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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소녀 마리아’ 인가?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희망의 또 다른 이름 ‘기적’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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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9월 12일 (수) 15:26:54
최종편집 : 2012년 09월 27일 (목) 02:25:01 [조회수 :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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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1장 25절~45절)


영아살해

몇해 전 경기도 안성에서 한 여중생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그 자리에서 질식시켜 죽게 한 뒤, 시신을 비닐봉지에 담아 거실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아기를 낳자마자 살해한 여중생 15세 A양을 영아살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A양은 사건의 벌어진 날 새벽 1시경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남자 아기를 출산한 후, 아기의 입에 화장지를 넣어 질식시켜 죽게 하고 시신을 비닐봉지에 담아 거실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어린 소녀를 비난하기 보다는 혼자서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하는 연민이 더 크다. 그 이유는 같은 또래의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 때문만이 아니다. 삶에서 만나는 감당 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는 이와 똑같은 위기의 순간에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한 소녀가 등장한다.

 

   
▲ 우리나라의 미혼모는 2010년 기준으로 약 2만 6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어린 소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큰일을 감당할 아들을 얻게 되는 축복이었다. 천사가 친히 '예수'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천사는 '장차 자라서 큰 자' 곧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윗의 위'는 왕위인데 잃어버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리라는 축복이었다. 그뿐 아니라,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될 것이요, '그의 나라가 영원무궁하리라'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요 가문의 영광이다.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당시에 소녀 마리아의 상황에서도 이 말씀이 과연, ‘기쁜소식(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 였을까?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의 입장에서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은 아마도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만일 천사의 말대로 아이를 갖게 된다면 약혼자 요셉에게 파혼을 당할 것이 자명하고, 또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눈총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대로 믿어줄리 만무했다. 하물며 ‘요즘도 믿지 못하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천사의 말대로 설령 아이가 장차 장성해서 그런 축복이 다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어린 소녀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이었음에 틀림없다. 만일 아직도 소녀 마리아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나의 약혼자나 나의 아내가 될 사람, 혹은 나의 딸이나 여동생이 어느 날 천사로부터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이것이 갓 태어난 아기를 무참히 살해하고 비닐봉투에 담아 창밖으로 던져 버린 열다섯 살의 여중생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영아살해(낙태율) 세계 1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기들도 만리타향으로 보내지는 해외입양 신세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렵게 출산을 감당한 엄마들은 '미혼모'로 낙인 찍혀 평생 비난을 받으며 모진 수고를 감내 해야 한다. 비단 어린 소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세계 222개의 국가들 중에 217위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의 심각성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저출산의 가장 큰 원인은 막대한 양육비 부담과 더불어 일명, '출산감옥' 이라고 불리는 일하는 산모들이 감당하기 힘든 열악한 육아 여건 때문이다. 결국, 출산감소로 인한 인구의 역피라미드 현상은 노동인구의 감소와 국가경쟁력 저하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심각한 국가적인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출산장려금 따위의 정부의 출산대책은 전쟁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요즘 부모들의 실존에서 볼 땐 한낱 탁상공론 일 뿐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낳으면 저절로 다 크더라'는 '그때 그 시절'을 살고 계신 어르신들의 시대착오적인 입바른 소리는 가소롭기만 하다.

 

   

