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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view]가야금이스트 서라미씨
최윤희  |  aa2291415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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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1월 25일 (목) 17:26:44
최종편집 : 2024년 01월 31일 (수) 05:53:21 [조회수 :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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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가야금이스트 

서라미 씨

“다음 세대들을 세워주고 좋은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목표”

미국 뉴욕에서 살며 가야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서라미씨. 한국에서는 이름이 덜 알려졌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스미소니언박물관, 재즈앳링컨센터, 타임스퀘어, 브라이언 파크, 카네기홀, 케네디센터, 2018 평창올림픽 UN 평화협정공연, 백남준 기념공연 등을 했고, 미주 최대 한인방송국 ‘AM1660 K-RADIO’ 메인 진행자이기도 하고, 굿네이버스 USA 나눔 대사이기도 한 그녀를 만나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눠보았다.

글. 최윤희 │ 사진. 김행옥

   
 

내년에 있을 큰 공연 위해 홍보하러 한국행

“작년까지는 한국에 공연이 있어서 왔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왔어요. 내년에 미국 뉴욕에서 있을 큰 공연을 앞두고 공연에 함께할 사람들을 오디션 한다는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녀가 오디션 볼 사람들은 유명연주자가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다. 그중에서도 자기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친구들과 어려운 목회자 자녀들이 대상이다. 내년 공연은 어렵게 성사가 됐다. 미국 정부 단체에서 몇 명만 뽑는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녀가 뽑혔다. 그런데 그녀는 그 공연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다음 세대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큰 공연을 거절

“제가 못할 것 같아서 몇 번이나 거절했어요. (왜 그런가요?) 돈이 없으니까 포기한다고 했어요. 미국에서 다 지원해 준다고 했지만, 그건 저에 관한 것만 그렇고 나머지 일체는 전혀 계획안에 포함돼 있지 않아서, 저는 공연을 하게 되면 저 혼자 하지 않고 다음 세대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안 한다고 했던 거예요.”

그녀에게 주어진 아주아주 특별한 기회인데, 그녀는 재능 있는 다음 세대 아이들을 위해 그 특별한 기회를 포기하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디션을 통해 뽑힌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려면 비행기 표에, 숙식에 해결해야 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좋은 기회를 못 한다고 했다.

“그 공연장이 5천 명에서 2만 명이 들어가는 공연장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 공연에 뽑힌 거예요. 한국인 최초로. 완전 꿈의 무대죠.”

 

기적이 일어나다

그래서 그대로 무산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최 측에서 처음으로 예외를 뒀다. 똑같은 기회를 내년에 한 번 더 주겠다고 했단다. 그녀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시간도 벌었다. 돈을 벌 시간. 이번에 한국에 온 것도 오디션 홍보도 있지만 후원을 위해서 온 것도 있다.

“특별히 목회자의 자녀를 세워주고 싶어요. 정말 가난한 교회 목회자의 자녀. 그분들은 자기 자녀들 키울 비용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반대로 그 아이들을 돕겠다는 거예요. 그동안 링컨센터나 재즈앳링컨센터 등에 우리 한국인이 최초로 섰어요. 그런 자리가 있으면 저는 혼자 공연하질 않아요. 혼자 초청을 받아도 그걸 같이 나누면 좋잖아요. 혼자 하면 혼자 기쁘고 뿌듯하겠죠. 그러나 20명이 있으면 그 기쁨을 그들이 20년, 30년 동안 누리는 거잖아요. 그 친구들이 나중에 저를 엄청나게 고마워하거나 은혜를 갚는다는 말은 안 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저는 이미 그 친구들을 세우면서 받는 은혜들이 엄청나거든요.”

 

이들을 위해 비행기 표에 숙식 제공에 빚더미

그래서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은 거다. 그래서 내년 공연을 앞두고 열심히 홍보와 투어를 다녀야 한다. 중보기도도 부탁해야 하고.

“사실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후원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정부 지원금을 받아본 적도 없고. 너무 힘들죠. 저는 이걸 하면서 대출을 한 번도 안 받아봤는데 2019년에 처음으로 대출을 받았어요. 미국에서도 받고, 한국에서도 받고. 그래서 그 돈으로 아이들 비행기 표 다 끊어주고 그걸 지금 5년 동안 갚으면서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대출을 너무 많이 받아서 빚에 허덕이고 있다. 그런데도 가까운 지인들 말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절 힘든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랬으니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후원을 처음으로 오픈하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걸 분담하는 훈련을 시키신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하다못해 중보기도라도 여러 사람이 그걸 같이 걱정할 수 있게 말이죠. 옛날에는 저 혼자 밤새워 기도하면서 걱정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10명, 100명이 다같이 그걸 놓고 기도를 하고 나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 와서 처음으로 오픈했다고 한다.

