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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목회에서 경이로움의 목회로
손운산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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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08일 (금) 16:32:20
최종편집 : 2019년 11월 09일 (토) 11:52:33 [조회수 :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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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목회에서 경이로움의 목회로


 
손운산 교수

손운산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 예일대 신학부. 밴더빌트 대학에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했으며. 이화여대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한국목회외상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용서와 치료. 따뜻한 경험 흐믓한 이야기 등이 있다.
 

   
손운산

 

1. 목회현장과 목회자의 마음 건강
 
교회는 아름다운 공동체다. 죄와 허물 많은 사람들이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받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공동체다. 욕심과 이기심 많은 존재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들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아름다운 마음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목회자들처럼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전문가가 어디에 있을까?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고 최선 다해 돌본다. 목회자와 교인, 교인과 목회자는 마음과 영혼으로 맺어지는 아름다운 관계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아름다운 이야기, 진하고 감동스런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제가 목사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희 부부가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벌써 남남이 되었을 텐데 지금은 두 아이들과
   너무 행복하게 살아요.”
 
  “저는 사업이 망해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때 새벽마다 제 이름을 불러
   주시며 기도하시는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재기했습니다.”  
 
  “저 같이 미천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되었어요. 저에게 목사님은 하나님 같은 분이세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 그리고 교인들과 목회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서로 상처를 주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평화롭고 부흥하던 교회의 갈등으로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부터 40여년 다녔는데, 이 나이에 어느 교회를 찾아가야 하나요?” 나이 드신 권사님의 하소연이다. 때론 교회가 다른 어느 집단 보다 비이성적 비윤리적 비상식적 이기적 집단처럼 보이기도 하다.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교회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가슴 아프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여느 사람들과 별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교회는 윤리적 도덕적 영적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정서적 갈등과 심리적 욕구들로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교회 안에서 본능적 충동들이 분출하고 채워지지 않은 심리적 욕구들이 드러나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 가운데 목회자가 있다.
 


끝없는 요구의 목회현장  
 
사람을 상대로 하는 직업들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기쁨, 만족, 보람을 얻기도 하지만 좌절, 분노, 갈등, 탈진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늘 긴장해야 하고, 어떤 일들이 생길지 두려움을 갖고 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목회자는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들의 상황에 맞춰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교인들의 돌봄 요구는 끝이 없다. 교인들의 삶 자체가 너무 각박해서 그럴 수도 있다. 목회자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교인들 가운데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 상처가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고 목회자를 힘들게 한다. 교인들 가운데는 충족되지 않은 심리적 결핍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늘 자신의 결핍을 채울 대상들을 찾아다닌다. 돌봄에 대한 요구, 상처 치유에 대한 기대, 결핍 충족의 욕구 등을 가진 교인들 앞에서 목회자가 있다. 문제는 교인들의 이런 요구나 기대나 욕구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목회사역 자체도 마침표가 없고 늘 미완성 상태다. 교인들의 요구와 기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목회자, 따뜻함과 배려가 없는 목회자가 된다. 목회자의 자신의 욕구나 요구는 무시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목회자도 목회자가 필요한데 목회자의 자기 돌봄은 고사하고 자기 돌봄은 죄책감을 갖게 한다. 교인들의 요구와 기대에 응답해주고 끝이 없는 사역을 하다보면 목회자의 몸은 망가지고 마음과 영혼도 고갈된다.
 


