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성(聖)금요일: 수치스런 모습

                                        빌 윌리 켈러만(Bill Wylie Kellermann) 지음
                                       정연복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십  자가의 힘입니다.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  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힘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고전 1:18-25)

우리는 십자가로 간다.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성금요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또 나쁜 소식들 중에서도 최악의 소식처럼 한 암흑의 날을 기다리면서, 교회력의 한 모퉁이를 굳게 차지하고 있다.

이 일, 이 표징, 이 길이란 대체 무엇인가? 십자가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어떤 실마리라도 우리에게 있는 걸까? 십자가 이야기가 길게, 아주 자세히, 그리고 몹시 구체적으로 보도되는 것은 성금요일의 은총이어야만 한다. 그 이야기의 상세한 점들은 추상적인 관념과 과장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체포로부터 다양한 심리(審理)와 재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고문실에서의 온갖 고통들로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의 숙달된 기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시하도록 요청 받는다. 배반, 부인, 자포자기, 계산된 정치적 책략들, 그리고 이런 것들 한복판에 있는 자유와 은총과 충성, 이 모두를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영감을 받아 제국의 군대 깃발에 십자가를 달고 전투에 나간 이래로, 그것은 공공연한 혼란스러움의 문제가 되어왔다. 십자가 자체가 다방면의 공격 아래 수난을 겪어왔다. 십자가의 의미는 교묘하게 뒤집히고, 하찮게 되고, 추상화되고, 간과되고, 혹은 무시되었다. 십자가는 보석들로 치장되고 하나의 성물(聖物)로 숭배되었다.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련회에서 묵상의 한 행위로,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의 구체성을 갱신하기 위해, 나의 한 친구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한가운데 의자를 가져다놓고 "이것은 사형용 전기의자입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하고 요청하는 복음서 본문을 읽었다. 그러면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만일 제단 위에 빈 전기의자를 올려놓으면 북미의 교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람들은 상상해야 했다. 십자가에 처형된 주님을 따르는 어리석음과 추문이 이 상상을 통해 보다 뚜렷이 드러나곤 했다.  

십자가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사형(死刑)으로서의 그 십자가의 가장 명백한 의미에서 출발해야 한다. 십자가는 궁극적인 형벌이요, 권력자들이 사회적 통제와 정치적 통제를 할 때 너무도 신속히 따르는 마지막 수단이다. 기존의 권력들을 문제 삼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가 십자가의 모든 풍부한 의미를 사색할 수 있을까? 복음서들은 작동하고 있는 다양한 세력과 통치자들을 시사한다. 그들 중 어느 것 혹은 어느 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베일에 둘러싸인 불분명한 문제다. 이것은 끝없는 학문적 논쟁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의 공모를 암시하기도 한다. 권력자들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충돌하고 있는가? 그들은 서로 부딪치고, 서로 비열한 짓을 하고, 서로를 속이고, 서로 술책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 권력들과 권력자들은 예수를 처형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서로 제휴하여 행동한다. 유대의 법과 로마의 법 체계, 성전 경찰들과 백부장이 이끄는 군인들, 밀고자와 스파이들, 산헤드린과 사제 귀족들, 꼭두각시 왕과 제국의 총독, 그리고 이들 배후에 있는 카이사르와 또 다름 아닌 시대 정신, 이 모두가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예수와 그의 운동에 반대한다. 설령 그 방법이 악명 높고 독특하게 로마적이라고 해도, 그들 모두는 십자가와 연루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죽음의 제의(祭儀)이며 그들의 권력의 진정한 기반이다.

