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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부인의 ‘조선 사랑’
이덕주  |  감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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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12일 (목) 19:14:08
최종편집 : 2020년 11월 19일 (목) 23:24:00 [조회수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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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부인의 ‘조선 사랑’

이덕주(감신대 은퇴교수)

 

   
 

 한국 이름 ‘강부인’(姜婦人) 혹은 ‘강모인’(姜慕仁)으로 불리는 조세핀 이튼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부인은 1852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유년 및 청년기 학업과 경험에 대한 정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21세 되는 1873년에 미국 남감리회 목사인 알론조 캠벨(Alonzo M. Campbell, 1842-1885)와 결혼하면서 ‘캠벨 부인’이란 칭호가 생겼다. 캠벨 부부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 버츠카운티 출생인 알론조 캠벨 목사는 남감리회 로스앤젤리스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873년 로스엔젤리스 트리니티교회(Trinity Methodist Church)를 개척 설립하여 목회하다가 1885년 8월 9일 별세하였다. 

 당시 캠벨 부인의 나이 33세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어린 두 자녀도 목숨을 잃었다. 이런 ‘가정적 불운’을 겪은 캠벨 부인은 남편이 못 다한 목회를 잇기 위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대학병원 간호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수업을 받은 후 1886년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후 캠벨 부인은 중국 상해와 소주에서 10년간 사역하였는데 주로 선교부 병원을 중심으로 의료사역에 종사했다. 

 


 여성선교 개척과 배화학당 설립


 1896년 미국 남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를 결정하고 1897년 중국 상해에서 사역하던 리드(C.F. Reid) 선교사 부부와 콜리어(C.T. Collyer) 선교사 부부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그 때 캠벨 부인도 45세 나이로 한국에 여성선교 개척자로 임명을 받고 중국인 전도부인 여(余)도라(Yui Dora/ Yui Ling-Tsu)와 함께 1897년 10월 9일 내한하였다. 

 캠벨 부인은 앞서 리드 부인과 윤치호 부인(중국인 馬愛芳)이 남대문 안 남송현(南松峴, 현 한국은행 본점 자리) 남감리회 선교부 안에서 시작한 여성 집회와 주일학교 사역을 이어받아 여도라와 함께 지도하였고 1898년 5월 1일 어린 여자 아이 세 명, 남자 아이 두 명으로 매일학교(day school)를 시작하였다. 몇 주 후 학생이 열 명으로 늘었고 장로교 여학교 출신 교사를 채용하여 가르쳤다. 한국에서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된 고양읍에도 매일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곳에도 교사 한 명이 12명 학생을 가르쳤다. 그렇게 캠벨 부인의 한국 사역은 ‘교육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감리회 여성선교 개척자로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후 남대문안 상동에 거주하던 스크랜턴(Mary F. Scrnaton) 대부인이 보내 준 전도부인 김세라(김인영 교수 어머니)를 내세워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캠벨 부인이 사역을 시작한 남대문안 남송현 선교부는 엄밀한 의미에서 리드가 마련한 남성 선교부였다. 리드는 1897년 6월부터 남송현 선교부 안에서 주일집회(후의 광희문교회)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남녀구별’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봉건적 시대분위기에서 여선교사와 전도부인, 부인과 여학생들이 남성 선교부에 출입하는 것이 불편하고 외부의 시비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또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역이 늘어남에 따라 선교부 공간도 좁았다. 이에 캠벨 부인은 독자적인 여선교부 개설을 구상하였고 1898년 8월 1일, 서울 북부 경복궁 근처 ‘고가나무골’(고간동, 자골)에 새 선교부지를 마련하였다. 캠벨 부인이 확보한 자골 선교부(내자동 75번지, 현 서울경찰청 자리)는 3년 전 한국선교를 시작한 침례회계통의 ‘엘라싱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 소유였는데 엘라싱선교회가 충남 공주로 선교거점을 옮기면서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구입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캠벨 부인과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자골 시대’가 열렸다.  자골에 선교부를 개설한 캠벨 부인이 우선 여선교사 사택 건축과 학교 및 교회 설립에 착수했다. 그는 선교부 부지 안에 있던 한옥 건물들을 수리하고 자신을 비롯한 독신 여선교사 주택을 마련했고 1898년 10월 2일 여학생 다섯 명으로 여자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시작하였다. 처음엔 한국인 교사 두 명이 한문과 국문(한글)만 가르치는 서당 수준이었으나 1년 후 학생수가 19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캠벨 부인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주일학교 학생들이 보내온 선교비로 1900년 봄, 2층짜리 서양식 붉은 벽돌건물을 지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이 학교를 ‘캐롤라이나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불렀다.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교명은 1903년 12월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학교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윤치호가 지어준 이름이다. 캠벨 부인이 자골에서 학교를 시작한 1년 후 남송현 매일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교육을 받다가 1902년부터 남학생들은 미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정동 배재학당으로 옮겨가고 배화학당은 여학생들만 다니는 기숙학교가 되었다. 

