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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언제 기름부음 받았나?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그리스도 예수는 기름부음을 받았던가?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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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7월 04일 (수) 22:34:33 [조회수 :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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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언제 기름부음 받았나?

막11:28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마21:23; 눅20:2)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야는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서 등단하는 공적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공적인물이란 대체로 왕을 가리킨다. 물론 왕만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 제사장도 기름부음을 받았으며(레4:3a,6:22a) 왕과 같은 공적인 인물임을 표지하기 위해 선지자에게도 기름을 부었다(왕상19:16b). 그러므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공식적인 등단을 나타내는 의식수행이다.


• 기름부음의 의미

삼상9:16과 10:1은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곧 왕의 등극을 알리는 공적지표가 된다(왕하23:30b). 사무엘이 사울에게 실망하고 다윗이 아직 어릴 때에 몰래 기름을 부었지만(이것은 반역이다. 알려지면 사무엘 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집 전체가 멸절당할 멸문지화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름을 붓는다는 행위가 사적으로 이뤄지는 개인적인 의례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을 통해 일국의 왕을 세운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삼상16:13).


• 기름부음 받은 자의 역할

그러므로 메시야라는 말이 갖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은 제왕개념을 갖는 국가 통치자를 뜻하는 말로서 한 나라의 영토를 관할하며 이상적인 제국을 이룩하고 통치해 나갈 정치-군사적 영웅으로서의 제왕을 나타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그 어디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말하는 대목에서 조차 그 메시야를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 연관시키지 않았다. 분명 구약이 말하는 메시야는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유대 땅을 통치하는 지상의 왕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메시야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바 천상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사용된 예가 단 한 번도 없다.


•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는 언제 기름부음을 받았나?

따라서 이런 질문을 할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언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었나?

이에 대해 몇 가지의 견해가 있을수 있다.

1)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은 때

여기서 혹자는 세례요한 때의 세례식을 연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례는 원래 개신교 일반이 이해하는 대로 머리에 물을 찍어 바르는 것이거나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물 속에 사람을 완전히 담갔다가 꺼내는 의식으로서 이를 침례라고 한다. 그러므로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과 사람을 물 속에 넣었다가 나오게 하는 것을 연관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세례식 때 기름부음의 의례라 행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은 모조리 메시야들이라는 얘기가 되고 만다.

2)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을 때

또 혹자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왔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것이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오순절 강림사건 때 불같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도 모두 다 메시야라는 말이 될수 있다. 이에 대해 예수께 임했던 비둘기 같은 성령과 제자들에게 임했던 불같은 성령은 서로 다르지 않느냐고 한다면 성령론을 의심받을수 있다.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 다르고 불 같이 임하는 성령이 다르다면 성령은 여럿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 자체는 여럿이 아니지만 각자에게 임할 때 그 형태가 다를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는 공식적 의례와 예수의 상징적 의례를 이미 구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를 구약의 메시야로 보지 않는다는 견해가 전제된다.

3)향유를 부은 사건의 때

또 어떤 사람들은 옥합을 깨서 예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을 기름부음에 해당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예고된 메시야 출현을 공고하는 기름부음의 의식이 아니라 장례를 위한 준비였다(막14:8; 마26:7~12). 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비슷한 누가복음 7:37~50의 내용은 예수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옥합을 깨어 예수의 발에 부은 여인의 죄사함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더군다나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의 머리가 아닌 발에 부은 것으로 되어 있다.


• 기름부음을 받은 적 없는 예수가 ‘기름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

이러므로 신약의 본문을 볼 때 예수는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구약의 메시야인가? 그래서 예수 자신도 구약의 기름부음의 의식과 같은 공식적인 의례를 통해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즉각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에게 말꼬리가 잡히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쓸수 밖에 없었다(막11:28; 마21:23; 눅20:2).


• 구약본문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 대두와 재해석의 의미

바로 이런 문제, 기름부음 받은 적이 없는 예수가 어떻게 구약이 예고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야인가? 라는 질문앞에서 이를 풀기 위해 제기되는 것이 바로 재해석의 문제이다. 이에 대답하려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은 곧 새롭게 해석한다는 뜻이다. 새롭게 해석한다는 말은 재해석한다는 말로 명기된다.