십자가 처형은 힘있는 권력자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는 자기를 에워싼 환경의 수동적 희생물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반대로, 십자가는 자유롭게 행해진 예수의 행동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신이 어디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그가 자기 목숨을 자유로운 선택의 행위로 내버린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 10:18). 복음서의 여러 본문에는 그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그들의 한가운데로 통과하고, 혹은 당장은 몸을 움츠리는 예수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예수는 자기 자신의 때를 명명(命名)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행해진 모든 "예언들"의 숫자를 세어 보라. 이 예언들은 예언자적 전지(全知)의 갑작스런 폭발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의 본질적 부분인 위험들에 대한 침착하고 냉정한 이해이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는 신학화되어 그저 "죽음"(death)을 의미하게 되었다. 북미에는 십자가를 초월적인 수동적 무저항의 순간으로 만드는, 세련되고 영향력 있는 다양한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가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리스도를 흠 없이 순결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투쟁들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는 요구들과 반대 요구들, 인간 삶의 경쟁들에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를 상황에 전혀 강요하지 않는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건이 그에게 닥친다. 그리고 예수는 머리를 가만히 숙이고 두 손을 접은 채로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인다. 그 십자가는 인간 역사에서 하나의 초월적 순간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욕 없는 헌신적인 사랑이 가능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역사가 "조명된다." 인간의 모든 경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십자가에 비춰 볼 때 그 경쟁들은 죄 많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적인 정치적 견해에 비춰 볼 때, 그래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그들의 주님을 따라야 하는 걸까? 설마! 혹은 어쩌면 오직 고립된 소수, 즉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가들과 재세례파 교도들과 중세의 완벽주의자들 타입의 사람들만 그래야 하는 걸까. 이런 신학, 그리고 이런 신학의 후예들에 따르면, 그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는 실제적인 변혁의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혹은 십자가는 믿기 어려운 "가짜 약속"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십자가는 오직 계시일 뿐이지 수단이나 방법이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어떤 생활방식이나 사회 변혁의 희망에로 부른다는 그 어떤 주장도 칭찬할 만하지만, 실제로 십자가는 종파적 순수주의자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방식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북미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이런 견해들 아래 괴로움을 겪고 있다.

주님은 십자가가 하나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 하지만 십자가의 정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십자가는 하나의 원리로 축소될 수는 없다. 하지만 십자가의 형태가 우리의 행동을 모양지을 수는 없을까? 그리고 모든 호언장담은 제쳐놓고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변혁적인 권능에 내맡길 수는 없을까?

그 어떤 십자가의 정치도 마음에서 출발한다. 십자가 밑에서 인간의 마음은 감동을 받고 찔림을 당한다. 예수의 고난을 보는 것은 눈이 뜨이는 것, 모든 인류의 고난에 대해 우리의 두 눈이 열리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 심지어 고난과 죽음 속으로 들어오셨다. 예수는 가장 작고 천한 사람들, 갈릴리의 농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 예수는 그들을 위해 고난 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수는 애쓰고 정성을 들여 고난의 연대를 이루었다. 만일 예수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권력들과 대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면, 예수 자신의 고난은 그들의 고난과 하나다. 즉 예수의 고난은 공적인 활동 무대에서 노출되고 두드러지게 된 그들의 고난이다.

노예의 고난으로부터 솟아난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 흑인들의 한 영가에는 그런 고난의 연대성과 당신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잊지 않음의 의미, 이 둘 모두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그들이 나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을 때 거기 너 있었는가? ....    오! 때로 이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그들이 나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을 때 거기 너 있었는가?"

사실 누가 거기에 있었는가는 복음서가 던지는 가시 돋친 물음이다.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에서,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바로 여성 제자들이었다. 그들만이 거기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해도, 십자가 처형의 두드러진 목격자들은 바로 이 여성 제자들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맨 처음 이해했던 사람들 역시 바로 여성 제자들이라는 것은 전혀 놀랄 게 없다!) 이름 꽤나 날리고 세인의 주목을 받던 남자들의 대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십자가 처형의 본래 목적인 위협과 협박이 남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그들은 은신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하지만 여성들은 모두 십자가 곁에 서고 또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이 여성들이 바라보는 것은, 전문 기술을 동원한 고문이 암암리에 행해지는 우리 시대에도 거의 활용되지 않는 공개적인 고문 방법이다. 수십 년 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발견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이런 특별한 죽음의 기술의 세부 사항들에 관해 보다 충분히 알고 있다. (그가 묻혀 있는 뼈 동굴 위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존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의 해골 잔해는 십자가 처형 때 못을 사용했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질질 끌어온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팔뚝 뼈의 손목 관절 가까이 팔에 박은 못들로 인해 생겼을 게 거의 틀림없는 긁힌 자국이 하나 있다. 뒤꿈치 뼈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12cm 가량의 길고 뾰족한 못이고 그 못에는 이름을 적은 한 조각의 장식판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그가 범죄자임을 말해 준다. 못의 뾰족한 끝에는 올리브나무 십자가의 몇몇 부스러기마저 그대로 남아 있다. 다리뼈들은 아마도 일격에 절단되고 쪼개진 모양인데, 이것은 그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고 동시에 그를 십자가에서 떼어놓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비록 일부의 해석들에 의존한 판단이기는 해도, 처음에는 발 하나에 못 하나씩 박아 두 발을 나란히 십자가에 못박고, 다음에는 두 팔을 못박았으리라는 게 가장 그럴 듯한 주장이다. 숙련된 사형 집행인들은 희생자의 체중을 떠받치고 또 고통을 연장하려고 엉덩이의 양쪽 살 아래에 작은 가로대 하나를 더 갖다대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 처형은 시간을 질질 끄는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는데, 숨이 완전히 끊어지려면 여러 날이 걸리는 때도 간혹 있었다. 사람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죽음에 이른다. 복음서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듯이, 매질과 채찍질은 죽음을 재촉하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겨 죽이는 것도 십자가 처형의 잔인한 특성이다. 신체 기능들이 노출되고 인내심의 한계가 환히 드러난다. 희생자의 무기력함은 철저하고도 완전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나무에 달린 사람에게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공개적인 수치를 더욱 부채질했다(신 21:23; 갈 3:13).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리라는 것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을,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유혹했을, 십자가 처형의 장소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최후의 절망감을 가볍게 지나치면 안 된다. 누가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23:34)라고 기원하는 것은 바로 이 어두운 고난 한복판에서, 또 그 고난으로부터였다. 그 십자가는 적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산상설교와 (혹은 누가복음에서처럼 평지설교와) 떼어놓을 수 없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 처형의 원인은 바로 적극적인 비폭력에 대한 호소를 핵심으로 하는 저 산상설교, 그리고 점령을 일삼는 제국의 정신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적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낳는다. 그것은 어딘가에 다다른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그 십자가는 산상설교의 성취다. 그것은 산상설교의 진리의 구현이며 실행 바로 그것이다. 산상설교는 오직 하나의 "공인된 절대 기준"이며 우리 자신의 결점들을 거기에 비춰 측정하는 하나의 "불가능한 이상"(impossible ideal)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그 십자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행해졌다"고 답변한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산상설교를 몸으로 살 수 있다. 가능한 것은 실제적이다.

