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엮은 민중신학((12) - 죄·원죄, 사죄·대속·용서, 은혜 
                       
                                                정연복 엮음(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째 마당: 죄/원죄

1. 원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존 쉘비 스퐁

    어떤 구체적인 근거로 창조는 선하게 이루어졌고
    또 죄악에 떨어졌는지를 우리가 말할 수 있는가?
    그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생존하고 자식을 낳고
    음식과 물과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동물적 본능,
    그리고 우리의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본성들이
    언제부터 돌연히 악한 게 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 있어온 게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없이도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 오랜 기본적인 충동들이
    오직 창세기 3장의 “타락”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나타났다는 말인가?
    아니면,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들은
    본래 창조 그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에는 씨족, 부족, 그리고 국가,
    마침내 우리들의 서로 엄청나게 의존적이 된 세계에서
    삶을 이루어 가는 문명화의 영향에
    굴복하여 생겨난 게 아닌가?
    우리가 이기심 혹은 자기 중심성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성들도
    죄악으로 타락하여 생겨났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충동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만일 전통적인 기독교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왔다고 가르쳐온
    “인간의 타락설”이 이제 무의미하다면,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그리스도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부적절함의 바다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타락 이전의 피조물의 선함을 회복하도록,
    타락한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도록 보내어진
    신적인 구조자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듭 고통스럽게 발견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적인 주장이
    우리가 더 이상은 믿지 않는 문자적 성경 이야기에
    근거한 가정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실재에 근거해 있지 않다.
    만일 신앙의 기본적인 이해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거나 다시 표명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점차 우리의 상징이나 언어를 이해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교회는 과거의 자원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
    대중의 마음에 충분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존 쉘비 스퐁, 한성수 역,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국기독교연구소, 65-67쪽.)         
2. 원죄/브라질수도회연합회
     
      이 세계에서 “하느님의 모습대로”(창 1:27)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본받고, 하느님이 행하시는 것을 행하고,
      질서를 창조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고,
      모든 인간이 생명을 풍부히 누릴 수 있도록
      세계를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지상 낙원과 아담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는
      기원전 950년 경 솔로몬 통치 말기에 쓰여진
      야휘스트 전승에 속한다.
      야휘스트 사료를 쓴 저자는
      이스라엘 민중이 처해 있는 상황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많은 악을 목격하고
      그 모든 악이 대부분이 지배적 군주체제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은 것임을 발견했다.

      원죄는 오늘날 사회와 온 세계 민중을 해치는
      악의 기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온 세계 민중의 절대 다수가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것은
      바로 인간과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원죄 때문이다....
      원죄에 관한 교회의 교리는
      아담의 범죄가 미치는 전체 범위와
      범죄의 보편성을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브라질수도회연합회 엮음, 김수복 역, 『일어서는 하느님 백성』, 일과놀이, 33-35쪽.)

3. 역사적 관점에서 본 죄/도로테 죌레

    원죄 교리에서 주목할 점은
    죄에 대한 집단적 책임성의 강조다.
    신약성서의 지적대로 죄는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은유로 죄의 지배를 상세히 묘사한다.
    죄는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고 복종시키고
    정복하고 공포와 죽음을 유발한다.
    바울은 죄를 사회학적 맥락에서 다룬다.
    오늘의 용어로 하면,
    우리는 군국주의, 에너지 고갈, 식량 낭비, 착취 등
    폭력적 세력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는 게
    바울의 죄론의 사회학적 의미다.
    기독교의 죄론은 사람을 억누르고
    죄책과 무력감에 빠지게 할 수도 있지만,
    오늘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구조적 죄의 세력에 대한
    상황 분석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죄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아담과 하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욕심을 냈어요.
    그들은 선악과를 먹었어요.
    그게 탐욕이 아니고 뭡니까?
    죄는 뭘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끝없는 탐욕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이런 소유욕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라는
    한 흑인 여자 목사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성서와 일치되게 죄의 본성을 파악한다.
    선악과 이야기는 개인적 사고의 방향에서는
    의미가 올바로 파악되지 않는다.
    죄의 본성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혹은 구조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실 하느님은 성서에서 정의로 이해되며,
    죄는 다름 아닌 불의다.

