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엮은 민중신학(3) - 하나님 나라    

                                           정연복 엮음(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의 복음대화

     하늘에는 사랑이 지배한다.
     거기에는 이기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불의나 억압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상 생활은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들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도 약 한 봉지 살 수 없고
     어떤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치료를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갈아입을 옷이 하나도 없고
     어떤 사람들은 옷장에 형형색색의 옷이 가득하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착취가 아니라 평등과 형제애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이 실현되어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언젠가 그분의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실현될 것이며,
     사랑의 나라인 그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살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
     (에르네스또 까르디날, 성염 역, 『말씀이 우리와 함께 - 솔렌띠나메 농어민들의 복음 대화』, 분도출판사, 156쪽.)

2. 예수는 어디에?/박재순

     얼마 전부터 시한부 종말론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하다.
     한국교회가 사회를 이렇게 혼란에 빠뜨린 것에 대해
     민족 앞에 사죄하고 참회해야 한다.
     병든 한국사회를 고쳐주어야 할 한국교회가
     더욱 깊고 부끄러운 병에 걸렸다.
     미국 선교사들이 잘못된 근본주의 신학과
     감정적 신앙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성숙한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반지성주의적, 문자주의적, 교리주의적 신앙 이해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다.
     시한부 종말론도 결국 높은 데만을 바라보는
     병적인 습성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예수께서
     공중에서 구름 타고 나팔 불며 온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구름 타고 나팔 불며 오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을 나타낸다.
     그것은 역사의 궁극적 완성과 성취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다.
     우리의 역사적 삶과 무관하게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오는 예수에 대해서는
     나는 관심이 없다.
     만일 예수가 온다면,
     2천 년 전에 오셨던 것처럼 그렇게
     낮은 자리로 임하실 것으로 믿는다.
     예수가 말구유처럼, 십자가처럼 그렇게 낮은 곳으로
     오늘도 임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이 세상의 낮고 천한 자리, 사람들이 외면하는 자리로
     예수는 오고 계신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신다.
     (박재순, 『예수의 눈길』, 나눔사, 139-140쪽.)

3. 천국/권정생

     프랑스 화가 루오의 연작 그림 ‘미제레레’에는
     어느 부자집 마나님이 천당에서도 특석을 예약하는
     서글픈 그림이 있다.
     오늘날 자기 만족에 도취된 교인들은
     천당의 면류관과 황금으로 된 영원의 집을 꿈꾸고 있다.
     내가 바친 헌금과 새벽 제단에 쌓은 통성기도와
     열심히 다닌 부흥회로
     최상급의 보상이 약속된 줄 착각하고 있다.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기도와 헌금과 부흥회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벌써 받을 보상을 다 누린 사람들이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기도,
     이웃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나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한 기도가
     어찌 진정한 기도인가?
     그런 기도를 예수께서 언제 가르쳐 주었던가?

     주님의 기도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하나만을 위한 기도말은 없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다.
     주기도문은 앉아서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다.
     행동하는 기도, 살아 있는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엔 특혜라는 건 없다.
     햇빛이 정부 고관이나 부잣집에만 비추는 게 아니듯,
     비가 골라가면서 내리지 않듯,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고른 세상이다.
     그 나라를 이루어지게 하려고 예수는 이 땅에 와서
     고통을 겪는 삶을 살고 또 그렇게 죽은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쳐다보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왜 우리는 이 땅을 업수이 여기는가?
     설혹 천국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우주 바깥 어느 곳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세상 끝나는 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죽어서 가는 감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꿈을 이 땅에 이뤄야 한다.
     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도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김응교 편역, 『부활을 믿는 사람들』, 나눔사, 146-147쪽.)    

4. 하나님 나라/어느 노동자

     극소수 특권계급이 호사스런 생활을 구가하기 위해,
     신당동 무학빌딩에서 수십 개 피복제조업소 노동자 수백 명이
     남녀혼용 변기 6개와 소변기 2개를 사용해야 하는
     한국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극소수 집단과 나라가 자기네 이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자원을 고갈시키며
     토지와 바다와 대기를 오염시켜 공해를 만연케 하는 세계,
     자연과의 공존과 평화를 깨뜨리는 세계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자본과 생산수단을 극소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독점하고,
     그에 따라 자유를 독점하는 세계는
     진정한 민주주의 세계도 아니며 하나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차별과 계급이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형제자매와 혈육으로 알고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국가가 다른 국가를
     억압하거나 착취하거나 학살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극소수의 독점적 발전이 아니라 절대다수의 균등한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면서 검소하게 사는 가운데
     인정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무기가 폐기되고 전쟁이 종식된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끼리 서로 용서하면서 죽이지 않고 살리면서
     생명을 증진시켜 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인 해방사건들 안에서
     일시적으로나마 구체화되고 앞당겨지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남녀 차별이 없는 나라요
     동일한 노동량에 동일한 월급이 지급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저마다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는 나라요
     칠 년에 한번씩 남의 빚을 삭쳐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어가며
     영원, 즉 절대적인 미래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해 가는 우리의 공동노력으로
     이미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연과 인간세계 전체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해방,
     개인적 범죄와 사회적 범죄에서 벗어나는 해방,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자연과의 친교를 지향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 14:17).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신앙생활연구분과위원회, 『함께사는 세상』, 일과 놀이, 167-169쪽.)                       

5.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 역사와 이상향

     달걀은 아직 닭은 아니지만,
     가능태적으로 닭을 내포하고 있다.
     즉 뼈와 살, 눈과 부리, 깃털과
     심지어 닭 울음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까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도 마치 달걀처럼 우리 가운데 현존해 있지만
     아직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역사와 이상향이라는 이중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정의, 재산의 나눔,
     인권 존중, 사회적 형제애가 있는 곳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항상 보다 더 많은 정의,
     보다 더 많은 나눔, 보다 더 많은 인권 존중,
     보다 더 많은 사회적 형제애가 가능한 이상향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의 그 무슨 역사적 표현으로도
     완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활동에 의함과 동시에
     온갖 역사적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역사의 근본적 변형에 대한 희망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예수님을 제외하고서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없다.
     교회도 하나님 나라와 혼동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요 성사일 따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폭넓고 포괄적이다.
     교회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낳는
     인간적인 행동과 사회적 과정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을 실천하고 해방을 쟁취해 가는
     과정과 상황 안에 현존해 있을지라도,
     자기의 이상향적인 차원을 잃지 않으며
     항상 현실을 넘어서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상황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이 상황은 더 이상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들며,
     끊임없이 우리를 새로운 상황에로 개방시켜 준다.
     하나님 나라의 투사가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혁명적인 소명을
     생활 안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엮음, 『하느님 나라의 일꾼』, 일과놀이, 37-38, 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