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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 ―
김종길 (구약학 Ph. D.)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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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6월 10일 (금) 13:04:33
최종편집 : 2016년 07월 09일 (토) 00:40:52 [조회수 : 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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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 ―

김종길 (구약학 Ph. D.)

 

I. 서론

루터(Martin Luther)는 구원을 위하여 종교적 행위를 강조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서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및 로마서 3장 21-26절에 근거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회의 핵심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서 칭의론에 대한 해석이 주로 루터신학의 지배를 받아 왔다.

현대에 이르러 루터 신학의 칭의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브레데(W. Wrede)와 슈텐달(K. Stendahl)이 칭의론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한 후에, 근래에 이르러 샌더스(E. P. Sanders)를 위시하여 던(J. D. G. Dunn), 레이제넨(H. Raeisaenen), 도날드슨(T. L. Donaldson), 라이트(N. T. Wright) 등이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칭의론을 연구하였다. 슈텐달이 지적하듯이,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서구신학은 칭의론을 내성적인 양심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원래 칭의론은 개인의 실존적인 구원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선교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교리적 차원을 넘어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정황을 고려하여 칭의론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는 명제에는 칭의와 믿음이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는 것이 요구된다. 본고는 사회-문학적(Socio-Literay) 연구방법으로,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을 중심으로 칭의론이 형성된 사회적 정황과 칭의론의 기능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칭의론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믿음’을 다루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칭의론은 신앙의 그리스도를 전제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논의와 아울러 역사적 예수를 살펴볼 것이다.

 

II. 칭의론의 배경과 기능

A. 칭의론의 배경

1. 갈라디아교회 정황

‘갈라디아’는 갈리아 사람들이 거주하는 북쪽 지역을 지칭하기보다는, 로마의 행정구역인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첫 번째 선교여행 기간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 교회들을 세웠다(행 13:13—14:28). 그가 두 번째 선교여행을 하면서 갈라디아를 지나갔고(행 16:6), 세 번째 여행에서 그곳을 다시 방문했다(행 18:23).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전달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몇몇 사람들”(갈 1:7)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켜 “다른 복음”(1:6)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혼란을 야기하였다. 믿음이 약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릇된 가르침의 유혹에 넘어가서(3:1) 혼란을 겪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 사이에 대립과 논쟁이 발생하였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두 가지 면에서 바울을 비난했다. 첫째로, 바울은 진정한 사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복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그의 가르침에는 율법의 실천이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정당하고(1:1),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언한다(1:7). 그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1:11-2:21), 이어서 하느님의 은혜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한다(3:1-4:31). 사도권을 방어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칭의론이 부각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등장한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대적자들의 정체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바울의 대적자들로 ‘종교적 혼합주의자들,’ ‘영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과 방종주의자들,’ ‘열심당원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 등이 거론된다. 본고는 보수적인 유대적 기독교도를 바울의 대적자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을 수용한다.

 

2. 안디옥교회 사건

전통적으로 바울의 다메섹 경험으로부터 이신칭의 교리가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디옥 사건을 계기로 칭의론이 형성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은 바로 앞에 있는 11-14절과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의 배치는 칭의론이 안디옥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이 유대계 신자들과 대립하던 상황에서 발생한 안디옥교회 사건은 갈라디아교회의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당시에 안디옥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하는 곳이다. 안디옥에서 이방계 교인들과 유대계 교인들이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들어오자, 게바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자리를 피하였다. 바울이 보기에, 이러한 처신은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게바의 일관성이 없는 행동을 비난하였다(2:14). 예루살렘 총회에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행 15:11)는 데에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미 합의하였다. 그런데도 일부 유대계 지도자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행 15:5)고 주장하였다. 2장 11-14절에서 안디옥의 상황을 추정하면, 대세는 할례자들을 비롯한 유대계 신자들에게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 비하여 열세인 바울은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아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투쟁하였다.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최갑종은 안디옥 사건의 핵심을 유대인의 정체성 유지와 관련하여 “[유대인의] 삶의 문제”로 파악한다. 언약 백성인 유대인이 어떻게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건의 요지다. 이에 대하여 이한수는 “[이방인의] 신분 문제”와 관련하여 안디옥 사건에 접근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정황을 고려하면, 최갑종보다 이한수의 관점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안디옥 사건은 유대인의 선민적 우월주의 내지 배타주의가 신앙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의 우선적인 관심은 이방인 신자가 어떻게 유대인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14절에서 언급된 “복음의 진리”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리의 장벽을 허물고 식탁에서 친교를 나누는 구원의 현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대계 신자들의 “외식”(2:13)은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시인하고 이방계 신자들을 격하하여, 신앙공동체의 결속을 와해시키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분열을 방지하고 일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평등함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근거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요컨대 안디옥 사건을 계기로,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칭의론이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B. 칭의론의 기능