감정적 관계 집단으로서의 교회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하나님의 백성 등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신학적 혹은 성서적 표현이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따라 살려고 믿음의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가진 존재들이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집단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라고 보았다. 집단 안에서 사람들은 이성적 판단력과 윤리적 책임감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유아들처럼 감정적이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르 봉(Gustave Le Bon, 1841-1931)이 보는 집단의 특성을 열거하면서 집단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1) 르 봉이 보는 집단의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개인들, 그들이 누구든 집단에 속하면 개인 혹은 개인의 특성은 사라지고 집단의 일원이 되어 집단의 심리를 따르게 된다. 집단 안의 개인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집단으로부터 고립되거나 소외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 심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억제했을 본능적 충동을 집단 안에서는 억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온갖 충동들이 표출될 수 있다. 그 결과 개인의 의지나 의식적 인격이 약화되고 지적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대신 유아기적 충동이 활성화 된다. 집단은 원시인이나 어린이의 정신생활과 일치한다. 집단은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성급하며 전적으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집단은 무엇인가를 바라면 그 욕망을 당장 성취해야 하고 욕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집단은 자신이 전능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고 불가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은 무엇이든 쉽게 믿으며 영향도 쉽게 받고 비판력은 전혀 없다. 집단의 감정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고, 지극히 과장되어 있으며 의심할 줄도 망설일 줄도 모른다. 집단은 극단적이라 의심은 금방 확신으로 바뀌고 작은 반감도 격렬한 증오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을 흥분시키려면 자극도 극단적이어야 한다. 집단에 영향을 주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주장할 필요가 전혀 없이 힘찬 색깔로 채색하고 뭐든지 과장해서 말하고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야 하면 된다. 집단은 무엇이 사실이고 잘못인가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집단이 영웅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강한 힘이고 심지어는 폭력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집단은 지배당하고 억압당하기를 원하며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두려워한다. 집단은 기본적으로 철저히 보수적이어서 모든 혁신과 진보에 대해서는 깊은 반감을 품고 전통에 대해서는 무한한 경외심을 품는다. 왜 집단은 냉혹하고 잔인하고 야비한가? 집단 안에서 억제되었던 무의식적 충동이 풀려나면서 잔인하고 야비하고 파괴적 본능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개인은 집단에서 그동안 눌러왔던 원시적 본능을 마음껏 채우려고 한다. 집단은 결코 진실에 목마른 적이 없다. 집단은 환상을 요구하고, 환상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집단은 항상 현실적인 것보다 비현실적인 것에 우선권을 두고, 진실만이 아니라 허위에도 강한 영향을 받는다. 집단은 결코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사람들은 집단에 숨어서 감정적 욕구들을 마냥 쏟아낸다. 서슴없이 유아기적 행동을 하고 감정을 표현한다. 지도자를 과도하게 이상화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한다. 구성원들에게는 지도자와의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심리적 과제다. 이상화된 지도자들은 그 집단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영향 받는다. 구성원들은 전적 의존의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고 자아는 더욱 퇴행한다. 프로이트는 교회와 군대에서 집단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분명 이런 집단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는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이런 특징을 전혀 갖고 있지 않던 교회들에게서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잘 억제되어 있던 본능적 충동적 모습들이 어떤 이유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 충동들은 억압되거나 승화될 수는 있어도 성화되기는 어렵다.
 
교회에서는 본능적 충동들 뿐 만 아니라 개개인의 채워지지 않은 심리적 욕구들이 분출한다. 교인들은 저마다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갖고 교회에 나온다. 신앙으로 상처가 아물기도 하고 욕구들이 채워지기도 하지만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교회에는 상처가 치유되었어도 마음이 여전히 슬프고 공허한 사람들이 있다. 많은 것을 얻었어도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은 느낌, 더 깊은 차원에서 수치감, 불충분감 등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습을 결핍이라고 본다면 교인들은 근본적 결핍의 문제를 안고 교회에 온다. 어릴 적에 부모에 의해 제공되는 돌봄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 건강한 자기가 형성되는 데 이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2. 나르시시즘과 목회자


 
목회자 뿐 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다. 정도와 형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르시시즘은 정도에 따라 종류와 형태가 다르다.


 
나르시시즘의 종류  
 
자기애 혹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정도에 따라 정상적 자기애. 자기애성 성격, 그리고 자기애성 성격 장애로 구분될 수 있다.  
 
정상적 자기애(normal narcissism):  칭송과 관심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건강하고 정상적 자기애의 특징이다. 이런 자기애는 일상에서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는 에너지와 기쁨을 주고 타인에게 공감적이다. 건강한 자기애도 상처를 입을 수 있으나 스스로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능력이 있기에 회복이 빠르다.      
 
자기애성 성격(narcissistic personality type): 자기애성 성격은 장애 상태는 아니지만 극단적 나르시시즘의 모한 습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하고 거만하고, 타인의 감정이나 곤경에 대하여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가 언제나 당연히 최고라는 여기고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애성 성격 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자기애성 성격 장애는 임상적으로 평가된 병리적 모습으로 지나치게 과장된 자신감, 칭찬에 대한 욕구, 그리고 공감 능력의 결여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보통 전 인구의 2%-6%가 자기애성 성격 장애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목회자들은 어떨까?


 
나르시시스트의 유형
 
나르시시스트는 “나는 특별하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데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르시시스트를 나눈다.2)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야 해”라고,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나는 보통들과 달라”라고, 관계적 나르시시스트는 “나는 원래 남을 잘 도와줘요”라고 생각한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  흔히 말하는 나르시시스트로 나르시시즘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다. 그들은 시끄럽고 허영심이 많고 자신을 과시하고 매 순간 주목을 받으려고 애쓰고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무자비하게 착취적이고 경쟁적이 된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비판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피하고 자기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꺼린다.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되면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숨겨진 재능과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세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자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내면에는 분노가 많고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주길 거부하는 세상을 원망한다.
 