• 구약을 새롭게 보는 재해석의 필연성

신약편저자들은 구약본문들을 제시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 이 증거는 구약의 본문들을 곧이 곧대로 인용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또 구약의 본문들을 곧이 곧대로 인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약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된 본문일 뿐만이 아니라 그 본문을 대하는 신약시대의 삶의 현장이나 구약본문상의 상황과 신약시대의 삶의 현장의 상황 등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약은 이방인들마저 염두에 두고 복음을 선포해야 했던 상황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유대인을 상대로 기록된 구약의 본문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사하듯이 문자 그대로 인용해야 봐야 효과도 없다. 그래서 이사야 7:14를 마태복음 저자가 마1:23에서 인용할 때 이사야서 본문에는 있지도 않은 ‘이를 번역한즉...’이라는 설명구를 첨가했는데 이것은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본문들은 반드시 새롭게 이해된 본문, 즉 재해석된 본문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때 신약편저자들이 증거하는 예수의 그리스되심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공적인물들이 등단하는 공식적인 의례 의식인, 기름을 머리에 붓는 일이 예수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식을 통과하지 않은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구약본문들을 새롭게 봐야했다는 부인할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필연적인 작업이 바로 구약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재해석이다.

신약의 편저자들이 구약본문을 재해석하므로 새롭게 이해한 예들을 들어 보면 이렇다.


• 세례요한 관련 - 사40:3이 마3:3에서 인용될 때 재해석된 모습

마태복음 저자는 사40:3을 인용하면서 세례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했다는 것을 증거한다(마3:3). 하지만 구약은 유대인들에게 제왕 메시야의 도래 이전에 그의 출현을 알리는 예비포고와 같은 메시야 도래 예고 메세지가 있을 것이라는 교훈이 없다. 그러나 구약을 새롭게 본 마태복음 저자는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구원계획 중에 포함된 “메시야 출현의 사전 포고자로서 그리스도 보다 앞에 온 선구자”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구약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했다.


• 구약본문과 구약을 인용한 신약본문의 차이점 비교

마태복음 저자가 인용한 사40:3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 저자는 이사야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문자 그대로 완벽하게 베껴쓰듯이 옮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다. 이사야 본문이 마태복음에 인용되면서 달라졌음을 쉽게 볼수 있기 때문이다.

(1)사40:3은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되어 있어 구절 초반부터 차이가 있음이 보인다. 이사야 본문은 분명히 ‘외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외치는 자는 광야에서나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어디서든지 외칠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은 ‘광야에서’라는 단어를 통해 외치는 자의 사역 영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이사야의 본문이 세례요한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새롭게 이해되었음을 나타낸다. 새롭게 이해되었다는 말은 곧 재해석되었다는 뜻이다.

(2)또, 이사야 본문은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는 이 ‘광야에서’가 빠졌다. 대신 이 “광야에서”가 외치는 자의 소리 앞으로 나갔다.

(3)그리고 구약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했을 때의 여호와는 말할 것도 없이 야웨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여 야웨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바꿨다. 신약에서 말하는 ‘주’는 구약의 야웨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약에서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4)마지막으로, 이사야 본문에 있는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이 생략되고 대신에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로 되어 있다. 이런 차이점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약의 본문과 구약의 본문이 인용된 신약의 본문을 비교하면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이렇게 구약의 본문이 신약에 와서 달라졌는가에 있다.


• 재해석된 마3:3의 구절을 또 한 번 재해석한 눅3:4~6

그런데, 일반상식선에서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사야 본문을 대하는 누가복음 저자의 태도이다. 그는 분명 누가복음 초두에서 누가복음을 쓰기 위해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했다(눅1:3). 그러면 마태복음 저자가 인용한 이사야 본문의 구절을 이사야 본문을 통해 한 번쯤은 확인해 보았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꼼꼼함과 세밀함을 전제한다면 그는 분명히 그의 복음서를 쓸 때 마태복음이 인용한 이사야 40:3을 세밀하게 단어 하나 하나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복음 저자는 그의 세밀함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도 이사야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마태복음에서 재해석된,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으로 인용되면서 변형된 이사야의 본문을 원형대로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태복음이 재해석한 구절을 누가복음이 다시 한 번 또 재해석했다.

