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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특한 목회가 되지 않기를<논어> 배우는 교회개혁 (8)…인본주의적 목회 성공 버려야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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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24일 (월) 06:02:48 [조회수 : 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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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曰詩三百(자왈시삼백)을 一言以蔽之(일언이폐지)하니 曰思無邪(왈사무사)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각에 사특한 것이 없다.

사서삼경은 사서(대학·중용·논어·맹자)와 삼경(시경(詩經)·서경(書痙)·주역(周易)인 역경(易經))을 말합니다. 논어는 사서 중의 하나이지만 시경은 삼경 중의 하나입니다.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입니다. 공자가 편집했다고 하는데 시경을 문학적 표현의 표준 모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시경은 305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고 대부분이 서정시로써 남녀 간의 사랑이 내용의 주류를 이룹니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통치자의 전쟁과 사냥, 귀족 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 및 일상 등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역시 시로 구성된 시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편은 많은 시들의 표제에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시가 있습니다. 시편 150편의 시에는 분위기와 신앙의 표현에 따라 기쁨의 찬양에서부터 엄숙한 찬송, 비통한 항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시편은 또한 기독교 예배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편은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가이드와 우리들의 시적인 감성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원천이 됩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 바울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 시에는 시와 찬양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예배 때 찬송을 부르기 위해 전통 곡조에 시편을 가사로 도입되었습니다.

시경은 공자가 각 분야별로 가장 충실하고 운치가 있는 것과 매우 어색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305편을 간추려 편집하였다고 합니다. 정치·교육·외교·군사·과학·경제·문화·예술 등의 모든 영역의 삶을 망라한 것입니다. 성경 66권 속에 인간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 시경을 두고 사특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거짓이나 나쁜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사무사(思無邪)는 서예가들이 액자에 붓글씨로 작품을 만들어 걸어 놓거나 정치인들이나 학문을 하는 교수들이 즐겨 인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경에 사특함이 없다면 성경은 더군다나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사특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겠지요. 시경이 인간의 희로애락의 죄성이 담긴 시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구속사적인 대서사시에 속한다고 여겨집니다. 시경을 읽으면서 남녀의 진한 애정 표현을 읽을 때는 아가서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시의 생명은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고 즐겨 부르는가에 있습니다. 시는 노래가 됩니다.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면 그 시는 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시경의 시는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난해한 시, 실생활과 동떨어진 시는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소월, 정지용, 박목월의 시는 시이자 노래로 우리들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1편과 23편도 우리가 즐겨 암송하고 노래로 부르는 시입니다.

모든 시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허지만 남녀 간의 연애편지로 쓴 시, 전쟁 중에 살면서 어두운 시, 세상을 하소연 하는 시, 울분을 토로하는 시, 세상을 저항하는 시들이 시경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사특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적 다양성은 성경 가운데 시편에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권력자에 빌붙어 아부하고 정치인들의 치적을 찬양하는 어용 문학자들의 작품에는 사특함이 묻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일제를 찬양한 문학 작품들이 있었습니까? 군사 독재 시절에도 지식인들은 사특함으로 도배한 어용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신학은 쓸데없어

신학도 그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현시대의 삶의 질곡을 외면하는 신학은 더 이상 신학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자나 목사나 다 사특함이 없는 신학과 목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학자는 교단을 위해 존재하는 어용 신학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특한 생각으로 아부하면서 교단 총회에 빌붙어 꿀물을 얻어먹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 역시 사특한 생각으로 투기를 즐겨하는 교인들과 부자교인들과 야합해서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밑바닥의 생활을 모르고서는 신학자도 목사도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밑바닥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형 교회를 위주로 하는 신학과 목회는 귀족 신학과 귀족 목회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사특한 황금만능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설교에는 현학적이고 지성적이고 화려하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시가 노래가 될 수 없듯이 지금의 신학과 설교는 허공에 돌아다니는 먼지와 같습니다. 부흥사 설교의 멘트는 개그의 소재만 되기도 합니다.