“간증 찬양할 때 처음으로 오픈했어요. 그랬더니 후원이 조금씩 들어오더라고요. 금액이 아무리 적어도 저한테는 너무 힘이 돼요. 돈이 없으면 한두 명밖에 못 뽑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더 많이 뽑지 않을까요? 한국 외에도 해외에서도 오디션을 볼 건데,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시는 사역자의 자녀들이 뽑히면 좋겠어요.”

 

어려운 형편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돈도 여유가 없는데, 다음 세대 아이들을 위해서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일까.

“제가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 몇 개월 후에 가정이 어려워졌어요. 부모님이 헤어지셨거든요. 그때가 중학교 1학년, 사춘기를 겪을 때였어요. 게다가 워낙 제가 내성적인데다가, 현실은 느껴지는데 아무한테도 말은 못하고 창피하고 그럴 때잖아요. 그러니까 굉장히 위축돼 있었어요.”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 그녀와 여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니 여유가 없을 수밖에. 그녀는 가야금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받을 수가 없었다. 레슨 받을 돈이 없었으니까.

“국립국악중학교를 들어갔는데 가야금을 어렸을 때부터 배운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요. 그때 10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진짜 한 명도 없었어요. 시험은 노래랑 필기시험을 같이 봤어요. 실기시험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되게 많이 뽑혔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야금을 배운 저와 대금하는 친구 빼고는 가야금을 하는 친구가 없었어요. 학교는 좋은 성적으로 들어갔지만, 집이 어려워지면서 가야금 레슨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좌절도 되고, 상실감에 힘이 들었어요.”

 

하나님을 떠나다

그때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다른 아이들보다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레슨을 못 받아서 아이들에게 밀리게 생겼으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하나님이 없는 것만 같았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 탓만 같았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가 모태신앙이에요. 유아세례를 받고 초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계속 다녔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저희 가정 얘기를 해서 제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질 않는다. 그녀 역시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렸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그런 사람들이 미웠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면 이런저런 안 좋은 얘기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여동생과 교회를 떠났다.

“그래도 기댈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은 헤어지셔서 의지할 데는 없고 하나님은 의지하는데 교회는 가고 싶지 않고 그래서 성경을 찾아보고 예배 시간에 배웠던 찬양을 혼자 불렀어요. 그리고 친구들한테는 교회 다녔다는 얘기를 안 했어요.”

 

국악을 포기할 뻔하다

그녀는 집안 사정 때문에 국악을 포기할 뻔하기도 했다.

“부잣집 아이들이 가야금 레슨을 받고 있으니까, 저에게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내 자리가 없을 것 같았어요. 이런 좌절감이 들면서 원래 무용을 배웠으니까, 무용과로 진학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어 무용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무용선생님이 얘기를 해주시는데, ‘라미야, 무용은 가야금보다 돈이 더 많이 들어. 네가 너무 안타깝지만 그래도 가야금을 계속하는 게 어려운 형편에는 더 나을 거야’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에 아직 어린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 가슴에 스크래치가 났다.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건가?

“국립국악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올림픽 공연도 했어요. 하나님이 잘 도와주고 계시고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때 일기장을 지금도 갖고 있는데, 그때 일기장에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고요.”

그녀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레슨비가 있어야 했는데 없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을까.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 음악 학과장님 같은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몇 명 어려운 학생들을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장학금은 아니고 학교에서 레슨을 받을 수 있게 해주셨어요. 약 한 달 정도. 그리고 전공수업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있고. 개인레슨을 할 수 없으니까 수업 시간에 죽어라 하고 열심히 했어요. 공부도 그렇잖아요. 학원 안 다니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만 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잖아요. 저는 가야금 실기는 상위권이었어요. 그렇지만 마음에는 늘 부족함이 있었죠. 불안감도 있고. 친구들은 거의 같은 선생님한테 가서 배웠어요. 저만 그 선생님을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상처가 되고 쓴 뿌리가 돼서 연습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집이 어렵기 전에는 그 정도로 연습벌레는 아니었거든요. 그때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연습밖에 없으니까, 하루에 8시간씩 연습했어요. 테이프로 연습했는데,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똑같이 했어요. 그때는 유튜브도 없을 때였으니 연습할 게 테이프밖에 없었어요. 테이프를 받으면 하나를 복사했어요. 늘어나면 더 이상 못 들으니까, 예비로 복사해 놓고 그걸로 계속 듣고 그랬죠.”