(1)“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가 그것이다.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대로 마태복음 저자가 이사야의 본문을 재해석한 구절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저자는 마태복음 저자가 재해석한 위의 구절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용했다. 누가복음 저자는 이사야 본문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에서 한 번 재해석된 구절을 그대로 복사하듯 인용한 것이다(눅3:4). 이미 변형된 구절을 원상복구시키지 않고 변형된 채로 베끼듯이 글자 그대로를 인용했다는 말이다.

(2)그러면서 거기에 더하여 이번에는 마태복음이 이사야서의 본문을 생략하면서 첨가했던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구절을 생략하고 그 자리에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를 넣었다. 첩경이란 지름길을 말한다. 이사야 본문에는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보다는 오히려 누가복음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가 이사야 본문에 가깝게 느껴진다.

(3)하지만 더욱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사야 본문 중에서 40:3만 인용하며 재해석했는데 누가복음은 이사야서 본문에 있는 두 구절을 더 인용하면서 그 구절들을 재해석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재해석된 마태복음의 사40:3을 그대로 인용했으면서도, 그것도 처음 문장만, 그 이후로는 자신이 직접 이사야 본문을 더 인용하면서, 있는 문장을 복사하듯이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이사야 본문을 재해석하면서 인용했다(사40:4~5과 눅3:5~6비교).


• 부인할수 없는 신학적 관점의 차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찌 이사야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후세대의 신약편저자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인용을 하려면 처음 계시받아 선포했던 원문에서 그대로 글자들을 한자 한자 세심하게 다루어 기계로 복사하듯이 베끼듯 조심스럽게 인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기에 어쩌다 실수한 것이라고는 볼래야 볼수 없는 이런 변형된 형태가 왜 있게 된 것인가? 대체 마태복음 저자와 누가복음 저자는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사야서의 본문을 왜 이렇게 다룬 것일까?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단순하다. 누가복음 저자가 이사야 본문에서 원형 그대로 베끼뜻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인용했어야 마땅할텐데 그러지 않고 마태복음 저자가 변형시킨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은 처음에 이사야가 계시 받았던 때의 하나님의 뜻을 신약시대의 두 신약편저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사야 때의 방식 그대로 적용할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두 신약편저자의 말씀선포와 적용의 입장이 구약시대의 이사야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시에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 문장에 관한 한 누가복음 저자가 마태복음 저자가 받은 계시에 동의한다는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는 서로의 입장이 똑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는 마태복음 저자의 입장과 누가복음 저자의 입장이 같으면서도 동시에 세밀하게 볼 때에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부인못할 증거이다.

이런 현상의 차이를 초래한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곧 성서본문 저자들의 신학의 차이인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입장은 똑같지만 그를 증거하는 구체적인 입장과 처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사야서 본문을 대하는 자신들의 시각을 서술할 때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같은 본문을 보는 신학의 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라고 해서 “성서편저자들의 [신학적 관점]의 차이”라고 부른다.

이런 신학적 입장, 혹은 신학적 관점의 차이는 구약의 미가서에 나오는 ‘다스린다’는 통치개념을 더욱 심화시킨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미가서 5:2의 제왕 통치개념인 “다스린다”를 새롭게 이해한 재해석

보통 ‘다스린다’라고 할 때 구약에서는 최고 통치자의 통치행위를 연상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다스린다’는 말은 제왕 개념일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본문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새롭게 이해되도록 재해석되어 통상적으로 연상되는 뜻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뜻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한 너무도 분명한 재해석의 자국이 신약본문에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다.


•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새롭게 이해된 “다스리다”의 개념

미가서 5:2와 이 구절을 인용한 마2:6을 눈여겨 보면 ‘다스린다’의 개념을 새롭게 보았음을 부인할수 없다. 미가서 본문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다스릴 자”는 분명히 제왕의 정치적, 군사적 권력형 통치개념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마태복음 저자가 인용하면서 ‘다스리다’의 의미가 새로워졌다. 마태복음 저자는 그리스도는 구약이 예고한 바로 그 제왕 개념의 메시야가 아님을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증언하기 위하여 말씀사역자로서 영감받은 신학적 “해설”을 첨가했다. 그것이 바로 ‘...목자가 되리라’는 표현이다. 구약 미가서 원문에는 이 표현이 없다.