 캠벨 부인의 뒤를 이어 1899년 힌즈(F. Hinds)와 캐롤(A. Carroll), 1901년 하보(S.B. Harbough)와 노울즈(M, Knowles), 1902년 하운셀(J. Hounshell) 등이 내한해서 캠벨 부인의 사역을 도왔지만 이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어학훈련을 마친 후 개성이나 원산, 춘천 선교부로 옮겨 갔기 때문에 자골 배화학당 사역은 오롯이 캠벨 부인의 몫이었다.

 자골로 옮겨 와 학교를 시작한 캠벨 부인의 다음 과제는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이었다. 캠벨 부인은 내한하자마자 1년간 남송현에서 리드 부인이 시작한 여자사경반과 주일학교 사역에 참여한 바 있었다. 그런데 1899년 4월 리드 부인이 질병에 걸려 귀국함에 따라 남송현 여성사역이 중단 위기에 처했다. 이에 캠벨 부인이 그 사역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해서 남송현으로 가던 부인들이 자골로 발걸음을 바꾸었다. 자연스럽게 자골에서 부인과 여학생 중심의 종교집회가 시작되었다. 이에 캠벨 부인은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여학생과 부인신자 40여 명으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후에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로 발전하는 ‘자골교회’의 출발이다. 자골교회 초대 담임자는 당시 서울구역(Seoul Circuit) 담임이었던 하디(Robert H. Hardie)였다. 

 하디는 그 해 8월 연회에서 원산 선교부로 파송을 받았고 그 후임으로 무스(J.R. Moose)가 부임했지만 이들 남성 선사들은 설교자일 뿐이고 자골교회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캠벨 부인이었다. 자골교회는 설립 1년 만에 70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캠벨 부인은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비로 1901년 9월 자골 선교부 안에 2층짜리 벽돌건물을 짓고 ‘루이스워커기념예배당’(Louise Walker Chapel)이라 명명했다.  독자적인 예배당을 확보한 후 자골교회 교인들은 계속 늘어났다.


 자골교회 설립


 배화학당에 이어 자골교회를 성공적으로 설립한 캠벨 부인은 다음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한국여성이 한국여성에게’(Korean woman to Korean woman)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깨닫고 토착인 여성 목회자(전도부인) 양성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남송현에서 시작한 여자사경반을 발전시켜 자골에서 교리학습반을 운영하였는데 성경과 기독교 기본교리 외에 위생과 실업(뜨개질과 자수 등)도 가르쳤다. 교리반 수업은 주로 중국에서 동행한 여도라가 담당하였다. 부인들은 미국인 여성보다는 중국인 여성에게 보다 개방적이어서 교육과 전도에 효과가 있었다. 여도라는 1년에 5천여 명의 여성 신자와 방문객을 맞이했다.

 여도라는 1903년 8월 건강악화로 귀국하기까지 캠벨 부인의 든든한 사역 동반자였다. 캠벨 부인은 같은 맥락에서 새로 시작한 원산 루씨여학교와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배화학당 졸업생들을 여선교사를 도와 교육과 전도 사역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캠벨 부인의 자골 선교부는 개성과 원산, 철완, 춘천 등 남감리회 선교부가 설치된 지역에서 전개되는 여성사역의 구심점이 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이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캠벨 부인은 1904년 5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 그런데 그가 귀국하기 한 달 전 4월에 자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부흥회 인도자는 8개월 전에 일어났던 ‘원산 부흥운동’ 주역 하디였다. 하디가 인도한 부흥회에서 전도부인들과 배화학당 한국인 교사와 학생, 그리고 선교부 일을 돕던 어학교사와 직원들이 통회자복과 성령 충만, 그리고 윤리적 갱신을 경험했다. 