    노동조건에 대한 분석이 없이는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인간 삶을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전통신학에서는
    노동이라는 주제가 빠져 있어서
    결국 죄를 단순히 개인적 무능력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죄론을 형성해왔다.
    죄론을 존재론으로 만드는 것 역시 위험하다.
    죄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면
    결국 숙명론적 죄론으로 귀결된다.
    전통신학에서는 죄를
    개인적, 사적, 존재론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해방신학에서는 죄를
    집단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히브리 성서에서 죄는 은총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와 관련된다.
    죄 개념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식의 존재론적 차원이 아닌
    역사적, 구체적 용어로 풀이되어야 한다.
    죄는 사회적, 역사적 사실이다.
    즉 죄는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형제애의 부재,
    하느님 및 타인들과의 친교의 단절이다.
    여기에서 죄의 집단적 차원이 드러난다.
    (도로테 죌레, 서광선 역,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한국신학연구소, 89-92, 114-115쪽.)

4. 사탄은 구조악이다/안병무 

    예수는 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고
    사탄이라는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예수에게 대전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와 상반되지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대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의 실체, 그것은 구조악입니다.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악에 속박되고 그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는
    구조악의 법망(法網)이 얽혀져 있는 것은 개의치 않고
    그것에 의해 속박당하는 소위 죄인들만을 보고
    그들에게 뛰어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다 죽은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구조악과 싸웠고
    그 구조악에 속박된 소위 죄인들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
    가장 영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세상은
    구조악을 형성한 지배세력에 의하여
    점점 더 죄 속으로 빠져드는 현실입니다.
    악한 지배권을 제거하는 것,
    따라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서남동 교수가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민중에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한(恨)”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 예리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저들의 삶 자체가 한의 덩어리요,
    저들의 한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 한을 더하게 합니다.
    저들은 약자들이니까 세상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모든 책임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있으며,
    세상의 규정을 그대로 받아
    창기, 전과자, 살인자라는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그 콤플렉스가 저들을 절망에까지 몰고 갑니다.
    저들은 늘 햇빛을 피해 그늘에 사는 인생입니다.
    저들은 세상의 저주가 수렁이 되어 그 속에 붙잡혀
    꼼짝못하고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규탄하는 설교는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짓밟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9-202, 208쪽.) 
     
5. 성서의 죄/안병무

    성서의 죄는 집단과 구조와 관계된 개념이므로
    사회구조에 내재하는 계급차별이 가장 큰 죄다.
    성서에서 죄는 가난한 자, 눌린 자,
    빼앗긴 자, 추방당한 자의 현실과 직결된다.
    이 현실을 인식하고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실천은 허공을 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정책도 공허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만이 계급현실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올바르게 제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과 처방이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믿음 안에서 모든 계급의 현실성이 저절로 소멸되는가?
    한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신도들 사이에
    계급 차별의 현실은 과연 없는 것인가?
    교회 안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에 대한
    야고보서(2:1-6)의 비판은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과연 아무런 타당성이 없는가?
    (안병무,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한길사, 31쪽.)

6. 책임 전가/김수환

    원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책임 전가다.
    “너 때문에”라고 말하는 게
    우리의 일상화된 습관이 되었다.
    “나 때문에”라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
    비단 비종교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종교인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가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내세웠을까?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7:3-5)
    물론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비판이 없는 비판은 위선이다.
    자신의 잘못은 감춘 채 남의 잘못만 꼬집는 것은
    상호 불신만 가중시킬 뿐이다.
    인간적인 공동체가 붕괴된 오늘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덕목들 중의 하나는
    성실한 자기비판이다.
    자기비판에 기초한 예언자적 고발과 비판은
    새 인간 새 사회의 씨앗이다.   
    (신치구 엮음,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 사람과사람, 170쪽.)

