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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인들의 몇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들한국교회 현장에서 흔히 얘기되는 뿌리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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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8월 09일 (목) 17:33:06 [조회수 : 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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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보수 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뿌리 깊은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다. 워낙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라서 흔히 곧잘 나오는 생각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깊고도 올곧은 고찰을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매우 찾아보기가 힘든 현실이다.

1. 성서 = 하나님 말씀

흔히 성서를 하나님 말씀과 동일시함으로써 성서를 우상화하는 잘못을 범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언어부분은 당연히 그 당시의 시대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럼으로써 당연히 성서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성서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일 성서=하나님 말씀으로 볼 경우, 성서의 수많은 오류와 모순들에 대해선 이에 대한 온전한 설명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에 따른 축자영감을 내세움으로써 성서의 수많은 오류와 모순들에 대해선 눈을 감는다. 혹은 핀트가 어긋난 원본무오설을 내세우기도 하는 어이없음도 연출한다.

혹자는 그런 것들은 성서의 오류와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들일뿐이라고도 말하는데, 물론 당연히 그러한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성서의 오류와 모순들은 서로 양립가능한 관점의 차이들이 아니라 양립불가능한 차이들을 말한 것이다. 게다가 성서가 무오하다는 축자영감설의 근거로서 디모데후서 3장16절을 내세우는 자들은 이 얼마나 코미디짓인가. 도대체 자기주장의 근거를 자기 주장 안에다 두는 자들이 어디 있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성서무오설>이야말로 신앙을 빙자한 무지로 안내하는 사탄의 교설일 뿐이다. 오히려 성서는 오류의 발견에 의해서 계시로 나아가는 길을 획득한다. 즉, 성서무오설이 아닌 성서오류설로의 적극적인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서오류설이야말로 무오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기회라는 점을 더욱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은 ‘=’이 아니다. 성서의 오류란 하나님의 말씀이 수행하고 있는 십자가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깨달은 만큼 세계 안에 보여질 따름이다.

[참조]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성경, 왜곡의 역사

2. 진화론 = 무신론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을 흔히 무신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진화론을 주장할 경우 하나님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편견일 뿐이다. 진화론은 결코 무신론도 아니고 유신론도 아니다. 진화론은 생명의 궁극적 기원이 아닌 그저 생명의 발생과정에 대해 말할 뿐이다. 생명의 기원은 이미 과학의 한계 지점을 넘어선 얘기다.

누군가가 말하길, “빅뱅 이전은 종교이며 빅뱅 이후는 과학”이라고도 했었듯이 종교와 과학은 서로 상호보완적이지 서로 적대적인 충돌을 갖는다고 보질 않는다. 진화론은 이미 세계 안에 발견된 모든 생물학적 지질학적 물리적 데이터들을 근거로 하여 생명의 발생과정들을 추적할 뿐이다. 물론 그것은 가설일 것이다. 어차피 모든 과학의 언술들도 가설일테지만. 하지만 그것은 가장 설명력이 높은 가설을 추구한다.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그런 게 아닌 것이다.

이미 신학계 안에도 진화론이 들어와 있다. 이를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떼이야르 샤르뎅의 신학사상은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로 남아 있다.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진화론은 이제 유전학의 차원에까지 와 있다. 창조론은 과학이라기보다 성서문자주의 입장을 이미 전제한 채 과학을 거기에 끼워맞춘 것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도 아닐만큼 매우 뒤틀려 있으며, 한국에선 창조과학회가 이를 주도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참조]
떼이야르 샤르뎅의 인간현상
존 호트, 다윈 안의 신Deeper than Darwin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

3. 종교다원주의 = 오직 예수 부정(또는 기독교불필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경우, 흔히 보수 기독교인들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종교다원주의’라는 딱지는 경계대상의 부여다. 이때 흔히 동원되는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구약의 십계명 구절이나 복음서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혹은 사도행전 4장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들을 종종 그 근거의 레퍼토리로 내세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문자 그대로 이것이 수용된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가능성을 열어놓고 인정하는 것은 자기 종교를 부정한다고만 생각하는 편견적 발상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고 것과 기독교를 부정한다는 것은 또다른 얘기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다른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는 1)배타주의 2)포괄주의 3)다원주의가 있다. 이때 한국교회 90%가 1)배타주의 입장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 2)의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기독교우월주의를 버리지 않고 내포하고 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잖은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가치와 속성들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종교를 볼 뿐이며,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완성을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현재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2)포괄주의에 있다.