 하디 부흥회를 계기로 자골교회와 배화학당 분위기가 ‘영적으로’ 쇄신되었고 새로 믿기로 한 교인들이 늘어났다. 부인만 나오던 집에서 남편도 따라 나오는 경우가 늘어났고 선교부 일을 돕던 유경상과 지수돌이 회심한 후 열심히 전도하여 남성 교인들이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자골교회 출석 교인은 1백 명을 넘겼다.

 자골교회의 부흥과 성장 분위기는 캠벨 부인이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1905년 10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자골교회만 부흥한 것이 아니라 전도부인들이 나가서 일하는 서울 근교에서도 개종자들이 계속 증가하였다. 서울로 귀환한 캠벨 부인은 자신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시킨 공로를 전도부인(홍다비다)에게 돌렸다.

 “1년 내내 주일마다 우리 예배당이 가득 찼으며 전도부인의 수고로 수백 명이 우리 자골 선교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서울과 근교에 있는 여러 집에서 믿기로 결단하고 우상 숭배하던 것들을 불태우고 교인 가정으로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던 때 쓰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버린 기구들을 가지고 올 때만큼 전도부인이 행복해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J.P. Campbell, “Mrs. J.P. Campbell’s Report”, MECS 1907, 44.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캠벨 부인은 미국에서 모금해 온 3천 달러로 배화학당 강당과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자골교회도 1906년 봄 부흥회를 계기로 1백여 명 교인들이 헌금하여 예배당을 16칸을 더 늘여지었다. 

 그럼에도 증축한 예배당은 계속 늘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 부족했다. 게다가 1904년 부흥운동 이후 눈에 띠게 늘어난 ‘남성’ 교인들이 여선교부 안에 있는 여학교 기도실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자골교회 교인들은 용단을 내려 1908년 4월 자골 선교부에서 멀지 않은 종침교 부근, 도렴동에 한옥 건물을 매입하고 그곳으로 예배처소를 옮겼다. 

 도렴동으로 옮긴 후 ‘종교교회’(宗橋敎會)로 불리었다. 이후 교세는 계속 증가하여 2백 명을 넘게 되었고 1910년 9월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런데 자골교회가 도렴동으로 예배처소를 옮길 때 모든 교인들이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자골 선교부 안에 ‘남아 있던’ 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선교부 안에 남아 별도로 예배를 드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도렴동으로 간 교인들이 주로 남성, 양반과 지식인 계층 중심이었다면 자골 선교부에 남은 교인은 여성과 평민계층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자골 선교부에 남아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은 이듬해(1909년) 선교부 주선으로 경복궁 바로 옆, 창성동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였다. 교회 이름도 ‘자교교회’(紫橋敎會)로 바꾸었다. 1900년 부활주일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시작한 자골교회가 8년 만에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로 나뉘었다. 
 이로써 캠벨 부인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일란성 쌍둥이’ 같은 자매교회를 생산한 어머니가 되었다.


 배화여학교 필운동 이전

 
 교회만 부흥한 것이 아니다. 교육과 전도사역도 계속 확장되었다. 배화학당은 1909년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배화여학교’란 명칭으로 재인가를 받은 후 학생들이 계속 늘어났고 전도부인 양성사역도 규모가 커졌다. 결국 종교교회와 자교교회가 떠났음에도 자골 선교부 공간이 좁게 되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생활하면서 수업을 받는 배화여학교 교실과 기숙사 환경과 시설이 열악하여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은 학교를 쾌적한 곳으로 옮길 것을 권하였다. 마침 남성 선교부도 1906년 도심 개발지역으로 변한 남송현 부지를 매각하고 자골 선교부에서 멀지 않은 사직동 언덕에 선교사 사택을 짓고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캠벨 부인도 학교와 여선교부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1908년 길 건너 용각골(필운동/ 누하동) 언덕에 4천여 평 부지를 매입하였다. 

