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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째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김련희씨 “제발 북한으로 보내주세요”
최윤희  |  youloveme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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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2월 23일 (목) 18:29:41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2일 (수) 02:56:10 [조회수 :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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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11년째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김련희씨
“제발 북한으로 보내주세요”

병 때문에 중국 사촌 언니 집에 방문했다가 한국 가면 돈 벌어서 병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브로커에게 속아 한국으로 오게 된 김련희씨. 국정원에 가자마자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며 11년째 남한에 묶여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 딸을 평양에 두고 온 김련희씨는 그동안 밀항 시도, 위조여권 조작, 간첩 허위 자수, 두 번의 자살 시도 등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지만, 여전히 현실은 남한이다. 그녀의 11년간의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탈출 얘기를 들어보았다. 

글. 최윤희 │사진. 김행옥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어떡해요... 어떡해요... 내 딸이잖아요”(김련희)
“왜... 왜... 왜 우리 엄마가 돌아오지 못하나요?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딸 련금)
그녀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꽃’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녀가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미국 언론 CNN에서 틀어준 동영상을 보고 그녀가 처음 한 말이고, 북한에 있는 그녀의 딸 련금이가 한 말이다.


잘못된 중국 여행

올해로 한국에 온 지 11년째가 된 김련희씨.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희 아버지가 4남매 중에 막내예요. 형이 세 명 있어요. 그분들은 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고 있어요. 그분들에게 자식들이 많을 거잖아요. 그때까지 저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저 아는 사람들이나 시집 사람들은 중국에 왕래하는데 그런 걸 보면서 저도 해외여행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간이 나빴다고 한다. 
“간경화 진단을 받았어요. 간 복수가 왔어요. 살고 싶더라고요. 남편이 의사인데 의사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잖아요. 의약품도 의술도 있지만 (북한의) 한계가 있으니까 중국 생각이 간절하더라고요. 그곳은 큰 나라니까 의술이 발전했을 테니 내가 치료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게 된 거죠.”


브로커 말에 속아 넘어가다

그래서 그녀는 치료목적으로 여권을 신청한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가보니 그녀의 희망과 현실은 차이가 컸다. 북한은 개인 주치의가 있어서 모든 게 공짜인데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라도 똑같지 않은 것이다.
“여권을 받고 중국에 사촌 언니네 놀러가게 되었어요. 중국도 사회주의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실제 가보니 우리와는 달리 감기약, 소화제 타는 것도 다 돈을 내야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전 외국인이니까 전혀 보험도 안 되고 모든 게 다 돈인 거예요. 그렇다고 사촌 언니한테 돈 달라는 말을 못 하겠고... 그때 탈북 브로커를 알게 됐는데 저보고 ‘바보냐?’고. 중국 사람들도 다 한국 가서 돈 벌어온다고. 중국에서 일 년 벌 돈을 한국에 가면 한 두 달이면 벌어온다고 저희 옆집 사람도 두 달 동안 한국에 밀항해서 불법체류자로 일하고 엄청나게 돈 벌어서 왔다고 그러는 거예요.”

 

탈북자가 뭐예요?

그녀는 한국에 간다는 무서움보다 두 달만 돈 벌고 오면 중국에서 간 치료 다 해서 건강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가겠다고 결심했어요.”
브로커는 삼양의 어느 위치를 알려주면서 거기로 오라고 했단다.
“가니까 한 일곱 명 정도가 방에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하고 하룻밤을 거기서 잤어요.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니까 다 중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조선족이거나. 전 탈북자들인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탈북자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거든요. (탈북자란 단어를 몰랐나요?) 북한에는 탈북자란 단어가 아예 없어요. 전 평양이니까 모르는데 지방에서는 많이 알겠죠. 제가 알고 있는 탈북자는 북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서 한국 가는 거. 이런 사람이라 한마디로 도주자죠. 탈북자는 한국에서 쓰는 말이에요.”
그럼 북한에서 한국으로 탈북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그건 아는데 원래 밀항해서 갔다가 불법체류하고 멀리 떠나는 줄 알았던 거지 한국 가서 정착하는 일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아예 그런 시스템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 거죠.”


영영 평양으로 못 돌아간다고?