하지만 용서받고 사랑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여기에서도 다시금 구체성이 앞선다. "그들"은 적들이며 친구들이다. 예수는 사형 집행인, 정렬해서 내려다보는 군인들, 자기를 비웃고 희롱하는 방관자들과 구경꾼들, 음모를 꾸미는 대사제들, 깨끗한 손을 가진 빌라도, 유다, 베드로, 그리고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치는 제자들을 사랑하며 용서한다. 더욱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십자가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한때는 적들이며 낯선 사람들이었던 우리가 이제 가까이 있게 되었다.

그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적대감의 벽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십자가가 역사 속에서 형태를 취하는 그 어디에서나, 그것은 폭력의 순환을 깨뜨린다. 예수의 용서하는 사랑은 한 특정한 역사 속의 한 결정적인 순간에 제 일을 한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그것은 역사의 중심적인 순간이 된다. 초기의 성서 역사에서 우리는 최초의 타락으로부터 폭력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최초의 죄는 거의 지체없이 최초의 살인으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고 있다. 라멕은 "나를 다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으리라"(창세기 4:23-24)고 말한다. 풍부한 결실을 맺고 번성하도록 부름 받은 인간들이 그 대신 폭력을 증가시켜왔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대답했다(마태 18:21-22). 십자가는 인간의 역사와 마음에서 폭력의 순환을 깨뜨린다. 예수의 기도가 바로 그렇다.

십자가는 진실로 열정적인 기도, 즉 위기와 압력 아래의 기도다. 그것은 극한까지 뻗친 사랑과 용서의 중보기도다. 십자가로부터 예수가 하는 그 "말들"(words)은 거의 전적으로 기도들이다. 대개는 히브리인들의 기도서인 시편들에서 곧장 이끌어온 기도들이다. 더욱이 그 기도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음 졸이며 처절한 몸부림, 광야에서의 유혹과의 고독한 전투,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가르쳐 준 기도인 주기도문, 갈릴리 주변의 고요한 언덕들로의 갑작스러운 철수들, 마지막 식사를 포함한 식탁에서의 기도들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여기 십자가 안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하나의 기도다. 한 목소리, 하나의 중보기도다.