안디옥 사건 및 갈라디아 논쟁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이 부각된다. 예루살렘 사도들이나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에 다 같이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음의 진리를 적용하는 데에서 입장을 달리 하였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비록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지라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 곧 믿음에 더하여 언약의 표지인 할례를 받지 않고 정결법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온전한 언약 백성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의 주장을 따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2장 18절에서 “내가 헐었던 것”은 19절의 “율법”을 가리키며 16절에서 거듭 나타난 “율법의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는 토라를 뜻하는 “율법”과 구별해야 한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율법을 ‘도덕적 율법’과 ‘제의적 율법’으로 구분한다. 던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들이란 ... 마카비 시대 이래로 유대교를 규정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규정하는 관행들, 곧 할례, 음식 규정, 안식일 준수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16절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가로막는 차별의 담, 곧 “할례 문제, 음식 문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의식, 공로주의” 따위를 일컫는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를 이등 백성으로 취급하는 유대인을 견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신분이 폐기되고, 새로운 신분이 부여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유대인과 헬라인의 평등, 자유인과 노예의 평등, 남성과 여성의 평등에 관한 사상은 헬레니즘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형성되어 갔다. 세계화 및 분열의 위기에 당면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칭의론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서구신학은 실존적이고 내면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논구하였다. 그런데 ‘의롭다고 하다’(δικαιόω)라는 용어는 원래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슈텐달에 의하면, 칭의론은 구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적인 관심에서 제기되었다. 바울의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어떻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에 맞서서 약자인 이방인 신자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을 목적한다. 이와 같이 칭의론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서 공동체적 의미를 지닌다. 던(J. Dunn)은 바울이 칭의론을 통하여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평등을 강조한다고 본다. 김창락을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서 자기네들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반복음적인 입장을 교정하기 위하여 개진되었다. 칭의론은 사회적 기능을 지닌 변론, 곧 유대인 교인과 이방인 교인의 관계를 조정하려는 이론적 장치이다. 그 변론은 실존론적인 구원론이 아니라, 이방계 신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론이다.

비슷한 시기(주후 56-57년경)에 기록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칭의론의 목적과 기능이 다소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와 로마 교회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칭의론은 긴장과 알력 관계에 있는 두 집단의 화해를 목적하고 있다. 당시에 로마교회의 구성원은 주로 이방인 교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한 자인 이방계 신자에 비하여 추방당했다가 돌아온 유대인 교인들은 약한 자에 입장에 처하였다.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약자의 입장에 있는 유대인을 옹호한다. 칭의론의 요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하며,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칭의론을 유대주의자의 주장을 공격하는 논쟁적인 무기로 사용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하느님의 의가 드러났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칭의론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그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이 우세한 입장에 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칭의론은 열세인 이방계 신자의 입지를 약화하는 보수적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투쟁적인 교리이다. 아울러 바울의 칭의론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명제는 하느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신자들이 실천할 제자도를 포함한다. 바울서신에서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맞서거나 로마의 체제를 전복하라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나 로마에 의한 순교를 감안하면, 바울의 메시지는 구조악과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기를 시사한다.

