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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민 아빠’ 김영오씨
최윤희  |  youloveme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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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4월 13일 (목) 20:31:52
최종편집 : 2023년 04월 14일 (금) 03:16:59 [조회수 : 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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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세월호 ‘유민 아빠’ 김영오씨

“진상 규명이 돼야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도 벌써 8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2014년 4월 16일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호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모습, 세월호가 완전히 넘어가던 모습, 학생들이 헬기에 매달려 구조되던 모습, ‘진도 팽목항’이란 단어, ‘유민 아빠’ 김영오씨, 노란 리본 등은 뚜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46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며 끝까지 진상 규명을 외치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제주도 전화 인터뷰를 했다.

글. 최윤희 │ 사진. 김영오씨 제공

 

‘유민 아빠’가 궁금해지다

가끔 세월호의 상징이 된 ‘노란 리본’을 볼 때가 있다. 지하철의 어느 남성 배낭에서, 어느 작가의 노트북에서... 그럴 때면 반갑기도 하고 ‘아직도 추모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세월호로 아침을 시작했고 세월호로 하루를 닫았다. 나라는 온통 세월호 뉴스뿐이었고 유가족들의 절규하던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헌화를 한 적이 별로 없는 기자도 시청에서 긴 줄을 기다리며 국화를 바칠 정도로 세월호는 우리에게 큰 슬픔과 아픔을 안긴 사건이었다.

어느 날 문득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궁금해졌다.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얼른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정보가 떴다. 그가 전라남도 무안에서 ‘인디언 감자’ 농사를 하며 지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디언 감자 주문할 수 있는 주문정보가 나와 있는데, 그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 계좌번호까지 필요한 정보가 다 있는 게 아닌가! ‘일이 쉽게 풀리네’라며 그의 전화번호를 여러 번 확인하곤 노트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고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김영오씨세요?”

“네.”

기자의 소개를 하고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승낙한다.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봤더니 무안이 아닌 ‘제주도’란다. ‘이게 웬일!’ ‘큰일 났네’ ‘제주도까지 가야 하나?’ 무안만 해도 멀지만, 인터뷰를 위해 당연히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제주도란 말에 순간 생각이 멈춰버린다. 갈 엄두가 안 나 결국 전화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날 당장 인터뷰를 했다.

 

   
 

제주도에 내려간 ‘유민 아빠’

동에 번쩍, 서에 번쩍도 아니고, 언제 전라남도 무안에서 제주도로 내려간 걸까.

“올 4월에 내려왔어요. (무슨 일을 하세요?) 에어컨 이전 설치와 철거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는 올 1월 에어컨 설치하는 일을 배우고, 3개월 만에 제주도에 내려가 현재 5개월째 에어컨 기사로 일하는 중이다. 에어컨 기사라... 왜 그 직업을 선택한 것일까?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에어컨 기사는 나이 제한이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다, 오십 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남자건 여자건 별로 없다. 기껏 해봤자 건물 청소라든지 보험설계사라든지 전화 상담원 정도가 아닐까. 그만큼 제한돼있는 현실이 오십 넘은 사람들의 오늘 모습이다. 보다 생생한 인터뷰를 위해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지 보내달라고 했다. 사다리에 올라가 에어컨 설치하는 모습과 바닷가를 뒤로 하고 찍은 사진 등 일곱 장을 보내왔는데 세월의 흔적만 살짝 보일 뿐 여전한 모습이다. 살이 살짝 오른 모습을 빼고는. 일이 힘들지는 않을까?

“땀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에어컨 한 대 설치하고 나면 온몸에 땀이 흥건해요. 진짜 비 오듯 흘러요. 옷을 짜면 물이 쭉쭉 나올 정도로... 실외기 무게가 보통 40킬로그램이 넘어요.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어요?”