 

좋은 선생님을 만나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좌절만 줬다. 자꾸 현실을 바라보게 됐다. 그래서 가야금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어요. 이제 가야금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중3 때 담임선생님이 저한테 ‘다른 애는 몰라도 너는 인문계 가면 적응 못 해. 그 끼를 갖고 어떻게 살 거야? 결국은 돌아올 거야’라고 하시면서 안양예고 연극영화과랑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추천해 주셨어요. 안양예고는 안 갔어요. 두 번째 옵션으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추천해 주셨는데, 저한테 공부를 잘하면 성적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실기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사실 말이 전액 장학금이지 그걸 받으려고 얼마나 치열하게 연습을 했을까.

“고등학생이라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고 공부하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사회적 부조리에 또 상처

그녀의 상처는 또 있었다. 밝고 상냥한 그녀에게 이렇게 많은 상처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분명히 오디션에 붙었는데 다른 친구로 바뀌어 있는 거예요. 콩쿠르에 나갔는데 제가 예선 1등이었는데 또 순위가 바뀌어 있고.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그래서 1등 했는데 2등, 3등을 줄 때 속상해하지 않고 감사하며 받았어요. 그때는 너무 예민해 있을 때였어요. 그때 몸무게가 40kg이니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는 늘 바뀌어 있으니까 열심히 할 이유를 잃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다 지난 일이고 많이 성숙해져 있어서 그때 만났던 선배들이나 후배들을 만나면 너무 편안해졌다며 놀란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도 한국에서는 절대 못 벗어나는 사회적 부조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를 꾀하고 싶었다. 정말 실력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

 

여름옷과 한복, 신발 2개, 가야금

“내가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쪽 분야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론이나 작곡하는 분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서 국악 전공으로 바꿔서 하시는 분이 몇 분 있었는데, 가야금으로 외국에서 정식학위를 받아서 활동하는 사람은 없었을 때였어요. 리서치를 했어요. ‘민족음학학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무한테도 미국 유학 간다는 소리 안 하고 미국 여행 간다고 하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죠.”

꼼꼼히 미국 유학 갈 준비를 마치고 짐을 쌌다. 여름옷과 한복, 신발 2개면 충분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가야금을 챙겼다. 미국 유학은 혼자 갔다. 그전에 중국 유학을 갔다 왔기 때문에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었다.

그런데 미국 가서도 상처받을 일이 생겼다. 어쩜 그렇게도 상처받을 일이 많았을까. 순하게만 생긴 그녀에게 왜 그렇게 상처가 많이 생겼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배신당하다

“한 제자가 있었어요. 가장 고생하며 가르치고, 부모님 부탁으로 미국까지 데려온 제자였는데, 그 제자와의 불화와 오해로 인한 피해가 계속 생기면서 오래도록 진행되니까, 엄마조차도 혹시 제가 나쁘게 대했는지 확인하시더라고요. ‘혹시 네가 진짜 그런 거 아니니?’ ‘아니면 네가 걔 계속해서 눈치 준거 아니니?’ 이제 엄마까지 그러니까 거의 1년이 다 됐을 때는 제가 세뇌가 되더라고요. ‘내가 그랬나?’하고요.”

그녀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지하철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한다. 억울했다. 유서도 쓰고 약도 먹었다. 지방대도 못 가는 실력의 아이를 국악과로 탑이었던 중앙대학교까지 입학하게 해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돌아오는 게 배신이라니... 아무도 안 믿어줄 때 찾은 게 바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인기피증이 생기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어요. 지나가다가 한국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면 ‘저 사람도 내 얘기를 들었나?’ ‘저 사람도 알고 있나 봐’ 랭귀지 스쿨도 같이 다녔는데 두 번 이상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쟤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겠지?’ 그러면서 자꾸 한국 사람 없는 데로 가게 됐어요. 결국 이사를 가게 됐죠.”