그들과 하룻밤을 같이 자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옆 사람이 전화하더란다.
“그런데 우리말을 쓰는 거예요. 조선말을 쓰면서 ‘언니, 우리 내일 출발하면 며칠 걸리고 태국 갔다가 한국 간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내 옆에 나이 많은 지수언니라고 있었는데 ‘여기 무슨 사람들이냐?’ ‘다 이거 중국 사람들 아니냐?’ 하니까 ‘어디 가냐?’고 저보고 그래요. 그래서 ‘나 원래 밀항해서 한국 가서 돈 벌려고 한다’ 그렇게 말하니까 ‘정신없다고 이게 다 북쪽 사람들이라고, 북에서 온 탈북자들인데 한국에 지금 살러 가는 길이고 한국 가면 죽어도 다시는 북에 못 간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녀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 난 두 달만 갔다 오면 된다고 그랬지 영영 못 가는 줄 몰랐다’는 생각을 하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단다.
“저는 여권을 달라고 했어요. 돌아가겠다고. 그런데 여권은 이미 다른 데로 보내고 다음 날 출발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대로 한국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중에 몇 번 도주를 시도했지만 감시가 너무 심해 끝내 도망치지 못했어요.”
그리고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한 20일 걸렸어요. 한 가닥 희망이 있었던 건 중국이나 태국은 외국이잖아요. 한국은 우리 동포잖아요. 우리 형제니까 내 말을 믿어주겠지, 내가 솔직히 말하면 내 고향에 보내주겠지 이런 믿음 같은 게 있었어요.”

 

   
 

“고향에 보내주세요”

국정원에서 보내준 ‘가짜 여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그녀. 국정원에서 대기해놓은 버스에 타고 곧바로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녀는 첫날부터 얘길 했다. 
“나 브로커한테 속아서 잘못돼서 왔다. 나 고향에 보내 달라.” 
“석 달 동안 독방에 갇혀있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독방에 갇혀있다 나와서 단체 생활했어요.”
그녀가 고향에 보내달라는 말만 안 했어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방 독방에서 나왔을 텐데 그 말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강제로 서약서를 쓰다

“너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 한 장만 써라. 그거 안 쓰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간다. 설사 네가 국정원에서 죽었다고 해도 네가 여기서 죽었다는 걸 알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제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옛날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판문점으로 해서 평양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분들 남쪽에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남산 지하실에서 엄청나게 물고문과 불고문 당했대요. 진짜 짐승처럼 때리고 그랬다는 거예요. 정말 놀라웠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고문을 하지? 그렇게 고문해서 전향수 받아내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국정원이 뭔지도 몰랐어요. 전 안기부인 줄 알았어요. 북에서는 안기부로 알고 있어요. 윗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지금 안기부에 잡혀 왔는데 독방에 갇혀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난 정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나 살아서 내 남편과 딸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결국 석 달 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습니다’라고 서약서를 써줬어요.”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억지로 서약서를 쓴 그녀는 그다음 날로 하나원으로 향해서 3개월 동안 남한에 정착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는다. 그녀가 서약서를 쓴 이유가 있었다. 하나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 6개월이 되면 대한민국 여권이 나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가지면 중국에 갔다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탈북자들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나를 안 보내주니까 할 수 없이 여권 받아서 가야 하는 방법밖에 없구나. 두 달 만에 돈 벌어서 가려고 했지만 할 수 없이 육 개월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권이 안 나오다

그런데 일은 그녀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 여권을 신청했는데 안 나오는 거다.
“다른 친구들은 여권 나왔다고 자랑하는데 저만 안 나오는 거예요. ‘왜 안 나오냐?’고 하니까 ‘국정원에 알아보라’고 하더라고요. ‘당신은 처음부터 북으로 보내달라고 했기 때문에 여권을 해주면 나중에라도 북으로 도망갈까 봐 절대 여권이 나올 수 없다. 신원 특이자로 분류가 됐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 들으니 얼마나 황당해요. 강제로 잡아놓고 강제로 자기 나라 국민 주민등록증 줘놓고는 너 고향으로 도망갈까 봐 이제 여권 줄 수 없다고 가둬놓는 거잖아요.”


말항을 시도하다

그녀에게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내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단다.
“이 나라 법을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렵죠. 그때 딱 하나 생각난 게 밀항이었어요. 북에 있을 때 중국에 밀수하던 애가 있었는데 저랑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보고 ‘나 중국 가야 하는데 여권이 없다. 어떻게 갈 수 없냐? 밀항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해주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대요. 날짜까지 다 잡았는데 2천오백만을 내래요. 밀항 값을. 이백오십만 원도 없는데 어떻게 그 돈을 내요. 그래서 포기했죠.”