55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이 몇 킬로그램 차이 나지 않는 실외기를 들고 나른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 마음이 짠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힘들어도 견디고 이겨내야지... 말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힘들지 눈에 선하다. 여름에는 너무 바쁘다 보니 김밥이나 빵 정도로 끼니를 때우며 일한다고 한다. 에어컨은 여름용 일인데 그럼 겨울에는 어떻게 먹고 산단 말인가.

“겨울에는 먹고 살 정도... 굶지 않고 살 정도만 일이 있대요.”

그래도 다행이다.

 

바닷가에서 만나는 유민이

그는 현재 제주도에서 혼자 살고 있다. 많이 외로울 것 같다. 그리고 유민이가 더욱더 생각날 것 같았다.

“가만히 집에 일 안 하고 있으면 그냥 아기(유민) 생각만 나요. 이제 한 8년 지났는데 드라마를 보든 뭘 보든 남들은 슬프지도 않은데 저는 눈물만 나오고... 그래서 일에만 파묻혀 살려고 해요.”

사람들은 벌써 8년이야 하는데 그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그는 밤마다 저녁 식사하고 바닷가에 가서 낚시하는 게 일이다. 한가해서도,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민이 보러 가는 거다. 집에 있으면 공간이 좁아 점점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나가는 것이다.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멍하니 어둡고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유민이를 생각한다고 한다.

“제가 무안도 그렇고 제주도도 그렇고 바다 쪽에만 가잖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아니 모르겠어요) 유민이 생각하고 싶으니까... 바닷가에 있으면 유민이 생각이 나거든요. 바다에서 죽어서...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려고 매일 밤 바닷가로 나가요.”

 

   
 

조심스럽게 꺼낸 세월호 이야기

유민이 얘기하니까 그날 일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심스럽지만 세월호에 대한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 당시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제가 그때 ‘명신’산업이라는 자동차 차체 공장을 다녔거든요. 기아자동차 협력업체인데, 저희가 2교대를 했어요. 아침 7시 반에 일을 마치고 ‘국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 9시 조금 넘어서 유민이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유민이 사고 난 거 알고 있냐?”고.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얼른 티브이를 틀어보라고 하더라고요. 티브이를 트니까 세월호가 넘어가고 있더라고요.”

 

유민이가 실종자 명단에 있어!

다급해진 그는 진도상황실과 단원고등학교 교장실 등 알아볼 만한 곳이란 곳은 다 전화했다. 그런데 전부 불통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그와 같은 마음으로 전화하고 있었을 테니 전화가 될 리 만무했다. 전화하는 걸 포기하고 유민 엄마하고 계속 통화하면서 정보를 나눴다. 학교에서 대절하는 버스가 있는데 진도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먼저 출발한다고 한다. 나중에 전화 통화하기로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한 10시쯤 지났나? 티브이를 보며 계속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전원구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유민 엄마에게 전화했다. “유민이 옷이 젖었을지 모르니 옷을 챙겨가라”고. 유민 엄마가 유민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동안 그는 회사인 충남 아산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출발 준비를 하며 계속해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원 구조 오보’라는 속보가 떴다.

“속보를 보자마자 바로 차를 몰고 팽목항으로 내려갔어요. 내려가면서 유민 엄마한테 “유민이 이름 올라왔냐?”고 물어봤어요. 생존자 명단, 실종자 명단, 사망자 명단이 있잖아요. 그중에 어떤 곳에 이름이 올라왔냐는 걸 물어본 거죠. 버스 안에 교육청 사람들, 단원고 대표도 타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더래요.”

그는 군산을 지나서 목포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유민 엄마한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안 하고 펑펑 울기만 하더란다. 얼마나 불안한가.

“‘유민이가 생존자 명단에 없고 실종자 명단에 있다’며 통곡을 하는 거예요. 저도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는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눈물을 닦고 다시 출발하고, 또 눈물 나면 차를 세워놓고 눈물 닦고 다시 출발하고,.. 거의 밤 10시가 돼서 팽목항에 도착했어요.”