관계적 나르시시스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데 집중하지 않고 성공에도 별 관심이 없다. 대신 자신들이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잘 이해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자선을 베푸는지, 자신에게는 얼마나 돈을 적게 쓰는지 자랑스럽게 말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믿으면서도 타인을 돌보는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기애는 병리적 발달의 모습이다. 생애 초기에는 리비도가 자기에게 집중되지만 발달하면서 타인에게 투여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어떤 이유에서 리비도가 다시 자기에게로 집중되는 병리적 자기애를 2차 나르시시즘이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자기애성 환자들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석도 어렵다고 보았다.
 
하인트 코헛(Heinz Kohut)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갖고 있으며 이 욕구가 충족되어야 건강한 자기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기애적 욕구는 과대 자기 욕구와 이상화 욕구로 이뤄지는 데, 전자는 “내가 최고” 경험 욕구고 후자는 “당신 최고” 경험 욕구다. 전자는 자기가 칭송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고, 후자는 내가 칭송하는 대상을 갖고 싶은 욕구다. 코헛은 이런 욕구들을 알아서 채워주는 대상을 자기대상이라고 불렀다. 아기의 욕구를 마치 아기처럼 알아서 제공해 주는 자기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아기의 건강한 자기가 형성된다. 코헛은 아기의 자기애적 욕구가 충족되어 아기의 자기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변형적 내면화라고 부른다. 변형적 내면화가 일어나면 포부와 이상을 가진 창의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건강한 자기가 형성된다. 또한 건강한 자기는 스스로 위로하고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위기에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변형적 내면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즉 자기애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자기 구조 형성에 문제가 생겨 불충분한 구조, 결핍된 구조, 혹은 결함이 있는 구조가 만들어 진다. 이런 자기는 상처입기 쉬우며, 자기가 부서지고 파편화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한 자기가 된다.
 
자기애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자기구조에 결함이 생기면, 자기애적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애적 욕구는 포기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적 본래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과대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끌어내려는 온갖 시도를 한다.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에게 주목받는 행동을 한다. 또한 충족되지 않은 이상화 대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숭배하고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들, 지성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자기대상으로 삼으려고 한다. 사람을 통해 과대 자기 욕구나 이상화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위로와 진정을 주는 마약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자기구조에 결함을 가진 사람들의 내면은 수치심과 공허함과 우울로 가득 차 있다.
 
코헛은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본래적 욕구로 보고 그것의 충족여부에 따라 건강한 자기와 그렇지 않은 자기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오토 컨버그는 병리적 나르시시즘에 관심을 두면서 자기가 만난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들의 특징을 열거하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심하게 혼란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고 충동 조절도 유아성 성격보다 더 잘한다. 이런 내담자는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유별나게 자기를 언급하고 타인의 사랑과 감탄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리고 자신을 매우 부풀리면서도 타인의 갈채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다는 점이 겉보기에 이상한 모순처럼 보인다. 이들의 정서 생활은 피상적이다. 타인의 감정에 거의 공감하지 못하고 타인에게서 받는 찬사나 자신의 거대 환상 외의 다른 생활에서는 즐거움이 거의 없으며, 외적인 화려함이 줄고 자기 중요성을 만족시킬 자원이 더 이상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고 지루해한다. 타인을 시기하고, 자기애적 지지를 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을 이상화하며, 종종 전에는 우상이었지만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을 비하하고 경멸한다. 대체로 타인과의 관계는 확실히 착취적이고 종종 기생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타인을 통제하고 소유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죄책감 없이 착취한다. 그리고 마음을 끌고 매력적인 이면에 냉담함과 무례함을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타인에게서 찬사와 감탄을 요구하므로 의존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더 깊은 수준에는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비하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 자기애성 성격의 주요 특징은 거대성, 극단적인 자기중심성, 타인에게서 감탄과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공감과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런 내담자들은 자기한테 없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자기 생활을 즐길 뿐인 사람을 매우 시기한다. 이들은 정서의 깊이가 부족하고 타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감정도 분화되어 있지 않고 쉽게 타오르고 쉽게 꺼져 버린다. 특히 슬픔 및 애도적 동경과 관련된 진실한 감정이 부족하다. 우울 반응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이들 성격의 기본적 특징이다. 타인에게서 거부되거나 실망하면 표면적으로 우울해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고마운 사람을 상실했다는 생생한 슬픔이 아니라 복수하고 싶은 분노와 원망이 나타난다.”3)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있는 내담자는 지나치게 자기에 몰두해 있고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적응을 잘 하고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내적인 관계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들은 강한 야망, 거대 환상, 열등감, 외적 숭배나 찬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양상을 다양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지루함, 공허감을 느끼면서 빛남, 부, 권력, 미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관심을 갖는 능력은 심하게 결핍되어 있다. 이들이 피상적으로는 사회적 적응을 잘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이렇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자신에 대한 만성적인 불확실함과 불만, 타인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착취와 무례함 또한 이 내담자들의 특징이다.”4)