위조여권을 만들다

그녀는 또다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이번에는 위조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도 인터넷을 검색해봤죠. 대학 졸업증 위조, 주민등록증 위조, 이런 위조 사이트가 있더라고요. 거기 들어가 보니 위조여권을 만들어준대요. 정말 좋은 세상이더라고요. 곧바로 전화를 걸었죠. 조선족이더라고요. 말 톤이. ‘제발 좀 해달라’고 애원했죠. 돈을 육백만 원 내라고 하더라고요. 얼른 돈을 보냈죠. 위조여권을 만들어줬어요. 그런데 제가 보호 관찰대상자니까 경찰이 계속 주시했을 거 아니에요? 핸드폰 도청 다하고... 결국 들켰어요.”
그녀는 막판에 들켜서 육백만 원 날리고 고향에 갈 희망은 끊어지고 말았다. 


첫 번째 자살 시도

“공문서위조, 잠입 탈출로 걸려서 재판받게 됐어요. 국가보안법에 걸린 거죠. 밀항도 시도해보고 여권도 만들어보고 했는데 결국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고향에 못 갈바에 차라리 죽고 말자. 나 너무 힘들어서 숨도 못 쉴 것 같다. 졸피람이라는 약 팔십 알을 먹었어요. 쇼크로 쓰러졌죠.”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계속 밀착 감시를 하고 있던 경찰이 밤새도록 그녀의 방 불이 꺼져있으니까 집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발견하곤 곧바로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하루 만에 의식을 찾았는데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약물성 중독으로 20일 동안 휠체어 생활을 하며 병원에 있었죠. 그리고 20일 만에 쌍지팡이를 짚고 퇴원했어요.”


두 번째 자살 시도

퇴원한 그날 그녀는 또 자살 시도를 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 자체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이대로 살 수 없다, 무슨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지? 이 시간에 가족들은 날 찾고 있을 텐데. 두 달 동안 중국 갔다 온다는 사람이 연락도 없이 1년 동안 안 돌아오는데 얼마나 미치겠어요. 부모님 생각하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퇴원한 그날 자살 시도를 했어요. 동맥을 끊었어요.”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의 자살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수술받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몸도 성치 못한데 계속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겠는가.


간첩이 돼야겠다

“또 인터넷을 검색했어요. 거기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탈북자 사건, 원정아 탈북자 사건 이런 것들이 뜨더라고요 ‘이거 뭐지?’하고 보니까 탈북자들이 탈북자 명단을 국정원에 넘겨주고 간첩이 돼서 감옥에 갔다는 거예요. 감옥살이하고 나오면 강제 추방할 거잖아요. 간첩이니까. 간첩을 이 나라에서 계속 살게 할 수는 없잖아요. 간첩질할 건데. 내가 간첩이 돼야겠구나 이거 너무 쉽잖아요.”
곧바로 그녀는 친구들 열일곱 명의 명단을 핸드폰에 입력시켰다. 
“핸드폰 번호, 집 주소, 북에 있는 집 주소 등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핸드폰에 입력시켰어요. 그리곤 밀항 건 때문에 조사받던 경북지방경찰청 수사팀에 전화했어요. 거기 팀장님한테 ‘나 북에다 넘길 탈북자 명단 수집했다. 나 이거 보낼 거니까 당신 빨리 와서 나 잡아가라’고 전화했어요.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 안 잡으러 오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전화하면 곧바로 경찰이 날 잡으러 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 거예요. 너무 속상하잖아요. 그래서 다시 전화했어요. ‘나 좀 만나자’고. 대구 식당에서 만나서 핸드폰을 보여줬어요. ‘이거 봐라! 명단 작성한 거다. 나 이거 북에 보낼 거다’ 그게 증거가 돼서 다음날 체포됐어요. (보여주니까 그 사람들이 믿었군요?) 내가 명단 있다고 하니까 계속 감시했겠죠. 어떤 일을 하나 하고... 그런데 실제 증거를 보여주니까 체포가 된 거예요.”

 

   
 

간첩이 집행유예를 받다?

그녀는 영화처럼 모든 그림을 다 그리고 있었는데 실제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2~3년 간첩 감옥살이하고 나오면 강제 추방되고 북에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어리석었죠. (그럼 어떻게 되셨어요?) 징역 2년 받고 집행유예 3년 받았어요. 재판받고 변호사랑 나오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마 세계적으로 간첩이 집행 유예받고 나오는 사람은 당신 하날 거다.’ 간첩을 누가 집행유예를 줘요?”
그녀의 얘기를 듣다 보니 참으로 북으로 가는 길이 멀어 보였다.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봐도 하나도 안 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간첩이 구속돼야지 정말 웃겼어요. 이 나라 법은 사람을 장난으로 가지고 노는 것 같고 법대로 되는 것 같지도 않고...” 


why 북한으로 안 보내나?

