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 새패러다임신학
새 패러다임의 핵심 : 하나님의 목적인 영광의 상속자로서의 신분·자질·능력인간 창조의 작업이 창세기에서 완료되었는가?
김주범  |  kjbjohn@yahoo.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8년 01월 24일 (목) 00:09:48 [조회수 : 2334]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3.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는 신분·자질·능력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는 신분

기업에 참여하는 신분은 적어도 3가지입니다. 한 나라안에서도 그 나라에 참여하는 신분이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장관으로, 공무원으로, 농부로 어부로 , 주부 등 갖가지의 신분으로 참여합니다. 이같이 하나님 나라에도 참여하는 신분이 있습니다. 그 신분 3가지는 아들, 백성, 왕입니다.

 

① 아들

아들이라는 말은 가족 관계의 말입니다. 가족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보다 더 좋은 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이 말들보다 더 사랑이 넘치며, 위로가 있으며, 포근함이 있으며, 신뢰가 있으며, 이해와 끝없는 용서가 있는 말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대하시되 아들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계21:7).

 

② 백성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적 신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지만 전체적인 관계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한 나라의 왕은 그 백성의 안전과 생명과 생계를 책임집니다. 왕의 행복은 그 백성이 부유하고, 즐겁고, 활기 있게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우리에게서 모든 눈물을 씻고 사망이 없게 하시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절대로 없게 하십니다(계21:3-4). 완전한 나라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③ 왕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자녀와 백성으로 삼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분봉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들들을 왕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이 왕의 직분은 하나님의 인사 보직 계획에 의하여 시행되는 하나님의 정책입니다. 그 보직에는 열 고을의 왕, 다섯 고을의 왕 등이 있는데 각 각인이 자신이 순종함으로 이룩한 신분과 능력에 따라 부여받게 됩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는 즉,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충만한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의 직분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계21:24, 계22:5).

 

④ 우리의 신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 백성, 왕

우리는 구원받아서 비로소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원래 신분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죄를 범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성령을 받아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들인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스스로 상실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인간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이거나, 버림받은 존재이거나, 마귀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하나님의 후사로, 아들과 백성과 왕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야 할 존재로 태어났을 뿐입니다. 완성되어 결국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로 창조될 존재로 이 땅에 창조된 것입니다.

사람이 지금 어떤 죄를 범하고 있든지, 어떠한 형편에 처하여 있든지, 그가 어떻게 생겼든지 그는 하나님의 아들, 백성, 왕입니다. 다만 그가 자기의 신분을 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 가문의 아들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녀 노릇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치인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그의 인생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과학자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신분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백성, 왕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의 신분을 찾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의 원 신분을 알지 못하고 붙여진 신분에 그들의 일생을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원 신분을 회복케 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백성, 왕임을 알고 그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탈한 기차를 철로에 다시 놓았기 때문에 기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기차이기 때문에 이탈한 기차를 원 위치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죄사함 받고 성령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 백성, 왕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는 자질 : 하나님과 같은 형상

 

① 신분을 세우기 위하여

우리가 기업에 참여할 신분은 「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분만으로는 그곳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신분에 걸맞은 자질이 필요합니다. 다 같은 고등학교 학생이라도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은 실력이 있는 학생인 것입니다. 고등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다 대학에 들어갈 자격과 조건은 됩니다. 그러나 신분을 이룬 학생들만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는 자질이 필요합니다. 구원에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고 영광스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광스러운 구원, 즉 영광스러운 기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어야지 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고전 15:48-50). 이는 마치 예복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마22:2-13)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잔치 자리에 왔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자 그를 잔치 자리에서 밖으로 내어 던진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입어야만 합니다. 이는 「왕」신분을 온전히 세우는 것입니다.

 

② 형상을 이루는 것은 겉의 문제가 아니라 속의 문제

이미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겉에 있어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필요가 없습니다. 형상을 이루는 것은 속의 문제입니다. 즉 성품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성품에 참여케 하십니다(히 12:10).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와 같아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분들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한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소원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좋아하는 것과 같아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이유

 