이사를 가면서 버스 안에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만약 제가 지금 보러 가는 집이 저의 집이면 제가 이 동네에 있는 어느 교회라도 갈게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그 동네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너무 다행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아는 언니와 랭귀지 스쿨에서 만났던 언니가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 좋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그녀만 보면 “우리 교회 한번 와봐” 이랬던 언니란다. 그런데 그 언니가 그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거다.

“1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언니들한테 내가 누군지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누군지 알려지게 되면 ‘쟤 그런 애야’라고 말할까봐 무서웠거든요. 그럼 또 정착을 못 하잖아요. 그러다가 1년 정도 됐을 때 우연한 기회에 그 언니가 목사님께 말씀드리게 되었어요.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목사님이 기도를 굉장히 많이 하시던 분이었는데, 국악 찬양을 하고 싶으셔서 국악 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1년 동안 기도를 하고 계셨대요. 그때부터는 예배에 쓰임 받을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치유가 시작되다

그녀의 치유는 교회를 처음 가면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폭우가 내려서 온몸이 완전히 젖었어요.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속옷까지 다 젖은 거예요. 완전 시스루 옷이 됐죠. 그때 교회를 간 건 ‘하나님, 교회 가서 억울함을 풀 수 있으면 살 거고, 아니면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여기까지만 살게요’라고 얘기하려 간 거였어요. 마지막에 하는 노력 있잖아요. 버스정류장도 지나치고 비도 오고해서 예배 시간에 늦었는데, 안내하시는 분이 저를 앞으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때 집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설교하고 계셨는데,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 따뜻했어요. 앉아서 설교를 듣는데, 옷도 많이 불편하고 낯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더라고요. 선교사님 설교를 듣는데 제가 집시더라고요. 집시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문란하잖아요.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저의 모습이 딱 집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막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어요. 울면서 ‘하나님이 나도 사랑해 주실 수 있을까?’하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됐어요. 그때가 27살 때였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이후로 처음 교회를 나간 거예요.”

 

선교를 다니면서 가야금 한 이유 깨달아

그러고부터 그녀는 열심히 선교를 다녔다.

“파나마로 첫 해외선교를 갔어요. 파나마는 도시인데 그 안에 산타페라는 동네가 있어요. 배를 타고 1시간을 가면 그곳이 나와요. 그곳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아주 오지였어요. 그런 곳을 저는 가야금과 한복을 들고 갔어요. 국내선교로 간 북미 원주민 선교에서는 복음을 알릴 수가 없었고, 문화교류라는 타이틀로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들어가 일주일씩 캠프를 진행했어요. 10년을 그렇게 다녔어요. 저는 느꼈죠. 하나님이 왜 저를 쓰시는지. 저는 가야금을 하는 사람이니까 문화교류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접근하기 수월하잖아요. 그들이 경계심을 늦출 수 있잖아요. 한복도 제걸 갖고 가서 입혀주고 아리랑 연주도 해주고 찬양도 살짝 섞어가면서 해주니까 그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전문 인력이 필요한 거셨구나’하는 걸 느꼈죠. 전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다음 세대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려면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고 그걸 내가 담당하게 하시려고 나를 좋은 학교에 보내셨고 철저하게 기술을 습득하게 하게 하시고 그 과정을 훈련시키셨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풀렸어요. ‘내가 만약 부유하게 선생님한테 레슨도 받고 아무런 문제없이 가야금을 잘 배웠다면 다음 세대나 어려운 친구들에 대한 마음이 있었을까?’ ‘내가 열심히 가야금을 하루 8시간씩 한 이유가 있었네’라는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모든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다음 세대들과 무대에서 함께 하는 기쁨을 나누길...

그녀는 이제 치유가 많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세대들을 위한 사역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빚을 내가며 학생들을 후원하는 것이고, 좋은 공연장에 세우려 하는 것이고, 교통사고로 안면마비가 와서 조금만 피곤해도 약을 먹어야 하고, 대상포진도 1년에 2번이나 앓았지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작은 몸으로 이 큰일들을 감당하는 그녀를 보면서 정말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잠깐 우리로 하여금 오해하게끔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처럼 나중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는 풀어지게끔 하시는 좋으신 분이다. 부디 선한 분들의 후원으로 내년 공연에 많은 인재를 오디션에서 뽑아서 큰 무대에서 같이 서서 기쁨을 나누는 그녀를 보고 싶다.

 

<이 기사는 계간 ‘치유’ 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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