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 리영희 선생님
정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제 삶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하나는 제 할머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리영희선생님이십니다. 할머님을 통하여 저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할머님의 기도입니다. 할머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정말 자격도 안 되고, 형편없이 살아가던 저를 불러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목사가 되는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좀 늦은 나이 28살에 신학대학을 입학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할머니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신학교 입학하기 직전까지, 국민학교 때부터 모든 교육이 철저하게 반공주의 교육이었던 탓에 저는 그냥 맹목적인 반공주의자였습니다. 79년10월26일, 심복 김제규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박정희서거로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40일 만인, 79년12월6일 대한민국 육군을 전역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 전국은 대학생들의 소요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제대하고 대구에 고등학교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저는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들이 등골 빠지게 등록금을 해대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를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요즘 <수구꼴통>은 그 때 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초를 치는, 요즘 수구꼴통처럼 그렇게 나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구 못지않은 <수구꼴통>이었지요. 교회 안에서는 누구보다도 근본주의 신앙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는 친구 녀석이, 제게 사준 책한권이 있었습니다. 이 리영희선생의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서문에 나오는 노신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캄캄한 어둠 가운데 갇힌 <벽속의 사람과 창>에 관한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나는 우상을 믿고 살았고, 내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기대고 살아가던 일체가 한 순간 다 허물어지는 전율이 있었습니다. 그 충격을 겪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28살에 늦깎이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대학생이 되었지요.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데 온 힘을 다해 몸을 실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살아가다, 15,6년 전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산에서 목회를 할 때, 어느 날 월간 <말>지에 리영희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이 아마도 <내가 종교인이 아닌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이율배반을 질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버린 교회와 세속적인 축복을 쫒아가는 물신우상숭배의 행태를 따갑게 비판하신 글입니다. 아무도 그 글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을 만큼 선생님 특유의 논리를 가지고 종교를 비판하셨습니다. 저는 다 옳으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가 믿는 신앙이 이렇게 비판을 받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감히 선생님께 <리영희 선생님께 올리는 어느 젊은 목사의 고언>이라는 제목으로, 선생님의 그 글에 반론을 기고했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선생님의 비판처럼 종교의 역기능적이지만은 않다는 점과 선생님의 종교 현상에 대한 지적은 모두 옳지만, 종교의 본질은 그렇게 비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잘못 믿는 사람들이 문제이지, 그 사람들의 잘못믿는 믿음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애를 씻기고 난 다음 구정물 버리면서 애까지 내다 버려서는 되겠는가 하는 것이 제 반론이었습니다. 기독교신앙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를 비판할 수 있지만, 현상이 아닌 본질이 그렇게 비판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입장이었습니다.

그 글을 쓰고 난 다음 많은 신앙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 옳으신 말씀이었고,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뭔가 이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런 반론을 할 수 없었는데, 제 반론을 보면서 위로가 되었다는 주로 그런 내용의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제 반론의 글을 읽으신 선생님께서는 제게 직접 친필로 편지를 써 보내셨습니다. 남 목사의 뜻을 십분 이해하고, 자신의 글로 인하여 마음 상했다면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그 편지를 받고 저는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저는 그 때 말지의 그 글이 인연이 되어 제가 대표로 있던 마산창원을 중심으로 경남지역의 지역의 시민운동단체였던 새날맞이시민모임이라는 단체에서 리영희선생님을 강연회에 초청 강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마산까지 와 주셨습니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책을 내신 무렵이라 그 책 제목으로 강연회를 성황리에 마쳤던 기억이 있습니다.(위 사진은 그때 리영희선생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입니다.)

제 살아온 날에 할머님의 기도를 통하여 신학의 길로 부르신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은총이습니다. 또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리영희 선생님과의 만남도 하나님께서 목사의 길을 가게 하시면서 제게 부어주신 큰 축복이요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할머니의 기도는 제가 신학훈련을 하고 목사가 되게 해주셨고, 리영희선생님의 가르침은 오늘 이 시대 목사로 살아가며 성경말씀을 읽고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묵상하는데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리영희선생님이 제게 열어주신 그 눈으로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우리시대 <사상의 은사>이신 리영희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주일 새벽 최장로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오늘이 장례식인줄 압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믿음의 길에 서 계시지 않으셨기에 제가 믿는 신앙적인 고백으로 마지막 인사를 올리지는 못합니다. 하나, 선생님이 떠나 가시는 데 그냥 지나가는 것은 저 스스로 생각에 그분을 통해서 사상적인 세례(?)를 받은 제 입장에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나름의 예의를 갖춰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이라도 남깁니다.

우리시대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없이도 얼마든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 우상의 시대를 미몽 가운데서 오래토록 해메었을 겁니다.선생님과 동시대를 살았기에 제대로 사람다움을 성찰하는 것이 어떤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정말 좋은목사는 어떤 덕목을 가진 목사인지를 깊게 고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선생님께서 가시는 그 곳은 우상은 없고 진실만 있는 세상이기를 기도합니다. 선생님 가시는 그 현장에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하고 이렇게 부족한 글로 아주 가시는 선생님을 추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