• 영원한 교제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소원과 관심사가 그것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서로 대화가 되는 것은 그 대화 당사자들의 관심사가 같다는 것입니다. 아이 키우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만났을 때 이야기 잘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한 자리에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은 대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 술, 담배, 돈 등에 대한 것에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함께 말할 마음도 없고 또 그것들에 대하여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젊은 남· 여가 연예할 때는 할 말이 참으로 많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얼마간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점차 오래 살수록 부부간의 대화가 적어지는 것이 대개의 현상입니다. 집안살림에 대한 것에는 몇 마디 말을 하지만 그 외에는 별 말할 것이 없어집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는 이유 중에 서로 대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우울증이나 고독감을 많이 경험한다고 합니다. 남편이 밖에서 들어와 신문이나 TV를 보다 자고 또 그것을 보다 웃지 자신하고는 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과 친밀하게 정감 있게 대화를 할 상대가 없고 외톨이 신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안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서로 관심사가 다르고 서로 아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안되면 함께 살지 못합니다. 함께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생활하더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서로 남남입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고, 이혼하고, 사표 쓰고 하는 것입니다.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닮는 것이라고 앞에서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닮겠어요?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좋아하는 것이 닮아야 합니까 ? 그래야 대화가 되어 함께 살 수 있게 되니까요.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대화가 안 통하는 상태로 같은 공간에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의사 소통, 교제를 잘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은 관심사를 가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대화를 잘 나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완전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리를 함께 하지도 않고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체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차거운 유리잔을 뜨거운 물에 갑자기 넣으면 그 유리컵은 깨집니다. 반대로 뜨거운 유리컵을 차거운 물에 갑자기 넣어도 역시 깨집니다. 우리의 연약한 영혼이 갑자기 영원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과 거룩과 신성을 보면 아마 호흡이 멈추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그 충격을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 때의 일입니다. 몇일동안 어두움에 갇혔던 사람을 구출할 때 그 눈에 수건을 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눈에 빛으로 인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서서히 눈이 빛을 지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결국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과 신성과 거룩과 능력과 자유를 볼 때 충격없이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소통될 수 있는 체질입니다. 우리가 그 체질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충격없이 하나님의 영원하며 완전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④ 형상의 회복이 아니라 형상을 이루어 감

아름다운 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도기의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고 유약을 발라서 정성스럽게 그리고 아주 과학적으로 잘 구워 내야 합니다. 흙으로 도기의 모양을 빚었지만 구워 내기 전까지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화로에 넣기 전의 모양은 모양일 뿐 완성품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인격적인 목표를 아담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가 완전한 인격이었다면 절대로 사탄의 꾐에 빠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사탄을 다스렸듯이 아담도 능히 사탄을 다스렸을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고 계시록에는 "이긴 자로서의 왕"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완성된 인격이 아니라 모양만 가진 형상이었습니다. 구워지지 않은 질그릇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아담의 첫 창조는 결코 완성된 인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인격이었습니다.

 

우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각 개인의 현재적 여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됩니다(만국이 다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계21:24) .

 

⑤ 진행 중인 창조

인간 창조의 작업이 창세기에서 완료되었는가? 대개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창세기에서 모두 종결되었으며 더 이상의 창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생각은 인간 창조목적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광을 받으시려는 모든 준비가 완벽하였을 것이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여건을 완벽하게 준비하시지 않고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는 것은 억지이며,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여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완전히 종결되었습니까? 우주 물질세계에 대한 창조는 전통신학의 말대로 완성되었습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완성된 기계를 사용합니다. 완성된 기계가 있을 때 비로소 제품 제조가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창조 여건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여건을 완성시키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두셔서 하나님의 목적인 인간을 왕으로서의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로 창조하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는 어떻습니까? 도기공의 이야기를 생각 해보지요. 무엇을 만들려 하든지 그는 진흙으로 모양을 만듭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자기를 만들든지 인형을 만들든지 동물 형상을 만들든지 사람 모양을 만들든지 우선 그 모양을 빚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모양만 완성되면 환성을 지르며 "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아직 아니라 합니다. 그것이 완전히 다 건조되고 구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완전히 구워져 나와야지 도기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창조를 창세기에서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도자기를 모양으로만은 만들었지만 그것이 굳어지고 구워지는 것도 만드는 과정 중의 한 과정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형상이 완성되었다 해서 사람 창조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더 완성해야 할 미완성 존재입니다. 인간 창조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사람을 창조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겉모양의 문제가 아니라 속의 문제입니다. 한 존재로서의 문제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같이 만드시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를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과 함께 자율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과 백성을 창조함에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면 서로 교제를 나룰 수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 같이 살지만 공통 관심사가 없을 때는 서로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하여 서로 관심이 많으면 그것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지만, 아버지가 전혀 아이 교육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부부 사이에는 아이에 관한 대화가 별로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제를 나누는데 절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그것을 잘 표현하여 나눌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다스리는 능력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계속 창조하시는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인격 곧 하나님의 경륜의 지식과 실제적인 능력을 갖춘 한 인격으로의 성장입니다.

