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조성자가 됨

A가 힘이 약한 B를 협박하여 도둑질을 시켰다고 합시다. B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사용한 것입니다. B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정말 엄청나게 맞았다고 합시다.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도둑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B가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시다. B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했든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고 싶지 않은데, 협박에 의해서 협박을 따라서 도둑질을 하였더라도 B는 자신의 의지로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둑질한 것에 대하여 A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까? 당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도둑질이라는 죄의 조성자입니다. 도둑질에 대하여 B와 함께 A도 책임이 있습니다. A의 배후에 범죄 조직이 있었다면 그 조직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강제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의지가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사자의 의지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그 당사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방송에서 '마왕'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형이 고등학생 때에 급우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머니까지 잃어야 했던 한 사람이 변호사가 되어 복수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형의 죽음에 연관된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는데, 자신이 직접 하지 않습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진행을 하여서 다른 누군가가 죽이는 일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변론을 통하여 정당방위로 이끌어냅니다. 당사자들에게 병주고 약주는 형식입니다.

분명히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은 죄의 조성자입니다. 그가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칼뱅의 예정론에 따른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은 그 경우의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죄의 조성자는 아니라고 우깁니다. 참으로 갑갑한 사고인데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의 드라마를 보면서 작가가 칼뱅의 예정론에서 이야기되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입장만이 죄의 조성자가 아닌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범죄에 대해서 예정하지 않으셨고 그 범죄를 이루기 위하여 섭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옛 뱀이 거짓말로 여자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자 먹음 직도 하고 봄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옛 뱀이 강제로 여자의 입을 벌리고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해를 끼치겠다고 협박한 것도 아닙니다. 옛 뱀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에 옛 뱀은 책임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옛 뱀에게도 물어 심판하셨습니다.

칼뱅에 따르면 옛 뱀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옛 뱀이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옛 뱀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아담이 옛 뱀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넘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 역사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 뱀이 아담의 범죄에 책임이 있어서 심판을 받았다면 더 근원적인 원인자이신 하나님께 당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아담이 자기 결정권을 사용하였기에 그 과정이 어떠하였든지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면 옛 뱀에게도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른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작정하셨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을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셨음에도 불가해라는 말을 앞세워 '죄의 조성자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궁색하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음에도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미리 정하지 않으셨고 아담이 범죄하지 않도록 역사하셨지만 아담은 자기 결정권을 사용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이는 성도의 범죄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범죄를 예정하지 않으셨고 범죄하지 않도록 역사하셨지만 성도는 자기 스스로 범죄하였습니다. 성도의 범죄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는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는 칼뱅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예정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예수님을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펼치셨기에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예정이 더 큰 은혜를 베풀기 위한 준비였기에 감사하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병보다 약이 훨씬 좋기에 병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한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난 너무나도 가슴 아픈 많은 일들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게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좋은 일이 주어졌기에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니 어찌 비신자가 호감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한 놀라운 구원은 아담의 범죄를 예정함으로써 가능하였던 일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 아셨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셨지만 아담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셨기에 그분은 구속의 역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범죄를 예정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길을 여셨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아담의 범죄를 예정하지 않았으나 아담이 범죄하였고 그를 이미 아신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길을 펼치셨다는 것입니다.

칼뱅의 무시

칼뱅은 자신의 주장의 문제점을 인지하고도 무시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리가 만일 그의 계명에 반대하는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요 완고함이요 범법인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하나님께서 뜻하지 아니했더라면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것이다. 물론 이를 나는 시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재정립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악한 것을 함으로써 그를 섬길 수 있겠는가?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그런 따위를 하라고 명하시는 분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그의 요구하시는 뜻을 심사숙고함이 없이 우리의 방자한 정욕에 말려 미친 듯이 무엇이든 행동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정한 뜻과는 달리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을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다." (J. Calvin, <기독교강요Ⅰ>, 김문제 역(서울: 세종문화사, 1977), 398.)

실지로 이 말은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문과 함께 시작된 그의 말은 그가 앞에서 인정한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앞에서 인정한 부분에 대하여 해명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주장 자체가 담고 있는 문제를 되돌아보고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을 수정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태양열과 시체의 악취를 비유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합니다. 시체의 악취가 태양빛 때문이지만 아무도 그 빛으로부터 악취가 나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악의 실질과 죄책은 악한 인간들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악인들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어떤 책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비유와 그 적용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 때문에'와 '~에도 불구하고'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태양빛 때문에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에도 불구하고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기에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것이지 빛(생명) 때문에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범죄나 불순종이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경적이지 않은 전제를 성경적인 말로 가리는 것으로 끝내어 버렸습니다. 교회 역사의 비극 중의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드러내고 높이고자 한 칼뱅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을 펼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의 주장을 따라야만 하나님과 그분의 우주 경영을 바르게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