• 원문에는 없는 표현의 첨가로 인한 새로운 이해

이 문장을 조심스럽게 살펴 보면 ‘다스린다’는 개념의 주체가 “목자”라는 단어로 이어지므로서 일국을 지배하고 영역을 관할하며 소속 백성을 통치하는 제왕적 개념이 연상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가서가 말하는 ‘다스리다’의 개념과 마태복음 저자가 말하는 ‘다스리다’의 개념에 차이가 생겼음을 알수 있다. 마태복음 저자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며 증거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결코 구약의 제왕 메시야가 아니라는 메세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보다 늦게 씌인 누가복음의 업그레이드된 재해석

누가복음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출생 후 첫 경배자들이 값비싼 물건을 선물로 가져 온 동방박사들로서 이들은 왕궁을 쉽게 드나들수 있는 사람들로 기술되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왕궁은 커녕 남의 밑에서 실제로 양을 치는 목동들이 첫 경배자로 나온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의 예수 출생 장소는 “집”이다(마2:11). 누가복음 본문에 의해서 인상지워진 마굿간 개념이 없다면 왕궁을 쉽게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도 무난하다고 여겨질 만한 “집”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의 예수 출생 장소는 여관방도 아닌 마굿간임을 분명히 표기한다(눅2:7,12,16).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마태복음에서와는 달리 아예 출생때 부터 목자의 입장이었음이 강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 경배자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내용도 다르고 경배자들의 신분도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는 결코 세상적인 통치자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복음서의 초반 선포라는 것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점이다.


• 제왕의 통치 개념인 ‘다스리다’의 개념이 새롭게 거듭나 갖게 된 의미

이렇게 해서 구약 미가서 본문의 제왕적 통치자의 통치개념이 마태복음 본문으로 인용되어 넘어올 때에 “목자”라는 어휘로 인해 ‘다스리다’의 제왕적 통치개념이 “종의 관리와 돌봄”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음을 볼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저자가 “다스린다”는 말이 갖는 일반적인 통치자의 권력형 통치행위의 뜻을 소박하고 일상적이며 평민적인 의미인 “위탁받아 관리한다. 돌본다”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양을 돌보는 목자는 주인의 개념이기 보다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개념이며 양은 통치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돌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 의한 신학진술의 차이-대상의 차이, 시대의 차이...

이런 현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부름받았던 신약편저자들의 영감받은 입장에서 나타날수 밖에 없었던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적 수고의 결과이다.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선포되었던 구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때 “기름부음 받은 적 없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소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저자가 상대하는 사람과 누가복음이 상대하는 사람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비슷한 비유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의 달란트는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의 므나와는 상대도 안되는 화폐가치의 차이를 보여 준다. 금 한 달란트는 금 20kg에 해당하며 므나는 이의 1/60일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같은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받는 대상자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차이점임을 보여 준다(금 20kg을 우리 식으로 환산할 때 한 돈은 약 4g이므로 금 20kg은 5,000돈이다. 금 한 돈에 24,000원 잡으면 금 한 달란트는 1억 2천만 원이다. 그러므로 한 므나는 2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마태공동체와 누가공동체는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의 배경도 다르게 나타날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구약본문이 일차적으로는 제왕 메시야관을 기대하던 유대인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말씀이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새롭게 이해시키기 위해 수행된 작업이 신약편저자들에 의해 수행된 성스런 작업으로서의 구약본문에 대한 재해석인 것이다.


• 재해석되지 않을 경우 만나 뵈올수 없는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

이렇게 신약은 기름부음 받지 않은 자, 그러나 바로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기 위해 구약본문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보았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낸다. 그러므로 구약이 예고한 바로 그 메시야가 신약의 예수라고 일차원적으로 보면 영감받은 신약편저자들을 통해 증거되는,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고 섬기기 위해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아들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숭배되는 예수?

