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부활, 영생을 다시 생각한다 - 역사의 지평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

1.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처형!

예수는 종교적 십자가(cross)가 아니라 정치적 십자가처형(crucifix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조심스럽게 던지고 싶은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내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처형을 들고 나오는 것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십자가’라는 종교적 상징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몰라서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있어서도 그 의미는 내 일생을 아낌없이 바쳐서라도 탐구하고 싶을 만큼 깊고 크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교리나 신학을 섣불리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채색되기 이전의 예수의 역사적 삶의 모습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역사상의 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를 교리와 신학으로 함부로 재단하려 드는 것은 살아 숨쉬는 예수의 생동하는 삶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 질식시키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고백했다. 그렇다. 예수는 “세상 죄” 때문에 죽었다. 예수는 태초부터 각본이 짜여진 대로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를 한치 오차도 없이 성취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었다. 불의한 세상에 맞서 조금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싸우시다가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처형을 당한 것이다. 예수라는 빼어난 자유와 정의와 사랑과 평등의 주창자를 십자가처형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제거하려 들었던 데서 세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확연히 드러났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에 십자가에 달렸다. 세상 죄를 적당히 모른 체했으면 예수도 우리처럼 그럭저럭 한평생 순탄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예수는 “좁은 문”(마 6:13)으로 통하는 자유와 진리의 길을 택했다. 세상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과 정의와 연대의 길을 택했다.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불의한 세상에 온몸 던져 싸우는 고난과 투쟁의 길을 택했다. 십자가처형은 그런 삶의 필연적 귀결점이었다.
그렇게 죽은 예수를 요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빛”(요 8:12),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한 알의 밀”(요 12:24),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예수는 “길”(道)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우리는 예수의 길을 걸어 예수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들을 완성해야 한다. 예수가 이룬 일에 기대어 천국에 무임 승차하려는 도둑놈 심보를 경계하고 부단히 예수의 길을 걸어야 한다.
물론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각 사람의 자유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으면 제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를 날조해서 엉터리 신자가 될 생각을 말끔히 버리고 예수의 참모습을 본받아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한다.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어느새 내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예수! 이 예수를 나는 모른 체 외면할 수 없을 것 같다. 힘이 많이 들겠지만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예수를 따르고 싶다. 이 보잘것없는 목숨 다하는 그 날까지.


2. 부활은 사후(死後)의 일인가?

부활은 사후(死後)의 일인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믿는 것인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 이 땅에서 축복 받고 내세에서는 더 큰복을 누리게 됨을 믿는 것인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언젠가 저 하늘 나라에서 살아 생전의 모습 그대로의 몸으로 부활하여 더 없는 기쁨의 재회를 하게 될 것인가? 부활신앙을 자연사로서의 “죽음”(death)이 아닌 타살로서의 “죽임”(slay)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는가?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성서의 부활신앙에 담긴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것을 요청한다. 주님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담긴 메시지는 생명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이 역사에서 마지막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폭넓은 성서 이해와 깊은 영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두루 갖춘 신뢰할 만한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 그에게서 부활은 이 땅의 인간 역사의 지평 안에 있다. 그는 부활을 비신비화·역사화한다. 그는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부활신학이나 신비한 교리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는 부활을 생활언어로 누구라도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한다.
먼저, 그는 부활을 사후에 저 하늘에서 일어날 뭔가 신비스러운 사건, 혹은 내세에서의 개인적인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풀이하지 않는다. 그는 부활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린다. 그는 부활을 우리가 역사 속에서 감당할 수 있고 또 감당해야 하는 일과 연결짓는다. 다시 말해, 그에게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신앙실천과 맞닿아 있다.
다음으로, 그는 “주님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부활은 아무런 죽음의 위협이 없는 안전지대가 아니라 “죽음에 직면한” 위험지대에서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죽음의 세력이 판치는 곳, 불의와 억압과 착취 때문에 인간 생명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곳, 구타와 학대와 폭력과 고문과 살육과 전쟁으로 생명이 짓밟혀 신음하는 곳이 바로 부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 땅의 고통스런 삶보다는 내세의 영원 복락에 관심이 쏠리는 믿음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생명을 주장하는”, 즉 죽음의 세력에 맞서는 용기 있고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는 “예수의 부활에 담긴 메시지는 생명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이 역사에서 마지막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예수 개인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부활이 “이 역사” 곧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판치는 이 땅의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이 역사에서 마지막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 것, 즉 생명 살림의 힘은 생명 죽임의 힘을 끝내 이기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활신앙은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겪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된다.
어쩌면 사후(死後)의 문제도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전(死前) 없는 사후는 없다. 부활신앙이 사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사전의 문제, 즉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박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적당히 눈감아도 되는 면죄부를 기독교인들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헌신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살해된 예수의 죽음과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예수의 부활을 크게 오해했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이 시대에 우리들 사이에서 활개치고 있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표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구티에레즈).


3. 영생으로 가는 길

보통 기독교인들이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생명은 사후에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이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으로 편향된 생명 개념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다.
착한 목자 예수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뭘까? 예수 당시 팔레스틴 민중들이 말할 수 없이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풍성한 생명이란 사람이 신체적·물질적·정신적으로 자유와 평등과 인권과 행복을 누리며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양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임을 암시하는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이 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성서에서는 뭔가를 참으로 “안다”(know)는 것은 그것을 참으로 “사랑한다”(love)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과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르는 삶이 바로 영생의 길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예수의 육체적 삶은 33살로 끝났다. 예수 당시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음을 감안하더라도, 예수는 평균 수명도 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육체적 숨을 거두었다. 그것도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처형으로.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의 생명은 끝났는가? 아니다.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예수는 살아 있다. 성령으로, 생명의 숨결로, 사랑의 숨결로, 정의와 평등의 외침으로, 자비와 동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친교라는 따스한 인간적 정(情)으로,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했다는 것은 신자들의 근거 없는 주관적 신앙고백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신자들의 개별적 삶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과 세속(世俗)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역사적 예수의 생에 대한 하나의 감동적인 객관적 진술이기도 하다.
그렇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자들의 간절한 꿈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한 육체적 생명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종교적 욕망 혹은 이 땅에서 누리는 행복을 저 세상까지 영원히 연장하고 싶은 탐욕일 수 없다. 불로장생의 신비한 묘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영생을 누리고 싶다! 이것은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다, 나는 생명사랑·인간사랑·민중사랑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나는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목숨을 세상 부귀영화를 탐하는 데 허비하지 않고 예수처럼 질적으로 고양된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영생의 길은 세속을 멀리하고 천사처럼 고결하게 살려고 애쓰는 데 있지 않다. 영생이란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이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다정히 어깨동무하고 살았던 예수의 따뜻하고 넉넉한 인간미와는 거리가 먼 교리적·율법적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은총이 깃들 여지가 업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 바늘은 쉴새없이 돌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매 순간 죽음에 다가선다. 하지만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 바늘 속에서도 예수처럼 살아 매 순간 영생을 맛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심장의 고동이 멈춰 육체적 생명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 즐거운 추억, 그리운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요즘 ‘업그레이드’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 땅의 신자여, 그대는 생명사랑·이웃사랑·민중사랑 실천의 생동하는 믿음으로 그대의 신앙생활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려는가. 이 땅의 목회자여, 그대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올곧은 역사의식의 균형 잡힌 조화로 그대의 목회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려는가.
말없이 떨어져 거름으로 썩어 봄날의 푸른 잎으로 되살아나는 가을날의 낙엽의 그 단순 소박한 생명의 지혜를 우리의 영생하는 삶의 지혜로 삼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