 

아비규환 세월호 침몰 현장

도착하자 현장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몰려든 가족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아이를 부르고, 아빠를 부르고, 연인을 부르는 소리가 팽목항에 퍼져나갔어요. 가족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떨다가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우르르 몰려갔어요. 어떤 배든, 배가 들어올 때마다 빈 배로 들어올 때가 많았어요. 생존자가 있는지, 실종자는 몇 명인지, 구조는 진행 중인지 아무도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진도체육관도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밤새 바다만 바라봤어요. 배들이 기쁜 소식을 싣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죠.”

한없이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얼마나 초조하고 애가 탔을까? 배들만 올라오고 아이들이 없으면 유가족들은 실망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유민이는 얼마 만에 바다에서 올라온 걸까?

“8일 만에 찾았어요. 한 5일째 될 때까지도 ‘우리 유민이는 꼭 살아있을 거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제가 굉장히 정신력이 강했거든요. 남들보다 강단도 있고 어릴 때부터 오기와 투지가 있어서 절대 안 지려는 성격이었어요. 저는 생각했어요. 우리 유민이가 나를 닮았으면 버티고 살아있을 거다. 저는 그것만 믿었어요. 우리 유민이가 에어포켓 밑에 가서 살아있을 거라고... 유민이는 꼭 살아있을 거라고.... 그러다가 유실 문제가 생겼어요. 멀리 떠내려간 학생이 발견된 거예요. 이러다간 시체도 못 찾겠구나 싶어 유실만 안 되게 해달라고, 애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축하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믿음도 약해졌다. 유실 문제도 생기고 죽은 아이들 시체가 하나둘씩 올라오면서 믿음은 점점 불안과 걱정으로 변해갔다.

“하루 이틀 삼 일째까지는 시체가 돼서 하나둘씩 아이들이 올라오면 ‘내 아이 아니다’하고 안도를 하다가 5일째 되니까 아이 찾았다고 하면 모두 ‘축하해’라고 했어요. 정부가 구제를 안 해줬잖아요.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으면 죽은 자식 찾았는데 축하한다고 그랬겠어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내 아이 시체를 찾았는데, 죽었다는데, 축하한다니... 그만큼 시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러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간절했다는 방증이다.

 

이상한 그날

그는 유민이 시체가 발견되던 날 꿈을 꿨다고 한다.

“저는 잠자리가 부족해서 밖에 있는 몽골 텐트에서 잤어요. 학부모들하고 얘기하고 새벽 서너 시쯤 들어가서 혼자 누웠는데 잠깐 잠이 들었나 봐요. 꿈에서 어느 교복 입은 여학생이 물에 완전히 젖어서 살살 들어오더니 제 목을 끌어안고 있더라고요. 가위에 눌린 거죠. 깨려고 막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안 깨지더라고요. 학생은 저를 가만히 등에서 안고 있고, 저는 손가락을 움직여야 일어나겠다고 생각해서 깼는데 여학생은 없더라고요.”

그리고 이상한 일도 있었다. 평소 유민 엄마는 팽목항이 무섭고 싫어서 바다에서 가까운 팽목항에서 안 지내고, 실내체육관(팽목항에서 차로 40여 분 거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나, 팽목항 가보고 싶어” 그러더란다. 그래서 그는 “그래 가자”며 팽목항으로 출발해서 가고 있는데, 작은딸 유나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언니 찾았어.”

 

찾았어. 유민이

세월호가 침몰한 현장과 팽목항과는 두 시간여 거리.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두 시간은 극도의 초조함에 온몸이 타들어 가고 말라붙는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드디어 배가 도착하고 유민이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신검안소로 들어갔다. 절친과 함께한 팔찌도 유민이 것이었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점과 오른쪽 발목에 상처 자국만 보더라도 유민이었다. 무엇보다 학생증이 목걸이처럼 걸려 있었고 명찰까지 꽂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그러나 바로 유민이를 데려가진 못했다.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몇몇 시신을 잘못 확인하는 소동이 있고 난 뒤 가족의 DNA 검사를 해야 하는 절차가 생겼기 때문이다.