 

⑥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

 

• 절대 스스로 나라

하나님 나라에는 절대 자율만이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만이 하나님의 존재 방법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은 “스스로”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섬기고, 다스리고, 순종하고, 찬양하고, 먹고,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만이 통치하는 나라에 사는 방법은 “스스로”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임마누엘 하는 능력이나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스스로” 계시는 자의 아들, 백성, 왕이 되는 것은 절대 “스스로”의 존재가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스스로”를 지켜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절대 “스스로”의 나라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나 사회의 자유가 많으면 많을 수록 범죄가 더 극악해지거나 범죄가 보편화되거나 사람들이 살기에 불안하게 되어 집니다. 이것은 자유의 법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자율적 존재가 되지 못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스스로”의 통치자와 아버지로서 절대 “스스로”의 나라를 경영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스스로”의 자유를 지켜 나갈 “스스로”능력이 없다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절대 “스스로”가 가능할 때에 자신의 존재가 확정됩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 자존감, 존재 목적을 소유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존재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한 존재로 설 수 없고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아내들이 “내가 당신의 종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존 감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당당한 한 존재로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가 되지 못하면 “스스로”나라가 오히려 불편할 것이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며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 자율적인 존재 곧 이기는 자

“스스로”의 존재는 모든 미혹과 시험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존재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과 방해하거나 해치는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존재가 되지 못하면 그는 절대자유의 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만약 사단처럼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역시 사단과 같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절대자유, 절대 자율의 나라를 위협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종말에 되어질 현상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이기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얻을 자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계 2:7, 계 2:11, 계 2:17, 계 2:26, 계 3: 5, 계 3:12, 계 3:21, 계21:7) 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작업은 곧 한 자율적인 자(者)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과 임마누엘 하여 교제를 나누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마음의 뜻을 알며 자신이 하나님의 소원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곧 마귀의 공격에 침해받지 않는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이기는 자가 곧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율적인 존재는 결정능력에 있어 마귀의 공격에 대하여는 능히 대적하여 이기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스스로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자율적 결정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훈련은 시행착오가 필요하고 의지의 견고화가 필요하고 지식의 새롭게 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자율 훈련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할 능력

 

① “임마누엘”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모든 풍요에 참여할 수 있는 아들을 얻는데 있습니다. 이 훈련이 잘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계21:7).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셔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계21:3), 아들이 되고(계21:7), 그 나라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계22:5).

하나님의 풍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의 요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신분이요, 둘째는 자질입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요건이 온전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도록 하지요. 사람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그 분의 자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역하고 마귀 수하에서 그를 왕으로 섬기고 산다 하여도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만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같은 사람은 자기의 신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우리의 신분을 회복하도록 애를 쓰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신분을 회복하도록 하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알리려 하셨고 이 세상의 임금 마귀는 거짓 아비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참 아버지는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리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를 두려워하지 말고 참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자녀라는 신분이 사람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피와 죽음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실 정도로 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그의 거짓 아비를 따라 살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살고 있는 지를 알고 그것을 위하여 살게 될 때 그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 즉 아버지의 유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자녀의 자질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자녀의 자질은 신분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분에 대한 자질이 형성되지 않으면 신분에 맞게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한 경찰관이 학교를 졸업하고 현장 경찰서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술을 먹고 잔뜩 취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술집에서 한 남자가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것을 본 이 경찰은 자신이 경찰이라고 말하며 그 사람에게 그만 중지할 것을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말을 듣기는커녕 이 경찰을 한 대 때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이 경우에 경찰은 그 신분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자질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자질은 자녀의 자질, 백성의 자질, 왕의 자질입니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나 이에 적합한 자질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부요 함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상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형성하는 자질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자녀의 자질을 많이 형성한 사람은 그 만큼 많이, 적게 형성한 자는 그 만큼 적게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산다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부요를 동일하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두 가지 요건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한가족이 각자가 가족에서의 기능을 잘 발휘할 때 함께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나이로는 20대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그 가정은 보통의 가정을 꾸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며 그것들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훈련을 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는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마1:23).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신 것이며(눅15장), 우리를 품으러 오신 것(마23:37)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충만하라고 하시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임마누엘의 훈련을 하도록 간절히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긴밀성이 아주 높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요 하심을 보다 많이 누리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② “교제”

이 기업에 참여하는 방법은 교제입니다. 교제는 언어 소통을 통한 사귐이며 나눔입니다. 친밀함과 대화이며 서로를 아는 지식입니다. 뷔페 식당에 가면 갖가지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뷔페 식당에 갔을 때 참으로 창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가져다가 먹는 것을 몰라 앞에서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음식을 한 접시 가득 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었더니 배가 어찌나 부른지 갈비구이, 훈제 연어, 생선 회 같은 것은 아예 맛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뷔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뷔페의 풍성함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뷔페에 대한 상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함께 가셨던 부장 집사님께 그곳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대화를 하면서 먹었더라면 아마 잘 먹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잘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나는 뷔페 전체를 다 누렸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앞에 앉아 있는 저에게 뷔페먹는 방법을 말씀하시기 불편하셨던지 식사가 끝난 후 일어설 때 “뷔페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가져다 먹는 것이에요”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만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교제를 나눌 수 없으면 전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며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에 참여하는 방법은 교제를 통해서 입니다.