전통 신학은 칭의론을 개인의 실존적인 구원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면적인 양심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왔다. 의로움은 신학적인 의미, 곧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그러나 칭의론은 선교적 상황에서 형성되었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정황을 고려하여 칭의론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칭의론의 중심 의제가, 전통신학이 제기한 것처럼,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을 지킬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론의 중심 의제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공동체에 합당한 구성원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의 칭의론은 평화와 정의를 지향한다. 로마서의 칭의론은 화해의 교리로서 교회의 연합을 목적하고, 갈라디아서의 칭의론이 투쟁의 교리로서 약자를 옹호한다. 양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하여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III. 그리스도의 믿음

A.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한 논쟁

근래에 ”πίστις χριστού“는 바울신학 연구에서 중요한 논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용어에 관한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문법적으로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목적격적 속격(objective genitive)으로 볼 수 있고, 주격적 속격(subjective genitive)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전자는 목적격 조사를 붙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읽고, 후자는 주격 조사를 붙여서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은 χριστού를 목적격적 속격으로 해석한다. 일찍이 라틴어역 성서(Vulgata)는 “πίστις Ἰησού Χριστού”를 “그리스도의 믿음”(fides Iesu Christi)으로 번역하였다. 그밖에 여러 번역본들도 주격적 속격을 따랐다. 그런데 루터가 이 구절을 목적격적 속격으로 번역한 이후로는, 교회에서 그의 해석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해석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 정신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루터의 입장을 지지한다. 예를 들면, 베츠는 16절에서 주문장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2:16b)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16a절에 있는 πίστις Χριστού를 목적격적 속격으로 번역한다. 던도 역시 Χριστού를 목적격적 속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등의 한글역 성서는 전통적인 입장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한다. 김창락도 칭의론에서 인간의 솔선적인 행위를 배제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해석한다.

이와는 달리, 근래에 대두한 새로운 해석은 ‘πίστις χριστού’에서 그리스도를 주격적 속격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위더링튼(Ben Witherington III)은 던의 주장을 반박하며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밝힌다. 위더링튼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구절은 십자가에서 죽기가지 순종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룬 신실한 자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성실’을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실함의 주체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순종은 복음의 객관적인 기초이다. 마틴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21절에서 유사성과 모순성을 지적하고, πίστις Χριστού를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역사적 예수의 성실한 삶과 순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신실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지닌 믿음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과 순종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믿음이 인간의 믿음에 선행한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믿음에 앞서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이미 드러났다. 박익수에 의하면, “예수의 믿음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이 강조된다.” 송광근도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인간의 믿음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주석가들이 ‘그리스도의 믿음’을 목적격적 속격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격적 속격이냐 목적격적 속격이냐 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과 관련된다.