 이후 캠벨 부인이 가장 신경과 관심, 노력을 기울인 것은 필운동에 새로 마련한 부지에 여선교사 사택과 여학교 교사를 지을 건축비를 마련하고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일이었다. 우선 필요한 것이 기금 마련이었다. 선교부 자체 예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금운동이 필요했다.  그런 목적에서 캠벨 부인은 1910년 7월 21일 2차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그가 귀국하기 두 달 전인 5월 26일, 배화여학교 제1회 졸업식이 방금 건축을 끝낸 종교교회 새 예배당에서 거행되어 졸업생 7명을 배출했다. 

 배화학당과 자골교회 설립자로서 캠벨 부인의 감회가 남달리 깊었다. 그 무렵 배화여학교는 재학생 91명 가운데 78명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정도로 학교는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선교 결과를 안고 귀국하는 캠벨 부인은 과로로 건강이 쇠약하여 치료부터 받아야 했다. 그래서 동료 선교사는 물론 한국 교인들 사이에 “과연 휴가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선교사 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기사다.

 “캠벨 부인은 미국에 오래 머물 것이란 소문이 돈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그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은 당연하다, 우리 가운데 캠벨 부인 같은 분이 있어야 한다. 선교사역을 하면서 어떤 획기적인 행동을 보인 적은 없지만 우리는 그처럼 조용하고 침착하며 꾸준하고 명석한 두뇌에 도덕적인 균형감을 지닌 여성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실로 영적인 지도력에다 치우침이 없는 판단력, 어두운 면이 없는 맑고 강한 믿음, 넓은 아량, 조용한 인내심, 다양한 경험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노련한 여선교사다. 그런 선교사야말로 경험이 일천한 초년병에다 무지하고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자신감과 자만심에 가득 차 실수를 일삼는 선교사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다. 한국 교인들은 캠벨 부인과 같은 선교사를 칭송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역에까지 나가 슬픈 마음으로 그를 전송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사 우리에게 쉬 돌아오게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모두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ditorial Notes and Personals”, KMF Sep. 1910, 215.

 그렇게 동료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울을 떠난 캠벨 부인은 미국에 도착해서 얼마간 휴양과 치료를 받은 후 1911년 접어들어 본격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마침 미국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가 50주년을 맞는 해여서 선교부 차원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선교비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캠벨 부인은 여선교부 총무 콥(Cobb) 부인을 비롯하여 보스턴의 피바디(Peabody) 부인, 뉴욕 시라큐스의 몽고메리(Montgomery) 부인,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의 밀러(Miller) 부인, 조지아의 데이비스(Daisy Davis) 등으로 조직된 모금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교회와 기관들을 방문하여 중국과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선교비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1911년 4월에 이미 51만 달러를 모금하는 실적을 보였다. 

 그렇게 캠벨 부인은 필운동에 지을 선교사 사택과 학교 교실을 위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고 1912년 8월 서울로 귀환하였다. 

 그런데 캠벨 부인은 자신이 떠나 있던 2년 사이에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 직후인 1910년 11월, 소위 ‘경술국치’라 하여 강제합병이 이루어짐으로 한반도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바뀌었다. 캠벨 부인은 서울로 돌아와 만나는 한국교인들의 얼굴에서 실망과 좌절, 불안과 두려움을 읽었다. 그런 상황에서 캠벨 부인은 귀환 직후인 1912년 9월 5-12일 개성에서 열린 16차 남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읽었다.

 “이곳 백성들 가운데 사역하는 것이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중에도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강한 믿음과 진실 된 목적을 갖고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우리가 전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사역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충격적인 상황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분야 사역과 보조를 함께 하면서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캠벨 부인은 식민통치하 한국선교를 ‘어려운 영적 싸움’으로 전망했다. 그런 보고서를 낸 1912년 연회에서 캠벨 부인은 배화여학교가 아닌 서울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 여성사역 담당으로 파송을 받았다. 학교는 그가 안식년 휴가를 떠난 후 교장이 된 니콜스(Lillian Nichols)와 스미스(Bertha A. Smith) 등 젊은 선교사들이 맡아 잘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캠벨 부인이 배화여학교 사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숙이 관여하였다. 학교를 필운동에 마련한 부지로 옮기는 일은 전적으로 한국여선교부 책임자인 캠벨 부인의 몫이었다. 그래서 캠벨 부인은 1912년 연회 이후 자신이 길러낸 전도부인 유사라와 정안라, 이마리아 등과 함께 서울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 여성사역과 서울 근교 전도사역을 관리하면서  많은 시간을 필운동에 학교 부지를 조성하고 교사 건축공사를 지휘 감독하는데 할애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겨울, 2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방 시설을 갖춘 현대식 2층짜리 벽돌교사와 역시 2층짜리 선교사 사택, 그리고 한옥 기숙사 공사를 마치고 1915년 1월 9일 필운동 새 교사에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입례송 ----- 찬미 6장 ----- 다같이
개식사 ------------------- 홍종숙 목사(종교교회 담임)
성경봉독 ----------------- 유경상 전도사(배화학당 졸업생)
환영사 ------------------- 남궁억(배화여학교 교사)
연설 --------------------- 벡커(A.L. Becker, 연희전문학교 교수)
독창 --------------------- 에바 하디(Eva Hardie, 배화여학교 교사)
축사 --------------------- 세키야(총독부 학무국장)
축가 --------------------- 배화여학교 고등과 학생
축사 --------------------- 와슨(A.W. Wasson,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
축사 --------------------- 박용래 목사(상동교회 담임)
찬송 ----- 찬미 32장------- 다같이
축도 --------------------- 로버트 하디(R.A. Hardie, 협성신학교 교장)