 
자기애성 성격장애 진단(DSM-TR-4)
 
1.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자신감이 있다: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함,
  뒷받침될 만한 성취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 받고자 한다.
2.끝없는 성공, 권력, 탁월성,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3.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다른 특별하거나 상류층인 사람 또는 기관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 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4.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5.특권의식 즉 특별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특별 대우나 복종을 바라는 불합리한 기대감을 가진다.
6.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7.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경청이 힘들고 타인의 말을 듣지않고 계속 말한다)
8.종종 타인들을 시기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9.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목회자의 나르시시즘과 교인들의 나르시시즘이 만날 때
 
자기애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 엄마를 찾아다닌다. 구조적 결함과 근본적 결핍이 엄마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자기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 자기를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해 줄 대상을 찾아다닌다. 과대자기욕구를 채워 줄 대상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이곳 저 곳을 찾아다닌다. 모두 가슴에 채워질 수 없는 근본 결핍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상, 엄마를 찾아 교회로 나온다. 엄마의 음성, 엄마의 손길, 엄마의 가슴이 그리워서 교회로 나온다. 그 엄마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찾아다니지만 그 엄마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그 엄마를 찾는다고 해도 그 엄마가 결핍을 채워주지 못한다. 결핍은 그 누구나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본래적 결핍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엄마를 찾아다니고 또 다닌다.
 
엄마 혹은 대상 엄마를 찾아 교회에 온 사람들은 목회자를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자기대상으로 보려고 한다. 목회자가 바로 자기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기대하고 믿고 때론 이상화시킨다. 목회자가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면 그들의 자존감은 높아가고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나 그들의 욕구가 좌절되면 분노하고 더욱 절망의 나락에 빠진다. 교회에는 그런 교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적 욕구의 좌절로 결함있는 자기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목회자도 있다. 목회자는 열심히 노력하여 교회를 부흥시키고 헌신적으로 교인들을 돌보면서 교인들로부터 최고의 찬사와 인정을 받을 기대한다. 마음의 결핍을 안고 찾아 온 사람들과 마음의 결핍을 갖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교우와 목회자와의 관계가 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의 텅 빈 부분을 채워 주길 기대한다. 특별한 존재로 느낄 수 있도록 자기를 최고로 인정해 주고 자기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텅 빈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보살펴주고 자기애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힘든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을까? 서글프게도 그런 아름다운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의 기대가 무너지고 자기애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을 때, 좌절과 갈등이 생긴다.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기대가 무너질 때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목회자의 자기애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심각해진다. 목회자는 자기애적 욕구가 자연스럽게 채워지지 않으면 교인들을 창의적으로 교묘하게 조정하고 그들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자기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과장하여 드러낸다. 교인들이 인정과 찬사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들의 인정과 찬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구세주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결핍 충족 욕구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다. 이 욕구는 다른 어떤 욕구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모든 만남, 시도, 행동, 활동은 이 욕구를 채우기 힘겨운 시도다. 이 욕구는 근본적이기에 이 욕구를 채워줄 대상이 어디에 있을 거라는 환상을 만들고 그 대상을 찾아 나서고 만나고 욕구를 표현하고 채워주길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망적이다. 설령 채워져도 임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대상을 찾아다녀야한다. 이유는 결핍을 채워줄 대상을 아직 못 찾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 결핍은 어떤 대상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대상이 어디에 있다고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극적 드라마가 이어진다.
 
 

   
 

 

3. 나르시시즘의 목회에서 경이로움의 목회로


 
결핍을 마음과 영혼의 빈 공간으로
 
결핍이 어떤 대상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면 그것을 평생 장애로 여기고 살아가야 하나? 결핍과 결함에 대한 다른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 만일 결핍이 근본적이라면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보다 결핍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목회자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나아가서 결핍이 근본적이라면 그것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위한 축복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결핍을 채워주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교육도 하고 훈련도 시킨다. 이를 통해 교인들은 용기와 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만일 결핍이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채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전능자 행세를 해서도 안 된다.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자나 교우들 모두 결핍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교인들은 이미 자신의 결핍을 수용했을 수도 있다. 교인들은 텅 빈 마음이 채워질 기대를 갖고 교회에 온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들이 매주 교회에 오는 이유는 혹시 이번 주일에는 채워질 수 있을까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결핍을 실존의 모습으로 수용했고, 이제는 결핍을 지닌 채로 사는 길을 찾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목회자가 채워준다고 설교할 때마다, 믿기만 하면 다 채워진다고 말할 때마다 실망한다. 차라리 결핍을 서로 인정하고 서로 보살피며 결핍을 지닌 채로 사는 길을 함께 찾고 만들자고 할 때 힘이 난다. 대상 찾기를 중단하고 결핍을 인정하고 사는 방법을 찾자고 할 때 교인들의 눈이 빛난다. 더 나아가서 결핍이 은총이고 나를 가장 되게 하는 가능성이라고 말할 때 교인들은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영혼이 맑아진다. 목회자가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자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전능성 환상에 사로잡힌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전능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부름 받는다는 것은 전능자 되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능한 목회자를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계를 가진 목회자를 통해 전능하게 일하신다.
 
