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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정녕 자유한가? 나는 자유하지 못했다.'자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말이었다. 어린 시절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얼마나 좋았는지...
허종  |  paulhu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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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15일 (금) 00:00:00 [조회수 : 3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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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는 정녕 자유한가? 나는 자유하지 못하였다 .

   
‘자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말이다.
어린 시절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얼마나 좋았는지...

나는 치열하게 ‘자유’라는 단어와 싸웠다.
그러나 나는 자유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내가 선택한 인생이 아니었다.
존재의 물음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유한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인생인지 조차 몰랐다.
절대자보다 열등한 내가 싫었다.
내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던져진 존재’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강요당한 인생이었다.
20세기에 한국 땅에 태어난 것부터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생긴 것부터 내 지적능력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은 아니었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금 잘나고 조금 못난 것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입혔다.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죽음이었다.
이것만은 내가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젊은 시절, 나의 문제였다.
영혼의 긴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 대들은 정녕 자유한가?
그러나 나는 자유하지 못했다.
나는 죽음을 향한 길을 선택하며 갔다.
저항하는 인간을 아름답게 생각했다.
‘죽음의 미학’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가 없는 인간에게는 사랑도 없었다.
사랑이 없는 인간에게는 존재의 의미도 없었다.
한 줌의 흙에서 와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형수를 만났다.
멀쩡하게 죽어야하는 사형수들과의 만남이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사형집행을 당해야하는 사형수들의 삶은 특별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인간 모두가 사형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집행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은 ‘인간의 실존’이었다.
죽음은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차이 뿐이었다.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
그들이 예수를 만났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보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신 말씀이
예수를 믿는 사형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은 하나였다.
죽음 앞에서 그들이 자유하였다.
아들이 자유케하니 그들이 자유하였다.

“너는 지금 자유한가?”
스스로 물어보았다.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하시면 자유하리이다.’라고 고백할 뿐이다.

‘자유’ 여전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자유하니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니 자유하다.
지금 나의 생활은 사랑하는 만큼 자유하다.

어찌되었든 자유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없지 않은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투쟁의 역사가 인류 역사가 아니었는가?

나는 다시 묻는다. 그대는 자유한가?
그리고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한 만큼 자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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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 (62.210.234.79)
2006-12-19 16:38:59
나의 목회적 관심은...
나의 목회의 관심은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능력하기만 했던 제자들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가 어디있을까?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체험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박해자였던 바울이 전도자가 된 것은 어떤 깨달음이었을까?
어거스틴의 변화, 죤 웨슬리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교회가 타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신학교수들의 방탕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경건치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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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 (217.128.46.46)
2006-12-18 12:28:06
체험이 없는 종교는 관념일 뿐입니다.
이성,성경,전통,체험이 하나일 때 우리는 진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관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물론 체험만 강조하는 신앙생활은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독선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타성이 나타나겠지요.

그러나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체험이 '진리인가?'라는 성찰이 필요하겠지요.

기독교의 영성은 체험의 영성입니다.
말씀이 육신의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시는
대강절기에 주의 은혜가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이웃의 좋은 친구되는 성탄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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