다른 한편, 양자의 견해를 절충하는 입장도 차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한 논의를 재개한 윌리암스(S. K. Williams)는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과 아울러 믿는 자의 믿음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πίστις χριστού를 ‘그리스도―믿음’으로 번역하였다. 마테라(Frank J. Matera)는 윌리암스와 동일하게 이 구절을 ‘그리스도―믿음’으로 해석하고, 주격적 속격으로 보면서도 목적격적 속격을 배제하지 않는다. 롱에네커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어구가 신앙의 객관적인 근거와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응답/신앙 사이에 균형을 이룬다고 파악한다. 현경식은 ‘그리스도’와 ‘믿음’을 동격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리스도라는 객관적인 믿음의 사건”으로 읽는다. 이러한 절충적인 견해는 먼저 형성된 바울의 서신서와 이후에 성립된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를 종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가 믿는 믿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B. 그리스도의 믿음과 역사적 예수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포의 핵심으로 삼았다. 바울은 유대교인으로서 예수 운동을 일으키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울의 신학은 원래 하느님 중심적이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기로 약속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반드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지칭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수사학적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늘의 진리를 파악하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예수에게서 믿음의 모범을 발견하고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예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는 도마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곧 복음서에서 고백된 그리스도 칭호는 예수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보는 경향은 초기 교회를 통하여 점차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중세 교회는 신격화 교리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가 선포한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구분된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가 그 핵심을 이룬다. 반면에 예수에 관한 복음이란 예수의 동정녀 탄생, 기적 사건, 부활과 승천, 대속론, 삼위일체론 등 후대에 교회가 형성한 교리들을 말한다. 복음서에 고백된 예수에 대한 상징과 은유가 나중에 초기 교회에서 사실적 묘사로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선포자 예수가 선포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대신에,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집착하였다. 중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예수의 신격화를 수용하여 기독론을 형성하였다. 서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조’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고,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본질에서 하느님과 동일하시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가 믿는 믿음’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변경하고, 예수가 선포한 복음 대신에 ‘예수에 관한 복음’과 ‘예수에 의한 구원’을 역설하였다. 죄인된 인간은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근거한다. 예수에게서 하느님이 누구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서 드러난 진리와 의미를 신뢰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사람이 …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갈 2:16)이라는 명제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2:16)라는 선언과 “하느님의 아들이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2:20)라는 고백을 이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6; 갈 3:11)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먼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느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에 이른다(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롬 1: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2:16). 16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믿음의 주체는 예수이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에서 믿음의 주체는 우리(신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신자의 믿음을 일으키는 근원이 된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것은, 그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증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모범적으로 대변하였다는 뜻이다. 예수는 믿음의 전형이며 삶의 모범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고(2:19),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2:20a)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2:20b)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의 믿음(πίστις Ἰησού)에는 ‘예수를 믿는 믿음’과 아울러 ‘예수가 믿는 믿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중세 교회는 전자를 수용하여 예수 신격화를 이루었다. 필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주격적 속격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로,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의’와 ‘예수의 구원 사역에 근거한 의’를 구분한다. 예수의 믿음이란 인간의 행위에 선행하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구원 사건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은혜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구원 사건의 핵심은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이다. 예수의 믿음은 하느님의 주도로 이루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화해의 사건이다. 예수의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진 구원 사건이고, 신자의 믿음은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역사적 예수의 믿음은 신자가 본받을 ‘믿음의 전형’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에서 ‘전형’과 ‘본받는 자’의 관계가 성립된다. 예수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충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곧 예수가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믿음이 신자의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런 뜻에서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믿음의 전형인 예수처럼 기도하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믿음은 신자의 주체성과 책임을 강화한다. 대속 신앙을 강조하는 전통 교회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태도를 신앙과 동일시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한 대속 구원은 예수와 신자의 의존적 관계를 강조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주체성과 자발성을 결여하게 한다. 반면에 예수가 믿는 믿음은 예수와 신자의 상호 주도적 관계, 곧 예수의 주도적 구원행위와 신자의 주체적 참여를 나타낸다. 믿음이란 수동적 의존감정이 아니라, 자발적 결단과 주체적 참여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에 의한 대속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참여하게 된다. 넷째로, 그리스도의 믿음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통합하게 한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를 공유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믿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그 믿음은 행위를 포함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예수는 우리가 그의 제자로서 살도록 초청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o)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처럼 산다는 것을 뜻한다.

 

IV. 결론

기독교 전통에서 칭의론은 신앙의 그리스도를 전제한다. 그것은 예수의 신성과 아울러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다. 개신교신학은 루터 신학의 영향 아래 인간의 실존적이고 내면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취급하였다. 하느님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사회학적 방법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칭의론의 사회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선교적 상황에서 형성된 칭의론은 교회 안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조정하려는 기능을 지닌 신학적 장치이다. 당시 교회의 현안은 교회 구성원의 분열이다. 안디옥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평등하지 않다는 유대인의 시각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황에서 바울은 강자인 유대인 신자를 견제하고 약자인 이방계 신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에 칭의론을 사용한 것이다. 칭의론의 요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며, 예수가 밝힌 진리를 실천할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재고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믿음(πίστις Χριστού)은 칭의론의 바탕을 이룬다. 인습적인 기독교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예수의 신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축소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믿음은 역사적 예수와 연결된다. 역사적 예수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주목한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순종한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계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는 성실한 태도로 정의와 평화와 생명 살림을 실천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실재와 하느님의 뜻을 믿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믿음은 은총과 책임의 균형을 추구한다. 예수는 믿음의 전형이며 삶의 모범이다. πίστις Χριστού가 의도하는 바는 예수처럼 믿고 예수처럼 살자는 것이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에 따르면, 예수 믿기는 곧 예수 살기이다.

