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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위기 교회의 위기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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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4월 06일 (일) 16:57:48
최종편집 : 2008년 04월 08일 (화) 12:17:28 [조회수 : 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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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소리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 돈의 가치가 침투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인문학의 가치와 성경적인 가치를 무력하게 하고 맘몬의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사호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이에대한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타락의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바로 하나님과 성경을 가장한 사탄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아니 70년대 이전까지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모습과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던 신앙자세가 이제는 풍성한 메시지의 홍수에 그냥 떠 밀려가면서 물을 먹다가 익사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할까요? 귀족목사들의 화려한 생활상이 언론을 통하여 만천하에 공개 되었습니다. 귀족목사들의 말씀의 양은 화려하고, 풍성하고 포장은 잘되었는데 설교가 질이 떨어지고 , 각종 첨가제가 가미되어 있어 교인들의 영적 세포에 병적유발요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원의 정체성에 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업자득으로 방송이 되었던 것이지요. 허지만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굳건한 목회반석위에 서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송의 바람이 불어도 요동하지 않게 하는 목회추종세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는 방송매체와 비공식적으로는 안티들의 공격을 당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의 핵심이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설교들이 강물과 같이 백화점의 상품처럼 풍성한데 왜 이렇게 설교생산자나 소비자들이 무기력해지고 가슴에 닿지를 못할까요? 청중들은 말씀을 듣고도 왜 결단과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생산, 판매, 소비하고, 폐기하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설교를 일회성으로 소비하고 폐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또 다른 멋진 아이템을 찾아 말씀요리를 하여 공급하게 되는 유통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교회 목사들의 질적인 문제는 부차로 하더라도 양적인 설교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꼭 말을 많이 하여야 넘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한 문장의 설교라도 성령의 감동감화의 역사가 있다면 수천, 수만 마디의 화려하고 현학적인 설교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회의 크기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일주일에 최소한 주일, 수요일의 장편설교가 3편 이상의 설교와 단편설교를 새벽기도에 7번 하게 됩니다. 다른 경조사와 기관 월례회 등등의 설교는 제외하더라도 연간 520번을 설교를 하게 됩니다. 대형교회의 1, 2, 3 부 연속상영(설교)하는 경우 그 회 수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설교의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사의 본질이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 점을 이해해 주어여 합니다.

대부분의 명품설교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와 별반 다름없습니다. 영화한편을 감상하며 느낀 것과 같은 가벼운 은혜? 로서만 족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아주 입맛에 맞는 설교이지요. 배우의 끼와 각색자의 시나리오에 충실한 가공된 연출, 연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메시지로서의 진정성을 결여 된다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많은 설교와 잡다한 목회로 목사를 너무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책임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아주 유아적인 신앙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이 성경을 주교재로 신학을 참고서로 하여 복음을 요리하여 먹을 줄 모르는 영적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비새끼 마냥 입만 벌이면 엄마제비인 목사가 중노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브랜드 목사이고 위대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과부하적인 설교가운데 얼마나 복음적이고,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학을 기초로 한 모범설교를 했는지 자문자답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도 과로사가 있습니다. 성인병으로, 암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설교의 중압감에서 목사를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방과 각종행정, 회의, 여러 경조사 참석, 사소한 것 까지도 목사에게 의존하는 성도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목사의 목회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성도들에게 시달린 까닭에 피곤한 몸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 해야하는 설교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의 고충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만큼 힘든 노동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오장육부의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래서 소언어(少言語), 양내기 (養內氣)라고 했습니다. 즉 말을 적게 하여 내기(에너지)를 길러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설교 한편을 준비하려면 최소 이틀 넘게 걸려야만 복음의 메시지가 생산하게 됩니다. 뼈를 깍는 고통이지요. 시인의 고통처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위해서는 밤새도록 소쩍새가 우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설교 소비자인 성도들에게도 책임도 많습니다. 복음이 복음답게 선포되어지고 예언자적인 설교를 듣기보다는 오히려 축복, 은사, 신유, 상공, 출세, 자본주의 삶의 긍정 등의 신앙가치관을 선호하기 때문에 설교공급자는 그러한 여론을 참작하여 공급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안에도 일종의 수요공급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적당히 성도를 길들이고 목회성공발판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는 웰빙과 축복의 명품설교로 인기를 모으려고 하고 인가를 먹고 존재하는 연예인들처럼 목회 퍼퓰리즘이 한국교회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렇지만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일평생 기억되는 설교가 과연 있을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설교는 영적 대사작용을 거쳐 영적으로 소화된 찌꺼기는 배설물로 배출되는 소화과정으로 본다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설교의 공급은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양질의 육적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듯이 양질의 설교를 들어야 영적 건강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나 저질 부흥사나 개그목사들은 거룩하고 신령한 음성, 약장사 음성으로 병고치고 대접 받은 경험이나 각종 허구의 예화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면서 성도들의 종교적 감성을 자극, 흥분시킵니다.

환자가 병원에 들어서면서 병원의 분위기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하는 순간 병은 나았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이미 사전 세뇌된 부흥사와 개그인기 목사들이 메시지와 제스쳐에 반응하게 됩니다. 넘어지고. 웃고, 울고, 뒹굴고, 금이빨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개인 최면이자 집단최면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설교 후에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서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 설교 참 잘 한다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역시 그날의 설교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의 현상은 설교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허공을 떠돌다 사라지는 설교, 일회성적인 가벼운 은혜, 부흥사들의 뜨거운 설교는 순간의 뜨거움으로 끝날 뿐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면서 지성의 틀을 잘 갖추고 있는 설교자들은 감정의 유발을 억제하고 이성을 통한 진리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을 낳게 됩니다. 이 것 역시도 차갑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목사의 설교에서 때때로 자신의 감정은 메마른 체 신학적 머리만을 굴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겁니다. 십자가 복음과 구원의 도를 전하는 설교자가 자신이 그 십자가의 사건에 도취되어 끝없이 감격하고 그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는 모습이 없이 성경의 말씀 나열로 신학적 지식으로 복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무미건조한 설교로 끝을 장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는 목사수준이상을 올라서지 못합니다. 목사가 머리로만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도 머리만으로 설교를 듣습니다. 반대로 목사가 먼저 회개하고 가슴으로 설교를 하면 성도도 함께 회개하고 가슴 속 깊이 그 설교를 간직하게 됩니다. 성질만 내는 설교이기보다는 우선 뜨거운 설교의 호소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냉혈동물과 같이 차가운 메시지만 선포될 뿐입니다.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마지못해 예배시간만 때우고 있는 인상을 풍깁니다. 설교자인 목사자신이 먼저 깨닫고, 감격하고, 그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식하지 않고 일방적인 전달로만 그칠 때는 설교의 생명력은 그만큼 감소되어지는 것이지요.

복음을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게 낫고, 백번 보는 것 보다 한번 깨닫는 게 낫고, 백번 깨닫는 것 보다 한번 실천하는 게 낫고, 백번 실천하는 것 보다는 한번 이루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은 우리의 단계별 신앙생활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되어질 때 까지 복음의 최고의 가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구원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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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220.121.84.77)
2008-04-09 20:06:33
하나(1)님의 종이라 하는 자들은 다아 사기꾼이다...!
요한복음

15:12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

모두 함께 스스로 말 하기를
여기 저기
그곳
이곳에서

하나(1)님
예수(6)의 종이라 하고

양(성도)의 피를 흡혈하는 자들은

다아
사기꾼(적그리스도)이니라...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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