 필운동 교사 신축과 이전으로 배화학당과 관련된 캠벨 부인의 ‘중요 사역’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그는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여성사역과 전도부인 사역, 주일학교 사역을 계속 지도하였고 1917년 1월부터는 세브란스병원 원장 에비슨(O.R. Avison) 박사의 부탁을 받고 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 겸 간호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남대문에 현대식 병원건물을 지은 세브란스병원의 규모와 시설이 확충되면서 간호사역과 간호사 양성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에비슨 원장은 ‘노련한’ 경험자 캠벨 부인에게 그 책임을 맡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캠벨 부인은 40년 전 처음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상해에서 시작했던 의료사역을 세브란스병원에서 다시 하게 되었다. 캠벨 부인은 간호사역보다는 간호교육 사역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였다.

 


3·1운동과 배화여학교


 1917년 10월,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캠벨부인의 ‘내한 선교 2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념식은 동료나 후배 선교사들이 주최한 것이 아니라 캠벨 부인에게 교육이나 지도를 받았던 한국 교인들이 마련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기념식에 참석했던 철원지방 장로사 히치(J.W. Hitch) 선교사의 증언이다.

  “순서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순서를 맡은 이들이 대부분 캠벨 부인이 한국에 와서 사역하는 동안 그에게 감명과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사회를 본 젊은 여성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의 부인으로서 캠벨 부인에게 교육받은 학생이었다. 캠벨 부인의 약력을 보고한 젊은 남성은 지금 본처 전도사로서 우리 교회에서 아주 유익한 인물인데 소년 시절 캠벨 부인에게 영어를 배웠고 캠벨 부인의 도움을 받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축가를 부른 전도부인 여덟 명은 모두 캠벨 부인에게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지도와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진행된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식장에 참석한 수많은 회중들도 그런 식으로 캠벨 부인으로부터 교육과 도움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캠벨 부인을 한국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였다. 축사나 기도 순서에서도 그런 내용이 계속 언급되었다.”

 약력 보고를 한 ‘청년 전도사’는 배화학당 초기 학생 유경상 전도사로 보인다. 사회를 본 ‘목사 부인’과 축가를 부른 전도부인 여덟 명을 비롯하여 참석자 대부분은 캠벨 부인의 지도와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렇게 캠벨 부인은 남녀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만나는 이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교회 지도자로 세웠다. 한국에서 캠벨 부인의 20년 선교사역은 한 마디로 ‘지도자 세우기’(building up of leadership)였다.

 이처럼 한국교회 교인들이 베풀어준 기념식을 맞이하였을 때 캠벨 부인은 65세, 은퇴가 가까운 나이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1912년 서울에 귀환한 후 배화여학교 건축과 이전,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 여성사역, 세브란스병원 간호교육 등 격무로 인해 그의 건강은 눈에 띠게 악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1918년 8월 신병으로 휴가를 얻어 다시 귀국 길에 올랐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 초교파 기독언론 <기독신보>에는 배화여학교 탐방기사가 실렸다. 그것은 캠벨 부인이 한국에 와서 20년 동안 일궈낸 여성교육의 결실에 대한 증언이었다.