결핍을 수용하면 은총이 되고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온전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결핍된 존재로 만드셨나보다.

그러므로 결핍은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다. 결핍은 다른 것, 외부의 것으로 채우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채워진 모습이 타락한 모습이고, 심리학적 개념으로 거짓 자기의 모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핍을 채우지 않은 것이 삶의 과제다. 나아가서 채워진 것을 거두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설령 성인이 되어 좋은 대상을 만나 채워졌다면 그 내용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인정과 찬사들이다. 내가 찾으려 했던 대상을 기적적으로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틀림없이 그 대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대상에게 순응하고 그 대상에게 매달리고 때론 그 대상을 위협하고 협박할 것이다.

어릴 적에는 그런 인정과 찬사들이 필요했었다. 성인인 지금의 과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진 것들을 덜어 내는 것이다. 채워진 것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채워진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결핍이 채워지면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일 수 있다.

결핍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위한 공간이 된다. 빈 공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숨을 쉰다. 이제까지 수많은 타인의 요구와 기대, 자신의 욕구 등으로 시달린 마음이 숨을 쉰다.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그 빈 공간 안으로 비춰진다, 그 햇살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다. 아침에 다시 찾아온다. 그 빈 공간에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이 바람처럼 불어온다. 그 하나님의 영(spirit)이 불어오면 우리의 영혼(soul)이 춤춘다. 이 빈 공간은 타인을 수용하는 공간이다. 이웃들, 이 시대의 약자들을 환대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우리는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창세기 4:9)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 그들이 제 안에 있습니다.” 결핍이 존재의 빈공간이 되면 내 안에서 진정한 나가 살아나고 나의 욕망이 살아난다. 그것은 나의 욕망, 나의 존재의 욕망이다. 나를 나 되게 하는 욕망이다. 이제까지 내가 욕망했던 것은 사실 나의 욕망이 아니었다. 엄마의 욕망이었고 사회가 심어 준 욕망이었다. 그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결핍이 수용되고 채워진 것들을 덜어 내면 바로 그곳에서 진정한 나의 욕망이 살아난다. “네 욕망이 살아나면 그것을 포기하거니 양보하지 마라.” 라캉의 말이다. 네 욕망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면 너는 평생 타인의 욕망만 채워주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로 빈들에서 잔치를 벌이셨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나 마음으로도 결핍 상태에 있었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고 그들이 밟고 있는 땅도 결핍의 땅 빈들이었고 때도 저문 때였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마가복음 6장의 앞부분의 헤롯의 궁궐 생일잔치와 달리 빈들에는 건물도 없고 휘황찬란한 불빛도 없고 산해진미도 없고 높은 분들의 화려한 의상도 없다. 빈들에 빈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에 우리 예수님도 계셨다. 예수님은 그 빈들을 오아시스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 빈들에 물길을 내고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게 하지 않으셨다. 하늘로부터 먹을 것들이 떨어지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 중 한 사람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잔치를 벌이셨다. 예수님은 빈들의 사람들을 데리고 궁궐로 몰려가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빈자리, 그 없음의 자리, 그 결핍의 자리에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그 빈들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빈 마음과 빈 마음과 통하고 하늘과 빈들의 땅이 맛 닿는 경이롭고 신비한 경험이 만들어졌다. 하늘 은총은 빈 벌판에 별빛처럼 쏟아지고, 그들의 빈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은 바람처럼 불어 왔고, 그들의 영혼은 하늘을 날며 춤췄다.

예수님은 저문 빈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고 용기와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절망과 소통하셨다.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싸 주셨다. 그때 그들은 여전히 상황은 암울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다시 희망을 가져 보자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라기보다 먼저 그 사람의 절망에 소통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절망하는 사람은 아직도 무엇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목회자와 함께 다시 희망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사탄의 유혹 “너는 전능자가 될 수 있다.”
 
