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 있느냐?” “저는 숨었습니다."

당신은 촛대처럼

“ 이봐 학생, 다 왔어요. 빨리 내려요.”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깨우는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등불을 든 역부였습니다.

기차 안에는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차 싶은 것입니다.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만 것입니다.

1958년 늦은 가을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경원선 종착역 대과리 전 동네인 신망리에서 서울까지 200리 길을 기차로 통학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4시반에 집을 나와 세 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 신설동 학교까지 2km남짓 걸어서 학교에 가고, 오후 5시쯤에 걸어서 청량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9시가 넘어 집에 가곤 하던 고달픈 세월이었습니다.

그날은 꼬박 서서 가다가 집을 한 30여리 앞둔 전곡역에서 겨우 끼어 앉았는데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만 것입니다.

가을비는 처량하게 내리는데 되돌아 이십리 길을 걸어 오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복 직후 전방지대 밤길은 참 무서웠습니다. 뛰며 걸으며 그 칠흙같은 밤거리를 어떻게 신망리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도에서 갈라져 집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섰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300여m쯤 떨어진 정거장 쪽으로 내 발걸음이 저절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아, 거기 정거장에서 나는 불켜진 촛대를 보았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등불을 들고 정거장에 서 계신 것이었습니다.

기차가 지나간 지 이미 두어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리고 이제 올 기차도 없느데, 지금 다시 생가해 보아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아버지가 거기 그렇게 서 계셨는지를, 그리고 나는 왜 짐으로 바로 가지 않고 정거장으로 발길을 돌렸는지를....

지금 와서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깨달음은 “내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그러십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내가 가야할 길을 지나쳤다면 비가 오시는데도 당신은 등불을 켜들고 내가 돌아가야 할 그곳에 그렇게 촛대처럼 서 계십니다.(내책, 아름다운 순간)에서)

“ 너 어디 있느냐?”

아무리 어둡고 무서운 밤길이라고 할지라도 신작로 따라 두 시간 쯤 뛰며 걸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너무 멀어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는 어떡해야 합니까?

기차통학을 하면서 청량리역세서 집으로 가는 기차를 딱 한번 놓쳤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던 날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좀 놀다가 신설동에 있는 학교에서 청량리역까지 걸어갔더니 기차가 벌써 떠났다는 겁니다. 서울 천지에 갈 곳이 없는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때 쓴 일기가 용케도 아직 남아 있어 한줄 옮겨 씁니다.

1959년 1월 26일,월,개학일,흐림
........다리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할 수 없이 청량리부터 걸어서 한 이십 리 되는 삼양동 이모댁에 갔다. 가면서 마음 준비를 많이 하고 갔기에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모가 어디 가고 없어서 자꾸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이모야 그렇지 않았지만 이모의 전실아들등 다른 식구들 대하기가 힘들어 학교에 입학한 4월부터 붙어 살다가 두 달이 안되어 뛰쳐나와 집으로 가서 200리 기차통학하다가 기차 놓치고 할일없이 찾아간 곳이니... 한 겨울에 서울 천지에 달리 갈 곳이 없어 청량리역세서 북한산 기슭 삼양동 빨래골 까지 두 어 시간 걸어 갔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시름없이 교문에 들어서는데 “완택아, 이 녀석아!” 하고 아버지가 다가서시는 것이 었습니다. 당신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돌아올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찾아 새벽기도회도 인도 하지 못하고 아들이 타고다니는 통학기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너 어디 있느냐?”고 한소리만 외워대다가 교문을 지키고 계신 우리 아버지! 밤새도록 한 잠도 주무시지 못했겠지. 기차 안에서는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셨을까.
“너 어디 있느야”
아버지. 하느님은 지금도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저는 숨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눔 사이에 숨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는 동산을 거니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기 3장 8-11절)

좋구나!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아담 내외여!

“너 어디있니?”
(동산 나무 사이에서 언뜻언뜻 몸을 보이면서 “저는 숨었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이 대담을 가르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숨었습니다!’ 이 대담이 사람되는 길의 시작이다. 이 결정적 마음 살핌이야말로 사람의 길이 트이는 시초이다. 이 고백이야말로 거듭거듭 사람다운 길을 터준다.”(하시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에서)

자연은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 절기의 부름에 따라 말없이 자기의 옷들을 벗습니다. 한 처음의 사람 아담도 선들바람이 불 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선뜻 “저는 벗었습니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자연은 깨끗하게 깨벋은 알몸으로 겨울박이를 준비하고 나섰고 한 처음의 사람 아담은 알몸으로 새로운 사람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민들에 식구 여러분, 찬 이슬 서리 내리는 한로(寒露) 상강(霜降)절기에 시방 우리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고 하느님이 부르십니다. 대답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