 “본교는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의 경영으로 설비한 바인대 위치로 말하자면 제1위의 적당(適當)을 취하였다고 할 것은 시가지의 복잡한 지경을 멀리 떠나서 한적한 곳에다가 붉은 벽돌 2층 양옥으로 건축하였는대 그 정원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는 외로히 서서 한양 역사를 교사(敎司) 대표하야 말하는 듯이 서리를 무릅쓰고 도리어 창창하더라. 경치 뿐 이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 본교 내용 정도까지라도 비교적 우월한 점이 있다 할 것은 조선 장로교회의 습관으로 볼 것이면 여자교육에는 남자는 어른대지도 못하는가 하였더니 청년 남자 교사들이 있고 또 백발이 성성하나 오히려 고리타분한 청년을 비웃을 만한 남궁억 선생이 교수를 하는 것이더라. 학생은 155명이다. 그 중에는 고등과는 시골학생이 많음으로 기숙사를 설비하였는데 기숙비는 한 달에 3원 뿐 학생이 부담한다더라. 기숙사에는 미국에서 공부한 김밀니사 여사의 감독으로 가정과 똑같은 훈련을 함으로 지방에 나간 졸업생들은 실제에 익숙하다는 칭찬을 듣는다더라. 이후로는 차차 확장하야 신제령(新制令)에 의지하야 고등보통학교로 될 희망도 있을가 하는 물의도 있더라.” “필운대 배화여학교”, <기독신보> 1918.11.27.

<기독신보> 기자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필운대 언덕에 서울 역사를 증언하듯 ‘서리를 무릅쓰고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서 배화여학교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읽어내려 하였다. <기독신보>가 암시한 대로 배화여학교의 교육이념은 신앙교육과 여성교육, 그리고 민족교육이었다. 그것은 교사진용에서 드러났는데 대한제국 내부 토목국장을 지내고 독립협회 지도자로, 한말 민족운동가로 활약했던 남궁억(南宮檍)이 역사 교사로,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김미리사(차미리사)가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김응집과 이정찬, 조민형 등 민족의식이 강했던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항일 민족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배화여학교 4학년생 김정애와 김해라, 최은심 등이 시내 다른 학교 지도부와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정보를 입수한 스미스 교장이 3월 1일 당일 학생들을 조기 귀가시킴으로 만세시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배후선동 혐의로 교사 김응집과 조민형, 이정찬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3·1독립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 1일 이른 새벽에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학교 뒤편 필운대에 올라 시내를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학생들의 만세시위에 놀란 경찰은 배화여학교를 급습하여 김경화와 이수희 등 시위에 참가한 학생 24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스미스 교장과 김미리사 사감은 교사직을 내놓아야 했다. 배화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이다.

 


 별세와 추모


 이처럼 3·1독립만세운동으로 배화여학교가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캠벨 부인은 미국에서 병을 치료하며 요양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그리고 그와 연관해서 배화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캠벨 부인은 선교지 귀환을 서둘렀다. 주변의 “친척과 지우(知友)는 노체(老體)로 다시 조선에 나아가지 말기를 만류하였으나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조선을 위하야 일하며 나는 조선에 돌아가 묻히겠노라.” 하고 1919년 8월, 연회를 주재하기 위해 내한하는 램버스(W.B. Lambuth) 감독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무리한 여행으로 그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후 필운동 배화여학교 부지 안에 있던 여선교사 사택에서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1920년 11월 12일 오후 3시 45분,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니 마음이 기쁘다.” 하였고 별세 사흘 전에는 위문하러 온 이들에게 “이 때는 과연 좋은 기회가 되는 때니 조선 전도인들과 조선 교인들에게 말하여 불신자들을 어서 구원하라 하시오. 나도 조선 불신자들을 위하여 기도 많이 하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캠벨 부인 장례식은 11월 16일 종교교회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그가 그토록 ‘묻히기를 원했던’ 조선 땅,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35년 전에 먼저 떠난 남편의 이름(A.M. Campbell)과 함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Blessed are the dead who died in the Lord)는 성경구절(계 14:13)이 새겨졌다.

 캠벨 부인이 별세한 후에도 그에 대한 기억과 추도는 계속 이어졌다. 우선 1921년 1월, 협성신학교 기관지 <신학세계>에 그의 약력과 추모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쓴 이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김인영(金仁泳) 교수였다. 그는 캠벨 부인이 내한해서 첫 번째 얻은 전도부인 김세라의 아들로서 캠벨 부인의 행적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캠벨 부인을 “여성 군자”로 표현했다.