7. 죄 없는 예수/레오나르도 보프

    그분은 죄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등하셨다....
    기독교의 맨 처음 두 세기에 걸쳐 형성된 전승에서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이 
    그분의 본성의 특별한 자질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하느님과의 본원적이고 부단한 일치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하고자 했다.
    어거스틴 성인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 문제를
    예수의 동정녀 수태에 입각해서 논증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죄 없음은
    그분의 윤리적 태도들의 결백이라든가
    그분의 개인적인 행동들의 올곧음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물러 있으며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그분의 존재의
    근본적인 상황에 더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생애 동안
    하느님과 인간 존재들 앞에서 그분이 보인 사랑과 처신을 통해
    점차적으로 그분 자신의 육에 있어서
    이 죄의 역사를 극복하셨다(로마 8:3 참조)....
    그분은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이르지 못한
    참된 인간 존재의 모델이자 원형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 황종렬 역,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263-266쪽.)

8. 세리와 죄인의 친구 - 무법자 예수/호세 까르데나스

    예수는 지극히 당연한 듯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우러지고 있다.
    예수는 사회 규범을 타파한다.
    그는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는 율법학자와 같은 명성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기보다는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된다.
    그는 세상의 폐물들과 사회적 유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예수의 기꺼운 행동을 통해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은 기쁨을 맛본다.
    그들은 예수를 대식가(大食家)나 술고래로 취급한다(마태 11:19).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행동을 보고
    아연 질색할 따름이다(누가 11:37-38).
    계율이나 종교적 체면에서 볼 때 예수는 무법자다.
    (호세 까르데나스, 이종렬 역, 『민중의 예수』, 성요셉출판사, 22-25쪽.)

9. 부자가 되는 죄/J. 바니에

    공동체 초기에는
    공동체가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온전히 몸을 기댄다.
    공동체는 간청하고 하느님은 응답하신다.
    공동체는 기도에 충실을 기한다.
    공동체는 불안정 속에 살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열어주며,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결정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사는 초기에는
    공동체가 사회로부터 곧잘 오해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보거나
    아니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무리로 생각한다.
    심할 경우 공동체는 박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 얼빠진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공동체의 진가와 광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동체는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된다.
    오히려 찬미의 대상이 되고 명성마저 얻게 된다.
    공동체의 필요를 채워 주는 친구들도 생긴다.
    그래서 공동체는 점차 부유해진다.
    이어서 공동체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한다.
    세력을 얻을 만큼 강력해진 것이다.
    이때부터 위험이 발생한다.
    그 공동체는 이제 가난하지도 겸허하지도 않다.
    공동체가 자만에 빠져든다.
    이제는 예전처럼 하느님께 낯을 돌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예전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지도 않는다.
    기도는 열정이 식는다.
    이제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과 살아 계신 하느님께
    문을 걸어 잠근다...
    공동체는 자신을 생명에로 불러주신 분에게서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데서 최초의 죄를 범하게 된다.
    두 번째 죄는
    공동체가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신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J. 바니에, 성찬성 역,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출판사, 127-129쪽.)

둘째 마당: 사죄/대속/용서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길희성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너무 기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으로만 보도록 세뇌되었다.
      십자가 사건은 그야말로 “유일회적” 사건으로서,
      이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모든 인류의 죄가
      대속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 사건은
      지금도 억울한 자들의 죽음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있는 사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도대체 2,000년 전에 예수가 당한 고난과
      지금 나의 죄가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가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말인가?
      내가 그를 죽인 것도 아니고,
      내가 그에게 어떤 잘못을 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가 바로 나 때문에,
      나의 무관심, 나의 탐욕 때문에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사건으로서
      나를 구원하는,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대한 명상을
      추상적으로 하지 말자.
      그리스도의 고난은 먼 옛날 단 한 번 일어나서
      인류를 구원한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다.
      저 옛날에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그 고난을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아무리 억지로 우겨보았자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지금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억울한 자들의 고난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그리하여 그들의 고난을 바로 나를 위한,
      나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묵상은
      한낱 일시적인 감상주의일 뿐,
      공허한 추상적 교리를 뇌까리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잊지 않고서
      오늘도 교회를 찾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들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빚진 마음, 나 때문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복음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책만 받은 게 아니라,
      우리도 남을 위한 십자가,
      남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억울한 자들의 고난에
      대고(代苦)라는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서,
      행여 그들의 고난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의 고난을 방치하고 방관해도 좋다는
      어리석은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도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고 나누며,
      남을 위한 대고의 역사에 뛰어들지 않는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무고한 자들의 고난에 대한 완벽한 이론적 해결은 없다.
      결국 고난은 함께 지고 나누는
      실천을 통해서만 극복될 것이다.
      (『약속하시는 하느님』, 새길교회 1999년 설교 모음, 길희성, 110-112쪽.) 