사탄은 “너도 전능자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고 이 유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 갔다. 사탄은 40일을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전능자의 모습을 보여 주라고 시험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서 찬사를 받고, 천하모든 것을 줄 테니 절하라고 유혹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선악과를 따 먹었지만 전능자가 되기는커녕 전능자 되고 싶어 했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숨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셨다. 예수님은 메시아, 전능자는 맞지만 사탄이 유혹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떡을 만들기는커녕 배고픈 사람과 함께 배고파하셨고, 높은데서 천하를 호령하면서 찬사를 받기는커녕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오셨고, 천하를 소유하시는커녕 하나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돌로 떡을 만들어 주겠다는 종교지도자들 참 많다. 높은데서 호령하면서 자기에게 찬사를 보내라는 종교지도자들 많다. 자기 왕국 세우면서 하나님 나라 건설한다고 속이는 종교지도자들도 많다. 전능성 환상에 빠질수록 신앙은 오염되고 신앙인의 삶은 유아기적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교회나 목회자가 전능성 환상에 빠져있다면 이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보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전능자가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를 찾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세기 3:9).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찾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너’를 찾으셨다. 아담아, ‘너’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너는 나처럼, 전능자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너’가 되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너는 ‘너’가 되어야 하는 데 그것은 나처럼 됨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전능성이 있어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 인간의 결핍이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능자가 되려고 할 때 이미 인간의 길에서 벗어 난 상태다. 삶은 한계를 극복하고 결핍을 채우면서 것이 아니다. 삶, 즉 나의 삶은 나의 한계와 결핍을 수용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성 환상에 빠진 목회자를 찾으신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과대 자기 욕구와 전능성 환상에서 공감과 연민으로
 
자기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는 특별하고 대단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숭배해야 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환상은 자기애적 욕구를 채워줄 대상을 찾는 욕망을 불러일으켜 대상을 찾아내던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찬양하는 만든다. 자기애 성향을 가진 목회자는 교인들을 자기애적 욕구를 채워줄 대상으로 보며, 목회활동도 자기 찬양의 도구가 되게 할 수 있다. 찬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기를 이상화시켜 교인들이 자기를 숭배하게 만들던지, 교인들을 위해 지나친 헌신과 희생으로 교인들이 자기를 찬양케 하는 방식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채우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구원자 환상, 혹은 메시아 콤플렉스라고도 칭한다.

아기는 전능성 환상을 갖고 있다. 엄마가 아기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제공해 주면 아기들은 마치 모든 것은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즉각 이뤄진다고 착각한다. 엄마가 제공해 준 것을 마치 자기가 만들어 낸 것처럼 착각하고 계속 그런 환상에 빠진다. 아기는 어떤 계기를 통해 전능성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죽을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전능성 환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현실 경험이 시작되고 아기는 성장한다.  전능성 환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유아기적 환상에 빠져 있다는 의미다. 전능성 환상을 갖게 되면 자기를 총애할 대상을 찾는다, 자기를 특별하게 여겨 줄 대상을 찾아다닌다.

전능성 환상은 한편으로 목회를 성공적으로 잘 하고 싶은 선한 동기에서 나온 바람이다. 그러나 전능성 환상을 갖게 되면 현실이 아니라 환상 세계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교인들의 현실은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길이 더욱 그립고 목회자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능성 환상에 빠진 목회자들은 교우들의 마음이 어떤 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와 교우들 사이의 마음과 마음의 소통과 교류, 영혼과 영혼의 대화가 불가능해 지고 매일 매일 힘겹게 살아가는 교우들에게 목사님의 위로와 격려는 공허하게 들린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한 힘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고 연민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empathy)은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연민(compassion)은 고통당하는 상대를 이해할 뿐 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 목회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그 전에 질병과 귀신들림으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공감하시고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셨다. 연민에 해당되는 성서의 표현은 ‘불쌍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다. 이 말은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다. 이 단어는 우리말 ‘애간장이 탄다’가 가장 가까운 의미다. 예수님은 천벌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마가1:41-42). 예수님은 아들을 잃은 나인성의 과부를 보시고 애간장이 타셨다(누가 7:13-15).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두 시각장애인의 눈을 만지시면서 불쌍히 여기셨다(마태 20:29-34).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소통하시고 그들을 품에 안아주셨다.

목회자는 전능성 환상을 버리고 메시아인 척하는 허세를 없애고 공감과 연민 능력을 배우고 길러야 한다. 목회자에게 공감과 연민이 중요한 것은 그 자체가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공감과 연민의 목회에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시의 마음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공감과 연민으로 대하셨다. 불쌍한 한 영혼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안아 주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마음 상한 사람들을 공감과 연민으로 대하시고 계시다. 목회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공감과 연민으로 교우들을 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다 먼저 마음 슬픈 우리 교우들을 공감과 연민으로 품고 계시다. 목회자는 늦었지만 우리 교우를 품고 계신 예수님 곁으로 가서 한 손으론 예수님을, 다른 한 손으론 우리 교우를 품는 것이 목회자의 공감과 연민 행동이다. 예수님은 우리 교우를 공감과 연민으로 품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 교우의 아프고 슬픈 마음을 못 보았을까? 설령 보았다고 해도 그 교우에게 설교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능력만 나타나려고 했을까?