교회개혁에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무늬만 교회개혁이 아니라 실생활과 모든 영역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종교개혁 주일에만 개혁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항상 개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치 어린이날에만 어린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린이를 위해야 하는 것처럼 개혁도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특함이 없는 교회개혁을 보고 싶습니다.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목사님 중에는 무늬만 그러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목사들 중에 연봉이 5000만 원 이상이 되면 교회개혁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특함이 있다는 거지요. 공자는 시경에 밑바닥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삶의 진실을 담아 놓고서는 사특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현 한국교회를 보고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지 않아도 공자의 시각으로 봐도 사특하구나 하는 소리를 들을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집착, 사특함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저주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짓고 우상화했을 때 하나님은 그 성전을 부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방 왕권처럼 왕 개인의 절대적 권력이 되자 하나님은 그 권력을 심판하신 것과 같이 한국교회는 이미 사유화왕국으로 권력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방 왕권처럼 교회 세습을 하기도 합니다.

사특함이 있는 목사는 성공하고 사무사한 목사는 성공하지 못하는 풍토가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사특하다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야삽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얍삽하다. 치사하다’ '약싹빠르다' 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야삽한 사람은 세상에 어디에도 있습니다. 성경 속의 등장하는 야삽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목사들 중에도 야삽한 목사도 가끔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천성인 인간의 성정을 극복하기란 힘이 듭니다. 야삽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가 얼굴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전자 정보의 발현인 셈입니다. 우직한 목회는 그저 십자가를 짊어지는데는 성공 하지만 목회성공하기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약싹빠른  목사가 목회성공 합니다. 

인본주의적 목회 성공 버려야

한국교회는 사특함으로 가득 찬 인본주의적 목회 성공을 버려야 합니다. 자본주의 가치관을 성경구절 몇절 인용하여 합리화 ,정당화하는 것을 지양하며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보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는 세미나와 집회는 있지만 참된 은혜는 없고 이벤트 프로그램은 있지만 생명이 빠져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복음이 빠진 조직 충성과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전도의 동기도 그렇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동기보다는 그 이면에는 전도의 동기가 사특함이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마케팅하는 것처럼 이벤트를 하려고 합니다. 고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테크닉 목회, 전도 노하우를 배우기에 각종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재정 수입을 위한 머리 채우기가 바로 전도의 속셈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목회의 사특함은 많습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연봉 증액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대구에 어떤 교회 목사는 교회 부지를 구입하는 과정에 커미션을 챙기고 서울로 도망가서 그럴듯한 교회로 가서 사특한 목회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그 사회에서 엘리트, 지배 이념이 될 때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보편적인 부패 원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을 가지고 장난칠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겁니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부에서 노른자의 자리에 투기와 각종 비리를 주도할 때 하나님은 그 교회의 권력을 심판하십니다. 사특한 목회 이념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 목사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왕 지사 목회의 길로 들어섰으면 겉옷 한 벌과 신발하나 지팡이 하나면 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특징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버릴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배와 그물과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특히나 일부 부흥사와 브랜드 목사들은 명품 옷과 신발, 자가용은 고급 대형 승용차를 선호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소유조차도 미련을 갖지 말고 집착을 하지 말아야 진정 복음을 전하는 목자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목자를 사특함이 없는 목자라고 일컬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思無邪의 성품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흠 없는 아들로 사특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구약에는 이삭이 그러합니다. 이삭은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정직하였고 농사에만 전심하였으므로, 그 생애는 그 부친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과 같이 다사다난하지 않고 단순·평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평화의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이웃과 화평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주위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삭처럼 순종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이삭처럼 순종과 겸손과 온유함으로 목회하는 목사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정화되고 우리 이웃에게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과 사무사한 성장 테크닉으로 바벨탑 같은 대형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작은 교회라도 예수님의 온유함과 사랑과 겸손함과 향기가 듬뿍 우러나오는 그런 진국 같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의 패턴으로 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대형 교회는 구조적으로 사특함으로 채워지는 조직에 불과합니다. 구조적으로 사특함이 없는 작은 교회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교회 목사를 좋아하고 작은 교회 다니기를 선호합니다. 허지만 작은 교회도 늘 대형교회를 벤치마킹 하려고만 하니 어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를 포기하려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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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느낌목사 (61.77.85.172)
2008-01-02 16:48:33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항상 예언자의 시각에서 날카로운 지적과 적절한 대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늦깎이 신학생으로 목회자가 되었는데 참으로 황당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학교에서, 목사님들에게서, 성도님들에게서......
거의 모든 기사에 공감을 하며 광야에서의 외치는 소리에 교회가 개혁이 되고 진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명 잘 감당해주세요.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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