앞에서 다룬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 및 역사적 예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중요한 논제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고, 뒤틀리고 어두운 이 땅에서 역사적 예수를 본받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구현하기를 기대한다. †

 

   
▲ 엘 그레코(El Greco), “성전 정화(Tempelreinigung)” (16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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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239)
2016-06-11 08:50:54
.
디오드레베와 같은 종교인들은 이 글이 싫겠지요.

신학교에서 소경이 되어 가르치는 교수나

그들에게 잘못 배운 소피스트와 같은 종교인들은 이 글이 정말 싫겠지요.

자신을 자랑하기에는 말이 쉽기에 행위로 보여줄 수 없는 종교인들은

이 글이 정말 싫을 겁니다.

성경의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십니다.

성령 충만한 글에 깊은 감동과 감사를 드립니다.

분별하는 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마라나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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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
황규봉 (204.237.0.126)
2016-06-11 06:07:50
최근의 여러 좋은 글에 이어서 이번에 바울의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그 내용의 핵심을 장 정리해 주신 아주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이러한 "그리스도가 가진 믿음"이 한국 교회에는 잘못 해석되고, 그리하여 신앙을 잘못된 빙향으로 몰아가는 현실을 볼때 정말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고 느낍니다만, 교수님의 이런 글이 새로운 신앙의 희망의 싹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것 같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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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1
아름다운동산 (115.137.206.230)
2016-06-11 05:38:40
정말 잘 지적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렸읍니다,요즘 교회에 가보면 예수의 대속만 강조하고,예수의 삶(언행)은 무시하는데,아주 적절한 정리 감사합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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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속고 속이기 (121.142.6.175)
2016-06-10 19:22:50
성경 한 두 구절만 가지고 추측에 가까운 페이퍼를 마치 논문인듯...
잘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한 두 구절만 그것도 정통적인 해석을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도 아닌데다, 복음서와 구약 전반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등은 어떻게 처리하셨는지요?
새로운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쓰신 글에 대해 해명해야 할 날이 올 것을 두려워하며 글을 쓰십시오.
루터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이 정도의 접근을 발견하지 못해서 '오직 예수'를 부르짖었을 것 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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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
자유케하는 진리 (121.142.6.175)
2016-06-11 16:59:02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성경 보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십시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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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류인용 (1.234.194.153)
2016-06-12 21:35:10
신격화된 예수
불교도 석가의 후예들이 신격화 하였지요 석가는 자기 입으로 신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들었읍니다...
그럼 예수는 머라고 했을까여.....???????
중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격화????? 이해가 가지 않네여..

신격화는 인간들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사람답게 사람으로서 살아야 된다는 선 을 말하지만 신 은 그거와 거리가 멀지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 된 실존인물일까여..
예수는 역사적으로도 실존인물임을 부정못하지만......
예수의 신격화된 성경은 타 종교와 먼차이가 있을까여...

강도질 하지않고 죽이지 않고 악하지 않고...... 선하게 살면 누구나 구원받지요 그러나 에수는 자기가 아니면 구원도 없다고 말하는 자인데..
그런 예수를 믿는 믿음은 광신이고 세상과 둥실 둥실 어울려 선(?)하게 살면 그것이 천국이 아닐까여....

예수가 말한 말들 뻥이고 믿을것이 못됩니다 지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기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구원받는다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이란자와 바울은 누구일까여.... 구박하고 버리고 도망간 제자란 자들이 나중에 예수를 만나(부활)서 용기를 얻어 성령을 받고(?)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고 예수를 신격화 시켰으니... 바울도 그렇게 예수의 추종자들을 괴롭히더니 어느날 개종해서 성경을 많은 부분을 남긴 위대한 바울은 본격적으로 신격화에 도장을 찍고 말았네여...

예수는 참신일까여...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좀 특수한 특이한 인류문명의 한사람일까여.. 예수가 신이면 성경을 모든 문자를 믿어야 할것이고 예수가 신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위대하고 위대한 사람이라면 굳이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받고 따를수는 있지만 목메일 필요가 있을까여....
예수같이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사세여..... 예수처럼 믿고 예수처럼 살자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난 부처처럼 믿고 부처처럼 살랍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을까여... 모든 종교에 다 있읍니다..

그러나 참 예수를 만난다면 참 하나님을 만난다면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알수있다는것이 말이 되지도 않지만.....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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