2. 세상 죄를 지는 속량자/김경호 

      “죄”와 “구원” 이 모두는
      본래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용어인데
      이것이 사회성을 상실하고 철학화, 관념화되었다.
      그래서 심리적 차원에서의 속량, 속죄함을 말할 뿐이다.
      “죄”는 사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해결은 엉뚱한 곳에서 해버리고 만다.
      죄는 사람들 사이에 저질러 놓고 해결은 하나님하고 한다.
      죄를 발생시킨 근본 원인,
      죄의 발생지의 꼬이고 얽힌 것들은 하나도 풀지 않은 채,
      자신에게 있는 죄책감만을 면제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고 하셨는지 모르겠다.
      타인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고 나 혼자 동떨어져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분명히 대속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죄값이 아니고
      사회의 죄악 덩어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고난에 뛰어들었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에 뒤이어
      우리 사회의 민중들이 당하는 고난에도
      대속의 의미가 깃들여 있다.
      이 땅의 민중들은 얻어맞고 죽임을 당하지만
      그 고난으로 너의 죄, 이 사회의 죄,
      이 민족의 죄와 악을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누군가 져야 할 역사의 짐 덩어리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천 년 후에 태어날 우리,
      우리들 각자가 지을 모든 죄까지를
      미리 보시고 속죄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가 8:34)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씀이다.
      누가는 여기에 “매일”(누가 9:23)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십자가 사건은 오늘 여기에서
      매일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삶의 실천 방식으로 삼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의 모순과 질곡을 짊어질 속량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세상 죄를 지고 예수를 따라 나설 것을 요청받는다.
      (김경호, 『해방을 위한 사랑의 선한 싸움 - 한국교회의 갱신과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신학적 설교』, 나단, 213-219쪽.)
       
3. 정결 논쟁/마커스 보그

    사회적 세계를 강조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1세기 팔레스틴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가
    우리 시대와 얼마나 근본적 차이가 있느냐에 관한 인식이다.
    예컨대 복음서에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정결 논쟁이
    현대인에게는 어리둥절하게 들릴 수 있다.
    정결과 부정,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양극 논리가
    1세기 팔레스틴 사회적 세계의
    근본적인 정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깨끗함과 더러움을 둘러싼 논쟁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 - 역사적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03-104쪽.)   

4. 예수의 율법 비판과 사죄 선언/한국신학연구소 성서교재위원회

    민중 일반을 지배, 관리하는 수단으로는
    재판권을 수반하는 법률과 교육이 최대의 무기다.
    그것은 실생활을 규정하는 동시에
    관념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을 조인다.
    생활을 규정하는 성서의 율법 조항은 613개나 되는데
    거기에 따른 세부적인 규칙들은 무수히 많았다.
    안식일 금지조항만 해도 무려 39개나 된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고 따를 조건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위안을 주지만,
    그렇지 못한 민중에게는 짐과 억압으로 작용했다.
    율법은 재산, 사회적 불평등, 지배계급을 옹호한다.
    율법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나 실체로부터 추상화시키며
    형식적인 법적, 정치적 평등을 찬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 안에서의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예속을 묵인하여
    인간이 자발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한다.
    율법은 사회를 통제하는 물리적 강제수단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 강제력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민중의 의식 속에 파고들어
    그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고 그들을 무기력하게 하며
    자발적인 의지로 지배계급에 순응하게 한다.
    지배계급은 이 율법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적대감 없이 민중을 속으로 병들게 해서
    그들의 지배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예수는 율법의 이런 기능을 간파하고
    율법을 통해 쌓인 민중의 죄의식을 제거한다.
    민중을 ‘순한 양’으로 길들여 온 허구,
    그들에게서 주인의식을 빼앗고
    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그 허구에 대해 예수는 무효를 선언한다.
    예수의 이러한 사죄 선언은
    민중을 사회적 주체로 일어서게 하며,
    짓눌렸던 제도에서 깨어난 민중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으로 동력화한다.
    (한국신학연구소 성서교재위원회, 『함께 읽는 신약성서』, 한국신학연구소, 99-101쪽.)   

