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현의 노래, 바퀴의 노래

양화진 목요강좌는 문화와 종교가 만나 세상을 향해 흐르는 강줄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 또한 매번 서둘러 시간 전에 도착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이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강의를 듣는 순간 단비를 만난 듯이 해갈되어 버린다.

여기에 초청된 강사들은 달변가도 아니요, 코미디언도 아니요, 어느 누구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뇌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 안에 숨겨진 내면의 질서와 순수함을 그대로 쏟아 놓기만 했다. 마치 뒤죽박죽 비빔밥 같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재료들은 각기 다른 향을 내며 최고의 비빔밥은 듣는 자가 스스로 비벼 먹게 했다. 이렇게 맛깔스런 비빔밥을 나도 오랜만에 먹어 보기에 열 일을 제쳐 놓고 매번 달려간다.

오늘은 김훈 선생 강의를 듣는 날이다

김훈(金薰, 1948년 5월 5일 - )선생은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겸 기자를 역임했다. 자전거 레이서로서 강이 흐르고 길이 있는 곳으로 희망과 새로움을 찾아 달려가고 있었다. 물이 흐른다는 것은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다는 희망이며 새롭다는 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담론으로 자신을 또 다른 새로움에 도전하게 했다. 강줄기 따라 자전거를 타며 일상에서 만난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두서없이 토해내고 있는 선생의 모습은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 모습 같았다. 한 마디로 강의는 완벽한 교정을 마친 시어가 아닌 그냥 강줄기 따라 흐르는 자연이었다. 풍륜(風輪),바람 따라 바퀴가 굴러간다는 아호대로 자전거 타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는 선생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아름다움과 신나는 것들을 안고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다.

어느 새벽안개 자욱한 강변을 달리다가 안개 속에서 발에 바퀴를 달고 튀어나오는 새로운 세대를 만났다. 인간이 수억 년 직립보행만을 고집했지만 발에 바퀴를 달고 안개 속에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세대를 만나는 순간 바퀴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았다 했다. 지금 우리는 수억 년 직립보행을 넘어 발바닥에 바퀴를 달고 미끄러져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선생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인라인 세대를 보는 순간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희망과 변화를 길에서 만난 것이다. 누군가가 길은 책속에 있다 했는데 선생은 “길은 책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즉 일상에서 길이 있고 희망이 있다”라고 했다.

“신의 존재는 초월적인 존재지만 인간은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빛이며 희망이다. 멀리서 반짝이는 등대가 빛이 아니라 날마다 일상 속에서 구체성을 찾아 만나는 것이 바로 빛이고 희망이다”
천국도 사후(死後)에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천국이 펼쳐져 있는데 천국을 하늘에서만 찾으려 하는 종교의 초월성을 좀 더 좁혀주는 것 같았다.

자연 속에서 만난 스승들

태백산자락을 자전거로 돌파한 후 양양 남대천에서 산자락을 펼쳐놓고 환호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때 마침 연어들이 회귀하는 시기였다 한다. 이곳에서 방류된 어린 연어들은 북태평양과 알래스카까지 나가 어미로 자란 뒤 3~4년 뒤 남대천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연어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4년 전에 떠났던 곳을 정확히 찾아오고 있었다. 남대천에서 북태평양 건너 강줄기 따라 4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연어들을 보면서 잠시 의시 대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여 한바탕 웃었다 했다. 어찌 사람의 지혜와 감지가 연어보다 더 낫다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선생은 태백 산고지 깊은 곳에서 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했다. 그가 만난 스승은 최고 학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 아닌 바로 흙과 함께 산 촌노(村老) 들이었다. 그들은 배우지 않았어도 선생이 아는 그 어떤 지식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책을 많이 본 선생보다 무학문인 노동에 종사하는 그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웠다 했다. 함께 앉아 듣는 사람들도 고개가 위 아래로 화답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질문자가 선생에게 맨토를 물었다. 황당하게 선생의 멘토는 스승도, 위대한 사람도 아닌 “밥”이라 했다. 즉, 밥을 못 먹었던 세대와 밥을 잘 먹고 사는 세대로 구분했다. 배 고파보지 않은 자는 배고픈 자의 서러움을 모르듯이 선생의 시대는 밥이 스승이고 친구이며 목숨이었기에 밥은 곳 스승이며 맨토 였다.

선생은 30년 전 넘어진 곳에서 또 다시 일어나 현세의 약육강식을 소설로 쓰고 싶다 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에서 픽션 속에 논픽션의 세상을 펼쳐 놓았다. 그 시대 세력가들을 ‘기름진 뱀, 뱀의 혀’로 표현하며 또 다시 세상을 향해 날 센 검을 날려 뱀의 대가리를 칠 것 같다. 자전거 바퀴도 체인이 돌아가지 않으면 전진 할 수 없듯이 구조적인 약육강식도 공정거래법 안에 갇혀 돌고 돌면서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말과 말로 서로 다투는 상황은 당과 종파와 세상의 담만 더 높여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세치 혀의 요설이 별만 다를 것이 없기에 말이다. 강자들의 폭식과 요설가들의 말장난이 난무하는 곳마다, 힘의 세파에 눌려 약자들이 억압당하는 곳으로 희망의 건필이 되어 달려가기를 기원해 본다.

또 하나의 질문을 진행자가 조심스럽게 선생에게 던졌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을 때 분위기가 분위기 인지라 답이 한참 후에야 나왔다. 아직 현저하게 신의 존재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순간순간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아름답고 신비한 것을 만날 때마다 무언가 새로움을 만난다 했다. 새로움 속에 신의 형상이 숨어있고 아름다움과 희망이 숨어있기에 초월적인 하나님을 아직은 믿지 않지만 일상에서 사람과 자연을 통해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확실한 긍정은 아니지만 선생의 희미한 부정과 새로움이 만나는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리라 믿는다. 선생의 맑은 영은 지금도 흐르는 강물처럼 새로운 것을 향해 신바람 나게 노래하며 흐르고 있기에 말이다.

국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