그렇다면, 신약편자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구약의 본문들을 그렇게 새롭게 이해한 것일까?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내 멋대로” “내 주장”을 내세운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어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일(?)이라고 말할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신약편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믿고 따른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놓고 독자들과 함께 일주일간 고민해 보기를 원한다. [내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신약편저자들이 구약을 ‘내 마음대로 해석한 결과’에 근거하는 조작된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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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123.XXX.XXX.153)
2007-08-27 13:17:03
아프간 낭보 날아오나
25일 현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탈레반과 한국 당국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한국인 인질 19명의 석방에 합의했으며 한국과 사우디 당국자들이 26일 합의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었다.
리플달기
0 0
이용섭 (125.XXX.XXX.169)
2007-07-09 16:42:10
굿뉴스 자유게시판에서 퍼옴
Re:[공개답변]이사야 7장 14절 "동정녀와 임마누엘"

작성자 조정제(wild306) 번 호 111870

작성일 2007-07-08 오후 4:28:59 조회수 134 추천수 2



질문하시려면 저같은 사람말고 권위있는 가톨릭의 성서학자에게 개인적으로 질문하시던가 아니면 가톨릭 주해성경을 보시던가 하시면 될 것인데요.

이왕에 저를 거론하셨으니 제 견해를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질문을 받지않고자하니 이런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톨릭성경의 해당 부분의 주해를 먼저 봅니다.

1. 이사야서 7장 14절 (젊은 여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 에대한 주해입니다.

가톨릭 성경 주해에서도
이 부분에서 젊은 여인(처녀)과 임마누엘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음을 밝힙니다.
하여 특정의 한 견해가 명백하게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도 합니다.
당시에 젊은 여인(히브리역 성경에서는 "동정녀" 혹은 "처녀"대신 "젊은 여인"으로 되어있음)은 예언자 부인 혹은 왕의 부인 즉 왕비를 지칭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합니다.
70인역 성경에서 이 젊은 여인을 "동정녀(혹은 처녀)"라 번역을 하였고
사도들은 70인역에서 번역된 이 동정녀(처녀)에 해당하는 여인을 "동정마리아"로 간주하였습니다.

사도들 전승에 따라 마태오복음에서도 이사야서의 해당 귀절의 70인역성경 번역 즉 동정녀(처녀)를 동정마리아로 받아 그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단정한 기록하였습니다.

70인역이
젊은 여인을 동정녀(처녀)로 번역을 받은 이유는
번역 당시(기원전 2세기경) 유대교의 전승들중 앞으로 일어날 일들 가운데 이 특별한 탄생은 동정녀에게 탄생하는 아기는 그 당시의 절망적인 유대의 상태를 구원하여줄 메시아로 이해하여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이런 유대 전승에 따라 이 동정녀를 동정 마리아로 간주하였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교(가톨릭)의 전승은 사도들에 있습니다.

사도들에 의하여 기초되고 그 전승을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는 가톨릭교회의 모든 신앙의 전통을 사도신앙이라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가톨릭신자들은 물론
가톨릭교회의 신앙전승을 고백하는 정교회나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의 개신교단들은 가톨릭 전승에 따라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신앙의 핵심으로 고백합니다.(정교회는 사도신경을 인정을 하지만, 전례안에서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도신경은 로마(가톨릭)교회안에서 이루어진 로마교회만의 전승이라 그럴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신앙을 고백하는 가톨릭신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동정녀=처녀>를 마리아로 받고 그 아들을 임마누엘로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런 것에 대한 의심이나 불목은
그리스도교 신앙자체를 의심하는 것으로 가톨릭신자들에게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그 계승자들이 교회안에서 올바르게 가르칠수있도록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사야서 7.14에 대한 귀절에 대하여
동정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로 단정하고 있음을 당연히 지지합니다.

다른 견해들이 많이 있다하여 사도신앙이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다른 견해를 추종하여 따라가려면
사도전승을 부정하겠다는 의도이니 사도신앙인 가톨릭교회을 버리고 유대교 신앙으로 가시면 되리라 믿구요.