개인적으로 워낙 극심한 한국교회의 배타주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2)포괄주의로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기존 기독교인들의 배타주의 입장들의 극성으로 인해 교회현장 안에서는 제대로 올곧게 고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는 2)포괄주의를 우습게도 3)포괄주의로 여기며 착각하기도 한다. 이른바 다른 종교의 구원가능성을 얘기하는 것 자체부터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의심의 딱지를 들이대는 것이다.

3)다원주의에 대한 이해도 그다지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학교 시절부터 진보적인 기독교 사상에 대해선 그 교육과정에서부터 온전하게 제대로 배우지 못하거나 혹은 이단시되는 표면적 접근으로 인해 깊게 고찰하고서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이 전혀 못된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다녀왔고 경험해왔던 기독교만이 기독교 전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자기 교회 목사들의 무지와 편견들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같다고만 얘기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도 있다. 특히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는 오히려 종교 간의 차이를 얘기한다. 이 입장이 갈라져 나와서 현재 <열린 중심주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 열린 중심주의 입장은 <오직 예수> 입장과 양립가능하면서 다른 종교에도 열려 있는 입장이다. 예수가 버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진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일부러 굳이 먼 데 있는 병원에 갈 필요가 뭐 있겠는가. 단지 만에 하나 내 종교 안에 오류가 발견될 경우 그제서야 나의 종교를 넘어서 다른 이웃종교를 통해서 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겠는가. 우선은 내게 익숙하게 서 있는 자리를 선택할 따름이다. 하지만 기존의 주류 보수 기독교는 무엇보다 변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길 만큼 싫어하는 구석이 있기에 기회가 있을 경우에라도 이웃종교에 대해선 아예 잘 들여다보지도 않으려 한다. 고정된 편견이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참조]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4. 구원 = 영혼구원

흔히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영혼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즉, 구원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이 되는 것이며, 죽고 난 뒤에 나의 영혼이 내세의 천당에 안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구원 문제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대체로 내 영혼이 구원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라며, 교회 다니는 가장 큰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것은 영혼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에는 영혼만 있는가? 엄연히 물리적 현실의 육체도 있다. 인간을 볼 때 총체적으로 보질 못하고 영혼과 육체, 내세와 현세로 나눠서 보는 사고의 유형은 이원론적 관점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자기 영혼을 자기 집에다 두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이미 존재는 총체적으로 봐야 마땅하잖은가. 인간에게 있어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라 인간구원이요 생명구원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정치 사회적인 억압에서의 구원 역시 함께 내포한다. 구원은 총체적이다. 육체가 병들면 그 영혼도 병든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 역도 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을 때, 구원은 총체적인 몸의 구원이지 어느 한 부분을 딱 떼어내서 영혼구원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죽고 난 뒤의 내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세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지금 여기서부터의 구원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의 삶과 유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4영리 신앙 식으로 “예수께서 동정녀 탄생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인해 나의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또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내가 믿으면 나는 자동으로 죄가 사해지고 내 영혼이 죽어서 천당 갈 수 있게끔 구원 받는다” 얘기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수준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한 마디로 가공할 넌센스라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

구원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 등등 모든 전인적 차원에서의 온전한 해방이기에 어느 하나도 동떨어지거나 배제해선 안된다. 바로 그래서 참종교는 이 세계에 대한 진정한 대안과 올바른 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닌 삶의 구원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세계 안에서의 건강한 삶의 증진과도 결부되어 있다. 현세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의 면류관이 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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