“유민이는 볼살이 홀쭉히 빠졌더라고요. 통통했었는데. 에어포켓이란 곳에 며칠이라도 살아 있었던 게 아닐까, 살려고 버둥대다 살이 빠진 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다음날 그는 혼자 시신검안소로 갔다. 유민 엄마는 도저히 못 가겠다고 울기만 해서였다. 최종적으로 유민이를 확인하고 소지품을 건네받았다. 학생증과 팔찌, 명찰 그리고 휴대전화와 용돈 6만 원이 있었다. 그것들을 보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만 원짜리 여섯 장을 보고는 너무 가슴이 아파 펑펑 울었다. 그 만 원짜리에 유민이의 모든 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민이는 생일날 옷을 사준다고 데려가도 아빠 어려운 걸 알고 제일 싼 오천 원짜리 티 한 장 고르던 아이였다. 그랬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구나’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못난 아비인 것만 같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만 원짜리 한 장을 챙겨서 지금도 지갑에 넣고 다닌다.

“평생 지니고 다닐 겁니다. 그것이 제 삶의 나침반이니까요.”

 

   
 

투쟁이 시작되다

그의 인생은 평범한 일반인의 삶이었다. 그러나 유민이가 죽고 나서 진상 규명이 안 되자 그는 투사가 되기로 했다.

“유민이 장례를 치르고 직장으로 다시 출근했어요.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시신이 올라오지 않아 해결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회사에서 자꾸 출근 언제 하냐며 연락이 오니까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2주 정도 일했나?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거예요. 새벽에 동틀 때가 되면 눈물이 나서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눈물이 펑펑 쏟아져서 일을 거의 못 했어요. 밖에 나가서 담배 피우면 회사 동료들이 실컷 울고 오라고 옆에서 많이 배려해줬어요.”

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면담을 했다. 위로의 뜻을 전하면서 거듭 사과하고, 유가족들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초청하게 됐다며, 생계 문제 등 각종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는 박 대통령의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는 회사에 출근해서 그 자리에 참석을 못 했는데, 참석자들에게 전화해서 ‘가지 말아야지, 왜 갔냐?’ ‘위로하려고 부른 거 아니다’ ‘다음날 대국민담화를 정해놨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부른 거다’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를 했죠. 역시나 그다음 날 보니 면담에서 한 얘기들이 다 나왔더라고요.”

 

만신창이가 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싶었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어서 진상 규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에 휴직계를 냈다. 그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국가에서 특별히 6개월 휴직계를 쓰도록 법으로 규정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두면서 “이 싸움이 일 년이 걸릴지 이년이 걸릴지 장담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

그의 싸움은 그의 말대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곁에서 10일간 단식하며 그의 곁을 지켰던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들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세월호 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세월호 아이콘’이 될 정도로 투사가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의 집중적인 표적이 됐다. 그에 따른 악성댓글과 비방, 조롱,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 까발려지고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비난의 화살’을 맞다

사람들은 맨 앞에 선 그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는 온몸이 방패가 돼서 막아냈다. 그러니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그가 그런 말까지 했다.

“저는 무명의 아무것도 아닌 ‘일개 시민’이었어요. 그런데 세월호 사건으로 한순간 공인이 됐잖아요. 갑자기 뉴스에 나오고 나쁜 놈이 되어있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일만 하던 놈이 이걸 겪었으니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정치인도 아니고 내가 사회적으로 뭘 해보려고 했던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유민이하고 유나 만나는 재미로 살고, 빚 갚는 재미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버렸으니... 대단해지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유민이 억울함을 밝히려고 했던 것뿐인데...”

 

단식과 치킨

그는 46일이라는 기록적인 단식을 했다. 그가 단식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악의적인 비난으로 그를 더욱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뮤지컬 배우 이산이란 사람은 막말 중의 막말로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유민이 아빠라는 자’야!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니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죽어라!!!’