‘여피족’과 ‘딩크족’의 세대

이런 세태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녀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다. 만일 마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상황을 고려해 출산을 거부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끝장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사랑과 평화의 새 세상은 아예 시작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미래적인 약속’이나 ‘내면적인 축복’ 보다는 ‘눈앞에 이익’과 ‘세속적인 보상’에만 급급해서 살아간다. 더욱이 살인적인 실업률과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침체로 인한 전쟁 같이 각박한 경제여건을 고려한다면 그 누구도 출산을 기피하는 부모들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늘날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s)으로 대변되는 젊은 부부들이 출산의 수고로움을 애써 회피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각박한 양육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여피족(yuppies)의 다음세대를 지칭하는 딩크족은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자녀를 두지 않고 맞벌이를 하며 오직 돈과 출세와 개인의 안녕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기적인 삶의 유형을 가리킨다. 앞서 언급한 여피족(yuppies)은 ‘젊은(Young)’ ‘도시화(Urban)’ ‘전문직(Professional)’의 머리글자 YUP의 약자로 베이비붐으로 태어나서 가난을 모르고 자란 세대로,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높은 수입을 보장 받은 젊은 세대 부유층을 뜻한다. 이들은 사회적 통념과 관습보다 개인의 취향을 우선시 하며 여유롭고 윤택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여피족과 딩크족의 사고방식에는 타인이나 미래를 위한 ‘희생과 헌신’ 보다는 지금 당장 나를 위한 ‘안녕과 유익’만을 추구하겠다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고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없는 건 세상의 이치다. 헌데 이들은 희생없이 기쁨의 열매만을 거두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비단 여피족이나 딩크족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기꺼이 선택하고 있는 가치관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씨를 뿌리지 않기에 열매가 없고, 눈물이 없기에 더 이상 기쁨도 맛볼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을 살아간다. 오늘 우리도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저마다의 삶에서 어린 소녀 마리아와 같은 선택과 시련을 겪으며 살고 있다. 오늘 말씀은 지금 우리가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 회피하고 싶은 고난이 어쩌면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마리아의 고난은 미래의 벌어질 놀라운 축복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마리아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셨을까?’ ‘하필(何必)’이란 단어는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꼭’ 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副詞)다. 이스라엘에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 수많은 가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도리어 영광이 되는 수많은 산모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결혼도 하지 않은 소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을까?’ 그도 아니면 잠시만 더 기다렸다가 약혼자 요셉과 정식으로 결혼한 후에는 안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 이유가 진짜 궁금했던 사람은 누구보다 바로 어린 소녀 마리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것은 풀리지 않는 신비요,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해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고 신학적인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본래의 뜻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적을 말하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결혼도 하지 않는 소녀 마리아였을까?’ 쉽지 않은 이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예수께서는 아주 특별한 사명,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 난 아기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결혼하지 않은 소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난 이유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 보티첼리 그림. 1489년 제작. 나무판 위에 템페라 150 ×156cm. 우피치미술관 소장.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수태를 알리는 장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장14절)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약 500년 전 활동했던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의 핵심은 '처녀잉태와 출산'이 아니다. 그의 예언의 핵심은 '이스라엘에 대한 열강들의 심판'과 '무너진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 만큼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실 것을 나타내는 ‘징조’가 바로 동정녀의 탄생이었다. 불가능한 동정녀 탄생은 바로, 도저히 불가능했던 이스라엘을 마침내 회복시키시는 구원의 성취를 나타내는 표적이었다. 예수께서 소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신 이유는 ‘절망을 이기는 하나님의 기적’, 곧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소녀가 아이를 갖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성 '0%(zero)'의 불가능한 '기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기적은 성경 곳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구십세에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무엘을 낳은 ‘한나’, 삼손을 낳은 마노아의 아내가 그렇다.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해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불임가정에서 벌어진 출산의 기적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깊은 절망 속에서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  곧  '가능성'이다. 한마디로, 동정녀의 출생은 불가능한 사건을 통해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비스런 사건인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말로 다 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을 나는 이렇게 믿는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동정녀의 탄생'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가능성 Zero’의 시대적인 절망 속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식’ 곧 기적을 통해서 여전히 새 희망이 도래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표적’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이 이와 같이 믿기 어려운 표적을 다른 복음에서 비해 더 '비중있고', '확실하게' 기록한 이유는 뭘까? 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의 말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그리고, 그 역은 ‘희망’이다. 그는 ‘절망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독제는 믿음이요. 절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치료제는 희망(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세상과 인생에는 도저히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절망들이 너무 많다. 소녀 마리아의 사건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찾아오셔서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표적이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꿈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나는 가능성 ‘제로(Zero)’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하루에 42명을 ‘자살’로 몰아가는 건 ‘우울증’이 아니라 ‘절망’이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일의 희망을 꿈꿀 수 없을 만큼 깊은 절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오늘 이 시대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기적’ 뿐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과 사명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출현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그 뜻을 세상에 펼치시는 까닭이다. 어쩌면, 저마다 개인의 안위와 번영만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딩크족'과 '여피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여전히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이란, 사실 그 자체가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까.

   

'기적',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의 능력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주창하며 한국교회의 촉망을 한 몸에 받던 S교회 J목사는 기적은 커녕 상식 조차 상실한 성추문으로 그 화려한 목회를 마감했다. 그는 기적보다도 상식을 지키며 사는 삶이 더 소중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평소처럼 강렬한 메시지로 온 몸을 던지며, 한국교회를 향한 마지막 설교를 남기고 떠났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간절히 바라지만 정작 삶에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성령의 능력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때" 비로소 기적은 가능하다고 증거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고 선포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각기 다른 두 사건을 통해 기적의 동일한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권능'<'기적'의 과정과 순서다. 기적은 나의 판단과 능력을 뛰어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능력" 이란 방언, 신유와 같은 신비한 은사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감성과 지성, 상식과 정신을 뜻하는 ‘스피릿(spirit)’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더 홀리 스피릿(The Holy Spirit)’ 곧 영원한 가치인 사랑과 희생, 섬김과 나눔과 같은 영성의 차원을 포함한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위로 부터 부으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사랑의 기적’이요,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희생의 기적’이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나눔의 기적’을 말한다.