5. 용서/앨버트 노울런

    세례자 요한은 죄인들에게 설교했다.
    그러나 예수는 죄인들과 하나가 되었다.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림으로써 야기된 ‘스캔들'은
    대부분의 현대인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실제로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가 됨을 의미했다.
    그것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기적적이다.
    예수가 죄인들과 사귄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처럼 불명예스러운 행적을
    예수보다 더 ‘존귀한 분들’이던 후대의 추종자들이
    창안했을 리는 만무하다.
    도리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행적의 이러한 측면이
    삭감되어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우리에게 있는 증거만으로도
    예수가 죄인들과 이른바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은
    분명히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마가 2:15; 누가 7:34, 15:2 등).
    이런 식사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장이 될 수 없으리라.
    그들을 친구로,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는 그들의 수치감과 비굴함과 죄의식을 씻어 주었다.
    예수는 그들이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자존심과 해방감을 주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기뻐하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한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예수는 치유하고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두려움을 몰아내고 걱정에서 건져 주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앨버트 노울런, 정한교 역,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분도출판사, 65-73쪽.)

6. 예수의 죄사함의 의미/지성수

    예수 당시의 유대인에게는 정기적인 죄사함이
    오늘날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누구나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죄사함을 위한 통과의례가
    곧 성전에 올라가서 제물을 바치는 제사제도였고
    제사를 수행하는 집단이 바로 제사장 집단이었다.
    세례의 의미는 성전 중심의
    제사장 세력의 제사행위와 구별되는 행위로서
    요즘으로 말하면 민중 의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소외된 민중들에게
    새로운 종교체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예수에게 이르러서는
    죄사함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커녕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조차 의미가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죄사함의 근거를
    제사나 세례라는 형식 대신
    ‘죄사함’의 확신을 갖는 믿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병자가 지녔을 이런 강박관념을 풀어주려고
    단호하게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지성수, 『교회야 교회야 뭐하니?』, 예루살렘, 20쪽.)

7. 용서/헨리 나우웬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나도 남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며
      폭력과 파괴의 사회에 한몫 해온 자임을 더욱 실감한다.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상처 입은 자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내 모습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왜 나는 나를 건드리거나 상처 입히는 자들을
      늘 생각하는 것일까?
      왜 나는 그들에게 내 감정과 기분을 지배할
      힘을 내주는 것일까?
      왜 나는 단순히 그들이 베푼 선을 감사하며
      그들의 실패와 실수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분노와 원한과 상처를 품어야만
      인생의 내 자리를 찾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내게 상처를 준 그들에 의해
      내 정체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용서란 사랑이 서툰 자들 사이에 행해지는
      사랑의 이름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서툴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 사실조차 모를 때도 있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가족이라는
      약자들의 교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랑의 작업이다.
      (헨리 나우웬, 윤종석 역, 『꼭 필요한 것 한가지, 기도의 삶』, 복 있는 사람, 162-164쪽.) 

