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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이 ‘광야’로 간 까닭은?한국교회, 이제 ‘방언’ 보다 ‘예언’ 해야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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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9월 19일 (수) 22:49:03
최종편집 : 2012년 09월 27일 (목) 02:24:40 [조회수 : 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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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누가복음 1장 67절~80절)


예언, 성령의 역사

67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한국교회는 '성령'을 방언이나 병고침과 같은 신유은사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전부가 아니라 한 부분일 뿐이다. 성령에 대한 가장 좋은 이해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이다.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요, 성자는 역사 속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요,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부가 ‘초월적’이고, 성자가 ‘역사적’이라면, 성령은 ‘내재적’이다. ‘내재적’이란, 우리가 인식하고,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은 ‘은혜와 진리’, ‘사랑과 평화’, ‘일치와 연합’과 같은 영원한 가치들로 묘사된다.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 했다. 누가복음은 사가랴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를 증거하고 있다. 성령의 중요한 사역은 바로 ‘예언’이다. 일반적으로 예언을 ‘다가올 미래를 미리 보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예언(預言)’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예언이란, ‘오늘, 바로 지금’ 나의 삶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입술로 ‘대언(代言)’하는 것이다. 예언의 본래적인 의미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하는 것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 앞에서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예언’이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절망 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68절~79절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얼핏보면, 사가랴의 예언은 마치 백발의 아버지가 늦둥이를 낳고 기쁨에 겨워 부르는 평범한 찬송시 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가랴의 예언은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앞서 살펴 본대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에서, 제사장 사가랴까지는 깊은 절망과 암흑의 시대 였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했고,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에 이르는 끊임없는 압제와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나라만 빼앗긴게 아니라, 신앙의 뿌리까지 송두리째 빼앗겼다. 이스라엘을 가장 절망하게 했던 것은 ‘예루살렘성전의 파괴’였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제국의 군대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모습은 그들에게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도대체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 믿어봐야 아무 소용없구나’ 그들이 지켜 왔던 오랜 믿음과 간절한 기도는 탄식과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실존은 단순한 불임가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진 시대,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절망의 시대를 예표한다. 사가랴의 예언은 누구도 희망을 말할 수 없는 끝없는 절망의 시대 한가운데서 한 아이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놀랍게 회복될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은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 ‘이미’ 끝나버린 일체의 절망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희망의 노래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의 삶 속에서 사가랴 만큼 깊은 절망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성경이 전하는 믿음이 때때로 현실의 높은 벽 앞에 무기력하고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낙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이란 절망 할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으로 인해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끈이다. 예언이란 바로 이 믿음으로 비록 내 판단과 내 계산으로는 절망이지만, 그 절망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 희망’을 입술로 선포하는 믿음의 선언이다. 그래서, 예언은 ‘절망 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다.

 

 

 

 

 

 

 

   

 


‘방언’보다 ‘예언’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온전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성화(Sanctification)’라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역사는 말(언어)의 변화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요, 그 사람 자체다. 우리에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생각과 사고가 바뀌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고 결국 언어가 바뀐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불평에서 감사로, 부정적인 말에서 긍정적인 말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이기적인 말에서 이타적인 말로, 다툼에서 일치로, 생각과 말이 뒤바뀌게 된다.

말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말하는 대로 삶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읍은 정직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잠11:11)” 이처럼 엄청난 말의 위력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단순히 말만 번지르하게 하란 뜻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무심코 튀어 나오는 말 속에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나의 중심’이 드러난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중심’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나의 ‘중심’을 반듯하게 세워가는 일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 중에 하는 믿음의 말, 모두가 포기하는 고통 중에 하는 위로의 말이 바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예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사모해야 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전14:1~19)

   

 

'심령'이 강한 아이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에 관한 아주 짧은 기록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아이가 자라면서 신체가 잘 발달하고, 지식이 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의 건강을 위한 영양섭취와 지식을 위한 학습에 엄청난 시간과 막대한 물질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녀들의 학업과 성장에 관심을 갖는 대부분의 부모들 조차 자녀들의 심령(mind & spirit)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러한 현상은 독실한 크리스천들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본문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해졌다고 증거한다. 심령의 강함이란, 용기와 열정, 영혼의 순수함, 실패를 극복하는 힘인 동기(motive), 삶의 목적과 이상(理想)과 같은 내면적인 성숙을 의미한다. 오늘날,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외적인 성장과 성취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는 떡(need)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the Holy Spirit)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사람은 물질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따라서, 육체의 양식 처럼 마음의 양식도 규칙적으로 충분히 공급 받아야 한다. 성경은 육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듯이 마음도 정성스럽게 가꾸는 균형 잡힌 삶을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마음’은 안중에 없고 ‘몸’에만 열중한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지면 ‘마음은 저절로 평안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오해요 착각이다. 성경은 ‘물질’을 통해 ‘마음’의 만족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우선순위를 마음과 영혼에 두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1:2)