도대체 국정원에서는 왜 그녀를 그토록 북으로 안 보내는 걸까? 간첩이라고 하는데 자살까지 하는데 서약서까지 썼는데 여권도 안 내주고 이해 안 될 것들이 수두룩했다.
“통일부에서 아침에 브리핑할 때 기자들이 질문을 했대요. ‘김련희씨 왜 안 보내주냐?’고. 그러니까 통일부 대변인이 뭐라고 하냐면 ‘김련희를 보내면 북에서 체제 선전용으로 쓸 거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예요. 대한민국이 인권유린을 한 거잖아요. 그러면 테러국이 돼요. 사람을 납치 유인해서 강제 감금 억류한 거잖아요. 이걸로 북에서 체제 선전용으로 쓸 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3만 명의 탈북자가 있는데 김련희를 보내서 선례를 만들어놓으면 탈북자들이 저마다 북에 가겠다고 할거고 우리가 막을 힘이 없다’는 거예요 3, 4년 전인가 통일부에서 설문조사를 했대요. 탈북자들을 상대로. 23.2%가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대요. 그런 상황에서 저를 보내게 되면 너도나도 북에 가겠다고 할 텐데 그러면 이 나라가 곤란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이쯤 되면 그녀가 느끼는 남한에 대한 생각이 여러 가지일 것 같았다. 


분단이 죄

“내가 간첩이라고 했지만 설마 내가 간첩으로 될까 했는데 진짜 간첩이 됐잖아요.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래서 검사한테 물었어요. ‘검사님, 살인자가 되려면 죽은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살인 동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 살인자입니다 하게 되면 아무 증거가 없어도 살인자로 재판받을 수 있나요?’ 그랬더니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깨달았죠. ‘이게 분단이 죄구나’ ‘분단 때문에 벌어진 거구나’ 분단이 아니라면 이렇게 비정상적인 법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검사나 재판장도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마지막에 재판받는데 판사님이 집행유예 선고 내리면서 부탁할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새해 맞으면 저한테 연하장 하나 보내달라고. (왜요?) 모르죠. 왠지 모르겠는데 평생을 법관으로 재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겠어요. 그들이 몰랐을까요? 죄명은 간첩인데 선고는 집행유예. 자기들도 이상하다며 아마 웃었을걸요.”
그녀는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이거는 분단이 죄이고 우리 모두 8천만의 죄다. 아직도 분단을 해소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죄지 누군가의 죄는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분단이 없었다면 빨갱이란 말도, 간첩이란 말도 없었을 텐데 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장 큰 상처는 가족을 못 보는 거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는 무엇일까?
“가족이 가장 큰 상처죠. 가족을 못 본다는 게... 가족이 그리운 게... 길 가다가 낙엽이 흔들려도 눈물 나고, 빗소리 들어도 눈물 나고, 거리에 애들 지나가도 딸 생각나고, 종이박스 싣고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면 우리 부모님 생각나서 막 눈물 나고...”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의 밤을 지새웠을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 11년이란 세월 동안 그녀는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며 ‘평양 아줌마’가 이제는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란 세월을 가족 한 사람 없는 이 남녘땅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것이다. 


6년 동안 자유 없이 살다

보호관찰 대상자로 6년간 살면서 그녀에게 인권이란 건 없었다. 그녀 옆에는 늘 경찰들이 붙어 다녔다. 마치 죄인처럼. 그들의 감시는 그녀만을 향했다. 그녀는 자유의 나라에서 자유를 못 누리고 자유 없는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병원에 입원해도 찾아오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도 따라와서는 길을 막고 못 나가게 하고, 다큐멘터리 찍을 때도 따라붙고, 더 이상 미행하지 말라고, 나 좀 살자고, 나 좀 숨 좀 쉬자고 해도 안 통하고, 베트남 대사관에 망명 신청하러 갔는데 안 들어준 것도 다 경찰 때문이었다, 베트남 대사가 경찰에 연락해서 와서 그녀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당신들도 인간인가요?”