8. 공동체의 핵심인 용서/J. 바니에
   
    공동체는 용서의 자리다.
    우리가 서로를 제아무리 신뢰한다 해도
    언제든지 상처를 주는 말과 자기를 내세우는 태도와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함께 사는 것은 어느 정도 십자가요
    부단한 노력이며
    날마다 서로를 용서하는 받아들임이 된다....
    무엇인가 발견하기 위해,
    활력 있는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이상(理想)에 접근하는 삶을 발견하기 위해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공동체를 찾는 이유가 용서의 신비를
    발견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공동체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이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이미 밝아진 부분,
    회심된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부분도 있다.
    공동체는 회심된 부분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변형되어야 하고 정화되어야 하며
    제거되어야 할 제반 요소까지 합쳐서 이루어진다.
    공동체는 ‘회심되지 않은 부분’으로도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하느님이 오늘 우리 곁에 데려다 놓으신 이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표징이다.
    우리라면 다른 사람을,
    더욱 사랑스럽고 총명한 사람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이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이들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평화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대가 머물고 있는 곳에 자신을 쏟아 부어라.
    그대를 응시하지 말라.
    그대보다도 곤궁에 처한 그대의 형제 자매들을 응시하라.
    오늘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이 그대에게 보내주신 이들과 가까이 지내라.
    오늘 하느님이 그대에게 부탁하신 일들을 수행하라.
    그대가 어떻게 하면
    그대의 형제 자매들을 보다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 여쭈어라.
    그러면 그대는 평화를 찾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찾고 있는 내면과 외면,
    기도와 활동,
    자기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 사이의
    훌륭한 조화를 발견하며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랑을 통해 저절로 해결된다.
    완벽한 공동체를 뒤쫓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오늘의 그대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삶을 영위하라.
    타인의 결점을 찾지 말라.
    그리고 어느 정도 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라.
    오히려 그대 자신의 결함을 주시하고,
    타인이 그대를 용서하고 있기에
    그대 역시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음을 깨닫고,
    오늘 사랑의 회심을 이루도록 하라.”
    (J. 바니에, 성찬성 옮김,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출판사, 23-24, 29-32쪽.)

9. 용서와 화해/브라질수도회연합회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보다 강한 원수 앞에서
      약하게 뒤로 물러나는 행위가 아니다.
      용서하는 행위는 창조적 행위,
      즉 증오심에 찬 폭력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을 본받으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불의와 범죄와 잘못을
      못 본 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억압자와 착취자와 살인자는
      자기가 그런 사람임을 솔직히 인정한 다음에야
      예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만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용서는 불의를 정의로, 억압자를 동료로,
      그리고 원수를 형제와 친구로 바꿔놓음으로써
      불의를 그 뿌리로부터 이겨낸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허약함의 표시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정의와 형제자매 사랑의 가장 고상한 표현이다.
      용서와 화해야말로 증오와 범죄로 얼룩진 우리 세계에서
      만민의 해방을 위한 실현 가능한 유일한 현실적인 길이다....
      고통받는 민중의 삶이라는 땅 속에 감춰진 씨앗은
      용서에서 그 결실이 드러난다: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사랑하고 믿어주는 신앙!
      회개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신앙!
      악에 대항하는 투쟁!
      (『일어서는 하느님 백성』, 57-58쪽.)

10. 용서/김수환 추기경

    참사랑에는 용서가 포함된다.
    가끔 우리는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움과 원한의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음에 맺힌 것을 완전히 풀지 못한다.
    왜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르는가?
    나 자신이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주 가지면서도,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별로 잘못한 게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 중에 ‘눈물의 은사’라는 게 있다.
    곧 내가 죄인임을 깊이 뉘우칠 줄 아는
    통회의 정(情)에서 우러나는 눈물이요,
    더 나아가 나의 모든 죄, 진홍같이 붉은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데서 오는 감사의 눈물,
    하느님이 나같이 비천한 존재도 사랑하신다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데서 오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은사’를 일컫는 말이다....
    참사랑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맺힌 게 풀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자만이
    참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김수환·추기경)

셋째 마당: 은혜
             
1. 은총에 대한 이해/도로테 죌레

    죄가 분리와 차별, 고독과 소외를 의미한다면,
    은총은 생명을 꽃피우는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은총은 심판 앞에서의 책임 면제 그 이상이다.
    은총의 진정한 의미는 일상의 언어인
    ‘행복’이라는 말로 가장 간단히 표현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상 삶의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이든 공로 없이 받은 선물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참된 은총은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의인(義認)을 성화(聖化)와 분리시키는 것은 값싼 은총이다.
    성서의 여러 표상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을 단순히 수혜자로 전락시키지 않음을 명백히 한다.
    신학사에서는
    인간 구원과 참여에 대한 논쟁이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해방신학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협력은 불가결하다.
    인간의 참여를 거절하는 하느님은 독재자 하느님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세상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무시킨다.