소녀 마리아를 선택하신 진짜 이유

하나님께서 수많은 여인 가운데 '소녀 마리아'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다. 그것은 어린 소녀 마리아에게 이 모든 일을 감당할 만한 충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명제는 마치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처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조차도 포기할 만큼 실현이 묘연한 절망적인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이었던 '이사야의 예언(동정녀탄생)'은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감당해야만 하는 ‘새시대를 여는 그 중대한 사명’을 감당할 능력이 어린 소녀 마리아에게 있다고 믿어 주셨다.

마리아는 비록 무명의 어린 소녀였지만 당찬 믿음의 딸이었다. 지난 십년간 담임목회를 통해 배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음은 결코 직분이나 나이, 신앙 연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마리아와 같은 저마다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사명들은 마리아의 경우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을 만큼 황당하다. 그때 우리는 마리아처럼 질문한다.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왜, 하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가정을 맡기신 겁니까?, 왜 저에게 이런 교회를 맡기셨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반문하곤 한다. 사실 지난 십년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되물었던 바로 '나의 질문들'이다.

사십대 목회자인 나는 십대의 소녀 마리아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이처럼 납득할 수 없는 그래서 포기하고 도망칠 만큼 불가능한 문제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나에게 있다고 믿어 주시는 까닭이다. 누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분명한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믿고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맡기신 분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도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엘리사벳의 간증

36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 37절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9절~45절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생리가 멈춘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생물학적인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백발의 노인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두려움에 떨던 마리아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다. 어린 소녀 마리아가 두려웠지만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서 기적을 먼저 경험했던 엘리사벳의 체험 곧 그녀의 간증이었다. 본디,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다. 신앙의 시작은 체험이고 완성은 간증을 통한 ‘고백’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론적인 종교가 아니라 체험의 종교다. 말씀을 머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신앙의 생활화가 주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간증'이다. 그 이유는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면 나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반드시’ 경험하는 까닭이다.

나는 목회현장에서 육체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같은 크고 작은 삶의 질곡을 겪는 가정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경우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절망적인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성경은 대부분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비범한 능력을 선포한다)을 증거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절망적인 가정에 새 희망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이 가정이 지금 이 문제로 망하고 쓰러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잘 극복해서 같은 문제로 넘어져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픈 자가 더 아픈 자를 위로하고, 넘어진 자가 일어나 또 다른 넘어진 이들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는 믿음이라기 보다는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소박한 믿음의 기도를 단 한번도 저버리지 않으셨다. 고비고비마다 순간순간 마다 놀라운 삶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또 나의 찬송이다.

   

'믿음'이 있다면,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소녀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 그녀의 강철 같은 믿음을 본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잠언을 관옥 이현주 목사님께서는 '사람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데, 하나님이 무슨 수로 결정을 하실 수 있으랴'고 명쾌하게 풀어 주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도 무기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씀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단과 순종을 통해서 그 뜻을 세상에 펼치신다. 그래서, 우리에겐‘내가 마땅히 감당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할 일을 구분하는 정금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그 믿음의 결과가 ‘순종’이다.

순종이 말처럼 쉽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고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 마리아의 순종으로 불가능할 것 같던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성취되었다. 우리도 종종 인생의 과제 앞에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기에는 고난과 사고, 원치 않는 환경과 조건을 만나면 ‘왜 하필이면 저 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라고 불평하며 회피한다. 하지만, 어린 소녀 마리아는 기꺼이 순종하고 받아들였다. 지금은 비록 고난이지만 마침내 영광스럽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흔들림없이 믿었다. 지금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마침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만일 마리아가 천사의 축복을 거부하고 힘들다고 불가능하다고 도망쳐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사야가 예언했던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새역사는 아예 시작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천사 가브리엘은 소녀 마리아에게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의 처녀들을 찾아가서 기쁜소식을 선포했지만 보기좋게 거절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멋대로 확신하는 까닭은 오늘도 수많은 그분의 종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조금의 헌신과 결단도 감당하지 않으려고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계산적이고 너무 잘났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다. 연약한 내 능력과 얄팍한 내 판단만을 의지한다. 그래서 쓸데 없는 염려와 끊임없는 근심속에서 살아간다. 믿음이 있다면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과연, 가브리엘 천사는 소녀 마리아에게만 찾아갔을까? 아마도 수많은 이스라엘의 믿음 좋은 처녀들을 찾아갔을테지만 대부분은 천사의 축복을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 마리아는 받아들이고 기꺼이 순종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류역사의 새 시대와 새 역사를 여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하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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