와... 어떻게 딸을 잃고 슬퍼하며 목숨까지 내놓고 단식하는 사람에게 이런 막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심한데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회원들과 ‘자유대학생연합’은 단식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옆에서 라면과 피자, 치킨을 나누어 먹는 ‘먹거리 집회’로 맞불을 놓았다. 게다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참으로 사람들이 악하다. 욕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에 넘는 비난은 상황을 생각하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눈에는 유가족들의 단식이 그저 그런 평범한 단식으로 보였을 뿐이다.

다섯 명의 유가족이 단식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사람은 김영오씨였을 것이다. 원래 제일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화살을 제일 많이 맞게 되어있다. 그에 대한 악성 루머와 댓글이 난무했다. 언론에서는 마치 경쟁하듯 근거 없는 소문까지 포함해서 온갖 뉴스들을 쏟아냈다.

 

당신이 이러면 이해 못하지!

여기에다 더욱 불을 지핀 것은 유민이 외삼촌의 글.

유민이 외삼촌은 한 포털사이트 기사 댓글난에 이런 글을 썼다.

‘다른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단식하면 이해하겠지만... 김영오씨 당신이 이러시면 이해 못하지... 당신이 유민이한테 뭘 해줬다고... 유민 유나 아기 때 똥 기저귀 한번 갈아준 적 없는 사람이... 누나 너랑 이혼하고 10년 동안 혼자 애들 둘 키운 거 알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러는 넌 그동안 뭐 했냐?’

말할 기운조차 없었던 그이지만 더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점 세월호 투쟁의 본질과 멀어지는 양상이 되면서 가만히 있다간 진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양육비를 안 줬다고?

“제가 그 당시 이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어요. 맨날 비정규직 일만 하고 이천만 원의 빚을 갚으려니까 얼마나 버거웠겠어요. 우리 비정규직들은 일반 외국인들과 똑같은 일들을 했어요. 힘든 일 말이에요. 매일 일하다가 손목 인대가 나가서 일 년 동안 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몇 달 양육비를 주지 못한 것 빼고는 매달 꼬박꼬박 양육비를 줬거든요, 저는 이자를 못 갚고 있었지만, 다달이 우리 유민이, 유나 맛있는 거 사주라고 적은 돈이지만 보냈어요. 보험금비, 핸드폰비도 다 내줬어요. 그런데 유민이 외삼촌이 내가 양육비를 제대로 준 적이 있느냐며 글을 써버린 거예요.”

그는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때 그런 기사들이 넘쳐난 것이다.

“병원에 있으니까 은행을 못 가잖아요. 복식 끝나고 나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곳이 은행이었어요. 내가 얼마나 돈을 안 줬길래 이런 소문들이 나지? 하면서 은행가서 입출금 내역서 다 끊어달라고 했어요. 제가 2003년도에 이혼했는데 그때부터 거 다요. 그랬더니 몇천만 원 보냈더라고요.”

 

억울해요

그의 상처는 ‘억울함’에서 비롯됐다.

증거를 명백하게 보여줬는데도 언론이 안 다뤄준 것이다. 비판적인 내용은 앞다투어 다루던 언론들이 막상 그가 증거를 들이대니까 조용해진 것이다. 그는 그때 언론에 대해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것이 상처 중에 큰 상처였다고 한다.

“언론은 진짜든 가짜든 한번 흘려버리면 절대 거두지 않는 게 언론이에요. 지금도 뉴스 하나 흘려버리면 그게 진짜가 아닌데도 모두 믿어요. 나중에 무혐의 처리 받아도 소용없어요. 주워 담을 수 없어요. 이게 대한민국 언론이에요.”

그는 아무리 진짜를 보여줘도 침묵하고 자꾸 거짓 뉴스만 양산해내는 언론의 모습을 보며 억울해했다. 증거를 보여주는데도 안 믿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변질돼서 그런 걸까?

 

아버님 오셨어요?

상처는 언론뿐 아니었다. 유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도 상처를 받았다. 그가 자꾸 무안, 제주도로 멀리멀리 내려간 이유는 사람들을 피해서 있고 싶어서였다.