    은총의 교리는
    ‘어떻게 인간이 죄의 절망과 공허감에서 벗어나
    새 삶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해방신학들(흑인신학, 여성신학,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에서는 
    하느님의 해방하시는 은총이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총을 주관화하여
    죄의 용서를 통한 마음의 변화로 설명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다르다.
    정통주의의 속죄, 자유주의의 화해에 대해
    해방신학에서는 해방이 곧 은총이다.
    정통주의의 책임 면제, 자유주의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해방신학에서는 삶의 변화, 
    즉 개인적 및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의
    삶의 질적 변화로서의 은총을 강조한다.
     
    그런데 해방은 늘 압제와 연관되므로
    압제자를 규명하지 않고서는 해방이 불가능하다.
    억압 구조를
    누가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에
    죄 곧 악마적 특성이 깃들여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죄의 절망을 믿으면 믿을수록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전통적인 개신교는
    인간에게는 선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인간학적 비관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롭게 될 수 있다.
    의인과 성화는 서로에게 속한다.
    참된 믿음은 이 세계가
    더 이상 착취와 부정의 장소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위해 싸울 수 있다.
    이런 회심을 바울은
    은총이 우리와 함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은총은 지배 권력에 의존하는 절망에서 해방실천으로
    우리를 옮겨 준다.
    (도로테 죌레, 서광선 역,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한국신학연구소, 115-135쪽.)     
2. 은혜/마커스 보그 

    은혜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 
    하느님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든지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덜 느끼게 될 수 있다.
    은혜는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모든 기독교인의 자만심을 무너뜨린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도,
    우리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자신의 “성취”라고 주장하는 것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의 유전적 유산,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진 가족과 경제적 조건,
    그리고 우리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 주어진 것인가?
    은혜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간직해 온
    종교적, 정치적 신념들 중의 일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올바로 이해된다면,
    은혜는 심오한 의미에서 평등주의적 개념이다.
    은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
    교만,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그만큼 더 감사로 대체될 것이다.
    감사와 은혜는 맥을 같이한다.
    (마커스 보그, 한인철 역, 『새로 만난 하느님』, 한국기독교연구소, 256-258쪽.)
   
3. 은혜를 받아들이려면/루이 에블리

    하느님의 사랑은 온전히 각 사람에게 적합하며,
    하느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될 수 있는 한
    생동하는 사랑의 관계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의 성화(聖化)에 한계가 있는 것은,
    하느님이 관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 대해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신다”(요 3:34).
    수태고지, 겟세마네 동산, 또 부활 때의 천사들은
    현대에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녀들,
    만민 위에 감돌고 있으나,
    저들이 내려설 장소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곤란할 따름이다.

    은혜를 받아들이려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내주려고 할 때,
    남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를 받아들이려면 나도 나 자신을
    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다.
    사람을 소유물 중의 하나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내주려는 사람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게, 그만큼 더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그 사람에게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제아무리 하느님을 찾는다 해도
    하느님은 우리가 있는 그곳 이외에는
    결코 계시지 않으므로,
    딴 곳에서 찾을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아 헤매는 노력은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할뿐이다.
    하느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주고 계신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러 나갈 필요도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제공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훨씬 이전에 하느님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수는 물으셨다.
    “빌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요한 14:9)
    우리도 마찬가지다.   
    (루이 에블리 지음, 김수창 역,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가톨릭출판사, 6-7쪽.) 

4. 하느님이 떠나시지 않은 이 땅/구티에레즈

    우리는 은혜의 때, 한 ‘카이로스’에 살고 있다.
    이 카이로스 안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계시록 3:20).
    환영과 적극적인 깨어 있음,
    확신과 용기의 태도를 요청하는 것은
    폭력적인 침입이 아니라 조용한 두드림이다.
    무관심, 그들이 이미 획득한 특권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을 영적인 귀머거리로 만든다.
    결국 주님은 그들의 집에는 머물지 않고 지나가신다.
    그러나 우리의 나라들과 이 시대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들의 삶의 문을 열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의 한 특별한 시기,
    예수를 따르기 위한
    새로운 진로가 트이고 있는 때에 살고 있다.
    (구티에레즈, 김문호 역,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한국신학연구소,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