교제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곧 언어와 행동입니다. 언어와 행동은 마음과 생각의 표현입니다. 언어와 행동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의 종합적 표현입니다. 때문에 모든 지식, 느낌, 결심, 생각, 목적, 목표 등이 종합적으로 상호 작용하여 하나의 말과 행동을 맺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은 그가 내재하고 있는 지식, 느낌, 결심, 생각, 목적, 목표가 어떠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고 표출되어 지는 것입니다. 언어 소통 정도가 많으면 많을 수록 교제를 많이 나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기업에 참여하는 능력을 창조하는 것은 곧 지식, 느낌, 결심, 생각, 목적, 목표에서 하나님의 그것들과 같아져 서로 온전, 완전하게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의사 소통 능력입니다. 시간 안에서 배우는 영원의 언어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고전 1:9, 요일1:3).

 

참여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됨

참여 능력은 방법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분에 있어서는 아들, 백성, 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능력의 문제로서 성숙한 선택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살아 있는 인격으로서의 임마누엘과 교제 능력 훈련을 통하여 창조됩니다.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지 못하며 체험만으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 둘이 적절하게 함께하여야 하나님을 더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키스는 하지 않아도 요리는 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감정과 상관없이 따르고 순종해야 할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가 따르고 순종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경험을 하든 아니든 영원한 불변의 말씀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진리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진리 자체는 우리를 살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생기 있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로 활력 있게 하지 못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감동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며 진실로 아버지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킵니다. 반대로 진리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과 임재는 서로 상호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살아 계신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는 진리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말씀과 임재의 성장에 따라 교제 능력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임재가 깊어질수록 그는 자유자재의 자율능력 존재자로 성장하고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즉 말씀과 임재를 통한 교제 능력의 성장에 따라 그의 창조가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임마누엘과 교제의 구체적 경험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실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임마누엘이며 깊은 교제입니다. 요즈음 교회현실은 성령충만을 기쁨이나 만족이나 평강이나 병고침이나 은사를 얻는 방편으로 생각하지만 성령충만은 그것들을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성령충만한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지, 그것들을 위하여 성령충만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과정적 필요입니다. 성령충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충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기쁨이나 만족이나 능력이나 병고침이나 평강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한 과정적 필요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완전한 영광과 생명을 볼 때 그것을 담대하게 볼 수 있게 하는 훈련입니다.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며 참여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을 볼 때 우리의 영혼에 충격이 되지 않게 하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생명과 신성과 자유를 한 순간에 본다면 우리의 생명은 파멸되고 말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어두운데 있던 사람은 햇빛으로 나올 때에 눈을 수건으로 가립니다. 밝은 빛으로 눈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한 순간에 밝은 빛을 본다면 그의 눈은 실명할 지 모릅니다. 서서히 그 눈이 빛을 지각하도록 합니다. 그럴 때 그는 안전하게 눈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태어날 때 눈을 바로 뜨지 않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빛을 본다면 그는 정말 실명할지 모릅니다. 그 눈이 빛에 적응하기까지 눈꺼풀이 눈을 가리고 눈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눈이 빛을 받을 수 있을 상태가 되면 드디어 눈꺼풀이 열려지고 그 눈은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 즉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 생명, 거룩, 사랑, 신성, 능력, 자유들을 한 순간에 본다면 우리는 숨이 막혀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성령충만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들에 적응하여 나가며, 참여하여 나가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받을 준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완전한 하나님께 참여하기 위하여, 완전한 하나님을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때문에 성령충만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보게 되며 그것이 곧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누리게 하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충만함으로 영원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받으며, 누리며, 참여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의 목적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통치 및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에 참여할 신분을 완성하고 자질을 체질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하여 훈련시키고 연단시켜 성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완전하게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일부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체안에 있는 동안의 훈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과 거룩과 사랑과 자유와 통치를 받을 때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왕은 다른 이의 명령을 따르는 이가 아니다.
왕은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하며 명령하는 주권자다.
계시록에 나오는 왕도 바로 이런 왕이다. 누가 시켜서, 안하면 저주 받을까봐,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모두 왕이지.
모두 기뻐서, 자원하여, 스스로의 결단으로 행동들을 하니까. 그렇다.
모두 왕이 되는 세계가 역사의 저 끄뜨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완성된 세계이다.  

역사의 춤 말씀의 춤(방인근)중에서

[관련기사]

김주범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7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