그 십자가는 모든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다. 주요 우상들을 식별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기꺼이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보다 더 훌륭하거나 더 간단한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성전 체제든, 제국이든, 국가의 안정이든, 한 특정한 경제 질서든, 석유 에너지든 상관이 없이, 이 모든 것을 절대시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다름없다. 십자가는 하나의 다른 길을 가리킨다. 근본적인(radical) 은총! 그 십자가는 자기 자신의 수치스러운 종류의 안전, 즉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맨손의 안전을 갖고 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또한 자발적인 가난의 정신과 자유가 담겨 있다. 그것 역시 투쟁에 대한 이 맨손의 접근법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두 손에는 무기도 돈도 없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한 손에는 무기를, 다른 손에는 돈을 들고 있는가!) 간디가 죽었을 때, 그의 세상적 소유물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유명한 사진이 하나 있다. 좌우 대칭으로 가지런히 구도가 잡힌 그 사진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두 켤레의 샌들, 손목시계 하나, 밥 그릇 두 개, 악의 낌새를 찾아볼 수 없는 세 마리의 원숭이가 새겨진 우습고도 작은 조각상 하나, 안경, 힌두교 경전의 복사본 하나, 그리고 그밖에 몇 가지 보잘것없는 물건이 고작이다. 이 스냅사진에는 뭔가 사색적인 분위기,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하는 한 인생살이에 대한 증거가 서려 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그와 같은 종류의 스냅사진을 보게 된다. 처형된 자의 소지품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제국의 사형집행 의식에 따라, 그곳 십자가 밑에서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뽑기를 한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세상적 소유물을 나눠 갖는다.

바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관한 구절(고전 1:18-25)에 뒤이어 이런 사실을 고린도 공동체에 상기시킨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6-28).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의 가난을 매개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축소"(reduction), 즉 하나님은 고작해야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것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보여질 수 있는가? 혹은 예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실은 뭔가 깊은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권력들을 분쇄시킨다는 것은 복음서들과 서간들, 그리고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다양하게 제시되는 신약성서의 주장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골 2:15). 이것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용감한 주장이다. 한계에 내몰린 권력들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제재 수단이요 유일한 도덕적 권위로서의 죽음에의 의존은 노출되고 만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버밍햄에 폭력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고발한 지역의 자유주의 목사들의 공공연한 비난 아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버밍햄의 감옥에서 이와 유사한 기분으로 편지를 썼다. 하지만 폭력은 이미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공적인 답변에서 이런 취지의 편지를 썼다:

사실 직접적인 비폭력 행동에 가담하고 있는 우리는 긴장의 창조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미 존  재하는 숨겨져 있는 긴장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따름이다. 우리는 긴장을 옥외에 내다놓으며, 그리고 그곳에서 그 긴장은 보여지고 다루어질 수 있다. 완전히 덮여 있는 동안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기에 공기와 빛이라는 자연적인 약(藥)들에 자신의 모든 추한 모습을 열어 보여야 하는 종기처럼, 불의가 치유되려면 그것의 노출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긴장과 함께 인간의 양심의 빛과 국가적 의견   의 공기에 노출되어야 한다.

현대의 명석한 논쟁자들이 번갈아 주장할지도 모르는 폭로, 그리고 무장 해제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자들의) 강제 퇴위, 이 둘은 전혀 별개다. 당신은 현재의 역사 속에서 이것을 어디에서 보는가? 시험 당하는 것에 전율하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십자가를 따라 사는 공동체의 삶과 자유 안에서라고 답한다. 예수는 십자가 안에서 놀라운 자유를 드러낸다. 예수는 권력들의 지배로부터, (광야의 시험에서 요약되듯이)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그리고 (체포되기에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들의 시간과 암흑의 세력과 마주쳤을 때처럼) 그들의 협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예수는 사실상 자유롭게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앞에 지체없이 서고, 또 자유롭게 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의 편지들 중 어디에선가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義認)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라도, 그것은 예수의 부활의 자유라고 불리면 더 좋을지 모른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제자들에게처럼 자포자기도 아니고 자살적인 절망도 아니다. 예수는, 나무 신발 한 짝을 역사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들 속에 집어넣듯이, 자기 자신을 최후의 우스꽝스런 몸짓 속에 내던지고 있는 게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고 계시며, 역사를 펼치고 계시며, 역사를 뒤집어놓고 계시며, 또 역사를 부수어 열고 계신다는 신념에 다다른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희망의 행동이다.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는 그의 친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가 14:25)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는 학자들과 함께 시간과 역사에 관한 예수의 의식에 대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끝이 역사의 종말과 결합되어 있다고 상상했을까? 그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린다고 생각했을까?

요점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실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망과 자유 안에서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뇌집단의 학자들, 세속적으로 현명한 정치가들, 협상가들과 전문가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지혜의 조달자들, 현대의 명석한 논쟁자들에 의해 순진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은 것으로 매도되고 거부된다. 그러나 그 나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그 나라에 이르는 길을 걸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이며, 목적에 이르는 수단 바로 그것이다.

+ 이 글은 Bill Wylie Kellermann의 저서 『신앙과 양심의 계절』(Seasons of Faith and Conscience, Orbis Books, 1991) 제11장의 완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