그런데 누가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고자 하겠습니까??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은 물론이지만
교황과 일치하는 사도단 전체가 사도성전에 대하여 가르치는 가르침엔
오류가 없다는 것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믿고있는 사항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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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69.XXX.XXX.246)
2007-07-08 12:43:12
박경은님은 주목할만한 인물이긴 하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흘러 와서 박경은 목사의 글을 몇개 읽었다. 박경은님은 구약의 해석문제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있는듯 하다.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다만 왕으로써의 메시아와, 대속물인 어린양으로써의 주님을 혼동하는 모양이다. 믿음만 있다면 분명히 해결할 것이다. 바라건대 정강길 같은 쓰레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쨌든 밑의 김인찬님의 글이 정답이다. 영감설을 부인하는 순간 성경은 조잡한 철학책으로 떨어진다. 잊지말자.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유일한 근거가 성경이다. 성경의 최종결론이 바로 오직예수이다. 구약이건 신약이건 바로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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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derman (67.XXX.XXX.14)
2007-07-08 07:17:14
예수가 구세주임을 부인하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박경은이라는 이분은 예수가 구세주임을 부인하고 있네요 참 학문연구의 자유라는 것이 아무이야기나 마구 만들어내라고 주어진 것은 아닐텐데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지어내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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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찬 (222.XXX.XXX.104)
2007-07-07 15:45:53
[예수는 과연 메시야가 분명한가?]**답변부탁합니다.
아래의 글은 요약한 글입니다...자세한 글은 자유게시판에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메시야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메시야로 태어났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으며 선지자로 태어난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야의 활동은 성인이 되어서 감당한다.

그 메시야의 공식적인 활동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부터 메시야로 활동한다.
성령이 예수 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그 때부터 메시야로써 사역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메시야의 사명을 순서대로 감당하게 되셨던 것이다.

그는 먼저 시험을 받으셨다.
사람들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로써 사탄의 시험을 온전히 이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먼저 선지자와 같이 일하신다.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치시고 먹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칭송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메시야의 직분을 감당한다.
바로 예수의 죽음이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죽으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메시야 직분을 차례대로 감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모든 과업을 완수하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다.

[신약기자는 구약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는가?]

구약성경을 인용한 사복음서를 보면 구약성경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한 자들이 자의적으로 임으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의적인 해석은 없었다. 물론 유기적인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사용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은 구약성경을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 아닌 그 의미를 정확히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었다.

또한 구약의 그림자에 대한 신약에서의 실체적 적용은 신약성경 저자의 자의적인 재해석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사람이었지만 그 기록에 직접 관여하신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관계된 것들로 가득차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신약의 기자가 취하여 인용했던 것을 구약성경에 대한 자의적인 재해석으로 보는 것과 구약성경의 그림자에 대한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기사에 대한 실체적인 재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과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서로 밀접한 그림자와 실체로 이해하려는 것을 간과하면 결국 신약 저자의 재해석만이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그림자적인 것들을 보게 하고 신약성경을 실체로 확인하게 한다. 물론 구약성경 전체가 모두 그림자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내용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은 구약성경을 약속과 그림자 그리고 예표적인 사건과 인물로 보는 것이 필요하며 신약은 성취와 실체 그리고 예표에 대한 실제적인 사건과 인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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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XXX.XXX.167)
2007-07-07 02:57:49
아래 글이 한심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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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XXX.XXX.167)
2007-07-07 02:56:30
굿뉴스 자유게시판에서
Re:예수님은 언제부터 그리스도인가?

작성자 조정제(wild306) 번 호 111844

작성일 2007-07-06 오후 10:32:45 조회수 42 추천수 1



성경과 신앙의 유산에 의하여 망라된 가톨릭교회교리서만 보아도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께서 언제 기름부음을 받으시어 그리스도가 되셨냐구요??~~@@
사도신경 첫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셨다함은
예수님은
"성령에 의하여 생명을 받으시고 동시에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어졌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름부어지다"라는 말은 달리말하면
"기름부음 자체이신 성령"에 의하여 "거룩하게 축성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다 함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부터 생명만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성령에 의하여 기름부음도 이루어져 거룩하게 되어졌다"라는 겁니다.
하여
주님 잉태부터 동방박사들이나 목자들, 시므온....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리스도=기름 발리우신 자"이임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37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루가 2,11).
그분은 처음부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파견하신”(요한 10,36) 분이며,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거룩한 아기”로 잉태되신 분이다.(루가1.35)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고 명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가문, 곧 다윗 가문에서 난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게 된다(마태 1,16).(참고 : 로마1.3, 디모테오후서2.8, 묵시 22.16)

.....