   

 

 

 

 

 

 

 

 

하우스푸어와 에듀푸어, 그리고 '스피릿푸어'

오늘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육체적으로 더 건강해졌지만, 내면적으로 공허하고 영적으로 빈곤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모와 건강에는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상대적으로 마음과 영혼에는 너무 인색하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가운데, 막대한 재정을 들여 집을 장만해서 대출금을 갚느라 다른 곳에 사용할 돈이 없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하우스푸어(House Poor)’라고 부른다. 이와 더불어 과외, 선행학습과 같은 자녀들의 사교육을 위해서 많은 돈을 지출해서 다른 곳에 사용할 돈이 없는 세대를 가리켜 ‘에듀푸어(Edu Poor)’라고 한다. 하우스푸어와 에듀푸어는 어김없이 삶의 질이 떨어져서 결국 ‘스피릿푸어(Spirit Poor)’로 전락하고 만다. ‘스피릿푸어(spirit poor)’란, 물질과 탐욕을 추구하다가 삶의 가치와 만족을 잃어 버린채 살아가는 세대를 가리키는, 필자의 신조어다.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IQ (intelligence quotient, 지능지수)에서 EQ (emotional quotient, 감성지수)로 이제는 ‘어떤 가치와 정신을 추구하는가’를 묻는 SQ (Spiritual Quotient, 영성지수)로 가치가 전환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 1세기 국가들에서 전통적인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의 요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가치가 변화되고 있다. 외적인 성장 보다 내면의 성숙과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소위 돈벌이를 위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보다 행복학(Positive Psychology, Happier)이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단적인 실례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요인은 더 이상 예전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경제여건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시행착오를 통해서 체득한 삶의 지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장 안타까운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적인 만족과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신앙생활을 통해 영혼이 잘되기 보다 오직 범사와 건강만이 잘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령의 능력, 내면의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지 못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속적인 물욕, 명예욕, 권력욕에 하수인 노릇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에서 ‘성숙’으로, ‘소유’에서 ‘향유’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경제적인 중산층, 영적인 빈곤층

중산층의 기준을 묻는 질문에 대해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은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부채 없이 소유하고, 월수입 500만원 이상 그리고 2000cc 이상의 중형차와 은행잔고 1억원 이상을 보유하고 적어도 1년에 1회 이상의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중산층의 기준은 다르다. 영국의 옥스포드대에서 제시 한 중산층 기준은 ‘속임수와 탈법을 쓰지 않고 페어플레이를 하면서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 사회적인 불의와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중산층 기준은 더 독특하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할 줄 아는 폭넓은 세계경험을 갖춘 사람, 한 가지 분야 이상의 스포츠에 능통하며 악기를 하나 이상 다룰 수 있는 사람,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를 만들어 손님 대접할 줄 아는 여유,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사회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중산충의 기준은 지극히 ‘물질적’인데, 반해 외국은 ‘내면적’이다. 그래서, 오늘날 물질적인 중산층을 꿈꾸며 달려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영적인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유명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적인 지평이다. 끊임없이 분노하게 하는 세상에서도 언제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성숙, 쉬지 않고 염려하게 만드는 근심 걱정 많은 세상에서 쉬지 않고 기도 할 수 있는 마음, 매사에 불평불만하게 하는 현실에서 좋은 일에서 나쁜 일까지의 모든 일에서 감사를 건져 올릴 수 있는 영혼의 성숙과 강인함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스피릿푸어’들은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못하고, 일상에 대한 감사와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쓸데없는 염려와 다툼에 인생을 허비하며 무감동, 무감각, 무기력 속에서 삶을 낭비하고 있다.