그녀의 인권은 아픈 와중에도 ‘해당 사항 없음’이었다.  
“한번은 간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입원했으니까 제가 뭘 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냥 가면 될 걸 가지고 괜히 간호사들한테 ‘보호관찰소에서 왔는데 저 사람 보러왔다’ 그러니까 간호사들이 계속 이상하게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범죄자구나 생각했겠죠. 그런 게 상처가 되더라고요, 내가 남의 거 도둑질했다거나 해를 줘서 범죄를 저질렀으면 당연히 죗값 받아야죠. 그런데 난 남쪽 사람들한테 일절 해를 준 것도 없는데 그냥 가족한테 가고 싶을 뿐인데 저를 그런 식으로 대하니까 속상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보호관찰소에 전화해 자신의 마음을 표출했다.
“당신들도 인간인가요? 병원에 입원했다면 먼저 건강은 어떤지, 병은 심한지, 차도는 있는지 물어보고 나서 당신들에게 필요한 감시를 하든 병원 확인을 하든 호출을 하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 입원할 때 언제 퇴원하는지 계획을 갖고 입원합니까? 어떻게 아픈 환자한테 전화해서 무턱대고 언제 퇴원하는지를 물어봅니까?”


수많은 엄마와 딸

이렇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을 치유해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남녘 분들한테서 제가 치유를 정말 많이 받아요. 평양에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딸만 있잖아요. 근데 남쪽에는 수많은 가족이 생겼어요. 제 가족의 자리를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생겼어요. 동생하고 싶다고, 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어요. 딸하고 싶다는 어머님은 수첩에다 청소하기, 차 마시기, 밥 먹기, 이렇게 한 장씩 썼어요. 전화하면 와서 한 장씩 뽑아서 같이 하재요. 아프고 힘들다가도 남쪽 어린애들이 뭐라고 말하면 내 딸 같아서 치유 받고, 어르신들이 저를 딸처럼 챙겨주시면 부모님 같아서 치유 받고... 제가 남쪽에 와서 느낀 건 한 형제, 한 핏줄이구나 하는 거예요. 그전에는 별로 관심 없었거든요. 그냥 남조선 하면 그냥 갈라져 사는 한 민족 정도... 그런데 이제는 그분들 때문에 정들어서 치유 받았어요. 분단으로 생긴 상처지만 분단으로 해서 또 치유를 받네요.”


북한 가면 먼저 딸이 되고 싶어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분단의 이중성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리 남한 가족들이 생겼다고 해도 친가족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누가 제일 보고 싶을까?
“엄마예요. 북에 도착하는 순간 엄마 손잡고 시장 봐서 엄마 턱밑에 앉아서 엄마가 해주는 따끈한 밥을 먹는 거. 이게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11년을 기다렸을 딸을 생각해서 내가 맛있는 거 챙겨줘야 하는데 아니에요. 가자마자 엄마! 하고 손잡고 먼저 딸이 되고 싶어요.”


호소합니다. 나를 엄마, 딸로 봐주세요

두 달 계획하고 한국에 온 김련희씨. 그러나 그 두 달이 11년이 됐다. 월북계획을 세웠지만 다 실패했다. 그래서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한 국민한테 호소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왜 북한 하게 되면 정치를 먼저 떠올리나요. 왜 나한테 분단, 정치, 빨갱이, 사회주의라는 정치 프레임을 씌우시나요. 저는 그저 평범한 평양 아줌마예요. 제발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나 당신들의 가족이라고 한 번만 봐줘요. 나 당신들의 누나, 당신들의 딸, 당신들의 언니로 생각해주세요. 여러분들도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군가의 딸이잖아요. 가족을 만나는데 정치, 체제 분단, 사상 이런 것들이 뭐가 필요한가요. 우리가 이 정도로 일반 아줌마 북으로 보내는 거 두려워할 만큼 약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 대국이... 이젠 우리나라도 많이 컸는데 이 정도는 눈 감고 보내주자 이 정도로 국민들이 여론을 환기해주면 거기에 떠밀려서 정부도 보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잖아요. 국민들이 비빌 언덕이 돼줬으면 좋겠어요. 정부는 걸린 게 너무 많아서 보내기 힘들어요. 정부한테는 더 이상 기대 못해요. 국민들이 제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발요.”


마지막 화장품이 됐으면

화장품을 다 쓸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이 화장품이, 이 옷이 한국 땅에서 마지막 화장품이고 옷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김련희씨. 집도 1,000만 원에 30만 원짜리 지하에 산다. 너무 답답해서 집 앞 조그마한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까지 만들어놓고 가끔 나와 시간을 보낸다는 그녀. 북에서는 청량음료라고 말하는 맥주만 먹던 그녀가 이제는 소주도 제법 마시게 됐다. 외로움에 술이 대신 친구가 돼준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과 북에 돌아가면 맞짱 뜨면 되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정말 그 농담이 진담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서 따끈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딸도 되고 엄마도 되고 부인도 됐으면 좋겠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하며 김련희씨 ‘파이팅’을 외쳐본다.

<이 기사는 계간 ‘치유’ 3호 96~113페이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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