“지금 대한민국 진보 단체들의 활동가들이 대부분 앙숙이 돼서 서로 싸워요. 그런 상태에서 제가 여기 단체하고 좀 친하게 지내면 여기 단체를 싫어하는 저기 단체에서는 ‘유민 아빠 쓰레기네’라며 욕을 해대요. 소위 ‘빠’들 있잖아요. 빠와 지지자들은 명백히 달라요. 대한민국 진보파들은 박근혜 태극기 부대와 단 하나도 다른 게 없다는 걸 느꼈어요. (어떤 게 다른 거죠?) 남의 말 안 듣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거요.”

그는 그들과 친해지면서 별의별 얘기를 다 했다. 사적인 얘기까지도... 그런데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고 싸우는 사람들이 그를 험담하고 욕하고 뒷담화했다. 그러면 그게 다시 그의 귀에 들어오고... 그러한 과정들을 겪으면서 그는 그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랬던 사람들이 몇 년에 한번 가잖아요.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아세요? ‘어머, 아버님 오셨어요?’ 그래요. 뒤에서 내 욕, 뒷담화 실컷 해놓고 앞에서는 웃으면서 얘기하죠.”

그는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멀리 내려간 것이 농사지으러 내려간 것도 아니고, 에어컨 일을 하기 위해서 내려간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싫고 역겨워서 내려간 거다.

 

   
 

후유증

그는 상처의 후유증으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

“활동가들과 술자리로 만날 경우가 있잖아요. ‘저 사람이 유민 아빠라고 소개하면 제일 느끼는 게 뭔지 아세요?’ (뭔가요?) 저 사람은 나를 속으로 무슨 욕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어요.”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얘기를 오래 듣고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하며 공감하게 되었다. 단식 후유증도 앓고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다. 기억력도 좋았는데 단식을 오래 하다 보니 국민의 응원 편지를 받아서 첫째 줄을 읽고 둘째 줄을 읽으면 첫째 줄 내용이 생각이 안 날 정도가 됐다. 암기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제가 노가다를 할 때 체력이 엄청 좋아서 다른 사람이 벽돌 서른다섯 장 질 때, 저는 마흔두 장씩 지고 날랐거든요. 그러던 제가 단식하고 나니까 기가 약해지고 힘이 없어져서 예전만 못해졌어요.”

 

치유는 전혀 안 되는 거죠

인터뷰는 이제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그에게 치유는 어떤 걸까?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치유는 전혀 안 되는 거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면 슬픔도 빨리 아물 수 있는 건데 치유 자체가 안 되다 보니 슬픔이 치유가 안 돼요. (심리치료 받을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그거 받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거 받는다고 상처가 치유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의지할 뿐이지. 진실적인 치유가 되지 않으니까... ”

 

힘들더라도 버티세요

그에게 치유를 물어본 게 너무 성급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치유잡지에 맞는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러면서 결론은 사람들에게 완전한 치유는 없다는 것. 부분적이고도 치유로 향해 가는 발걸음만 있을 뿐이지.

그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했다.

“감히 제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치유하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사람마다 상처는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깊이 그 상처를 안고 가면 상처가 깊어지고, 상처를 어느 정도 털려고 생각하면 털 수 있는 게 상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상처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하세요’라고 할 수가 없어요. 다만, 저도 죽고 싶을 때가 많이 있었어요. 사람들한테 공격당할 때 자살해볼까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죽으면 끝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는데, 힘들다고 절대 죽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살아만 계세요. 아무리 힘들더라도 버티세요. 버티고 견뎌주세요.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네요.”

 

서울로 올라와야죠

그렇다. 그의 말이 현명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 상처는 다르다. 그리고 내가 그 상처에 대해서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자기 상처는 자기가 해결해야 하고 자기 안에서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돈을 벌면 서울로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쯤 되면 대인기피증도 회복돼서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으로 변해있었으면 좋겠다.

 

 

<이 기사는 계간 ‘치유’ 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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