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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우위의 하나님 (1)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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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4월 13일 (일) 16:55:03
최종편집 : 2008년 04월 13일 (일) 19:09:01 [조회수 :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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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우위란 경제용어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밀접한 경제적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금 우리는 돈이 움직이는 가치와 득실만을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으려는 반 생태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태적인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나의 희생과 손해로 전체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게 합니다. 그런 숨은 희생이 있었기에 지구가 인간이 살기 좋은 조건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그런 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기에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을 가거나, 심지어 교회를 선택 할 때도, 어떤 물건을 살 때도 A라는 대학, 교회, 물건과 B라는 대학, 교회, 물건을 두고 어느 곳에 가야 할 것인지, 어느 교회를 선택할 것인지, 어느 물건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때 각각 대학 브랜드와 장래 취직에 유리한지, 내용물과 디자인과 가격 대비를 비교해보고서 말 그대도 더 우위에 있는 상품을 구매하게 됩니다. 결혼조건도 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들의 생활조건을 결정지을 때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선택하여야 할 때 교회건물, 목사의 브랜드, 설교의 내용, 성도들 간의 친교, 목회마인드의 건전성, 등 기타 여러 가지 조건을 자신의 비교우위 결정 체크리스트에 체크하고 난후 비로소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교우위를 결정지을 때 하나님 입장보다는 인간인 나의 입장에서 결정짓는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외형적으로 측정되는 비교우위의 조건들이기 고려되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와 브랜드목사들에게 점수를 많이 주게 됩니다. 작은 교회는 골목 구멍가게와같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져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합니다. 마치 주차하기 좋고 쾌적한 환경속에서 원스톱 상품구매에 편리한 대형마트와, 복리후생이 좋고 기업의 이미지가 좋은 대기업으로 사람들이 모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양극화의 현상이 자연히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재도 돈도 한곳으로 쏠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복음도, 하나님도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에 따라서 비교우위의 법칙이 적용되는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 밖에는 되지가 않지요. 이게 이 땅에서 믿는다는 우리들의 죄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아니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편리한 메뉴의 설정을 하고서 믿음의 구미를 충족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란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소꿉놀이 장난밖에 되지 않는 집단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디면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적 비교우위의 법칙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교회가 한 몸으로 유기적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는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비교우위의 경제법칙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제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비교우위의 법칙이 지배하니까 교회를 마케팅 기법으로 운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비교우위 법칙을 포함한 모든 경제법칙이란 일정한 조건하에서 경제현상간에 존재하는 일정관계의 규칙적 반복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일정한 조건이란 매점 매석, 주가조작, 부동산투기 등의 인위적인 거래조건의 조작을 통하여 거짓수요와 거짓공급, 작전세력의 정보에 의하여 놀아나는 경제현상을 말하며 이러한 경제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작게는 한국경제현상으로 크게는 글로벌 경제현상으로 빈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법칙은 철저히 인간의 죄성을 기초한 인간의 경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탐욕의 도구가 된 경제법칙은 하나님나라 경제 법칙에 반하는 맘몬의 경제법칙이 되는 거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경제질서인 희년법은 지켜지지 않고 인간의 질서인 경제법칙은 진보를 거듭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을 통한 국가 간 자유무역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약소국가는 죽어갑니다. 골목 구멍가게는 죽어갑니다. 사회적 약자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죄성만 극대화 되어가는 경제질서일 뿐입니다.

우리한국교회는 인간의 질서에 기초한 경제법칙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경제법칙을 따르는 것이 백성 된 자의 의무일진데 희년법조차도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히 인간의 질서인 자본주의의 더러운 꿀물을 빨고, 복음을 마케팅으로 삼고, 교회를 사업장으로, 성도를 고객으로, 전도행사를 잠재된 고객유인 행사로, 조직을 다단계시스템으로 하여 결국 최고의 정점에 있는 목사는 기업적 CEO의 역할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성공한 목사로, 브랜드목사로 자타가 공인을 받는 세속적인 목회에서 인기 짱, 혹은 인기스타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의 창조질서는 일정한 조건과 일정한 관계속에서 규칙적 반복이 되어집니다. 이를 자연현상의 불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틀에서에서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리고하는 기후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경제현상은 한마디로 인간의 질서에 의한것이며 이는 탐욕을 기반으로 하는 죄의 질서입니다. 이처럼 탐욕에 의한 경제주체는 하라는 선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악을 행하는 죄성을 극대화하려는 자유의사에 따라 경제행위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제의 열매는 권력자가, 강자가, 부자가, 대기업이, 거래관계상 지위우위에 있는 기업, 소수의 눈치 빠른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법칙이란 수요공급의 현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종의 경향적 법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을 기초로 한 경향이 있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조건하에서 유도할 수 있는 법칙을 보편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역시 죄의 보편성과도 연결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수요공급이기 보다는 인간의 탐욕에 기초한 수요공급의 현상은 결국 자본의 논리의 파워에 따라 돈이 몰린다는 것이지요.

