871년-1878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19세기 독일 건축의 걸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지붕의 장식 조각상은 고트프리드의 아들인 엠마누엘 젬퍼(Emanuel Semper)의 작품이다.    

 

   
▲ 츠빙거 궁전
   
▲ 츠빙거 궁

츠빙거궁전(Dresdner Zwinger)은 작센공국의 후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Friedrich August I)의 별궁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티브로 삼아 1709년부터 약 2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건축가 다니엘 푀펠만(Matthäus Daniel Pöppelmann)과 조각가 타하자 페르모저(Balthasar Permoser)가 함께 작업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궁전 건물은 3면으로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고, 궁전 안에 미술관, 도자기 박물관 등이 있다.

 

   
▲ 아우구스투스 거리의 군주의 행렬

아우구스트거리(Auguststrasse)에는 작센지역을 다스린 베틴(Wettin) 왕가를 기념하기 위해 102미터의 벽을 파고 염료를 넣어 그린 ‘군주의 행진’(Führstenzug)이라는 벽화가 있다.  1872년-1876년 빌헬름 발터(Wilhelm Walther)가 완성한 것을 1900년 이후 마이센(Meissen)에서 제작한 도자기 타일 23000개로 새롭게 장식하였다. 이 벽화에는 9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35명은 베틴 왕가의 후작, 공작, 선제후들이고, 예술가와 과학자, 학생들이 그 뒤를 이어 행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타일 벽화이다.  

 

   
▲ 드렌스덴을 대표하는 바로크 건물 성모교회(푸라우엔 키르헤)앞에서

성모교회(Frauenkirche)는 드레스덴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교회이다.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완벽하게 재건함으로 인해 이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관용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1726년에서 1743년 사이 게오르그 베어(George Bähr)에 의해 지어졌던 아름다운 돔 형식의 교회는 1945년 2월 13일 드레스덴에 대한 공습 이후 정확히 하루 동안 서 있었다가 교회의 건축 재료였던 사암이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교회의 폐허는 반세기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1990년대부터 거액의 기부금으로 교회가 재건되기 시작하여 2005년에 새로운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 가톨릭 궁전교회 앞 계단에서 찬양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가톨릭 궁전교회 앞 계단에서 찬양하는 평화드림5만리 순례단
   
 
   
 
   
 
   
 
   
 
   
 
   
▲ 드레스덴 미대 후문
   
▲ 엘베강 아우구스투스 다리에서 바라본 유럽의 발코니 브뤼울 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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