486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인간으로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
바로 ‘그리스도’, 곧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분이시다(마태1.20, 루가1.35).
그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목자들에게(루가2.8~20)),
동방 박사들에게(마태2.1~12),
세례자 요한에게(요한1.31~34),
그리고 제자들에게(요한2.11)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는지”(사도 10,38)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용섭님에게 권고드리는 말은
"무지한 일부 목사들의 글을 인용하여 더불어 무지한 자로 남지 마시고
가톨릭교회교리서부터 잘 읽어보시며 묵상하시어" 착한 가톨릭신자로 남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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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완 (121.XXX.XXX.67)
2007-07-06 23:58:56
교정에 대해서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샬롬!
당당뉴스는 필자가 보낸 글을 대부분 그대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원글에 손대거나 수정은 거의 하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정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데 좀 더 열심히 틈나는대로 교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자들이 직접 글자 크기나 글자색 편집을 하는 경우도 거의 그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박경은목사님의 글 편집은 필자가 글쓰기 모드를 이용하여 직접 한 것,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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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문 (218.XXX.XXX.155)
2007-07-06 19:01:17
쉬운 글(당당뉴스와 박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박목사님 글은 학자스타일의 글이라서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이유로 좀 쉽게 써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1) 신문은 대중성(평신도)을 지향한다.
2) 신문지면보다 컴퓨터로 보는 것이 더욱 어렵다.
3) 인터넷은 사람들을 조급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당뉴스는 기사를 좀더 정밀하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형편을 알지만, 그래도 시간나는대로 교정을 좀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명색이 신문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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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가는 돌 (211.XXX.XXX.204)
2007-07-06 17:56:03
글을 끝까지 잘읽어 보면...
박경은목사님 글을 볼때마다 역시 조선말은 끝까지 읽어보고 의미를 새겨봐야 된다고 느낍니다. 앞부분은 항상 잘못가고 있는 현재의 기독교를 지적하고, 중간에는 성서를 정확하게 다시 해석하여, 글 말미에는 옳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글 같습니다. 이번글도 예수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올바른 해석과 올바른 신앙을 위한 글임이 분명합니다.
아래 구르는 돌님 글을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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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XXX.XXX.167)
2007-07-06 02:31:31
...
오늘로써 금주 26일째이고 저와 노모의 40일 작정 새벽 6시 기도의 23일째입니다. 박 목사님의 이 글을 잘 보았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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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2.XXX.XXX.124)
2007-07-06 00:25:38
신약의 편저자들은 구약해석이 있기 전에 예수진리의 깊음(?)이 있었다
신약의 편저자 ...바울을 가장 먼저 말할수가 있겠는데

먼저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무엇인가? 무슨 당위성으로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약을 해석하기전에 먼저 구약을 왜? 누구중심으로 해석해야할 이유와 당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한계가 있는 표현, "복음을 전하는 기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함)의 복음을 처음 전한 바울은

당시1세기 때의 십자가 사형틀에 대하여 깊은 고뇌가 있었음(구약의 양의 제사를 상상하게됨, 나아가 인류심판을 상상하게됨)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체제(영의독점체제, 사죄장소의 독점체제)에 한계를 이미 느끼고 있었음.. 이미70년도에 정전이 파괴될때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문제가 필두로 대두됨(장소의 거룩성이 위기가 옴)

세례요한의 출연은 당시 성전체제에서의 사죄독점을 광야 요단강물로 사죄가 가능하다는 충격이었음 (그것은 단순히 예수예고를 넘어 지역적 성전체제를 거부하는 모습이란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됨) 요한은 물로 사죄를 말하는데 예수는 더나아가 "믿는자는 누구든지.." 라는 세례라는 의식자체도 개인내면으로 말씀함(물론 그리스도공동체(바울등)의주장임)

위의 시대적 상황의 한계 위기 (하나밖에 없는 사죄의 장소"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계속된 피지배상황)로 참하나님 나라운동과 통치,메시아가 염원된 상황이었다.