무한경쟁과 자유무역을 전개하는 글로벌 문명이 보편화되어가는 시점에 우리사회는 국가 간, 기업 간, 개인 간, 더 나아가서 교회 간, 목사 간에도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이런 경쟁의 법칙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경제법칙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까닭은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의 선수대결과, 대학생과 초등학생사이에 달리기 경쟁은 처음부터가 잘못 설정된 경쟁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쟁구도설정이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기초한 경쟁구도이어서 자본이 있는 사람이 결국에는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경험적 인간의 법칙이 제도화된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돈이면 다되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법원 모 부장판사가 돈을 받고 죄를 가볍게 하여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술값을 갚아주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모든 행정제도가 그렇게 돈의 힘에 무력화되었습니다. 대선도, 총선도 돈의 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은 맘몬의 권세입니다.

남대문 화재사건도 개인의 성격장애등의 문제로 돌리지 말고 함축된 우리사회의 모순된 엔트로피의 증대현상이 터진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혈압이 높아 뇌출혈이나 코피가 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반사회적 모든 범죄현상에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고 예방적 차원에서 분석해야 합니다.

속된 말로 돈이 돈을 번다고 합니다. 도박을 하더라도 결국 밑천이 두둑한 사람이 돈을 따게 되어 있습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돈이 더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경쟁에서 더 우위의 조건에서 경쟁을 하여 마침내는 상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관찰이 됩니다. 돈이 권력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부처님도 하나님 마음도 움직이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마트간의 상권 경쟁에서 자본이 든든한 마트는 상대 마트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원가이하의 가격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붙잡아 둡니다. 그러다 상대 경쟁마트에서는 버티기에 한계를 느끼면 문을 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쟁구도는 우리사회의 상식적으로 전재되어 있는 탐욕의 논리, 강자의 논리, 힘의 논리, 죄의 논리가 경제법칙이란 사회과학이란 학문의 옷을 입고 경제정책을 펴고 있는 국가와 글로벌경제는 한마디로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경제제도라고 여겨집니다.

국가 간의 경쟁도 그렇습니다. 종국에는 경제제도로 기초한 하나의 통합된 경제국가로 되어갈지도 모릅니다. 이미 글로벌 경제추세로 봐서 그런 징후가 농후합니다. 하나님의 생태적 국가경영이기보다는 독점적 경영방식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약자의 지위에 놓여 있는 국가들은 점점 비교우의의 경제논리의 희생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는 개인과 ,가족과, 국가사이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죄의 논리만이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무한 경쟁을 주도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진행될수록 국가 간의 엄청난 양극화와 환경의 엄청난 불평등, 토착산업, 토착상업, 토착자본 등 이 소수의 사람의 손으로, 국가로 자본의 집중이 심화가 되면 지구의 생태계는 무너지게 되어버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되는 시간의 단축, 연장이 관건이 되겠지만 문제는 인간의 질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화평을 거슬러 도전하는 보편적, 역사적 속성에 기초한 허약한 질서라는 겁니다. 이러 허약한 질서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삶의 보람과 열정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돈 버는데 투자하고 경쟁하는 소꿉장난을 벌리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지금은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사라졌지만 그에 대체하는 신분제도가 등장했습니다. 악이 하나 물러가면 또 다른 악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질병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지금은 돈이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하나님 역할을 합니다. 가족 간에도 돈이 화합의, 애정의, 가족구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교회도 돈이 하나님보다 더 비교우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돈이 있는 사람이 지역 유지행세를 합니다. 즉 입김, 말빨이 세어집니다. 지금은 인격보다 돈격이 더 비교우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전에는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비교우위로 우월감과 열등감등으로 서로간의 무형의 알력이 있었다면 지금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행동거지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이에게는 우쭐대고 거만하게 행동하지만 자신보다 잘사는 이에게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경향이 속물적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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