어둠 가운데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어둠은 곧 물러가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빨리 힘을 내고 희망을 가지라”는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격려나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힘들게 한다. 절망이 사람을 얼마나 움츠리게 하고 스스로 무가치하게 느끼게 하는지에 대하여 듣기도 전에 희망부터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몰려올 때 얼마나 추운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위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힘내라고 말하고는, 그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처럼 빨리 떠나 버린다.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빨리 위로하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자기 방어적 태도에서 나온다. 그것은 절망과 슬픔과 관계 맺지 않으려는 회피적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교회가 불안, 외로움, 절망은 감추고 승리, 기쁨, 희망을 이야기하라고 하기에 교인들은 더 외로워하고 절망스러워한다.

목회자는 삶의 힘듦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한다. 교인들도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 같아서 경청한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공허한 느낌이 든다. “나도 정말 슬프고 외로운데, 목사님이 설교하는 그 슬픔은 누구의 슬픔이고, 그 외로움은 누구의 외로움인가?” “나도 아프고 힘든데, 왜 목사님이 설교하는 그 아픔과 힘듦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슬픔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해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절망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었더라면 그 설교는 다르게 표현되고 다르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목회자는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과 마주 앉아 그 사람의 절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 사람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잡아달라고 내민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 사람의 눈물을 너무 빨리 닦아 주려하지 말고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도 절망과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 사람의 슬픔이 목회자 자신의 슬픔이 될 것이다. 그 때 하늘 은총이 절망하는 사람과 그 절망에 소통하는 목회자를 감싸주고, 하나님의 위로가 외로워하는 사람과 그 외로움에 소통하는 목회자에게 임할 것이다.


 
경이로움 이야기를 만드는 목회
 
결핍을 장애나 한계로 보지 않고 마음과 영혼을 위한 빈 공간으로 본다면 우리 마음은 가벼워지고 영혼은 맑아질 것이다. 전능성의 환상에서 벗어나 공감과 연민을 갖게 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목회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회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의 목회는 어떤 목회일까? 그것은 경이로움의 목회다. 
 
예수님과 관계된 이야기는 경이로운 이야기다. 인류의 구세주가 마구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재산의 반을 내 놓겠다는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하여 평생 전도자로 살아가는 바울의 이야기, 오병이어로 수많은 군중들이 먹고도 남은 이야기. 12년을 혈루 병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나았다는 이야기, 모두 경이로운 이야기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성공의 이야기나 꿈이 실현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경이로운 이야기다.
 
예수님의 목회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목회 이야기도 경이로움의 이야기들로 꽉 차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목회를 통해 일으키시는 경이로움의 목격자고 증언자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목회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목회자로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목회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불러 주신 것이다. 목회자의 목회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목회가 아니다. “제가 당신의 목회를 대신하고 있으니 저에게 능력주세요”라는 간구는 잘못된 간구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내가 목회할 테니 와서 보렴. 그리고 증언하렴. 그런데 너는 왜 내 목회를 대신하려고 하니? 대신하려면 잘 하던지 왜 망쳐 놓니? 이제 네 목회를 십자가에 못 박고 와서 보렴. 그리고 내가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너도 참여해 주렴.” 이렇게 되면 목회는 놀라움 신기함 경이로움의 장이 된다. 나의 목회는 내가 찬양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치고 허무하고 교인들도 힘들게 한다.
 
퍼브스(Andrew Purves)는 피츠버그 신학대학원 목회신학교수다. 그의 아내는 목회자다. 어느 해 휴가를 보내면서 아내의 고충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불현 듯 효과적 목회를 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효과적이고 성공적 목회를 위한 모든 프로그램들이 예수님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만이 참된 목회의 길이라는 깨달을 갖게 되었다. 퍼브스는 목회자들에게 질문한다. 목회에 매여 있는가? 예수님께 매여 있는가? 목회에 매여 있는 목회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설교를 은혜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를 잘 경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 등등에 신경 쓴다. 목표가 성공적 목회이기 때문에 성공하는 목회자,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가 되려는 강박적 태도를 갖고 목회한다. 마치 자기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전능자가 되고 싶어 하고 전능자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그러나 목회 현실은 정반대다. 자기 아내의 말 그리고 일선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공적인 목회는커녕 목회자는 늘 허탈감, 무능력감, 죄책감, 분노, 수치 등이 쌓여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퍼브스는 목회자들에게 목회 사역에 구속되지 말고 예수님께 구속되라고 권고한다. 예수님께 구속받으려면 지금하고 있는 목회 사역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한다. 그가 지은 책의 제목이 Crucifixion of Ministry 이다.5) 목회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에게 구속받으라는 것이다. 성공적 목회를 위한 시도는 예수님의 목회가 아니라 메시아처럼 행세하는 것인데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용서하고, 축복하고,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가르치고,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증언하는 일이다.”6)  퍼브스는 우리 목회 사역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목회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목회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다. 퍼브스는 구세주처럼 행세하는 목회자들은 지치게 되어 있고 목회의 즐거움은 사라진다고 경고한다.   
 