위와같은 상황이 먼저 있었다고 봅니다.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첫번째, 바벨론포로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스라엘 패망으로 하나님 정의문제에 심각한 회의가 누적되어 다시 기억되는 상황,
두번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거룩한 장소의 심각한 의문,
세번째, 성전의 파괴로 죄를 씻는 제사에 대한 거룩한 장소파괴와 상실로 짐승제사의 심각한 의문과 맞물린 당시 가장잔혹한 십자가상에서 수천명, 수만명의 죽음,
네번째, 하나님의 나라 통치적인 아들의 도래와 그 나라는 언제, 어떤식으로 오는가에 대한 경건한 바리새인들(바울)과 유대인들의 심각한 회의)

위와같은 상황이 그리스도 메시아 운동전에 전개되었던 상황입니다.

위와같은 상황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때 유대교 혹은 유대인들 중심으로

예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와 심판을 설교한 요한의 운동(광야의 엣세네파운동)이후에 벌어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선포는 심판과 요단강물로의 사죄 선언이었고 성전귀족들에게 독설과 심판설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운동은 세례요한 운동과 달리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운동이며 유대담을 넘고 더러운 이방인도, 죄인도, 하나님의 사랑의 수혜자라고, 자녀라고 선포되는, 심지어 그 운동(교회)는 태초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라고 까지 말하는 운동이 예수의 이름과 명칭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말하며,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예수를 메시아 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바울역시, 요한복음의 요한등, 요한계시록역시)이 인식한 하나님나라는 천상의 하늘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는것이고 그나라를 이루고 만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아 운동이었습니다. (단지 희생과 사랑, 죄의 용서로 용납하는 운동)
오히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천상의 나라로 대부분 인식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처음 그리스도인들의)메시아 칭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메시아 눈과 다른 이해의 눈(죄인용납, 사랑, 희생)을 가지며 같은 통치의 역동성으로 메사아 운동을 한것임)

이 모든 후에 당시 글자와 인쇄술이 발전되지않은 상황에서 그 운동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매안식일마다 1년일기로 일정분량의 율법서를 읽고 낭독해야하는 유대인 혹은 디아스포라(이민유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이름을 중심으로 메시아 운동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부터 배척받아 갈라져 나온후 그리스도인들 나름대로 혹은 전파목적으로 매주 읽을 거리를 율법서와 비슷한 예수이름중심으로의 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를 중심한 율법서를 예수이름으로 변형, 해석, 각색)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이름으로 진행되었다는 사건과 운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를 모른다면
그야말로 건조하고 조작된 신앙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작되고 건조한 신앙이라 할찌라도 그 내용이 참이고 진리이며 당연히 벌어져야할 일일찐저 ! 그것이 저울질 되거나 외면되어질 수 없는 도래 인 것입니다.

우리의 선포와 운동이 "정말 그렇다" 그 내용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그러한 눈과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믿음이다" 라고 동의되어지고 받아들인다면(믿음) 우리의 해석과 믿음이 "조작""만들어진""마음대로 해석"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구약의 정확한 해석의 유무로 우리의 신앙의 집이 지어져야 한다고 강요될 수 없다고 봅니다.

요즘은 심지어 "예수는 허구다, 예수는 없다", 라는 책들과 "예수는 정말 존재 했는가"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책들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허무는 목적인지, 아니면 본질을 찾으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둘다 이겠지만)

예수가 실지 인물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말한다고해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겠습니까?

만일 흔들린다면, 그것은 예수신앙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예수인물의 존재 유무에 신앙의 목적을 두기 때문일 것이며, 또 구약에서 정확히 예수(이름)가 예언 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가?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달리 어떤 주장을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고있는가와 만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아는 길일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그일을 하신분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의 시작으로 그의 제자들, 바울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운동, 신약에서의 메시아 운동이 무엇인지 안다면 "맘대로 해석한것이다""조작된신앙이다""만들어진 예수를 신앙한다" 라는 말(훼방)이 아무 의미없는 소리가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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