   
     

‘집’ 보다 ‘광야’

철은 제련(製鍊,smelting)으로 강해진다. 그렇다면, 사람의 심령(마음과 영혼)은 무엇으로 강하게 될까? 오늘 말씀은 그 비결을 가르쳐 준다.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빈들은 곧 광야다. 세례요한은 광야의 사람이었다. 광야는 단순히 사막과 돌로 가득찬 기후와 지형만을 말하지 않는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아무 것도 없기에 오직 나 자신과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공간이 바로 ‘광야’다. 모세가 40년의 미디안 광야생활을 통해서 비로소 위대한 영도자로 부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40년을 머물러야만 했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사도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머무른 후에야 비로소 위대한 전도자로 거듭났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길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심령(마음과 영혼)이 강하게 되려면 반드시 광야로 나가야만 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광야는 세 가지 고통과 세 가지 선물을 동시에 준다. 광야가 주는 첫 번째 고통은 죽음의 위험과 뼈를 깎는 시련이다. 두 번째는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광야가 주는 세 번째 고통은 세상으로 부터의 철저한 단절 곧 ‘절대고독’이다. 이와 같은 광야의 고통을 통해서 누리는 세 가지의 보배로운 지혜가 있다. 그 첫째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구나'라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다. 40년간 미디안 광야의 모세의 삶을 출애굽기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는 단 한문장으로 그의 40년의 광야생활을 일축한다. ‘게르솜’이란, "내가 광야에서 객(客,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 되었다"는 뜻이다. 광야가 주는 두 번째 선물은 삶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겸손한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게 없고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는 심령의 강인함을 얻게 된다. 광야가 주는 마지막 선물은 나를 사로잡던 탐욕의 허상을 발견한다. 그래서, 일상이 주는 감격과 삶 자체가 주는 환희를 온 몸으로 누리게 된다. 배고픔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광야를 통해서 이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스치는 바람, 하늘의 빛나는 별, 작은 풀잎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먹고 마시고 숨쉬며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화려한 도시의 대형교회를 떠나 변방의 작은 교회를 십년 간 담임하면서 경험한 나의 고백이다.

 

   
     

 페스트푸드와 스마트폰의 세상

오늘날 언제나 화려한 도시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마음은 다른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 화장실 갈 때도 스마트폰을 가져가고, 하루의 대부분을 인터넷과 TV로 보내는 현대인들은 심각한 집중력 저하를 경험한다. 심지어 A4 용지 한장 분량을 읽는 것 조차 버거워 하고, 영화 한편을 끝까지 못볼 정도로 조급하다. 그래서, 스마트한 젊은이들은 장문의 글을 혐오하고, 책읽기를 멀리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에만 반응하고 열중한다. 현대인들은 ‘빨리, 맛있게, 배부르게’를 표방하는 햄버거와 피자 같은 자극적인 인스턴트식품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런 음식은 결국 건강을 해치는 정크푸드다.

이러한 성향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늘날 ‘짧게, 재미있게, 쓸모있게’를 표방하는 설교자들이 판을 치며 ‘속도와 크기, 화려함과 흥미’를 갖춘 교회들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심령을 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삶에서 거친 광야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은 무엇으로 채우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져서 자꾸 무엇으로든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채워진 사람은 더 이상 채울 수 없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붙잡을 수 없다. 탐욕과 집착으로 채워진 마음에는 평강과 만족이 깃들지 못한다.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진실한 사랑과 샘솟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빈 들에서 심령이 강하여지는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광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공간을 가리켜 ‘골방’이라고 말씀하셨다. 인류 이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검증된 하나님과 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규칙적인 골방기도’다. 광야에서 심령이 강해진 세례요한이 절망의 시대를 비추는 하나님의 희망이 된 것처럼 외적인 성장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내면의 성숙과 강함을 추구하는 ‘말씀의 사람’과 ‘기도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펼쳐 나가실 것이다.

몇해 전 국보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했다. 불에 타버린 남대문을 복원하기 위해 쓰여진 금강송은 인적 없는 깊은 숲에서 굳은 절개를 지키며 수백년을 기다려 온 낙락장송(落落長松)이었다. <무너진 삶, 무너진 가정, 무너진 교회, 무너진 나라는 무엇으로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동량(棟梁)으로 세례요한을 키워 낸 곳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거치른 광야’ 였다.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탐욕으로 무너진 세상을 새롭게 재건하고,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 빼앗긴 천국을 회복하는 길은 ‘빈들’로 나가는 발걸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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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 (112.159.111.98)
2012-10-04 11:10:06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저하고 동갑이신데, 같은 목회자로서 늘 감동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리플달기
11 13
김명섭 (125.179.213.78)
2012-10-05 18:32:20
목사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부족한 글에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교회사정으로 인해 후속편 업로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플달기
1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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