효율이나 효과를 앞세우는 목회에는 은혜가 없다. 행동으로 구원받는 이야기이지 은총으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성공이나 업적의 목회이야기를 경이로움의 이야기로 바꿔야 한다.


 
4. 마감하는 이야기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제자들이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산 위에 있고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다. 산 위에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했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본 베드로는 너무 황홀해서 거기서 살자는 제안도 했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던 아홉 제자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한 아버지가 귀신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리고 왔으나 고쳐 주지 못했다. 그들은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하필 그 순간에 예수님은 변화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올라가셨다. 남은 아홉 제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소외감을 느꼈을까?
 
산 아래 남아있던 아홉 제자들은 처음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언제 산에서 내려오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지루하고 심심하고 짜증도 났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한 아버지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데리고 왔다. 그 아들이 간질로 자주 넘어진다는 것이다. 외아들이라고 하면서 고쳐달라고 사정했다. 예수님이 계시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홉 제자들은 난감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아들을 고쳐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안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병은 낫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주위의 사람들이 빙 둘러 서서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홉 제자들은 얼마나 창피했을까? 산에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산 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세 제자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무능력감과 부끄러움을 느낀 아홉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도 처음에는 뭔가를 보여 주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능력을 나타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아이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인정했다. 이때부터 아홉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를 고치려는 행동 대신 그 아이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아홉 제자들은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말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실망하셨지요. 저희들이 해보려했지만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곧 우리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아드님의 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시지 마시고 우리들과 함께 기다려 주세요.” 아홉 제자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들을 고쳐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는 아버지의 절망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면서 소외당한 이야기, 외로운 이야기에 귀에 기울였을 것이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향해 “나을 지어다. 이 아이에게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호통 쳤던 아홉 제자들은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 호통이 그 아이와 아버지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했다. 그렇게 명령하고 소리치던 자신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들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놓아 주었다. “아이야, 많이 힘들었지? 조금만 기다리면 예수님이 오셔서 너를 고쳐 주실 거야. 너를 축복해 주실 거야.” 드디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 오셔서 그 아이를 고쳐주셨다. 아이가 기뻐하고 아버지가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는 아홉 제자들도 기뻤을 것이다.

산 아래의 제자들이 한 일은 주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그들과 함께 있어 준 존재의 목회, 즉 현존의 목회였다. 진정한 목회 능력은 병을 고치는 것이라기보다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고통당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아홉 제자들이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에 그 아이와 그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견딜 수 있었다.
 
목회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예수님이 안 계셔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귀신 들려 간질로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아이와 그 아이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부모들이 있는 곳이다. 바로 그 곳이 산 아래에 위치한 교회이다. 교회는 귀신들려 고생하는 아이, 그 아이 때문에 아파하는 부모, 그리고 목회자가 함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곳이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곳으로 곧 오실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아이는 치유 받고 기뻐하고, 아버지도 즐거워하고, 목회자도 춤을 추면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상처 입은 영혼들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이야기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상처 입은 영혼들과 함께 슬픔과 아픔의 이야기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상처 입은 영혼들은 목회자가 있기에 힘들지만 아픔을 견디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은 기다리는 그곳으로 오셔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돌보아 주시고 치유해 주실 것이다. 목회자는 상처 입은 영혼들이 나음을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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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김석희 옮김,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 『문명 속의 불안』
   (열린책들, 1997), 87-92 참고.
2) 크레이크 맬킨 지음/이은진 옮김,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푸른숲, 2015), 66-68     참고. 
3) 오토 컨버그 지음/윤순임 옮김.『경계선 장애와 병리적 나르시시즘』(학지사, 2008),      240-241.
4) 오토 컨버그,『경계선 장애와 병리적 나르시시즘』, 278.
5) 이 책의 번역은 애드류 퍼브스 지음/안정임 옮김. 『십자가의 목회』(새세대, 2016)이다.
6) 애드류 퍼브스 지음/안정임 옮김. 『십자가의 목회』, 9.
7) 손운산, 『따뜻한 경험 흐뭇한 이야기: 상처입은 현대인을 위한 돌봄목회』(KMC, 2013), 25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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