 “그의 성격과 용모는 남성을 띤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원대한 이상과 호활(豪活)한 포부는 20년간을 하루 같이 분투역행(奮鬪力行)하였도다. 여자는 물론하고 남자이라도 그를 대할 때에는 그를 앙시(仰視)치 아니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위풍과 행사가 자연히 엄부(嚴父)와 같이 여기게 되었으며 또한 저는 천국복음을 주린 영혼에게 전할 뿐만 아니라 생활에 빈곤한 조선인을 얼마나 동정을 표하며 활로(活路)를 열어주었느뇨. 그와 인연 있던 이들은 그가 다시 조선으로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이리 기다리고 바라든 것은 말할 것 없으며 본 기자도 여사가 다시금 우리 민족에게 유익을 많이 끼치기를 얼마큼 많이 주야로 고대하였도다. 그러나 유감천만은 더 오래 생존치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남이라. 그의 사업과 유지(遺旨)는 영원무궁하리니 우리는 그의 유언대로 온 조선 민족을 속히 교화(敎化)하게 함이 우리의 본무(本務)가 아니며 또한 여사에게 감사의 정을 표함이 아니리요.” 김인영,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잃음”, 116-117.


 여성은 물론하고 남성들도 그를 볼 때 ‘우러러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엄한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갖춘 캠벨 부인이었다. 그러면서도 복음에 주린 영혼과 빈곤한 사람들에게는 동정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이런 그의 ‘부모를 겸한 이미지’는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 선교사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서울지방 장로사로 사역하면서 캠벨 부인의 행적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저다인(J.L. Gerdine) 선교사의 증언이다.

“캠벨 부인은 우리 남감리교회 여성사역의 선구자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수년간 선교 경력을 쌓고 들어왔다. 남자 선교사도 그렇지만 여자 몸으로 선교사역을 개척하려면 성격도 강하고 재능도 만능이어야 할 것이다. 캠벨 부인은 성품이 워낙 강직해서 그가 해놓은 일을 다른 사람이 뒤집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은 그를 ’강부인‘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자골 지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세운 학교, 그가 출석하는 교회, 그가 관리하는 전도부인들이 나름대로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강부인 학교’, ‘강부인 교회’, ‘강부인 전도부인’으로 불렀다. 이처럼 캠벨 부인이 매사에 강인하고 적극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냥하고 인자한 성품도 지니고 있었다. 사회관계에서 누구를 대하든 친절한 면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선교부 안에서 그와 함께 지내본 사람들은 그의 다정다감한 성품을 기억할 것이며 또한 대화중에도 남을 흉보거나 비난한 적이 한 번도 없이 유익한 대화를 나눈 것을 기억할 것이다. 캠벨 부인은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한 번은 내가 ‘강부인 교회’에 가서 결혼식을 집례한 적이 있었다. 결혼식에 늦게 갔던 탓에 나는 신부의 이름을 미리 알아두지 못했다. 그래서 서약시간이 되어 신부 이름을 물었더니 회중석에서 “이름 없습니다.” 하였다. 그냥 건너뛸 수 없어 그 자리에 있던 캠벨 부인에게 “강부인, 신부 이름을 지어주시죠.” 하였다. 그러자 캠벨 부인은 전혀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각, “내가 엘리사벳이라 명명하노라.” 하였다. 그렇게 해서 예식은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J.L. Gerdine, “Some Pioneers of Korea”, KMF Sep. 1934, 183-184.

 강직했든 부드러웠든, 강인했든 다정했든, 엄했든 인자했든, 아버지 같았든 어머니 같았든, 그 모든 것은 조선민족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기 위한 ‘그리스도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 ‘강부인’의 권위와 지도력은 그가 설립하고 섬긴 학교와 교회를 통해 백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강부인 학교’로 불렸던 배화여학교, ‘강부인 교회’로 불렸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그리고 ‘강부인 전도부인들’이 사역했던 광희문교회와 수표교교회, 석교교회가 ‘한민족 복음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 그 증표다.

 

* 필자의 원문에는 각주가 있었으나 이 게시글에서는 생략함-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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